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2장

                      또 한 번의 증거 기회


   스위스 태생의 마크는 뉴욕 행 일간 비행이 취소될 때까지 아메리칸 에어라인의 쮜리히 지사에서 근무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비행이 취소되면서 마크를 포함한 30명의 직원이 해고당했습니다.


   그는 스위스에어의 자매회사인 스위스포트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나 아쉽게도 주일에도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그는 구원받은 이후로 교회생활이 삶의 우선순위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떡을 떼고, 말씀을 배우고,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들과 사귐을 갖기 위해 지역교회에 참석하기를 원했습니다.


   마크에게는 주일이 특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직업이 그에게서, 주일을 사랑하는 구주를 위해 따로 구별해놓는 특권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는 주일날 일하는 것은 그의 신앙생활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신문 구인광고란에 스위스에어의 광고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항공사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할 사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기도해오던 그런 일자리였습니다. 더 이상 생각해볼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을 찾아가 면접을 치렀습니다. 면접관들은 마크가 답하는 것을 만족스레 여기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느슨한 태도가 미심쩍었습니다. 어쨌거나 사업은 사업이니까요.


   "여가시간에는  뭘 하지요?"라고 그들이 물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그리스도인 신분을 밝힐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그의 삶의 중심이며, 따라서 여가시간에는 성경을 읽고 전도를 한다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면 왠지 일자리를 잃을 것 같아서 그는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어설프게 대답했습니다.


   사무실을 나오면서 그의 양심이 그를 찔렀습니다. 그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미소보다 일자리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는 어떤 종류의 그리스도인이었을까요?


   그 일을 교회의 어느 노 자매님께 고백했더니 자매님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위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슬기롭게 한마디 해주었습니다. "주님께 또 한 번 기회를 달라고 구해보세요?"


   그것은 그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었습니다. 그는 집에 돌아가 말씀 앞에서 시간을 가졌습니다. 예레미야 32장 27절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그 때 그는 면접관이 혹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일자리를 주실 줄 믿었어야 했음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는 주님께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증거할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실 줄을 확신했습니다.


   어는 날 세 명의 동료 직원들과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셋이서 담배를 입에 물었습니다. 한 동료가 물었습니다.

   "마크, 당신은 담배 안 피나요?"

   "아뇨, 한 10년간 피웠지만 어떤 일이 생겨서 담배를 끊게 되었지요."

   "무슨 일이 생겼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거예요. 그분을 믿고 나서는 내 몸이 그분의 것이고, 또 발암물질이 든 것으로 내 몸을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와, 당신은 최근에 내게 그런 얘기를 들려준 두 번째 사람이예요." 그 동료의 친구가 예수님을 믿고 담배를 끊은 얘기를 일전에 들려준 모양이었습니다.

   그 동료는 마크를 조롱하는 대신 그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날 오후, 마크는 스위스에어의 직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관심이 있다면 그를 고용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마크는 기꺼이 승낙했습니다. 이제 마크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그분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으며,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존귀히 여기는 자를 존귀히 여기신다는 산 증거를 갖게 되었습니다(삼상 2:30). 그는 주님께서, 그를 만나본 스위스 항공사 사람들같이 그분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스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증거할 또 한번의 기회를 허락하셨으며, 그 경험은 그로 하여금 범사에 주님을 시인하는 삶을 살도록 큰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울다가 지친 신자들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 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말라기 2:13).


   하나님이 눈물을 싫어하실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흘리는 눈물의 경우는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한국의 기독교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영상이 무엇인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 손 모으고 눈물을 흘리며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거나, 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몸부림치며 울며 기도하는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꼭 부정적이지만은 않는다 할지라도 이것이 신앙의 훌륭한 표본처럼 각인된 현실은 우리가 점검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물론 한나처럼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거나 깊은 통회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있다. 필자도 최근까지 그와 같은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한국교회의 통곡과 눈물의 문제점을 분석하면서 진정한 신앙의 진실을 알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그들의 눈물을 과소평가 하여 비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다. 그들의 눈물 속에 가려져 있는 진실을 드러내어 우리의 신앙을 바로잡아 보고자 하는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현실에 눈물의 의미는 대단하다. 언급한대로 예배당에서 눈물을 많이 흘리는 자들은 대단한 신앙의 소유자로 인정받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이 우리에게만 처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말라기 시대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님은 이 일에 대해서 "눈물로 내 단을 가리우는도다"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일은 분명 사단이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눈물은 주의 단을 가려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주의 단을 보지 못하는 자는 지옥에 갈 것이 분명하다.

