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5장


                   참된 영적 길갈의 체험을 위한 권고

 

 완전한 구원이란 주제를 마치면서 우리의 관심을 집중해 온 이 메시지의 실제적인 적용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만일 에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물론 사실이지만, 우리도 그분 안에서 죽은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의 시는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 주 예수님, 당신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당신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다시 살아나셨고,

나를 묶었던 속박을 모두 풀어주셨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 안에 살아계십니다.

아버지의 얼굴에 있는 은혜의 밝은 광

이제 나를 향해 밝게 빛납니다."


   이제 이것은 더할 나위 없는 위대한 실제적인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기독교의 참된 기초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옛 상태로부터, 또한 거기에 속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건져내셔서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땅에서 사망의 어두운 강물을 뒤돌아 볼 때 생명의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승리의 기념비를 그 강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망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되돌아볼 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사망의 두려움이 내게서 지나갔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가장 끔찍한 상태로 사망을 맛보셨습니다. 이 사실은 마치 요단강이 가장 무서운 상태에 있을 때 강물이 갈라진 것과 같습니다.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수 3:15)


   우리 주님도 우리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을 대면하시고, 가장 무서운 상태에 있는 그 원수를 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망의 어둡고 음울한 지경의 한 복판에서 밝게 빛나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든 찬송과 존경과 찬미가 우리 주님의 비할 데 없는 이름에게 돌려지기를! 우리가 영과 믿음을 통해 요단강의 가나안쪽에 서서, 우리의 참된 여호수아이신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을 기념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백성의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곳에서 돌 열 둘을 취하고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의 유숙할 그 곳에 두라 하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예비한 그 열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들어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 (수 4:1-7)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위대한 일이 일어났음을 잊지 말아야 했고 또한 실제적으로 그 일을 기념해야 했습니다. "매 지파에 한 사람씩",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바로 그곳에서 돌들을 취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 대로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도록" 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요단강물의 흐름이 끊어지는 놀랍도록 신비한 사건을 각 개인의 살아 있는 체험으로 맛보아야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후일에 그들의 자손들이 이것이 무슨 뜻인지 물어야만 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은 결코 잊어버려서는 안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얼마나 놀라운 교훈이 있는지요! 우리 또한 과연 이 기념비적인 사건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어린아이의 마음에서 조차 충격을 받을 정도의 증거, 즉 우리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가 있습니까?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실제적인 어떤 증거가 나타나고 있습니까?


   "각기 돌 한 개씩 취하여 어깨에 메라"는 말씀에 나타난 교훈을 따라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 날마다 응답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미 요단강을 건넜으며 이제 하늘에 속한 사람, 곧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임을 분명히 선언할 수 있습니까? 과연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습관과 행동을 보면서, 우리의 정신과 태도를 보면서, 우리의 전체 인격과 삶의 방식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것들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질문할 만한 것이 있을까요? 우리는 진정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죄에 대하여 또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의 능력 안에서 실제로 세상에는 관심이 없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떠나보내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 여러분,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 자신의 영혼을 살펴볼 수 있는 질문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것 같이 정직하게 이 질문들에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을 입으로만 고백하며 또 이론적으로만 아는데 그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생생한 기억 속에 그 기념물이 있습니까? 당신 어깨 위에 짊어졌던 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을 판단해봅시다.


   "우리가 죽었고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 있다"는 이 위대한 진리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철저하지 못하거나, 실제적인 것이 아니거나, 습관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이상 느긋하게 만족하지 않도록 합시다. 단순히 입술로만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능력, 즉 진리를 경험한 결과로 나타나는 실제적인 열매를 원합니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두 돌 -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다른 돌로는 그런 이야기, 그런 교훈을 말해 줄 수 없는, 또한 그렇게 엄청난 사실을 상징해줄 수 없는, 유일 무이한 돌 - 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아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수 4:19-24)


   이제 우리는 길갈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이르게 하신 일 곧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명한 일이 다 마쳐졌습니다. 이스라엘 벡성 모두가 다 요단을 건넜고, 단 한사람도 죽음의 강이 감히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조상들에게 약속한 기업의 땅으로 모두 안전하게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넘으로써 애굽에서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요단강을 마른 땅처럼 건넘으로써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여리고 평지인 길갈에 진을 친 것입니다.


