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도 죄인인가?


                     믿어도 죄인인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예수님은 왜 죽으셨습니까?"

   "우리들의 죄 때문에 죽으셨지요."

   "그렇다면 당신은 죄인입니까?"

   "죄인이죠!"

   제가 현재 교회에 다니는 많은 교인들을 상대로 상담했던 대화 내용 중 일부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는데 왜 계속 죄인이란 말입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얼마 전에 상당한 빚을 지고 고민에 빠져있었는데 그의 부모가 모든 빚을 대신 완전히 청산해 주었다고 하면 그가 계속 사람들을 향하여 자신은 빚쟁이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너무나 쉽고 평범한 이 진리가 풀리지 않으므로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의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불안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상태를 보면, 첫째로, 죄를 용서받은 사실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죄수가 죄를 사면 받았을 때의 기쁨을 여러분은 상상해 보았습니까? 이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둘째로, 교회생활이 기쁘고 평안하기보다는 오히려 수많은 짐을 지고 괴로움과 고통과 번뇌 가운데 입으로는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하고 찬송을 부르나 실은 그 반대 현상이 중심에 있는 채로 별다른 대책 없이 끌려 다니는 것입니다.

   셋째로,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보다는 공포의 하나님,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생각되어 교회생활이 불성실하면 심판하고 저주하며 헌금을 내지 않으면 당장에 복을 거두어 가는 듯한 하나님으로 착각하며 떨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公儀)의 하나님이시지만 균형 있는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건짐 받는다" 는 것이 아닙니까? 절망적 상태인 멸망의 길에서 구원(구출) 받았다면 눈물어린 감사와 찬송과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 증상은 왜 왔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認識)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7)고 함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죄를 짓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으니라" (요한일서 3:8) 함과 같이 마귀는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미끼로 죄인을 자기의 수하(手下)에 두고 종을 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짓는 것으로 인하여 정죄(定罪)하고 낙심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방황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여러 가지 환경을 통하여 죄를 짓게 되고 죄의 종이 되게 합니다.

   또한 사단은 죄의 유혹으로 우리 중에 역사(役事)합니다. 그것은 달콤하고 또는 합법적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죄로 썩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예레미야 17:9).

   이때 사단은 속삭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선(善)을 행함으로 지탱해 보라고, 자신을 꾸미라고... .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실체입니다. 본래 부패하고 썩은 죄인인데 선을 행하려고 하는 온갖 노력이 있다 하여도 의인(義人)이 될 수 없습니다. 사단은 심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광명의 천사(고린도후서 11:14)로 가장합니다. 그는 계속 속삭이기를 선을 행함으로, 노력함으로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있으며, 구원받을 수 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증상인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이루려고 헛된 종교적 열심에 빠져 있으니 당연히 기쁨과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증상인 두려움은 자신이 설정한 종교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니 자연히 두렵고 불안한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비슷한 현상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은 불확실한 죄인들을 위하여 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고 친히 육성(肉聲)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의 근본이 되는 죄의 무거운 짐을 모두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홀로 지고 고통하지 말고 대신 그 짐을 져주신 예수님께로 오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중(重) 죄인을 처형하기 위한 로마제국의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 사형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모든 죄라 함은 세상의 모든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 무거운 짐을 당신이 질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義)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로마서 3:24). 이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의인이 되었다는 것은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로마서 8:1)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9장 12절의 영원한 속죄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예전에는 염소나 양, 송아지의 피로 말미암아 제한적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으나 이제는 한 마리의 속죄양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영원히 용서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러므로 죄인이 의인의 신분을 얻게 되었고 이 사실을 깨달은 자는 구원을받았으며, 지금 이 세상을 떠나도 당장에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실한 보장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형벌의 두려움에 떨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원받은 이후의 실수로 짓는 죄에 대하여는 자녀의 신분으로 주님 앞에 자백함으로 주님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되 그와 같은 죄로 인하여 지옥 형벌의 두려움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고 선언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은 죄인이라 말하거나, 죄 용서 받은 기쁨을 경험하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비극적이며 잘못된 것인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불신(不信)임이 분명합니다. 믿는다 하면서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는 것은 곧 주님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주님께서 " 다 이루었다! "고 외치실 때에 당신과 저의 모든 죄는 이미 해결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어떤 사람은 "죽어보기 전에 어떻게 자신이 구원받았는지를 알 수 있겠느냐" 고 질문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 반문하고 싶습니다. 도대체 자신의 심중에 확신 없는 사실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으며 중심에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평안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근본적인 문제요 기초적인 문제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확신적으로 전파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에베소서 2:8).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편지하려는 뜻이..." (유다서 1:3).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47).

