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는

                        2장

                         불신자에게


    지금까지 "그리스도인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 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 더욱 엄숙하고 진지한 주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곧 "불신자에게 죽음 이후에 무슨 일이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장차 오는 세상의 실제성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바로 회개치 않은 불신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차 오는 세상은 바로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계시 문제는 별개로 하더라도 우리가 확실히 느끼는 것은 그 사랑하는 제자였던 요한이 영원세계에 대해서 말한 것은 모두 그에게 있어서 매우 실제적인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또한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부활하신 주님을 헌신적으로 좇았던 사도 바울도 오는 세상에서 그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했던 다윗이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정죄하고, 구주되신 주님을 높인 십자가의 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죄하는 피를 통한 구원으로부터 돌아선 가인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때 마음에 깊은 부담을 가지게 됩니다. 한 그릇 팥죽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와, 은 삼십에 영원한 축복의 소망과 맞바꾸어버린 배도자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과 또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호흡을 멈추고 묻고 싶습니다.

   과연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하고 끝없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욥기 14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ghost)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라는 구절을 대하게 됩니다. "기운(ghost)이라는 단어의 앵글로 색슨족의 고어체 표현은 독일어 "geist"와 유사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영"(spirit)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죽을 때에는 영이 나가게 되는데, 문제는 바로 그 영이 이디로 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몸은 장사되어 매장되거나 혹은 다른 방식으로 처리될 것이지만, 과연 그 몸 안에 일생동안 거주하며 살았던 영적인 실체는 어떻게 될까요? 욥기 14장 14절에 보면 또 다른 질문이 있는데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

   그러므로 여기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죽음과 미래의 부활 사이에 있는 사람의 상태와 관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다면 어느 곳에서 부활하게 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이제부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 즉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장래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불신자가 몸이 죽게 되면, 어디로 가게 되며, 과연 그 몸은 무덤에서 다시 부활하게 될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난 답변은 아무런 권위가 없습니다. 인간의 사색은 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합리적이지도, 온당하지도 못합니다. 성경의 증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무덤 너머의 삶의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100년 전, 곧 소크라테스 시대에 살았던 헬라 철학자들이 생명과 죽음과 불멸에 대해서 논했던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대학에서는 플라톤에 대한 연구와 학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현 시대의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불멸에 대한 옛 철학자들의 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진보가 있었다는 것이 수긍이 가고 또한 사실임에도 여전히 권위 있는 해법은 없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롭기만 합니다. 영혼의 문제는 여전히 불확실한 가운데 남아 있습니다. 오직 성경만이 우리에게 명확한 지식을 제시하고 잇습니다.

   우리가 이 궁금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면 성경의 어디를 찾아보아야 할까요? 구약성경은 아닙니다.

   마음을 가다듬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서도 물질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건대 그러한 사람들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다양한 분파를 가진 안식일교와 그리스도아델피안,(삼위일체 하나님과 타락한 천사, 마귀, 영원한 지옥불은 비성경적이고 타협과 관습으로 형성된 사상들이라고 주장하는 무리-역자주) 러셀파(여호와의 증인 창설자-역자주)와 및 소규모의 이단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 죽은 자의 무의식적인 상태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가운데는 심판 후에 악한 자의 영혼소멸론(annihilation)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 가운데 자신들의 이론을 주장하기 위해서 신약성경을 인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거의 모두가 구약성경 구절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구약성경 가운데서도 세 곳, 즉 욥기, 시편, 전도서에서 그 근거 구절을 제시하고 있고, 특히 전도서를 많이 인용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약성경은 영원미래에 대한 계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로 이생에서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문제에 대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구약성경은 다른 성경과 더불어 경험적인 책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겪게 되는 경험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여기서 사용된 '썩지 아니할 것'(immortal), '불멸'(immortality), '영생'(eternal life)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약시대뿐 아니라 구약시대의 모든 경건한 자들은 모두가 다 직관적으로 그에 대해 믿고 있었음은 사실이며, 장차 그에 대해 공개적이고 완전히 드러나도록 선언하실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에도 구원 이전에 속죄제사의 필요성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개적으로 전파될 수 있었고, 영원에 대한 문제들이 계시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을 드러내신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이 위대한 진리들이 구약성경에서는 완전히 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그에 대해 희미하게 볼뿐입니다. 후에 계시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충만한 빛을 통해 우리는 확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불멸의 소망을 전혀 가지지 못했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 성도들도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은 욥기일 것입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욥도 자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욥은 큰 소리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 19:25)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족장들을 언급하면서 죽는 것을 자기 조상들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말했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실제로 죽여서 제물로 바칠지라도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습니다(히 11:17~19). 이러한 일은 확실히 아브라함에게 영생의 믿음이 없었다면 결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사랑하는 아들이 병들었을 때, 금식기도하고 많이 울었지만, 아이의 죽음을 알았을 때는 눈물을 그치고 숙고한 끝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 하리라"(삼하 12:23)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다윗은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고 외쳤습니다.