   이제 다음 구절들을 주목해보십시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이구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모든 족속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극도의 두려움으로 마비될 지경이었습니다. "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수 5:1-2)


   이것은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요! "부싯돌로 만든 매우 날카로운 칼!" 은 얼마나 암시적이며 또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요! 만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칼을 사용해야 할 것 같으면, 먼저 자신들에게 이 날카로운 칼을 적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애굽의 수치가 그들에게서 굴러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고, 또 가나안 땅의 소산물인 곡식을 먹기전에, 우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선언된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분명 이일은 그들에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실행되어야만 했던 일입니다. 애굽의 수치를 안고 있으면서 어떻게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을까요? 어찌 할례 받지 않은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카로운 칼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음식을 먹고, 또 전쟁을 수행하기 전에 이스라엘 진 전체에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여호수아가 할례를 시행한 까닭은 이것이니 애굽에서 나온 모든 백성 중 남자 곧 모든 군사는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죽었는데 그 나온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았으나 오직 애굽에서 나온 후 광야 노중에서 난 자는 할례를 받지 못하였음이라...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유월절 이튿날에  그 땅 소산을 먹되 그 날에 무교병과 볶은 곡식을 먹었더니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수 5:3-12)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지위에 대한 모형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지금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곳에서 그와 함께 연합한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은 그리스도로 가득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으로 새롭게 된 우리 영혼의 양식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것이 그리스도인의 위치이며, 또한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분깃입니다. 하지만 충만한 기쁨 속으로 더욱 들어가려면 반드시 자연인에 속한 모든 것들에게 "날카로운 칼" 의 적용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옛 사람" 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져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 우리의 신분과 우리의 위치를 유지하고 또 누리려면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만일 육신의 본성 가운데 살고 있다면, 우리가 만일 낮고 천한 세상의 분위기에 젖어 살고 있다면, 우리가 만일 이 세상을 추구하며 이 세상의 쾌락과 정치와 부귀와 세상적인 명예와 패션과 영예를 좇고 있다면, 그렇다면 부활하신 머리되신 주님과의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독자들은 가나안 땅의 곡식이란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주목해야 합니다. 만나는 겸손 가운데 자신을 낮추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겸비하신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은 우리 영혼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귀한 일입니다. 자신을 낮추셔서 겸손하시며, 또 자신을 비우신 주님의 본을 돌이켜 추억해보는 일은 참으로 달콤한 일입니다. 이것은 감춰진 만나 - 를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 가운데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참된 목적과 대상입니다. 이 그리스도를 인해 행복하려면 악한 세상의 수치가 그리스도의 할례의 영적인 적용을 통해 우리에게서 떠나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가 영으로 또 믿음으로 주님이 계신 그곳에서 살게 될 때, 그분을 누리게 됩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에 속한 존재라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와의 사귐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1:6)


   이것은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만일 내가 세상에서 세상에 속한자로 살고 있다면 나는 어두운 가운데 행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의 사귐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복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갈 2:20)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정 이 구절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라는 표현 속에 담긴 강력함의 무게를 느껴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살면 안 되는 걸까요? 물론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서 살아야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다양한 삶의 영역과 또 다양한 삶의 관계 속에서 움직이고 행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본향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의 생명도 하늘에 있습니다. 그의 목적, 그의 안식, 그의 모든 것이 다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매일의 실제 삶에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유지하려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땅에 있는 자신의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이에 관한 모든 것들이 골로새서 3장에서 자세히 기록되어 있씁니다. 사실 다음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보다 "길갈" 의 참된 의미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골 3:1-4)


   이제 우리는 "길갈"과 "날카로운 칼" 의 참된 영적인 의미와 적용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5)


   성령님께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위치, 우리의 분깃,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대해 더 깊고 더 충만한 지혜를 우리에게 주시길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적인 길갈의 체험을 통해 가나안 땅의 곡식을 먹는 것이 무엇인지 더 많이 경험하도록 도우시길 빕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영적인 전쟁과 신령한 봉사에 더욱 합당한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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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천하를 얻고도


                    꼭 믿어야만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인가?


