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천국에 갈 수 있느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립보서 3:20).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은 필자가 수없이 해온 고전적인 질문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바른 전도자라면 당연히 했을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전도함은 천국에 감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땅위에 있는 기독교 신자에게 " 왜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물으면 당연히 "천국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게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오신 것이 사실이라면 당연히 천국가기 위하여 예수 믿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의 기독교 현실은 이와 같은 질문을 하면 일단은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은 슬픈 일이요 비극적인 모습이다.


   여기서는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살펴보면서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먼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지옥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지옥을 믿지 않는다. 그들도 지옥을 믿는다고 대답은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입으로는 인정하나 행위로는 부인한다. 오늘날 기독교가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아 내세보다는 현세의 복을 중심으로 발전한 결과 지옥에 대한 강조가 약해진 까닭이리라. 그러므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현세의복에 관심을 두고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없어진 것이다.

   성경말씀이나 찬송들은 하나같이 현실의 복보다는 내세의 복에 대한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언제부턴가 천국에 대한 소망의 가르침이 약해지면서 현실의 축복에만 매달려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뇌리에서 지옥에 대한 관심이 점점 사라져갔다. 결국 지옥을 믿지 않는 교인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이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러한 절차를 거쳐 사단에게 먹힌 것이다.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더 이상 사단에게 두려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단의 친구가 된 기독교, 사단의 도구나 노리개가 된 기독교가 되는 것이다.

   직선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님은 사람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요, 사단은 지옥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지옥에 대하여 관심 없는 기독교는 사람을 지옥에 데려가기 위해 분주한 사단의 전략을 착실히 수행하는 종으로 전락한 모습이다.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러나 필자가 그들에게 지옥이 어떤 곳이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신자들을 거의 만나보지 못했다. 지옥이 얼마나 끔찍한 곳인데 믿는다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설명도 못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지옥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감히 말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상당수가 지옥을 안 믿는다. 참으로 슬프고 비통한 현실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이와 같은 관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요 기독교인들을 향한 중요한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질문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살릴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였을 때 나온 반응들을 함께 생각해보며 구원의 진리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 번째 반응은 "그것을 어떻게 미리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며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면 그때에 가부간 결정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지금 천국에 간다고 확신하고는 있지만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하지 못하면 탈락하고 말 터인데 어떻게 천국 간다고 함부로 확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믿는자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 복음 6:47)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한 신자들이 의외로 많아 천국의 소망을 불확실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얼마나 명확한 하나님의 약속인가! 천국에 가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천국의 소망에 잡혀 날마다 당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 걸음 한걸음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이다.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도 없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은 학교에 입학한 적도 없이 학교에 날마다 나가는 학생처럼 불행한 것이다. 그는 졸업식날 울어도 졸업장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다닌 학교생활이 졸업장을 받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기가 막힐 일이다.

   그대는 입학식과 같은 구원을 받은 적이 있는가? 냉정히 그대의 신앙을 점검해 보라. 진정 양심적으로 생각해보라! 천국에 대한 소망에 부풀어 있는가? 그리고 그 소망은 말씀에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가? 성경에 근거도 없는 자기 확신은 스스로 속는 것임을 명심하라! 스스로를 냉정하게 점검해 봄이 그대의 생명을 진정 사랑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한 번 더 강조하거와 자신에 대해서 관대하지 말라. 대충 넘어가지 말라.

   이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반응을 들어보자. "나는 천국에 가려고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지만 자신은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사회를 위해 소금의 역할을 하며 불쌍하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 소위 말하는 해방신학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억압당하고 소외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밝게 아름답게 하는 사회 사업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어야지 어디 새로운 낙원이나 천국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들의 말은 상당히 매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허점이 있으니 그들의 이상은 좋으나 이루어질 수없는 이상, 즉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성경은 모든 인생이 다 죄인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죄인들이 모여서 어떻게 낙원을 만들 수 있는가? 수많은 사상가들이 만든 이론으로 세상을 고쳐보려 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지 아니하였던가.

   기독교 사상으로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 수 없다. 예수님은 천년왕국을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로 천년낙원을 만드시는 것이지 인간을 서서히 개조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립보서 3: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필자가 사회사업이나 복지사업을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필요하나 천국복음을 위해서 해야만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세 번째 반응을 보면 "당연히 갈 수 있지요" 하는 것이다.  물론 합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필자의 두 번째 질문에 그는 막히고 만다. "무슨 근거로 천국에 간다고 말합니까?" 하고 질문하면 "그냥 믿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하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물론 원칙적으로 믿음으로 간다고 하는 말에 모순이 없다.