   사무엘 모양을 한 노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나타난 흥미로운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싶진 않지만, 사울에게 한 그의 말은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서들 가운데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음에 대해 알려주는 여러 본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 인정은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약성경 기자들의 목적은 이 위대한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으며, 이미 언급했던 경험적인 책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어떤 본문들이 그 반대적인 것들에 대해 언급하는 듯 보여도 놀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러한 일은 문맥을 따라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러할 때 전적으로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이제 여기서 진지하고도 냉정하게 한 문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놀랄 분이 계실지 모르고, 곧 궁금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지만, 진실되지 않은 구절들이 많이 있다!"

   잠시 이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마음을 가라앉히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종종 성경의 어떤 본문이 논쟁을 불러 일으킬만한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맥과 정황에서 벗어난 본문의 일부가 해악한 성경해석 오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완전히 거짓된 이단의 기본 신조로까지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명한 남부출신 변호사가 켄터키 주 판사 앞에서 어떤 소송에 대한 변호를 맡았는데, 곧 그 의뢰인이 자기 생명에 대한 변호를 의뢰했던 것입니다. 검사가 배심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소장을 읽었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한 권한은 바로 우리가 가진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판사에게 상당히 인상적인 일이었는데, 왜냐하면 그 검사가 바로 성경에서 그 글을 인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검사가 소장 읽기를 마쳤을 때, 변호사가 일어나 "검사께서 최고한 권한에 대해 말씀해주셨는데, 우리도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펴서 욥기 2장의 사단이 말한 부분인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를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극적인 효과를 살리면서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기소한 검사는 최고한 권한에 대해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었습니다. 물론 사단에게도 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구절이 성경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사단이 한 말이고, 또한 이것은 많은 경우에 진실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꾼다:는 것이 언제나 사실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 헌신된 허다한 제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일전일획이라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았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일은 제가 "성경과 관계된 것들이 다 참된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드린 바를 잘 보여주고 잇습니다. 성경에는 마귀가 한 말이 있고, 욥의 친구들과 같은 선인들이 한 말도 있는데, 그들이 한 말 가운데는 성령님의 감동이 없이 한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책인 성경에는 매우 악한 사람이 한 말도 기록되었지만, 그 말이 곧 하나님의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상과 이론들도 때로는 기록되었는데, 전도서가 그와 같은 책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 가운데 특히 경험적인 책들을 읽을 때,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읽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상급이 없다고 말합니다..(전 9:5).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진리로 받게 되면 그것은 곧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감동을 통해 솔로몬이 말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니라"(전 12:13,14)는 구절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계시를 직접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전도서가 영감 받지 않은 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왜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우리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핀 것에 대한 기록을 주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사람들이 죽고, 장사되는 것을 보았고, 그 가운데 다시 무덤에서 나온 사람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전 9:5) 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이 구절이 과연 죽은 자들이 몸을 떠나면 완전한 무의식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생각과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 없는 시신은 바로 어제까지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그 머리에 가득했던 세상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생각이 짧고 피상적인 사색가는 "죽은자는 아무것도 모르며"라는 구절을 가지고, 신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을 반박할 것이며, "영혼의 잠"과 같은 교리를 들고나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표현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동일한 표현이 사무엘상에서 다윗과 요나단이 서로 약조를 맺는 일 가운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들에 숨어 있었고, 요나단은 자기 부친을 살피고 과연 다윗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돌아갔습니다. 요나단은 동행한 아이를 시켜 그를 들로 보내고 화살을 쏘기로 미리 다윗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살이 네 앞 편에 있다" 하면 사울이 다윗의 생명을 노리고 있는 줄로 알도록 했고, 혹시 "보라 살이 네 이편에 있다"고 하거든 다윗이 안전하다는 표시였습니다. 그 계획은 약속대로 진행되었고, 요나단은 아이 뒤에서 외치되 "살이 네 앞에 있지 아니하냐"고 말했고, 다윗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했다"는 글을 보게 됩니다(삼상20:17~42). 그 소년이 무의식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그 아이는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있었던 약조에 대해서 몰랐던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표현들이 사용된 여러 가지 사례들을 일일이 소개하자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여러분이 직접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말라기서의 마지막 장을 보면, 악을 행한 죽은 자들의 운명에 대한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보이는 본문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나의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 4:1~3).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말하는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점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말라기 선지자가 여기서 죽은 악한 자들에 대한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이 땅의 악한 자들에게 임할 심판에 대해 예언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심판은 천년왕국 이전에 있을 심판을 말하는 것이지, 천년왕국 후에 있는 심판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사람들이나 그들의 부활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습니다.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은 바로 주의 날을 가리키며, 죄로 물든 악한 자들은 그 뿌리와 가지가 함께 살라질 것이며, 뿌리와 열매도 모두 다 태워질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러한 심판을 행하시는 그 날에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을 것입니다.