   앞에는 넓은 바다가 그리고 뒤에는 높은 산이 보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예술가이십니다.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셨는지, 어떤 시인이 말하기를 " 이 산의 나무들을 이렇게 모두 초록색으로 물들이려면 얼마나 많은 초록색 물감이 있어야 할까? " 라고 한것처럼 하나님은 참으로 얼마나 많은 초록색 물감을 갖고 계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은 보면서도 하나님을 부정하는지요.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면서 자연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러 화랑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태양이 반쯤 산에 걸려 있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감탄하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 일출이 아름답죠? " 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 이것이 일출입니까?  일몰이죠." " 아니 이것이 어떻게 일몰입니까? 이것은 일출이 틀림없습니다." 하자 그는 " 이것은 일몰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바로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거든요." 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제주에 와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감탄하지만 정작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연을 본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넓고 크고 세밀하신 하나님을!

   바다는 얼마나 신비한지요. 여러분은 바다를 왜 바다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어떤이가 말하기를 "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바다)들이기 때문에 바다라고 한다." 라고 했답니다. 바다는 육지에서 흘러 들어오는 각종 오물을 다 받아들여 소금물로 정화시킨 후 다시 하늘로 올려 보내 비가 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합니다. 하나는 넓어야 합니다. 바다가 좁으면 금방 부패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낮아야 합니다. 낮은 곳에 처하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넓고 낮은 바다. 이 바다를 지으신 하나님의 마음도 바다와 같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얼마나 크신 분입니까? 그런데도 어떤이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하나님답지 못하고 옹졸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크고 넓으신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함에 있어서 꼭 믿어야만 된다는 전제를 다는 것은 하나님답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 믿으면 구원해주고 안 믿으면 지옥에 보내는 것이 하나님이 할 일이냐? " 라는 것입니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합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주장에 넘어가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만 구원해 주시고 안 믿는 사람은 지옥에 보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모든 사람이 지옥 가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지옥 가게 되어 있는 상태에서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된 이것이 바로 사람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요, 복음인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큰배가 항해 중 풍랑을 만나서 그만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물에 빠져 아우성치고 있을때 구조 신호를 받은 구조선이 달려 왔습니다. 구조선의 선장은 선원들에게 있는대로 밧줄을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구조선과 연결된 밧줄들이 물에 빠진 사람들 근처에 많이 떨어졌습니다. 이 때 구조선의 선장이 외쳤습니다. " 빨리 빨리 밧줄을 잡으세요! 그러면 삽니다." 그러자 물에 빠진 많은 사람들이 밧줄을 잡고 하나 둘 구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사람 중 하나가 " 그것 참 옹졸하다. 왜 꼭 잡아야만 살고 안 잡으면 죽는가? " 라고 했다 합시다.

