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울다가 지친 신자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 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말라기 2:13).
하나님이 눈물을 싫어하실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흘리는 눈물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 무엇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 손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거나,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몸부림치며 울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신앙의 훌륭한 표본처럼 각인된 현실은 우리가 점검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물론 한나처럼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거나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다. 필자도 최근까지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통곡과 눈물의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진정한 신앙의 진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그들의 눈물을 과소평가 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어 우리의 신앙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현실에 눈물의 의미는 대단하다. 언급한대로 예배당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는 자들은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로 인정받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처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말라기 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 "눈물로 내 단을 가리우는도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분명 사단이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은 주의 단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주의 단을 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하다.
먼저 말라기의 말씀을 생각하며 눈물로 단을 가린다는 의미를 고찰해보자.
눈물로 단을 가리는 첫 번째 의미는, 보여주는 신앙의 표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신앙, 이것은 가증스러운 신앙이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외향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찌들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고 순전하고 순수한 양심도 더러움으로 변해있었다.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향한 애정과 경외심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변질되어 눈먼 것, 저는 것들로 드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나왔던 예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기하여 드리는 자이므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말라기 1:13,14).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증스러운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보여주는 신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고자 하여 외모를 꾸미고, 사람들이 보는 길모퉁이에서 크게 기도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마태복음 23:5).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큰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곳에 많은 시설들을 갖추어 외모를 과시 하려 하지 않는가? 또 교회의식에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웅장하게 보이려 한다. 성직자들의 의복이 그러하며, 성가대들의 가운이 그러하며, 내부의 수많은 시설들이 그러하다.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는 아무래도 헌금이다. 일일이 이름을 다 기록하고 그것을 교회 앞에서 다 공표하며 주보에 명단을 발표하니 헌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러하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신앙으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회개하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인데 그 대상이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 감사하고, 사람을 섬기는, 신앙이 아닌 길을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분위기 때문에 헌금하고, 욕심 때문에 헌금하는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이다.
두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우는 것은 감정적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깨달음에 의한 감정변화가 아니라 감정변화에 의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감정을 주셨으나 감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혼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감정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심각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하여 훌륭한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사무엘상 2:3).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양심을 다 보고 계신다. 감정적인 표현이 신앙생활의 중심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통곡을 하고 울뿐만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정신이 없게 만든다. 더구나 새벽기도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많은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당만 지으면 주변에서 반대농성을 하여 못 짓게 하는 현실이다. 또 예배당 주변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야 마땅할 것이다.
예배당은 우는 곳도 슬픈 곳도 아니다. 예배당은 은혜로 구원받아 지옥을 면한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에배를 드리는 곳이다. 그곳은 기쁜 곳이며 감사하는 곳이며 즐거워하는 곳이다. 거기는 우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눈물로 괴로워하는 곳이 아니다. 근심하는 곳은 더욱 아니다. 거기는 웃음이 있는 곳이며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이다. 생각하여 보라. 당연하지 아니한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아야 마땅할 죄인을 값없이 건져 주셨는데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그 감사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예배당에만 오면 얼굴을 찌푸리고 슬픔을 머금은 얼굴로 울어야하며 또 이러한 자들이 신앙심 깊은 신자로 인정받고 있다. 통성기도 시간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괴성을 지르며 우는 자들로 인하여 혼란스런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주님은 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밝으며 명랑하여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아버지만 만나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고 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세상에서 잘 지내다가도 예배당만 오면 울기 시작하는가? 기도만 시작하면 울기 시작하는가?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는 것의 문제는 습관적인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종교 규칙들을 만들고 그와 같은 규칙들을 열심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신앙의 모습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말라기 시대보다 예수님의 시대는 더 타락하여 그들의 가슴은 얼음보다 차가웠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규칙들은 수 없이 많아서 그들은 그 규칙을 지킴으로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방하였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태복음 15:1,2).
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유대교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동은 이단적인 행동으로 정죄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성경에 없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전통이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단이라고 공격한다. 필자가 믿기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요한 웨슬레나 루터나 무디가 와도 이단으로 정죄당할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국교회에 오시면 당장 이단으로 규정되어 쫓겨날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학교도 나온적이 없고, 어떤 교파에 소속된 적도 없고,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고 있는 절차에 따라 예배를 드리지도 않으며, 목사란 호칭도 쓰지 않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이는 단체에 어떤 교파 이름도 붙이지 않았고, 그들은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볼 때 잘못되었으니 이단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질문하였다. 왜 필자는 교파에 속하지 않느냐고. 필자는 그것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며,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주님의 본을 따라, 말씀의 본을 따라, 이 두가지를 기준한 양심의 본을 따라 신앙을 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받지 못한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면 기쁘고 즐거워야 하며 천국에 갈 수 있는 희망에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눈물이 습관화되어 있는 것은 무슨 현상인가? 그들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눈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진행하며 웃음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니 부활이 그것이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눈물 흘리는 회개가 나온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울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그들은 즉시 큰 기쁨이 충만하였다. 46절에 기록된 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장면은 기독교의 시작의 모습이요, 오늘날 한 사람이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된 정상적인 모습이다. 필자가 편의상 기독교인이라 하였거니와 실제는 성도라고 표현해야 정상이다. 거듭난 정상적인 성도는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눈물은 필요하다. 이것은 필자가 서두에도 언급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러나 신앙의 기본은 이렇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죄인이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며 어찌 할꼬 하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구원받기 직전의 준비된 모습이다. 이것을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준비된 자들이며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전도자가 그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일어나며, 형제 사랑이 일어나며, 말씀사랑이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이 모든 슬픔을 이겨 그들의 삶이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힘든일이 있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겠으나 천국에 대한 희망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쁨의 기초 속에 때때로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값없이 건져주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눈물이며, 허물과 실수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천국을 소유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통회의 눈물인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눈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있다.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있고, 기도제목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있다. 이와 같은 눈물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눈물이다.
필자가 분별하기로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흘린 눈물의 대부분은 이 눈물과 종류가 다르다. 모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불안하고 하나님 앞에 불안하며 자신들의 불완전한 삶에서 파생된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음으로 천국 갈 소망을 기초로 하고 있는 자들의 눈물과 이러한 눈물은 본질이 다르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약의 말라기 시대처럼 눈물로 단을 가리우고 있다. 소경된 그들은 그와 같은 반복된 눈물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칭찬하고 있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은 이 시대에 응한 것이다(마태복음 15:14).
사랑하는 독자여, 스스로에 속지 말고, 지도자에 속지 말고, 기독교에 속지 말라. 성경은 한 권이요, 길은 한 길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이것은 여러분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은 것이며 죽어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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