   어떤 이는 그냥 예수를 믿으면 되는 것이지 왜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믿음을 논할 때 그렇게 막연한 것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21절 이하의 말씀에는 믿음이 막연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말해주고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의 경고요 엄숙한 선언인가!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평생을 살았던 헌신적인 신자였다. 분명하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천국에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의 공의는 두려운 것이다. 성경은 진실하고 완전한 책이다. 분명하게 성경에 있는 구속의 진리를 따라서 거듭난 성도가 아니면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산 순교자라 할지라도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여 주여 하면서 막연하게 천국에 갈 거라는 생각만 가지고 교회에 출입하는 수많은 허수아비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여 정신을 차리고 구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의 많은 신자들은 믿음을 단순히 "신앙의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교회의 모든 모이는 시간에 열심히 참여하고 신자로서 모범된 행실로 살기 위하여 노력하고 교회에서 맡긴 직분에 충실하고 헌금을 성심을 다하여 내고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 잘하는 그런 모습이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믿음이며 좋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으니 결국 천국에 가지 않겠느냐고 그들은 곧잘 말한다. 이들은 "나는 이미 믿고 있으니 나에게 전도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왜 잘 믿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시오?" 하면서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알 것은, 이런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 받지 못했음을 실토하고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정상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한국의 대부분의 기독인들이 구원받지 못한 자들로 보인다는 현실이다.

   한국의 영적 현실은 이교도들에게 전도하는 것보다 기독교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여서 기독종교인에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바울도 지적했듯이 자기의 말하는 내용이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하는 종교인들, 그들은 종교 속에 갇혀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며 지옥에 가고 있다.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디모데전서 1:6).

   이러한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잘 외우며 주기도문을 잘 말하지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방황하는 자들이다. 아무 뜻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경을 외우는 사람들은 사도시대에도 있었으며 그들은 소경이 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사도행전 13:27).

   아무 의미도 모르고 종교적으로 외우는 경전, 앵무새의 말과 무엇이 다를까? 그들은 종교적으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믿을 뿐 아니라 그 알지 못하는 것들을 훼방하기도 한다.

   앞에 인용한 사도행전의 말씀을 보아도 그들은 성경 속에서 태어나서 성경을 늘 외우면서 자라고, 또한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성경대로 오신 예수님을 대적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얼마나 이상하고 우스운 이야기인가.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이와 같은 일이 초림 예수 때에 일어났고 재림 예수 때에 또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성경을 사랑하고 믿는다는 종교인들에 의해서 죽임당함 같이 오늘날도 거듭난 사람들이 기독교 정통이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있다. 이 시대에 참으로 거듭난 아름다운 무리들이 성경의 진리를 따라 모이는 순수한 교회를 주님이 감추어두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소수이지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이외에도 이 질문에 대한 기이한 대답들이 많다. 그러나 지면 관계로 그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천국에 가는 진리를 소개하며 마치고 싶다.

   천국은 거룩한 곳이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천국에 데려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털끝만한 죄만 있어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누가 당당히 설 수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 자신이 아직도 죄인이라고 하거나, 의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명쾌하게 해결 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무서운 심판 아래 있는 인생들을 누가 살릴 수 있겠는가?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9).

   주님께서는 이와 같은 죄인의 현실을 보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온전히 해결하셨다. 죄인들의 모든 죄, 곧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심으로 죄인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서 3:23,24).

   모든 죄를 해결하신 주님을 믿는 자는 죄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얻은 것이다. 그에게는 정죄가 없되 영원히 없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자기 의를 내세우는 신자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필자는 사랑을 실천하는 성자들에 관한 주제를 다시 한번 다루고자 한다.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경건한 삶을 살다간 그 많은 훌륭한 분들이 모두 지옥에 갔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님을 밝혀두는 바이다. 다만 거듭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순교할 수 있고 경건한 성자 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구원 없는 이교도 중에도 존경스러운 성자는 얼마든지 있다. 필자가 생각할 때 그들이 지옥에 가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생활을 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속죄의 진리를 모르는 저들을 우리가 어찌 인정할 수 있으랴. 기독교내에서 이 문제를 적용해보면 답이 나오지 아니한가. 거듭난 경험 없이도 얼마든지 거룩한 삶으로 많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질문에 필자도 이해는 한다. 그럼에됴 불구하고 사실이요 현실임에 어찌하겠는가.