   여러분, 이것처럼 어리석은 말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는데 밧줄이 얼마나 고마운 것입니까? 눈물로 고마워 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잡지 않겠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똑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밧줄입니다. 우리를 하늘나라까지 끌어주실 넉넉한 밧줄입니다. 요한복음 3장16절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붙잡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거저 주시는 사랑입니다. 무슨 옹졸이니 독선이니 하는 것은 자기가 물에 빠진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정말 자기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다급하거나 절박하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약을 주면서 하는 말이 " 이 약을 먹으면 곧 괜찮아집니다."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그런데 " 꼭 먹어야만 낫나요? " 하고 묻는다면 이상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 꼭 먹어야만 낫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옹졸한 것 아닙니까? "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우수꽝스러운 대화입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 꼭 믿어야만 구원받나요? "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밧줄을 잡는 것이나 약을 먹는다는 것은 다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싶으셔서 구조선이 되신 주님, 생명의 약이 되신 주님을 보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만 밧줄을 잡으라 하시고 약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옹졸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말씀하시고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다고 하셨습니다. 죄인에게서 죄인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나고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나는 것처럼 죄인은 죄인에게서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구원을 필요로 하는 물에 빠진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지옥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 죄만으로도 넉넉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의 길을 예비해 주신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새로운 길이며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그것은 죄인에게 베푸신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죄의 길에서 돌이켜 주님을 믿고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찾는 목자처럼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지금 손을 내밀어 우리에게 내미신 주님의 못박힌 손을 잡으시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지금도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계십니다.

   "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사 55: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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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천하를 얻고도


              노예해방 선언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구원을 얻게 될까요? 성경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얻어지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미 이루어 놓으신 사실을 듣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미국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간에 걸쳐 '남북전쟁' 이 있었습니다. 피아간에 치열한 전투로 말미암아 60여만명이 전사하고 수백만명이 부상 당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의 중요한 이유는 "노예 해방" 이었습니다. 노예를 필요로하는 남측과 노예를 해방 시키려는 북측간의 싸움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북측의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은 1863년 1월 1일 드디어 노예 해방을 선언하였습니다. "모든 노예는 이제 자유로우며 스스로 생업을 가질 수 있으며 미국의 모든 지역에서는 노예가 없다." 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많은 노예들은 크게 환호하며 만세를 부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당시에 널리 전파되지 못했습니다. 지금처럼 TV나 신문, 라디오가 발달하지 못했던 때이기 때문입니다. 남부지역의 외진 곳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이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신분상으로나 법적으로 노예가 아니지만 그들은 해방된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의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예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식을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노예인지 자유인인지는 해방선언을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에서 결정되어지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선한 일을 했는지 악한 일을 했는지, 건강한지 병들었는지 배웠는지 못 배웠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잘 생겼는지 못 생겼는지 돈이 있는지 없는지 일을 잘 하는지 못하는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다만 그들이 노예 해방 선언을 들었는가, 못 들었는가만 중요할 뿐입니다. 들은 사람은 자유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의 서명과 도장이 있는 선언문을 읽은 사람은 이제 자유입니다. 자기가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미 과거에 이루어진 사실들입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피를 흘려 성취한 노예 해방입니다. 어떤 노예가  이 노예해방 선언문을 읽고도 그냥 노예로 산다면 그는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선언문이 있습니다.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4)

   23절은 노예입니다. 그러나 24절은 해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노예 해방 선언" 입니다. 당신이 해야 할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당신을 값없이 의롭다 하셨는데 왜 또 죄인으로 살려 하십니까?

   마치 링컨의 선언문을 보고도 노예로 살려고 하는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당신은 23절에 사십니까? 아니면 24절에 사십니까? 왜 자유를 못 누리십니까?  흑인 노예들이 링컨 대통령에게 감사하고 있는 것처럼, 또 피흘려 싸운 숱한 장병들에게 고마워 하는 것처럼 당신은 이제 당신의 해방을 위해 친히 죄의 형벌을 받으신 주님을 고마워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자유의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정죄-定罪)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 5:24)

                                                                                                        -김우종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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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4과

                    믿음과 행함(야고보서 2:14-26)