   이 말씀들이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의 영혼소멸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그 때에 있을 심판이 소돔과 고모라에 임한 심판과 성격에 있어서 유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롯과 그 식구들이 소돔 성을 떠나던 날,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그 성 사람들과 그 땅과 뿌리와 가지를 다 살라버렸습니다. 만일 롯과 그의 삼촌, 아브라함이 심판이 끝난 며칠 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을 돌아보았다면, 그 악한 자들이 그들의 발바닥 밑에 재가 되어버린 것을 친히 목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이 구절들이 영혼소멸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수세기 후에 기록된 유다서에서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유 7절)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주님이 이 땅에 계신 동안 하신 그분의 말씀을 거절한 자들에 대해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0:15)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비록 뿌리와 가지가 살라지고, 의인들의 발바닥 밑에 재와 같이 될지라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또렷한 의식 가운데 고통을 받고 있으며, 심판 날에 다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구약성경에 머물지 않고, 또한 사도들의 말이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의 가르침과 성령의 영감을 받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저는 바울이나 베드로, 또는 요한의 가르침은 받아들일 수가 없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려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드린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악한 자의 영원한 심판에 관해 기록된 엄숙한 경고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예수님의 가르침이야말로 자신들이 바라는 전부라고 말합니다. 곧 자신들에게는 산상설교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산상설교에서도 영원한 심판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들의 실제적인 상태에 대해 더욱 많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마 5:29,30). 하나님의 복되신 아들,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 곧 이 땅에 살았던 가장 충성된 인자이신 주 예수님보다 더 죄인들 앞에 놓여있는 파멸적인 운명에 대해 심각하고 엄숙한 말을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 곳"에 대해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불로서 소금 치듯 함을 받는 것"에 대해 말한 사람은 바울이 아닙니다.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 9:43~49)는 말을 한 것은 요한이 아닙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에 기록된 악한 자의 형벌에 대한 거의 모든 교훈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르침의 가장 단순하고 분명한 형태를 누가복음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 이야기는 단지 비유일 뿐이잖아요"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 성경입니까?

   이 말씀은 비유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란 어떤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화 혹은 이야기입니다. 여기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는 비유로 불리지 않았습니다. 비유는 일반적으로 "비유를 말씀하여 가라사대... "와 같은 식의 표현이 먼저 나오지만 여기 누가복음 16장에서는 그러한 표현이 없습니다.

   그리고 설령 이것이 비유라 하더라도, 이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채 죽는 자의 가공할만한 두려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확실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그 시대의 청중들과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일어난 느낌이나 인상은, 여기서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교훈의 목적과 같이 자기 죄 가운데 죽는 일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이 도입되는 부분의 자연스러움도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들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교훈하시는 과정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부자가 있어...," 이 부자가 실제로 있다는 얘기입니까, 아니면 없다는 얘기입니까? 예수님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추측해보자'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그러한 사람이 확실히 존재하며, 그 사람이 어떠한 옷을 입었고, 얼마나 값비싼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었는지에 대해 명확히 선언하셨습니다.