   필자는 앞에서 그들을 자기 의에 붙잡힌 사람들이라고 말하였다. 그들이 자기 의에 붙잡힌 까닭은 이러하다. 거듭남의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거듭남은 영적인 출생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자는 그 속의 세계를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이해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 사실이 그러하니 그냥 그리스도의 사랑을 열심히 실천하여 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아간다. 구원에 있어서 그들의 인격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경험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성자들의 이야기로만 규정하여 남의 이야기처럼 지내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거듭남으로 인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심만 내다보면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의(롬 3:24)에 복종치 아니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에 빠지게 된다.

   교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교만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교만한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이미 교만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감히 우러러 볼 수 없는 겸손한 성자가, 평생을 봉사한 경건한 성직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린 충성스런 열심 장로가, 교만한 자로 정죄 되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신앙의 절대적 실패 요인이 무엇인가? 속는 것 아닌가? 사단의 본질은 속이는 것이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지 아니하였는가. 사단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여 지옥으로 데려간다.

   생각하여 보라. 속이는 자가 엉성하게 속이는가? 속는 자도 수상하면 속겠는가? 완벽한 진짜 같으니 속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도 나는 큰 교회의 이름 있는 목사님 밑에서 잘 배우고 있으니 절대 안전하다고 자위하는 사람은 분명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이 어찌 쉽게 함부로 판단하느냐"고 반문한다. 성경은 구원의 문은 좁은 문이라고 하였음을 생각하여 보라. 거듭난 자들이 결코 큰 무리일 수 없으며 유명한 교파일 수 없음을 왜 모르는가. 유명한 교단을 자랑하고, 유명한 목사님을 자랑하는 자기 도취에 빠져있는 불쌍한 종교인들이여! 기독교는 종교가 아님을 왜 모르는가! 제발 정신을 차리라.

   비극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필자는 이단에 속한 여호와의 증인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 한 가지는 그들의 말에 먹혀 들어가는 내용에 있다. 그것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다. 그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약점인 온갖 비리들을 깊이 연구하여 낱낱이 폭로하면 쉽게 설득력을 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에서 거룩한 생활을 해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오는 실수들을 파고드는 것이다.

   필자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변론할 기회를 많이 가졌던바 저들이 왕년에 한국의 제일 유명하다는 교회의 장로요 집사였다는 경력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른다. 심지어 전도사 목사 출신도 있다고 들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보면 참으로 영생 얻은 자는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들이 제대로 거듭난 양이었다면 왜 사단의 자식이 되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장로여, 집사여, 그리고 목사님들이여! 진정 거듭났는가? 정말 그대의 영혼은 안전한가? 기회는 항상 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이제 거듭남의 본질에 접근하면서 그 훌륭한 종교인들이 지옥 갈 수도 있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거듭남의 본질은 무엇인가? 거듭남은 나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썩어 가는 문둥이처럼 불쌍한 죄인이요, 구더기처럼 더러운 죄인이요, 사자처럼 사나우며, 뱀처럼 간교하며, 여우처럼 약삭빠르며, 돼지처럼 천박하고, 거북이처럼 게으르며, 양처럼 무능하고, 소처럼 고집 세고, 공작처럼 자랑하되 자랑할 것도 없는데 자랑하기 좋아하여 도저히 거룩할 수 없는 죄인의 종자이다. 선을 행하려하나 할 수 없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도저히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는 죄인이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