   아마도 이 구절들이 야고보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구절들일 것입니다. 루터와 같은 기독교회에서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도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야고보의 가르침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바울의 교훈이 조화될 수 없는 모순으로 보았습니다. 이 구절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에 행위를 더하여야 한다는 이단적인 가르침을 지지하는데 늘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주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주님의 구속사역에 우리의 자선과 헌신이라는 행위를 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락은 실제적으로 "행위로 의롭게 됨" 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행위로 의롭게 되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칭의에 관한 온전한 진리를 꼭 붙잡기 위해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롬 3:24). 이것은 단순히 우리가 의롭게 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반대되는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5:1).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거저 주시는 선물을 받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어 주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롬5:9). 이 피는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시기 위해 치러진 대가입니다. 죄의 값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치러졌고, 이제 의로운 행동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경건치 못한 죄인들을 의롭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됩니다(롬 8:33).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행함으로 의롭게 됩니다(약 2:24). 행위는 우리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외적인 증거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밖으로 드러내어 줍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은혜로, 믿음으로, 피로, 하나님으로 그리고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조금도 모순이 없습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동일한 진리의 다른 면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원리입니다. 믿음은 사람이 그 은혜를 받는 수단입니다. 피는 구주께서 치러 놓으신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행위는 그 결과입니다.

   헬렌 쇼(Helen Shaw)는 이러한 진리를 아름다운 시로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 나를 택하셨네

   하늘나라에 두시기 위해.

   이것이 주님의 기쁜 뜻이었네

   나는 은혜로 의롭게 되었다네.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죽으시는 바로 그 시간에

   진홍 같은 피가 흘러내렸네.

   가장 추악한 것을 눈처럼 희게 만든 피

   나는 피로 의롭게 되었다네.


   하나님이 주를 일으키신 것, 이것이 보증이기에

   악한 의심들은 가라앉아야 한다네

   주님의 부활은 모든 두려움을 잠재운다네

   나는 능력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네

   성경에서 말씀하는 곳으로.

   나는 그 진리를 붙잡았다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당신이 혹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심한다면

   혹 누구든 의심이 든다면 숨어 살피시오.

   내가 주님의 것임을 행함으로 보이리라

   나는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주님을 찬양하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은혜도 믿음도 피도,

   부활의 능력도 행위도,

   나는 하나님으로 의롭게 되었다네.


무가치한 행함 없는 믿음(2:14)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구원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깨닫는데 크게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열쇠가 있습니다. 첫째, 야고보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그 사람이 진실로 믿음을 가진 자인가 아니면 구원받지 않은 자인가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야고보는 그 사람의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고백이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의 삶에서는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용한 열쇠는 이 구절의 끝에 있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라는 물음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러한 믿음이 구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제시하고 있는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이 구절의 앞부분에 나오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선한 행위가 뒷받침되 않는 말뿐인 믿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은 무가치한 것이며, 말만 있을 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에 대한 예(2:15-16)


   행함이 없는 헛된 말들에 대해 여기에 예를 들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사람이며 다른 한 사람은 둘 다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나누기를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무척이나 관대하다고 말하는 그가 가난한 형제에게 "옷을 좀 입고 다니게나, 그리고 좋은 음식도 좀 먹고." 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말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전혀 배부르게도 몸을 따뜻하게 해주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2:17)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17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전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믿음에 행위를 더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견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뤄 놓으신 사역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과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주 예수님과 우리 자신이라는 두 명의 구주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구주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만 행위의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선한 행위의 삶이 수반되는 그러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위는 구원의 뿌리가 아니라 구원의 열매라는 것이며, 동기가 아니라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뉘어질 수 없는 믿음과 행위(2:18)


   참된 믿음과 선한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두 사람의 논쟁에서 끌어다 보여줍니다. 첫째 사람은 진실로 구원받은 사람으로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고백은 하지만 그 믿음을 선한 행위로 나타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대답할 수 없는 말로 도전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대화로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사람이 아마도 바르고도 타당하게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당신은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행위는 없으시군요. 나는 그러한 믿음은 선한 행위로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선한 행위 없이 당신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삶으로 그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행위로 내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주겠습니다." 행위를 떼어놓고 믿음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충분치 않은 지적인 동의(2:19-20)


   그 논쟁은 계속 됩니다. 첫째 사람이 계속 말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고백한 믿음이 그저 잘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한 지적인 동의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적인 동의는 인격적인 신뢰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으며, 어떠한 삶의 변화도 일으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참되고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귀들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임할 최후의 형벌을 생각하므로 떱니다. 마귀들도 그 사실은 믿고 있지만 그분께 나아오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진실로 주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완전히 맡긴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뢰는 삶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행위와 동떨어진 믿음은 머리로 믿는 것이며 황무지와 같습니다.