   제가 설교하는 중에 최근에 회심한 아리조나 주에 사는 어떤 인도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고 해봅시다. 제 설교가 끝나는 즉시 여러분은 "설교 중에 말씀하신 그 인도 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며, " 그 사람이 회심한지는 얼마나 됐지요?"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때 제가 "너무 진지하게 들으셨나봐요 그것은 단지 비유일 뿐입니다. 단지 예화를 든 것 뿐이라구요. 저는 그런 인도 사람에 대해서 전혀 모릅니다."라고 말할 때, 여러분이 제게 "그렇다면 당신이 우리에게 마치 그러한 사람을 실제로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참으로 정직하지 못한 것이며,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도 부정직한 일입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확하게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날 모든 청중들에게 믿도록 말씀하신 것은 그 이야기 가운데 또 다른 사람에 대해 언급하시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있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추측해서 말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거지의 이름을 언급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그 나사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우리는 과연 심판의 날까지 그 부자의 이름을 알지 못할 것이지만, 그 거지의 이름은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믿음에 부요했던 나사로는 그리스도의 양무리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이야기와 관련해서 매우 상세히 언급하셨고, 심지어 나사로에게 와서 헌데를 핥던 개들조차도 언급하셨습니다. 만일 이것이 단지 비유라면 비유적인 부자의 비유적인 집의 비유적인 대문에 누운 비유적인 거지에게 비유적인 개들이 와서 비유적인 헌데를 핥았을 것이고, 거지 나사로를 지켜보며 비유적인 음식을 먹지 않았겠습니까? 종종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청중들은 주님이 설명하시는 일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믿는 자의 조상으로 낙원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이 구속함을 받은 거지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환영을 받으며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들이 죽을 때,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 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품속에 들어가는 일은 구약 성도의 분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의 경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도 죽어 장사되었고, 육체에서 분리된 그의 영은 다른 세계로 들어 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구여! 저는 지금까지 할 수 있는 대로 성경에서 여러 차례 인용해왔습니다. 지금 저는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가 "천국은 가득하게 하시고, 지옥은 텅 비게 하소서!"라고 기도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리차드 백스터가 쓴 책을 탐독했고, 다양한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이 쓴 여러 권의 책들도 읽으면서, 자기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는지를 부지런히 살펴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 본문에서 그 옛날 앵글로 색슨어인 "지옥"(hell)이라는 단어는 버리고, 대신 헬라어인 "하데스"(hades)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물론 이 "하데스"라는 단어는 형벌의 장소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하데스"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음부(陰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 헬라어를 다음 구절에 적용해보겠습니다. "저가 '하데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장소의 이름은 바뀌어도,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그 고통은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하데스'를 사람이 죽은 후에 가는 장소 또는 상태로 본 것은 큰 실수입니다. '하데스'는 단지 무덤의 의미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말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는 바에 의하면 성경은 그 반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말이 나왔으니, 지옥이라는 단어와 무덤이라는 단어를 바꿔서 적용해보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될 것입니다. "저가 무덤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단어를 바꾼 것만으로는 그 고통을 없애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단어를 무덤으로 불러도 좋고, 단지 "음부"(陰府) 로 생각해도 좋습니다. 또는 "영계"(靈界)로 읽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그 어떤 말로 불러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가 간 곳이 어디이든지, 또는 그곳의 이름을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한가지 엄중한 사실은 그가 고통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까? 그 두려움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이 필요합니까?

   당신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신은 이 가련한 사람, 곧 십자가의 구속을 경험하지 못하고 죽은 이 부자가 고통의 수렁에서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두가지 애처로운 간구를 올렸지만 둘 다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죽음의 부정적인 측면 때문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우선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바싹 마른 자기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던 생수를 거절했던 그 부자는 이제 영원한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생수가 전혀 없는 곳에 있습니다.

   그 부자의 또 다른 간청은 다섯 명의 동생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내가 만일 지옥에 간다면, 그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 않겠소. 그렇다면 지옥에서 그들과 같이 있으니 외롭진 않을 것 아니오."

   그러나 나의 친구여, 이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여섯명의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가족입니다! 한 사람은 지옥에 가있고, 다섯은 지옥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에서 "할 수만 있다면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그들이 이곳에서 저와 함께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저희에게 경고하여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며 간청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즉 그들도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성경을 가지고 있고, 그들 스스로 직접 성경을 주의 깊게 살펴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고통 중에 외치며,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의 증거를 받아들이시고, 또한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구주를 영접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영원히 바깥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냐, 지옥이냐의 선택의 문제로써,곧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저에게 "당신이 설명한 바에 따르면 심판 이전에 그 사람이 고통 중에 있다는 말이 되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심판의 날은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으실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화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질러 체포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주립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습니다. 어느 일정 기간 동안,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실제 범죄 사실이 있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범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다가, 또 때로는 그 사실을 격렬히 부인하기도 하면서 지내게 됩니다. 마침내 법정이 열리고, 형이 확정되면 교도소로 보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데스'(음부)는 구치소에 해당하고, '게헨나'(지옥)은 교도소에 해당합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우리는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날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망은 몸을 내어주고, 음부는 영과 혼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의 부활로써, 생명의 부활이 있은지 천년 후에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기록하기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열리게 될 엄청나게 큰 법정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정한 공의(righteousness)를 따라 형벌이 정해질 것입니다. "불못"이라는 상징적인 표현이 품고 있는 그 의미에 대해 그 누가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의 친구여,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스스로 위험을 감당하려 하지말고, 즉시 피난처 되신 그리스도께로 피하십시오. 그리하면 당신도 폴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가 말한 것처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내게 정죄 없으니, 지옥이 없네.