   먼저 말라기의 말씀을 생각하며 눈물로 단을 가린다는 의미를 고찰해보자.


   눈물로 단을 가리는 첫 번째 의미는, 보여주는 신앙의 표본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신앙, 이것은 가증스러운 신앙이다. 말라기 시대의 유대인들은 외향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에 찌들어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고 순전하고 순수한 양심도 더러움으로 변해있었다.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향한 애정과 경외심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변질되어 눈먼 것, 저는 것들로 드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가지고 나왔던 예물이었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사기하여 드리는 자이므로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말라기 1:13,14). 어떻게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가증스러운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보여주는 신앙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고자 하여 외모를 꾸미고, 사람들이 보는 길모퉁이에서 크게 기도 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마태복음 23:5).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큰 예배당을 아름답게 꾸미고 그곳에 많은 시설들을 갖추어 외모를 과시 하려 하지 않는가? 또 교회의식에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모든 것들을 준비하여 웅장하게 보이려 한다. 성직자들의 의복이 그러하며, 성가대들의 가운이 그러하며, 내부의 수많은 시설들이 그러하다.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는 아무래도 헌금이다. 일일이 이름을 다 기록하고 그것을 교회 앞에서 다 공표하며 주보에 명단을 발표하니 헌금을 낼 수 없는 사람은 교회에 출석하지 말라는 이야기와 무엇이 다른가.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러하므로 예수님은 이 문제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1).

   예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신앙으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는 회개하여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또는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인데 그 대상이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 앞에 감사하고, 사람을 섬기는, 신앙이 아닌 길을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체면 때문에 헌금하고, 분위기 때문에 헌금하고, 욕심 때문에 헌금하는 오늘의 현실이 보여주는 신앙의 극치이다.


   두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우는 것은 감정적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인 깨달음에 의한 감정변화가 아니라 감정변화에 의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감정을 주셨으나 감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혼을 자극하는 방법으로 감정을 일으켜 눈물을 흘리게 하고 심각한 분위기로 이끌었다 하여 훌륭한 설교를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사무엘상 2:3).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보시며 또한 행동을 통해서 인간의 양심을 다 보고 계신다. 감정적인 표현이 신앙생활의 중심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을 보면 통곡을 하고 울뿐만 아니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정신이 없게 만든다. 더구나 새벽기도에 소리를 지르는 것은 많은 이웃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당만 지으면 주변에서 반대농성을 하여 못 짓게 하는 현실이다. 또 예배당 주변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고 한다. 이것은 슬픈 일이다. 오히려 부동산 가격이 올라가야 마땅할 것이다.

   예배당은 우는 곳도 슬픈 곳도 아니다. 예배당은 은혜로 구원받아 지옥을 면한 자들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에배를 드리는 곳이다. 그곳은 기쁜 곳이며 감사하는 곳이며 즐거워하는 곳이다. 거기는 우는 곳이 아니다. 거기는 눈물로 괴로워하는 곳이 아니다. 근심하는 곳은 더욱 아니다. 거기는 웃음이 있는 곳이며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이다. 생각하여 보라. 당연하지 아니한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아야 마땅할 죄인을 값없이 건져 주셨는데 그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그 감사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예배당에만 오면 얼굴을 찌푸리고 슬픔을 머금은 얼굴로 울어야하며 또 이러한 자들이 신앙심 깊은 신자로 인정받고 있다. 통성기도 시간에는 있는 힘을 다하여 괴성을 지르며 우는 자들로 인하여 혼란스런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데살로니가전서 5;16)고 하신 말씀은 그들에게 적용되고 있는가? 주님은 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가?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어떤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밝으며 명랑하여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려 재미있게 노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한가지 문제가 있다. 그는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아버지만 만나면 울기 시작하는 것이다. 얼굴을 찌푸리고 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러분의 자녀가 그러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왜 세상에서 잘 지내다가도 예배당만 오면 울기 시작하는가? 기도만 시작하면 울기 시작하는가? 이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눈물로 단을 가리는 것의 문제는 습관적인 것이다. 그들의 눈물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종교적인 관습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많은 종교 규칙들을 만들고 그와 같은 규칙들을 열심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수님도 그와 같은 신앙의 모습을 정확하게 지적하였다. 말라기 시대보다 예수님의 시대는 더 타락하여 그들의 가슴은 얼음보다 차가웠으나 그들이 만들어낸 규칙들은 수 없이 많아서 그들은 그 규칙을 지킴으로 피곤해 있었다. 그런데도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하여 자기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방하였다.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태복음 15:1,2).