   돼지가 깨끗해지려고 노력하여 깨끗해질 수 있겠는가? 밤낮으로 교육받으면 가능하리라고 보는가? 밤낮으로 훈련하면 깨끗해질까? 조금은 개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자가 유순하려고 노력하여 유순해질 수 있겠는가? 사자가 양처럼 되려면 가능한가? 얼마큼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잠을 안자고 걸음걸이 연습을 하면 가능할까? 몇년 동안, 아니 몇 십 년 동안 목소리 연습하면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사실이 이러한데 오늘날 죄인들을 모아다가 교육시키고 훈련하여 경건한 모습 흉내 내게 하고 있으니(이것이 종교다) 저들의 피곤한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고, 고난은 글로 다 표현하기 힘들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에 의해서 충분히 이기고 순례의 길을 가는 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의 경험 없이 고생하는 저들의 수고에 눈물이 있다. 거듭난 신앙은 결코 교육이 아니다. 훈련도 아니다. 흉내 내는 것도 아니며 연습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생각하여 보라. 스스로 움직일 힘없는 리어카와 움직일 힘 있는 자동차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거듭남 없는 종교생활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이다. 평생을 종교적인 훈련을 통하여 온갖 고생하며 아름다운 간증을 쌓았으나 그들은 하나님에게 배척 받을 것이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역사하여 힘들이지 않고 가는 자동차처럼 쉽게 가는 것이다. 주님도 마태복음 11장 30절에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니라" 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이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누리는 독자가 있다면 거듭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으리라.

   그렇다면 거듭남은 무엇인가? 돼지가 양으로 바뀌는 것이다. 어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지 말라. 1900여 년 전에 니고데모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아니하였던가(요한복음 3:9).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이요 인간에게는 비밀인 것이다.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사자가 점점 양으로 바뀔수 있겠는가? 그것이 아니다. 유다서 1장 3절에 주님은 "단번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죄인이 어느 날 갑자기 성도로 바뀌는 사건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설명하고 있다(갈라디아서 2:20).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

   거듭남은 사자가 죽고 양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죄인 아무개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의인 아무개로 다시 태어난 사건인 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신 것이 아니고 내가 죽었으며 부활시에 내가 다시 부활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지옥에 가서 영원히 치루어도 치루지 못할 끔찍한 내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영원히 해결하신 것이다. 이것을 믿을 때 이제는 의인이요 하나님의 자식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을 바울은 그림처럼 그려주고 있다.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로마서 6:4).

   죄인된 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 두 번 태어났으니 거듭난 것이다. 양으로 태어났으니 흉내 내려고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양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요 성도의 삶이다.

   이사야 1장 3절의 "행악의 종자:라는 말씀을 다시 생각해보자. 여기 돌감나무가 있는데 그 감나무에 아무리 거름을 주고 열심히 가꾸어도 좋은 감이 열리지 않는다. 좋은 종자를 접붙이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거듭남도 이와 같아서 좋은 종자를 접붙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종자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또다시 말하자면 마귀 자식으로 태어난 죄인이 하나님의 자식으로 두 번째 태어나는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종자 자체가 안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 종의 흉내를 낼 수 있으며 흉내를 낸다고 종이 바뀌겠는가? 천국은 양이 가는 곳이지 돼지가 가는 곳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인격은 사랑을 실천할 수 없고 실천한다고 하는 말 자체가 교만일 수도 있다. 물론 성경에 사랑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필자도 안다. 그러나 알 것은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려는 기도와 노력을 하더라도 주님의 은혜로 성령의역사하심과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을 뿐 우리의 육신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육신일 뿐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고 있다(빌립보서 4:13). 또한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삶이요, 성령은 거듭나는 순간 신자들 안에 내주하신다. 종교인들이 성령 없이도 얼마든지 그리스도인 흉내를 낼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울은 경고하고 있다. 사단도 얼마든지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할 수 있다고.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린도후서 11:14,15).

   얼마나 무섭고 끔찍하고 두려운 일인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하나님의 훌륭한 종이라 여겼던 사람이 사단의 종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필자는 누구를 정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관대하거나 방심하는 오류로 망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이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을 배운 신자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아서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내용은 복음을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깨닫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동일하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안다'는 말은 곧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써 "...에 의하여 ...을 알게 되다", "발견하다", "깨닫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상담하면서 느끼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며, 혹 구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그들은 구원을 배웠을 뿐이었다.

   구원을 배운 사람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결단코 아니다. 구원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전과 달라서 오늘날은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경 지식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을 지식적으로만 배워서 이론으로는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요, 근심거리이다.