   고통도 지옥불도 이젠 영원히 보이지 않도다."


   죄인의 마지막 운명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 "많이 맞을 것이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그리고 그 외 여러 말씀들에 나타나 있는 표현 속에서 그 두렵고 끔찍스러운 모습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도록 그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 영원히 사는 것! 그 무서운 운명에 도전하지 마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바로 지금 은혜로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을 기다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피난처로 삼아 피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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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 가는 신자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10).


   금일의 기독교 범주 아래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율법 아래서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예수를 믿고 있으며, 죄 용서함 받았으며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아 상당수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그들을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기독교인이 있다면 스스로를 분석해 보고 구원의 문제를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사단은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되 감쪽같이 속인다. 성경에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 지옥 자식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누가 자기를 율법 아래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는 것을 안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몸부림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볼 때에 율법 아래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을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단에게 철저히 속은 결과이다.

   여기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의 증상을 철저히 분석해 봄으로 아직 구원받지 못한 독자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일은 천국, 평일은 지옥"이라는 말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어떤 분이 나에게 고백하였다.

   "예배당에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들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통성기도 시간에 힘을 다하여 기도하면 마음이 기쁘고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만 받은 것처럼 즐겁고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은 자신감이 솟습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시간이 지나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세파에 시달리고, 또 형편에 따라서 실수가 나타나고, 죄를 짓게 되면 신앙에도 자신감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죽으면 지옥에 갈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나는 왜 이럴까요?"

   그는 왜 예배당에서는 천국이요, 집에서는 지옥인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들의 양심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격의 문제인가?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양심도 인격도 아니고 그들의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이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가르침에서 온다. 그 가르침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첫째는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로 갈등해 본 일이 없다. 오늘날 거리에서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개인적으로 상담해 보라. 그들의 대부분은 지옥에서 구원받는 문제를 진지하게 갈등해 본적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영혼이 어느 날 죽음을 맞이하게 될 때에 지옥에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정말 지옥이 있는 것인가?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옥에 가지 아니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듭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나의 죄가 얼마큼 용서 되었으며, 속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갈등의 제목은 얼마든지 있다. 참된 신앙은 진지한 갈등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위하여 이 정도의 갈등도 하지 아니하면서 참된 신앙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어떠한가? 진지한 갈등의 시간들이 있었는가?

   예전에 필자는 어떤 성도를 만났다. 그는 현재 캐나다 교포로서 한인교회에 나가는 성도이다. 그가 이민 가기 전에 친구의 권유에 따라서 필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집회에 딱 한번 참석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후에 보니 그 때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였다. 당시에 교회에 다니지 아니하던 그가 어떻게 딱 한 번 전도집회에 출석하고 구원받을 수 있었겠는가?

   그의 고백은 이러하였다. 그가 어려서 주일학교에 얼마 동안 나간 적이 있었다. 그 때 어떤 주일학교 교사가 지옥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그 설교를 들은 뒤 그는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으면 지옥에 간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마음의 고통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그 마음에 있었으며 그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 언젠가는 돌아가야 된다는 생각이 그의 마음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참석했던 그 날은 필자가 지옥 갈 죄인이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날 나도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훗날 깨달아 보니 그 날 구원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비록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지옥에 대한 갈등이 그를 구원받게 하였다. 다시 말하거니와 구원은 갈등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로 진지한 상담의 기회가 없었다. 대부분의 구원은 구원 문제를 진지하게 상담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물론 상담은 구원받은 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생명이 생명을 낳을 수 있다는 원칙에서 말하는 바이다. 여러분 주변에 기독교인들을 상담해 보라. 그들 중에 상당수는 그래도 앞에 말한 갈등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갈등이 있든 없든 그 모든자의 문제점은 누구도 그들에게 구원에 대한 진지한 상담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같은 경험을 겪었거니와 필자가 만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이렇게 목사님과 같이 앉아서 진지하게 구원의 문제를 놓고 상담하는 것이 처음있는 일이라고 고백한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라. 그들은 상담은커녕 이와 같은 상담이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다.