   그들의 생각은 무엇인가?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유대교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 지도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러한 행동은 이단적인 행동으로 정죄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은 성경에 없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 놓고 전통이나 유전을 지키지 아니하면 이단이라고 공격한다. 필자가 믿기로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실은 요한 웨슬레나 루터나 무디가 와도 이단으로 정죄당할 것이다. 아니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한국교회에 오시면 당장 이단으로 규정되어 쫓겨날 것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신학교도 나온적이 없고, 어떤 교파에 소속된 적도 없고, 오늘날 기독교가 지키고 있는 절차에 따라 예배를 드리지도 않으며, 목사란 호칭도 쓰지 않았고, 조직적인 방법으로 사람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들이 모이는 단체에 어떤 교파 이름도 붙이지 않았고, 그들은 성직자 제도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오늘의 한국교회가 볼 때 잘못되었으니 이단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필자에게 질문하였다. 왜 필자는 교파에 속하지 않느냐고. 필자는 그것은 성경에 없기 때문이며, 양심이 허락지 않기 때문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진실로 그러하다. 우리는 주님의 본을 따라, 말씀의 본을 따라, 이 두가지를 기준한 양심의 본을 따라 신앙을 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용서받지 못한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면 기쁘고 즐거워야 하며 천국에 갈 수 있는 희망에 부풀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예배당에서 눈물이 습관화되어 있는 것은 무슨 현상인가? 그들은 죄를 용서받지 못한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눈물로 시작하여 웃음으로 진행하며 웃음으로 열매를 거두는 것이니 부활이 그것이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며" 눈물 흘리는 회개가 나온다.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울었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에 그들은 즉시 큰 기쁨이 충만하였다. 46절에 기록된 대로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였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장면은 기독교의 시작의 모습이요, 오늘날 한 사람이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된 정상적인 모습이다. 필자가 편의상 기독교인이라 하였거니와 실제는 성도라고 표현해야 정상이다. 거듭난 정상적인 성도는 이렇게 태어나는 것이다.

   성도에게도 눈물은 필요하다. 이것은 필자가 서두에도 언급하지 아니하였던가. 그러나 신앙의 기본은 이렇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죄인이 자신의 현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리며 어찌 할꼬 하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이 구원받기 직전의 준비된 모습이다. 이것을 누가복음 4장 18절에서는 "가난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러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다. 그들은 준비된 자들이며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 자들이다. 전도자가 그러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복음을 믿게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으면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이 일어나며, 형제 사랑이 일어나며, 말씀사랑이 일어난다. 그들에게는 충만한 기쁨이 있으며 천국에 대한 소망이 모든 슬픔을 이겨 그들의 삶이 즐거움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들에게도 힘든일이 있고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겠으나 천국에 대한 희망은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쁨의 기초 속에 때때로 눈물이 있다. 그 눈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심으로) 값없이 건져주신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한 눈물이며, 허물과 실수로 지은 죄를 뉘우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조건 없이 천국을 소유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통회의 눈물인 것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은 눈물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또 있다. 죄를 용서받음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 있고, 기도제목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있다. 이와 같은 눈물은 이미 구원받은 신자가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눈물이다.

   필자가 분별하기로는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흘린 눈물의 대부분은 이 눈물과 종류가 다르다. 모든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불안하고 하나님 앞에 불안하며 자신들의 불완전한 삶에서 파생된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눈물인 것이다. 모든 죄를 용서받음으로 천국 갈 소망을 기초로 하고 있는 자들의 눈물과 이러한 눈물은 본질이 다르다.

   한국의 기독교는 구약의 말라기 시대처럼 눈물로 단을 가리우고 있다. 소경된 그들은 그와 같은 반복된 눈물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칭찬하고 있으니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은 이 시대에 응한 것이다(마태복음 15:14).

   사랑하는 독자여, 스스로에 속지 말고, 지도자에 속지 말고, 기독교에 속지 말라. 성경은 한 권이요, 길은 한 길일 뿐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9장 30절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이것은 여러분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단번에 용서되었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으면 은혜의 선물로 구원받은 것이며 죽어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없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로마서 10:10).

  

Posted by 행복자
,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나아만의 육체 구원과  영혼 구원


   " 나아만이 가로되...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열왕기하 5:17).