   사단의 입장에서보면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단의 속삭임에 속고 있다. 사단은 구원의 지식을 가르쳐주고 말하기를 "너는 구원의 진리를 알고 있으니 구원받은 거야. 더구나 한국에서 제일 이름있는 교파에 속했으며 유명한 목사님도 너와 같이 생각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너의 목사님에게도 인정받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조명하여 규정지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단에게 속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가 막힌 사단의 전략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제 본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구원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구원을 얻으라" 혹은 "구원을 얻었나니" 등으로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이론적으로 배우라는 가르침은 없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외치는 것이며 경고하는 것이며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가르쳐서 지식을 습득하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다르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구원에 관해서 자신이 없으며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 없는 대답만 한다. 혹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존심 때문에 말하거나 착각으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주제, 즉 구원을 배운 사람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서 경험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쌍한 여인의 안내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여인을 통해서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배움의 단계이다. 배움은 듣는 것이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며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소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것의 사실성을 물어볼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왜 메시아이며 왜 구세주인가, 그가 메시아라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나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구세주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인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경험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42).

   이 얼마나 확실한 경험인가.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경우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었다. 그분은 메시아라고 들었다. 또는 선지자라고 들었다. 여러 기적들에 관해서도 들었다. 가르친 말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들은 상식으로 예수님을 알뿐이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삭개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었으면 자신 없는 대답을 하되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하였을 것이다.

   금일에 필자가 만나본 교인들이 오랜 교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 없이 어정쩡한 대답을 하거나 분명한 대답을 한다 하여도, 학생이 배운바를 대답하듯 지식적인 대답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교인을 만나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그는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하니 "구역집회에서 전도사님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무엇을 배웠느냐?" 물으니 "여러분이 에배당에 나오는 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기 때문이라고 배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또 묻기를 "그러면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 어떻게 되는가?" 그는 "죄를 짓지 않아야지요" 하였다 "그래도 실수로 죄를 짓지 않는가?" 하니 "그러면 회개해야 하지요" 하였다. 또 끈질기게 묻기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거나 죄를 짓다가 죽으면 어찌됩니까?" 하니 "할 수 없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데 어찌 하렵니까?" 하였을 때,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수십 년 교회 다닌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지옥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지옥을 못 믿습니까?" 하니 "아니, 믿기는 믿는데 지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까지 대화를 들으면서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는 지식으로 구원을 배웠을 뿐 구원받은 적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삭개오는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뽕나무 위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의 생애는 달라졌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그대는 거듭났는가? 구원을 경험했는가? 속죄를 경험했는가? 지옥을 경험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들 되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앞에 질문한 질문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구원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고할 수밖에 없는 전도자의 마음을 아는가?


   구약의 예를 보자.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지만 솔로몬의 위대함에 대해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진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을 만나게 되었다. 솔로몬을 만나서 그가 한 고백은 무엇인가?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하였다. 그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 여왕을 칭찬하지 아니하였던가(마12:42).

   여기에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 "소문"이다. 소문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소문은 알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소문적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 말했던  구도자의 경우 지옥을 믿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소문적 신앙의 전형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이 수요일과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일방적으로 듣고(배우고) 끝나면 집에 와서 자기의 삶을 살고, 이렇게 살다 보니 들은 것은 많은데 내 것이라고 할만한 지식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직은 믿음이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세례 주고 교인을 만들면 천국에 가는가? 교회를 몇년 다녔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자격도 없으므로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협박하다시피 집사 직분을 맡기면 천국에 가는가?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필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사님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나의 부모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얼마나 잘못된 현실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집사를 맡기면 교회 망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관료주의에 젖어서 감투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오늘의 기독교가 이 속성을 이용하여 성경에도 없는 수많은 종류의 감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교인들은 그 속에서 위안을 받으며 천국에 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집사, 장로 임명을 받으면 얼마만큼의 헌금을 해야 하는 의무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에서 속죄권을 팔았던 사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또한 성직을 매매했던 슬픈 기독교 역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영생의 비밀에 관해서는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르쳐도 이론적으로 가르쳐 줄 뿐 그들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하는 현실 아닌가.

   독자여, 그대가 수 십 년 하나님을 섬겼는가? 구원의 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어서 내 죄를 용서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배워서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권하고 싶다. 그대가 진정 멸망의 지옥에서 건짐 받은 경험 있는 성도들인가를 정직하게 점검해보길 바란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Posted by 행복자
,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넓은 길로 가는 신자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섭고 놀라와 가슴이 떨리는 내용이 많다. 앞에 기록한 말씀도 그 중의 대표적인 말씀이다.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지만 그러나 진정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숫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수 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중에 앞에 기록한 말씀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을 계속 읽어나가면 거짓 선지자에 관한 말씀으로 연결되어져 있다. 그 거짓 선지자들은 이 시대 기독교의 거듭나지 못한 지도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전 생애를 드리며 고생하며 충성을 다 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부분은 거짓 선지자요, 멸망의 자식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으며 찾는 이가 많다는 말씀이 두렵지 아니한가. 생각하여보라.