두 가지 예(2:21-25)


   여기에서는 행위로 말미암은 믿음에 대한 두 가지 예가 구약 성경으로부터 제시되었습니다. 유대인 아브라함과 이방인 라합에 관련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올바른 시각으로 이 진리를 보기 위해 창세기 15:6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것입니다. 아직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드리는 것을 보게되는 창세기 22장까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곧 하나님의 보시기에 의롭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일곱 장 뒤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기꺼이 드림으로 그의 믿음이 진실된 것임을 나타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그의 믿음이 그저 머리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때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릴 때 다른 어느 누구도 그 자리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믿음의 실상을 증명할 수 없었다는 반대적인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동행했던 젊은 사람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이 산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곳에는 이삭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기 아들을 기꺼이 드리려 했던 것을 성경이 기록으로 보존하고 있기에 모든 세대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실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를 낳았고 아브라함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된 것이 분명합니다.  참된 믿음과 행위는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위를 낳고, 행위는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것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성취입니다. 아브라함의 선한 행위는 그가 하나님의 벗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지 믿음으로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24절).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믿음에 행함을 더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는 믿음으로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는 행함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믿는 순간 그를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 믿음의 진실성을 보여봐라". 그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습니다.

   두 번째 예는 구약성경의 기생 라합입니다(25절). 라합은 기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라합이 사자(정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가나안 족속으로 여리고 성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떤 전승하는 군대가 그성으로 진군해 오고 있으며, 그 군대에 대항할 자가 아무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은 그 하나님과 함께 하리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 정탐들이 그 성으로 들어오자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라합은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대한 진실성을 증명하였습니다. 라합이 정탐들을 숨겨줌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이러한 친절한 행동이 그녀가 참된 신자라는 것을 증명해 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가지고 구원이 선한 행위로 말미암는 것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선한 행위란 자선을 베풀고, 빚을 갚고, 진실을 말하며 교회에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과 라합에게 이러한 선한 행위가 있었나요? 분명히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기꺼이 자기의 아들을 죽이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라합의 경우에는, 반역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행위들에서 믿음을 빼 버린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매킨토시는(Mackintosh) 다음과 같이 잘 말하였습니다. "그 행위에서 믿음을 떼 내어 보라 그러면 그것은 부도덕하고 무정할 뿐 아니라 죄악된 것이리라. 이 단락이 제시하는 것은 율법적인 행위가 아니라 생명의 행위이다. 당신이 아브라함과 라합의 행위에서 믿음을 제거해 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악한 행위일 뿐이다. 그러나 그 행위들을 믿음의 열매로 바라보라 그러면 그 행위들은 생명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선한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사용하는 자들은 이 구절을 살인과 반역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고 하는 어처구니없는 가르침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생명 없는 믿음(2:26)


   이 단원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26절)는 선언으로 끝납니다. 이는 매우 훌륭한 요약입니다. 야고보는 믿음을 사람의 몸으로 비교했고, 행함을 영혼으로 비유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생명이 없는 것이며, 쓸데없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소용없고, 무가치한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구원하는 믿음이 아니라 거짓된 믿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보라고 요약하는 것입니다. 나는 옷이 충분치 못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작은 옷장으로 만족합니까? 나는 주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음식을 절약합니까? 나는 생명의 양식을 갈구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까? 나는 아브라함과 같이 내 삶에서 가장 아끼는 것을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까? 나는 라합과 같이 그리스도께 충성된 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대해 기꺼이 반역자가 될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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