   얼마 전에도 한 교인이 구원받았는데 그는 수 십 년 교회를 다니는 중 이와 같은 상담을 처음 했으며 지옥에 대한 갈등에 대해서 감히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한다. 상담의 기회가 없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교회에 출석해서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교회생활 충실히 하면, 그리고 성경 공부반에서 배워 나가다보면 신앙이 성장하고 점점 믿음이 자라서 천국에 가게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다니다보면 다 잘되지 않겠는가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막연한 것이 아니다.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도 잘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면 안 되는데 그대의 영혼이 영원한 지옥에 빠질 수 있는 문제를 막연하게 처리하지 말라.


   셋째로 상담을 하되 잘못된 상담도 문제이다. 어떤 구도자는 기가 막힌 사연을 필자에게 고백하였다. 성경을 읽다가 지옥을 발견하고 어떻게 하면 지옥에 가지 아니하는지를 목사님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목사님은 상기된 목소리로 다니다보면 다 잘 될 것인데 왜 급하게 생각하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가 하고 퉁명스럽게 말하므로 민망한 생각을 하며 쫓기다시피 나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구원의 문제를 물어보니 목사님이 대답하시기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예배당에 나오는 날 믿음으로 나왔으니 그 날을 구원받은 날로 알고 있어라." 그래서 그는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은 맞지만 어딘가 모르게 석연치 않고 자꾸 의문이 생겨서 고민하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내가 어떻게 하여야 죄를 용서받는가를 상담하였는데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다 담당해 주셨다는 대답을 들었다. 마음이 시원하고 그 목사님의 설교도 은혜롭고 한동안 좋았다고 한다. 죄를 용서받은 기쁨도 있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확신도 있으므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 설교에 우리는 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죄를 숨기지 말고 통회하여야 한다는 설교를 듣고 난 다음,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사라진 줄 알았던 죄가 자기 가슴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죄는 자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심령은 나날이 죄에 대한 갈등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용서하시지 않았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죄의 고통을 이겨보려 하였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십자가의 속죄는 성경에 있고 2000년 전에 있었고 멀리 있는데 내 마음속의 죄는 현실이 아닌가! 이 밤을 새고 나면 내일 직장에 나가서 나는 또 죄를 지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면서 살아야 하는가?

      주일날 말씀에 죄를 통회하라고 하여서 통곡을 하고 죄를 고백했다. 또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 기뻐하고 감사하라. 찬양하고 경배하라. 하염없는 눈물과 함께 찬양하고 또 찬양하였다.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이 울고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뻐하였다. 당장에 죽어도 천국에 갈 것 같았다. 진실로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그런데 오늘이 겨우 화요일이 아닌가. 나는 벌써 죄의 올무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있지 아니한가. 기쁨은 한 때의 감정으로 끝나고 이틀도 다 지나지 않은 화요일 밤에 나는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날의 그 신령한 말씀과 성령 충만한 분위기는 왜 나의 신앙을 이틀도 지탱시켜주지 못하는가. 어찌하여 나는 주일날은 천국이요 평일에는 지옥인가? 이 신앙의 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금일의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와 같은 갈등에 잡혀있다. 그 중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포기한 사람도 많다. 한 주간 지은 죄를 주일날에 가서 회개하고 용서받으면 되지 아니한가. 그 다음에는 또 주일이 있으니 그냥 족하지 아니한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서두에 말한 것처럼 율법 아래 있는 것이 문제이다. 율법 아래 있는 것은 율법의 통제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며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주일날 말씀을 듣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며 예배당에 있을 동안에는 죄를 멀리 하고 있다. 그러나 월요일부터는 죄와 가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멀리하고 있는 동안에는 기쁘고 죄와 가까이 있을 때는 기쁨이 없고 답답한 것이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모습이다. 생각하여 보라. 세상법도 내가 법을 지켰을 때는 담대하고 당당하고 기쁨이 있다 그러나 법을 어기고 죄를 짓는 순간 기쁨과 담대함은 사라지고 불안이 찾아온다. 그런데 일이 잘 되어서 구속되었다가 석방되면 다시 편안해진다. 다시 말해서 죄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기쁨과 불안이 수시로 교차하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의 법에 의해서 죄인이 되었다가 풀려났다가 하는 과정에 의해서 나의 마음상태가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 될만한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낙심되고 죄를 회개했거나 신앙의 상태가 좋을 때에는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다. 율법 아래서는 대단한 열심을 내고 있는 사람은 천국 갈 수 있는 확신에 차있다. 그는 큰소리로 구원받았다고 우기고 심지어 구원받은 날까지도  주장하지만 그의 실상은 자기 열심에 의한 자기의 의에 잡혀서 교만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열심과 그의 정직과 그의 충성과 그의 성실함이 그가 천국 가는데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불쌍한 모습인가. 구원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그 후에 열심을 내야 할 것인데 본질적인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열심만 내고 있으니 율법 아래서 교만한 모습이다. 그는 교만하여 지옥에 가는 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또 다른 모습은 앞에서도 언급한대로 열심을 내지 못하고 자주 죄와 타협하고 말씀을 순종하지 못함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 같은 죄인이 무슨 천국인가' 하는 낙심 속에 겸손(?)하다. 그는 그 겸손으로 인하여 지옥에 간다.