   기독교의 지도자로서 소경의 눈이요, 길 잃은 자의 안내자요, 상심한 자의 위로자요, 양들의 목자라고 자처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 멸망의 지옥 불에 떨어져서 끔찍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들 자신은 (지옥을 진실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을 다했기 때문에 천국이 있다면 들어감은 물론이고 각종 면류관을 받게 되리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누구인지 필자는 모르지만 이 글을 통하여 자신을 점검해보기만 한다면 하나님의축복이 그대에게 함께 할 것이다.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은 큰 교회, 유명한 교회, 유명한 목사님들이 목회 하는 교회, 큰 교파에 속하여 있는 자신을 스스로 위로한다. 그와 같은 교회에 속하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필자는 대규모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을 자랑하며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불쌍한 소경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을 만나보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자기의 경력이나 자기가 속한 교회의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이다. 거짓 목자들은 거짓 목자로 살았기 때문에 멸망의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을 따라가다가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어찌 한단 말인가.

   그들은 왜 성경에 대해서 무지하냐고 물어보면 우리 교회 목사님이 성경을 잘 가르치고 훌륭한 믿음으로 인도하니 걱정이 없다는 것이다.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그런 태도로 이야기한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다시 말하건대 이와 같은 거짓 목자가 참 목자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참된 하나님의 종은 정말 찾아보기 힘든 것이 기독교 역사요, 우리의 현실이다.

   거짓 목자 밑에서 배운 불쌍한 양들은 목자를 잘못 만나서 지옥에 떨어진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혹자는 필자에게 말하리라. 어찌 자신 있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구원의 진리는 비밀이라고, 비밀은 여러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보편적인 지식도 아니다. 극히 적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비밀이다. 성경은 구원을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이번에는 성경을 중심으로 구원 받은 자의 적음을 알아보고 그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서두에 기록된 말씀이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님 사역의 초기라고 생각이 된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참된 진리를 증거하며 불의를 지적하고 선한 양심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지 아니할 것을 이미 아셨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현장에서 보듯이 주님을 믿고 따르는 무리들은 적은 무리였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에 동조하였다.

   두 번째로는 누가복음 17장에 기록된 말씀이다. 26절에 보면 마지막 시대가 노아의 시대와 같다 하였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세상에 취해 있었다. 그들은 노아의 경고를 무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결국 멸망의 지옥에 떨어졌다. 그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몇 명인가. 성경은 겨우 여덟 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베드로전서 3:20).

   얼마나 떨리는 말씀인가. 겨우 여덟 명이라고 하지 아니한가. 혹자는 그 당시 인구를 5억 정도로 이야기한다.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 한다면 5억의 인구 중에서 겨우 여덟 명이 구원받았다. 기가 막히지 아니한가. "겨우"라는 말에 주목하라.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는 너무 적으므로  "겨우"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지 아니할까. 필자는 믿는다.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다. 지극히 적은 수가 구원받은 것을... .

   누가복음 17장에는 또 다른 말씀도 있다. 롯에 관한 말씀이다. 불과 유황으로 멸망당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극적으로 건짐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지옥 유황불에서 구원받는 성도들의 이야기이다.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그들에게 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성읍에서 구원받은 자가 4명이지 아니한가.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몇 명이나 건짐 받았는가.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뿐이지 아니한가.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마지막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다. 오늘의 한국에 천만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 중에 과연 얼마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필자는 말한다. 오늘날 기독교 범주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삼분의 일이라 하여도 성경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필자가 어떻게 감히 숫자를 다 말할 수 있을까마는 성경의 전반적인 내용은 극히 소수가 구원받을 것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왔을까?

   첫째는 구조적인 모순에 있다.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였거니와 오늘날 교회 일꾼들을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거듭남을 체크하고 있는가? 필자가 만나본 신학생들의 대부분은 거듭남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후배 목회자는 신학생 시절에 거듭났는데 동료들에게 거듭났느냐고 물어보고 다니다가 이상한 사람 취급받고 교수님에게까지 왕따 당한 슬픈 간증을 이야기하고 있다.