   이와 같은 말씀들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는 물음에 "가야지요" 하고 답변합니다. 이것도 아주 잘못된 답변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확률이 아닙니다. 구원 얻은 자에게는 명쾌한 소망입니다. 구원이란 천국이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미 얻은 사실을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죽어봐야 안다" 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안한 답변입니까!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를 불안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보십시오. 얼마나 사랑 해주었습니까! 얼마나 위로해주었습니까! 그는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며 포근하였겠습니까! 그는 잃었던 행복을 되찾은 것입니다. 우리는 잃었던 에덴보다 더 좋은 낙원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구원이요 영생(永生)입니다! 탕자의 부모가 탕자를 용서하듯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독생자의 속죄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속죄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진정 우리의 모든 죄를 단번에 용서하셨습니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0: 17,18).

   이것을 깨닫고 믿는 자는 멸망의 두려움 없이 확실한 구원을 얻었다고 성경은 증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 복음 5:24).

   그렇다면 이 모든 사실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왜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부분 많은 교인들이 예수님이 원죄와 지난 죄는 용서하셨지만 지금 짓는 죄는 계속 회개하여야 용서받는다고 알고 있으므로 날마다 죄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란 우리가 날마다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돌이킨다는 뜻이니, 죄인이 멸망의 지옥으로 가다가 어느 날 십자가의 속죄를 깨닫고 자신의 죄악(불신)의 길에서 돌이켜 천국의 소망을 얻을 때 있는 사건입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수의 죄에 대하여는 자백의 기도가 필요할 뿐입니다.

   독자 여러분! 이 시간 무릎을 꿇고 주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을 단순히 받아들이고 죄 용서함 받고 구원을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요한복음 6:47).


                                                                                                                                   - 전도자 허윤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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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과 구원의 확신

                                               (8장 1절~39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죄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8장은 모든 신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그에게 의탁하고 그에 의해 주관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 받아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 이제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받게 되는 축복된 결과들을 살펴 봅시다 ...


   1. 새로운 자유가 있습니다(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속박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한 자유를 뜻합니다.

   (- 초기의 여러 성경 사본에는 4절 상 반절 말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이란 말씀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2. 새로운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대신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돌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면, 그것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를 공중으로 띄우면, 그것은 하늘을 날아다닐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항상 죄로 유인하고자 하는 인력의 법과 같은 법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은 능히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3. 새로운 힘이 있습니다(3,4절). 사람의 성품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성품에 나타나는 육신의 죄를 이기시고, 그 죄의 세력을 끊어 놓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의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4. 새로운 의욕이 있습니다(5절).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을 돌이켜 육신을 즐겁게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5. 새로운 열매가 있습니다(6절). 생명과 평안이 믿는자의 분깃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생명이고,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6.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습니다(7절). 사랑 안에서 순복함이 적의와 반역을 대신합니다.


   7. 새로운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8,9절). 육신의 생활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합니다.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안일을 도모함으로 마치 자신의 몸과 재산만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8. 새로운 보증이 있습니다(11절). 성령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재하고 있음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리라는 확증입니다.


   9. 새로운 충성이 있습니다(12절). 우리는 육신에 대해서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대해 충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10. 새로운 살길이 있습니다(13절). 죄의 본성에 따라 산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몸의 악한 일을 죽여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 욕이 되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부정해야 함을 뜻합니다.


   11. 새로운 인도함이 있습니다(14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있습니다. 목표 없이 방황하지 않고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2.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15절). 그것은 종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3. 새로운 관계가 있습니다(16,17절).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모든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14. 새로운 특권이 있습니다(17,18,20~23절).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별로 특권처럼 보이지 않으나, 주 예수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오히려 이것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15.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23,24절). 그것은 몸의 구속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일은 그가 우리의 몸을 죄의 권세와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6. 새로운 전망이 있습니다(17~19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생물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가 영광 중에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날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고난과 탄식으로 보내지만, 희망의 그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7. 새로운 도움이 있습니다(26,27절).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18. 새로운 담대함이 있습니다(28~30절). 아무도 대적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하나님 편에 속해 있기에 항상 넉넉히 이깁니다.