   " 나는 예수 믿고 그 지긋지긋한 관절염 고치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구원받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신앙생활을 10년이나 했다는 어느 집사님의 대답이었다. 집사님의 대답이 하나님 앞에서 왜 잘못되었는지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문둥병 때문이었다. 인간의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문둥병을 고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가 계집종이 전해준 선지자의 소식을 듣고 먼 거리를 찾아와 고침받게 되지 아니하였던가! 나아만의 이 과정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우연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하나님을 믿을만한 양심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시고, 한 소녀가 포로로 잡히게 하시고 그 소녀를 통해 선지자의 소식을 듣게 하신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죄인들이 죄악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동안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기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 죄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스런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지옥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아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부르사 병을 고치신 것은 병 자체를 고치시는 것보다 그 역사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케하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통하여만 구원받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서두에 말씀을 소개한대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은 후 돌아갔다. 다시 말하면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것은 육체적 구원인데 하나님의 뜻은 이 육체적 구원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목적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의 육신의 고침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큰 물질을 아낌없이 선지자에게 바치려 했다 (열왕기하 5:15,16). 선지자가 받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싶다.

   첫째는 나아만에 대한 계획이 2단계, 즉 육체 구원을 통한 영혼 구원이었으며, 금일의 수많은 구도자들도 이러한 경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다. 병고침이나, 기도 응답이나, 능력 경험, 혹은 교육을 통해서 다양하게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곧 구원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필자가 상담한 많은 경우의 교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붙들고서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이 경우는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지 구원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구원이나 표적을 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

   바울도 표적만 찾는 유대인, 지식만 추구하는 헬라인을 책망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23).

   독자여,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라. 열 문둥병자가 다 병고침 받았으나 구원받는 자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었음을 명심하시라.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만 구원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믿음도 검토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놀랄 일은 주님 나라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 중에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복음 7:13~23). 당신이 지신의 영혼을 진정 사랑한다면 위의 말씀을 찾아 살피고 겸손히 당신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 이 일이 중요한 것은 만약 당신이 버리운 자라면 당신의 그 훌륭한 신앙 경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아만이 하마터면 병만 고치고 영혼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사가 그 물질을 받았다면 나아만은 자기의 병고침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당당한 생각을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엘리사야말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엘리사는 영안이 온전히 열려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에 돈이나 기타 인간의 생각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 훼손되는 것이다. 영생은 온전히 선물로만 주어진다. 그 아무것도 우리들의 댓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에베소서 2:8). 나아만을 감동시킨 이 하나님의 선물이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주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영생은, 돈으로나 기타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교하였다 하는 신앙 경력으로도, 그 어떤 댓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거져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그림자를 구약에 두신 것은 온전한 자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 삼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아만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버린 것처럼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나아만이 겸손해진 것처럼 당신도 그러해야 될 것이며, 나아만이 하나님을 경배한 자가 된 것처럼 당신도 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께 알려졌기를 바란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당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 8,9).

   당신은 분명히 영혼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육체 구원만 받았는지 겸손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 전도자 허윤욱 -

Posted by 행복자
,

          믿어도 죄인인가?


                 날마다 눈물로 회개해도....


   "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로마서 8:1,2).


   죄에 대한 분명한 해결 없이 천국에 간다든지 구원을 받았다든지 하는 것은 결혼하지도 않은 처녀가 혼자서 아이를 낳으려는 것만큼이나 무모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고삐를 풀지 못하고 있는 상태에서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부풀어 있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졌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며 나름대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다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가 100년이 넘어, 가는 곳마다 수많은 교회당이 세워졌으며 수백 명, 수천 명 모이는 교회들이 즐비하여도 이와 같은 죄 문제를 명쾌하게 풀어주는 교회를 찾아보기 힘든 현실을 생각할 때 통곡과 탄식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예배당에 나가서 지은 죄를 회개하며 눈물짓고 새벽마다 예배당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를 통한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자기 정죄의 눈물일 뿐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한 모습과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로 말미암는 한탄과 괴로움만을 토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와 같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을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왜 돌아보지 않고 있는 것일까요? 저 병들어 지쳐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왜 방치하고 있는 것일까요? 양떼들의 사정을 살피고 그들의 신앙의 문제점을 풀어 평강과 기쁨을 주기보다는, 비성셩적인 방법으로 헌금만을 강요하며 거두어들이는데 얼마나 열중해왔습니까? 호화롭고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화려하고 장중한 의식을 갖추어 예배를 드리지만 10년을 교회에 나가면서도 "구약"과 "신약"의 참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교인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의 경험으로는 직분을 가지고 교회에 충성한다는 자들은 많지만, 지옥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가져본 교인은 만나보기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저는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감히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옥과 천국에 관한 문제, 즉 영생과 구원의 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상담해본 적이 있습니까? 진정 당신과 당신이 속한 교회의 교인들이 지옥과 죄에서 놓인 기쁨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제가 최근에 만난 어떤 성도를 통해서 들은 바로는 어느 목사님이 자기가 속한 교회는 구원받은 자가 전혀 없으며 구원을 논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현대 한국 기독교의 이와 같은 영적 암흑 속에서 죄인들이 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불쌍하고 선량한 양떼들은 이 모든 책임을 자신의 믿음이 연약한 탓으로 돌리고 인내하며 "믿음이 성장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선량하나 무지한 가운데서 방황하는 양떼들을 위하여 저는 죄의 근본적 해결책을 알리고자하여 이 글을 쓰는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즉 죄용서 받기 위해 날마다 회개하는 죄인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첫째로,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도와 및 그의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의 행하였던 신앙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죄로 인하여 애통해하며 마음에 찔림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구원받은 후에는 크게 기뻐하고 즐거운 교제 속에 있었던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36-47). 그들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사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구원받는 수많은 성도들이 큰 기쁨의 생활 속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은 놀라운 믿음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토록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분명 모든 죄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분명한 구원에 기인한 것입니다.