   진정으로 참된 하나님의 종을 양성하려면 우선 거듭남부터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냥 신학교에 지원하면 합격하여 졸업하고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성직자로 세움을 입는다. 거듭나지 못한 일꾼은 거듭나지 못한 양들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주님이 친히 경고하셨다.

   또 다른 나의 친구 목회자는 집사로 재직시에 구원을 받았다. 문제는 이와 같이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집사로 임명되어 교회 일을 참여하고 있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라. 디모데전서를 읽어 보라. 집사는 얼마나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하였는가.

   두 번째로 오늘날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문제가 있다. 한국의 교회 대부분은 기복신앙에 잡혀 있다. 예수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필자가 얼마 전까지 휴대하고 다니던 교회 안내 전도지가 있었는데 제주도의 어느 교회에서 작성한 것이었다. "부자 되기 원하는 사람은 우리 교회로 오라! 교회 출석하여 도장 받아 오면 선물을 주겠다." 어떤 장로가 교회 명의로 내보낸 전도용 안내서였다. 노골적으로 예수 믿어서 부자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헌금 잘 내고 십일조 떼어먹지 아니하며, 또한 열심히 충성하면 축복 받아 잘되고 부자 된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한 것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은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예수 믿어서 병 낫고 건강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실제로 병 고침 받기 원하는 자는 기도원으로 오라는 전단지를 심심찮게 본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부자 되는 것도 필요하고 건강한 것도 필요하다. 필자도 성도를 위하여 기도할 때 그와 같이 기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한 것들은 부수적이고 지엽적인 문제이다. 성경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과 천국을 경고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통해서 거듭나지 아니하면 멸망의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의 핵심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신 목적이다.

   혹자는 이렇게 반박하리라. 나와 나의 동료 교인들은 다 천국을 믿으며, 천국에 갈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기본이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집사님들이 나에게 그렇게 반박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물었다. "집사님, 지옥이 있습니까?"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말 지옥이 있습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어떤 사람이 갑니까? 여기에 대해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얼버무렸다.

   오늘날 한국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문제점은 여기에 있다. 지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모르고 있다. 그들의 지옥에 대한 믿음은 막연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구체적으로 물으면 대답하지 못한다. 어떤 집사님은 끝까지 지옥을 믿는다고 주장하여 그렇다면 누구에게 지옥을 증거했느냐고 물으니 대답을 못하였다. 정말 지옥을 믿는 사람이라면 지옥을 경고할 것이다. 슬픈 일이다.

   강단에서 지옥을 전하지 않으니 양들이 지옥을 알겠는가? 지옥을 알지 못하니 그들은 구원을 알지 못하고 그 지옥 형벌에서 구원받은 적도 없다. 오래 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거짓 목자와 그를 따르는 양들에 대해서 예언한 적이 있다.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거짓 예언으로 백성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었으며, 자기 취향에 맞는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중심 내용과는 관계없는 기복신앙을 전하여 복을 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충성하며 헌금을 많이 내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된다고 양들을 속이고 있다. 양들은 그것을 좋게 여겨 천국의 소망과는 아무 관계없는 그와 같은 가르침을 따른다. 그들의 삶은 성경과는 아무 관계없는 죄악된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활에서의 문란한 삶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적인 삶도 성경을 깨닫고 성경을 사랑하며 성경에서 능력을 얻고 성경을 전하며 성경이 가르치는 소망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일주일 동안 세상에 빠져서 적당히 살아가다가 주일날 헌금 좀 잘 내고 목사님 설교 듣고 지은 죄 회개하고 돌아오면 마음이 조금 평안해지며 위로를 받으니 그것이 신앙생활인줄 안다.

   사도행전을 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러하였는가? 그들이 그렇게 살았는가? 신앙의 깊이는 먼저 내적인 변화에 있다.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공로로 모든 죄를 용서하여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신 것이다. 모든 죄라는 말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대의 모든 죄가 다 용서된 것이다. 십자가의 능력은 여기에 있다.

   이제 결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에는 많은 사람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였다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떨어지는 참담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 땅에서 죽도록 충성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지옥에 떨어졌다.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러한 비극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진정 거듭난 소수의 무리만 천국에 이를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2).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