   8장 33~39절의 말씀은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해 온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묵상하신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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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요 15:5).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지' 란 말은 그리스도인을 일컫는 신약성경의 많은 칭호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신약교회 진리 안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신분을 가장 잘 표현한 말 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이 '가지' 라는 칭호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묵상해볼 만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나무에 붙어 있는 생명 있는 가지는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라야합니다. 생명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성장하지 않는 가지는 죽은 가지입니다. 또 만일 가지가 살아있긴 하지만 자라지 않는다면 이는 어딘가 잘못된 기형적인 가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믿음에도, 믿음의 삶에도 또 말씀을 먹고 분별하는 깊이에도 항상 성장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므로 성장이 없는 가지가 기형이듯이 성장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기형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믿음의 성장을 방해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만심 곧 교만입니다. 자만심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신앙의 건전한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자만심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대개가 거의 처음 그리스도인으로 들어올 때의 영적으로 어린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어린아이의 상태로 오랜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생명에 자양분이되고 생명을 양육시킬 수 있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에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나아가 다른 앞선 성도들의 경험이나 가르침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도 스스로 높은 수준의 성숙한 신앙 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서신서들을 읽을 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어떻게 성장하였으며 어떻게 꽃을 피웠으며,어떻게 발전하였는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중이라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는 자로서의 전도의 일을 시작한 초기에 쓴 데살로니가전후서는 주로 주의 오심에 대한 성도들의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쓰여 졋습니다. 그렇지만 비교적 그의 심오한 이신칭의(以信稱義)에 대한 복음(福音)에 관한 진리(眞理)나 신약의 교회의 본질인 그리스도와의 한 몸 연합에 관한 신약교회진리(敎會眞理)등의 진리체계와 그 실행 등에 대하여는 충분히 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3차 전도여행 중에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관한 심오한 진리체계를 로마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도 생활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옥중에서 쓴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책에서는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감추어진 비밀인 그리스도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敎會)에 대하여 가장 심오한 진리체계인 신약교회진리(新約敎會眞理)가운데서도 핵심 진리인 한몸 연합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 진리를 잘 기록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의 지혜와 그 키가 자라났듯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혜와 키도 자라나야합니다(눅2:52).

둘째,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합니다. 나무의 본분은 열매를 맺는 것인데, 그 열매는 몸 된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에서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잘 붙어 있으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할 때 그 때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잘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갈5:22-23).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 주인에게 열매를 제공해주지 못하고 버림받는 미운 가지와 같은 삶을 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있는 자로, 한 몸 지체로, 형제의 우애가 있고, 형제 사랑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고 온전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포도나무인 그리스도의 몸에 잘 붙어 있음으로 인해서, 가지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나타난 우리의 잘 익은 성령의 열매로서 판단을 받기 때문입니다(마7:16).

셋째,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도 살다가 겨울이 오면 죽음과도 같은 시련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나무에 튼튼하게 잘 붙어 있는 한 시련의 겨울은 결국은 지나가고 맙니다. 그리고 어느덧 다시 봄이 찾아오게 되면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또다시 움을 틔우는 것입니다. 끝까지 나무에 잘 붙어 있는 가지는 봄이 되면 마침내 푸른 잎을 내놓습니다. 여름엔 녹음을, 드디어 가을엔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렇지만 겨울이라는 세파와 환란과 역경과 핍박에 부딛치면 가지는 벌거벗은 채 마치 죽음과 같은 혹독한 겨울을 보내고서도 살아있는 나무에 잘 붙어 있는 살아 있는 가지는 자신의 앙상한 삶에서 또다시 열매를 맺는 풍요로운 삶으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포도나무에 온전히 잘 붙어 있는 포도나무의 가지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온전히 연합된 그리스도인은 포도나무 가지처럼 죽음 같은 시련을 겪을지라도 그 몸의 머리 되시는 주님께로부터 사랑으로 돌보심을 받음으로 인하여 이 세상의 어떠한 무서운 세파에서도 온전히 보존되는 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음 같은 시련을 겪고 있을 때, 땅에서 우리와 동일한 시련을 체휼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동일한 고통을 느끼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추운 겨울이 되면 잎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거무스름한 빛깔로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앙상한 가지들의 모습은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절이 지나 봄이 오면 그 몸통의 뿌리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풍성히 공급받음으로 그 앙상했던 가지들이 생명이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된 자이므로 삶에서 죽음 같은 겨울이 오나 머리되신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자로서 영원히 안전한 자들임을 또한 믿습니다.

넷째, 나무에 잘 붙어 있지 않은 가지는 나무에서 떨어질 때 곧 죽습니다. 가지는 나무에서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그래서 나무에서 떨어지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원천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라는 성장의 능력도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모든 믿는 자들의 착한 행실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능력 또한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연합된 그리스도의 몸에서 결코 떨어져 나가 살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교제권에서는 떨어 나가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교회의 교제권 밖에서 살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살면, 이때의 그리스도인은 가지가 나무로부터 수액과 자양분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어 믿는 자로서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부끄러운 구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로서 나무에 잘 붙어있어 열매를 많이 맺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은 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현재의 삶을 살 수 있는 생명과 힘을 얻는 자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은 그날에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풍성한 상을 기대하며 이 놀라운 주님의 오심을 참 유일한 소망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붙어 있어야지만 살수가 있으며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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