   그렇다면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다음 말씀에 답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께서 저주받을 죄인을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을 죄와 저주의 지옥에서 해방시키셨다. 죄가 죄인을 주장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후로는 그를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라 부른다. 십자가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다 해결하셨으므로 이 후로는 죄로 말미암아 지옥 갈 번민에서 해방받았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그 은혜 아래서 살아가는 것이다. 죄를 절제하는 것도 지옥이 겁나서가 아니라 은혜를 갚기 위함이요 헌금을 내는 것도 벌을 겁냄이 아니요 체면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자원함으로 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행동이 십자가의 은혜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구원의 문제,

   오! 그대여 그대는 율법 아래 있는가, 은혜 아래 있는가?

   신앙의 상태와 관계없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는가?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상에서 온전히 해결된 사실을 그대의 양심이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같이 살게 될 것이다. 종파와 인종과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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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신자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누가복음 6:46).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가? 이 말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주제다. 세상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날마다 외치고, 골방에서 기도하며, 나가서 전도하고, 예배당에서 찬송하고, 직장에서 하나님 때문에 고난당하고, 희생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하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는가. 그런데 기가 막힐 이 일이 현실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민이 대통령을 아는 것과 대통령이 국민 개인을 아는 것은 차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을 만난적이 없어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삶이다. 기막히고 놀라운 것은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천국에 갈 뿐만 아니라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데 있다. 왜 그런 문제가 왔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면서도 그가 아버지의 말씀은 전혀 순종하지 않고 순종할 의사도 없다면 그가 아버지를 믿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성경 말씀을 순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교파나 그 지도자들을 맹목적으로 좇아가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보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필자는 전도하면서 기독교에 목숨을 걸고 있는 모범적인 신자들을 수없이 만나보았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말씀을 곱게 순종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혹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근거하지도 않은 자기주장이나 교파의 주장이나 목사님들의 가르침만 외치면서 분명한 성경말씀을 보여주어도 말씀을 거부했다. 성경말씀을 순종해야지 사람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된다는 필자의 말에, 성경이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모른다.

   서두의 말씀에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면서 나의 말하는 것은 행치 않는다"고 탄식하신 말씀은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어떤 목사님은 성경에 없는 교파의 전통을 지적하며 말하는 필자에게 우리의 신앙도 시대에 따라서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도대체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의사가 있는가?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들의 종교적 출세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를 따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의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축복받기 위하여,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가? 나의 건강, 나의 행복, 나의 출세, 나, 나, 나!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이 어찌 지옥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 하나님이 그대를 꾸미는 액세서리란 말인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 열정적인 기독교인들을 만나서 신앙의 동기나 과정을 물어보면 하나 같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축복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한다. 이 기복신앙은 무속신앙에서 출발하였다. 한국의 기독교는 무속신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다. 무속신앙의 본질은 자기에게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은 어떤 신을 숭상하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나 바다나 산에 많은 신을 만들어 숭상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도 자기에게 하나님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따른다. 무속신앙을 만들어낸 사단이 기독교도 샤머니즘으로 변질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을 자세히 보라.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복을 주셔서가 아니고, 기도를 들어 주셔서가 아니고, 병을 고쳐주셔서가 아니다. 이것은 마귀도 흉내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데서부터 믿음생활의 출발이 있다.

   신앙이 근본주의에 잡혀 있지 않고 현실주의에 잡혀 있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그런 신앙은 정함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을 말씀에 두어야 한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예수님이 오시기 전 말라기 선지자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 유대인들을 크게 책망한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성경이 말하는 제사장이 있고, 절기가 있었다. 절기마다 절차를 따라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배우며,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며, 율법을 따라서 생활하며 그렇게 훈련된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그들의 제사장들도 지도자들도 따르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이 타락한 사람들을 보기가 역겨워 차라리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말라기 1장).