   둘째로, 복음이라는 단어와 날마다 죄 때문에 괴로워 하는 모습이 서로 걸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복음(福音)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 "기쁜 소식" 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온 인류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류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누가복음 2:9,10).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인류를 향하여 사랑과 긍휼을 베풀기로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죽어가는 불쌍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구세주 예수님을 보내주셨건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였다고 자천하고 있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죄에서 해방 받지 못하고 죄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고통하는 것이 과연 복된 소식입니까? 결코 그렇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 날마다 눈물로 회개하므로 죄용서 받으려 하는 자는 "슬피 울며 이를 갈" (마태복음 13:49,50)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했다가 무서운 지옥의 형벌 속에 들어갔을 때의 그 놀라움과 충격으로 슬피 울고 후회하며 이를 갈고 있을 모습을... .

   셋째로, 날마다 회개하여 죄용서 받기를 빌고 있는 모습이 잘못된 것은 양심적 차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빚을 졌는데 빚을 빌려온 만큼의 돈을 갚지 못하고 그저 말로만 용서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소연한다고 해서 그 빚이 갚아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정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도 정당한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2)고 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하셨으며 "다 이루었다" 하셨고(요한복음 1:29, 19:30)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7)고 하셨지 않습니까!

   날마다 눈물로 회개함으로 죄에서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죄인들을 상담해보면 대부분 원죄(原罪) 와 지난 죄는 이미 십자가로 용서받았으나 현재부터 앞으로  지을 죄는 그때그때 회개하여 해결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저는 "만약 죄를 짓는 중에 당신이 회개하지 못하고 갑자기 죽는다면 당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 하고 질문합니다. 이 질문은 대부분 많은 사람이 구원받지 못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면, 구원받기 위해 날마다 회개하는 죄인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첫째로, 구원의 확신이 없습니다. 혹 있다 해도 헛된 착각일 뿐 정작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생명책에 그 이름도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죄인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될 수 없으며 천국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요한계시록 21:27).

   둘째로, 구원받기 위해 날마다 회개하는 죄인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날마다 죄와 싸우고 죄의 눌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죄인에게 무슨 평강이 있겠습니까?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였느니라" (이사야 57:21).

   빚을 다 청산하고 모든 빚더미 속에서 온전히 해방된자의 기쁨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눌림 속에서 살아왔겠습니까? 날마다 빚 독촉하는 소리에 웃을 날이 없었고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은 늘 불안하고 탄식하는 가운데 있으며 평생을 갚아도 다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에 눈물 흘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헤어져 영원히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오빠가 큰 부자가 되어 찾아와서 그 모든 빚을 "단번에" 해결해 주었습니다.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죄의 속박에서 눈물과 절망으로 지옥의 형벌만 기다리고 있던 죄인 된 나에게, 어느 날 복음의 실체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나의 죄를 단번에 용서하시어 의롭다 함을 주셨습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브리서 10:10).

   이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나에게 거룩함(의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4) 함과 같이 우리가 거룩하게 되어 구원받음은 영원히 영원히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구원과 속죄는 단번에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영원히 보장된 확실한 약속입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이 이미 당신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고 오늘 그 사실을 깨달음으로 당신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구원은 단순하고 쉽게, 십자가에서 모든 속죄를 이루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2000년 전 십자가에서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놓으신 줄 모르고 오늘도 구원받기 위해 날마다 회개하느라 눈물을 흘리는 불쌍한 죄인들이 모두 구원받기를 바랍니다.

   구원받기 위해 날마다 회개하고 있는 죄인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용서한 속죄를 모르고 또 용서를 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다 이루었다(다 갚으셨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