   오늘날 기독교인들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놓은 옷을 입혀 목사님들을 제사장처럼 꾸미고, 성가대를 만들고, 예배당을 성전처럼 특별히 만들지만, 그리고 거기에서 온갖 의식이 진행되지만 진정 주님이 거기에 함께 계신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마르틴 루터가 만인 제사장 주의를 부르짖고 종교개혁을 하여 기독교가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는 다 제사장이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귀한 신분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목사님을 새로운 제사장으로 성직자로 추대하였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뜻이며 성경의 가르침인가? 실로 슬프지 아니할 수 없다.

   말라기서의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흠 없는 깨끗한 양으로 제사 드릴 것을 레위기에서 명하셨거늘 그들은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려 하였다. 그들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오늘날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이 몇 가지나 되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또 있다. 말라기 시대의 백성들은 성전에 와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렸다고 말하고 있다(말라기 2:13) 그들은 성전에서 통곡하고 울므로 회개하는 척, 경건한 척, 진실한 척하였던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어찌 그리 똑같이 닮았는가. 왜 예배당만 가면 울고 기도만 시작하면 통곡하는가? 그들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닮은 삶은 나타내지 아니하면서 통곡과 탄식으로 자기를 포장하고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경우에 따라서 울며 부르짖는 기도를 하기도 한다. 또 이것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배당에서 통곡과 탄식으로 우는 것과는 본질이 다른 것이다. 성경에 "항상 기 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였지 "항상 울어라. 범사에 통곡하라" 하였는가? 습관적이고 종교적이고 기계적인 눈물은 하나님의 눈에 눈물을 드릴뿐이다.

   눈물에 관해서 한마디 더 하고자 하는데 성경의 본질은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흘리는 감사의 눈물이어야 하며, 또 살아가는 가운데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흘리는 눈물이어야 하며, 또 죄를 지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사라지지 아니함을 인하여 죄를 자백함과 함께 감사의 눈물을 흘려야 함이 옳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유대인들과 그 지도자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요한복음 5:38).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한복음 5:42).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있는가?

   이제 개인적인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에는 믿음의 두 기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반석이요 하나는 모래다. 잘 아시는 대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매 무너졌지만 그러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큰 홍수가 나도 든든히 서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엇인가?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말씀의 기초 위에 믿음을 건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어떤 집사님에게 필자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예수님을 믿으니 천국 가는 것 아니냐"고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니 "우리 집이 점쟁이 집이었는데 계속 어려운 일이 있어서 예수님 앞에 나오니 잠잠해졌다"고 하였다. 또 질문하기를 "성경적으로 구원을 이야기해 보라" 하니 버럭 화를 내면서 "왜 그렇게 꼬치꼬치 파느냐? 믿으면 믿는 것이고 천국가면 가는 것이지 그렇게 깊이 파고드는 것은 머리 아프다"고 반박하였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이런 경험이 있거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고 본다. 생각하여 보라. 자기 영혼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는가? 시장에서 물건 하나를 사도 얼마나 망설이고 사는가. 하물며 한번 잘못되면 영원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데 집요하게 파고드는 사람이 잘못인가? 대강 믿는 사람이 잘못인가? 구원은 말씀에 기초하여 완성되어지지 아니하면 잘못된 구원이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는 말씀이요 증거도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이며 말씀은 예수님이며 말씀은 성령님이다. 말씀을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모습은 또 있다.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정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신 생명의 은인이라면, 그것을 깨닫고 경험했다면 그분을 얼마나 사랑하며 기뻐하고 함께 걸어갈 것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생활 따로, 사회 생활 따로 하지 아니한가? 또 교회 생활 따로, 가정생활 따로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교회에 가면 경건한 신자인데 집이나 직장에 가면 딴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도대체가 하나님을 닮지 아니한 자식들이 친자식일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하나님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지 말고 의붓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앞에서, 예배당에서 종교적으로 우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있다. 그들이 우는 이유를 필자는 잘 안다. 필자도 수없이 울어보았고 또 상담을 통해서도 들었다. 큰 문제는 죄다. 죄를 용서받은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목사님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가슴속을 들여다보면 죄악들이 가득 차 있고 일주일 동안의 삶을 돌이켜보면 온통 죄, 죄, 죄 뿐이다.

   죄를 지은 자신도 밉고, 죄를 짓게 하는 친구도 밉고,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현실도 밉고, 그렇다고 현실을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고...! 그 마음의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하랴, 나오는 것이 눈물이요 짓는 것이 한숨이라. 탄식은 기도의 주체요 슬픔은 기도의 동력이라. 하염없이 울고 나면 마음은 시원한데 시원함도 잠깐이고 또 다른 걱정이 살아나니 내일부터 지을 죄를 걱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위선자 같아서 몇 번이고 교회를 떠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징계가 무서워서 그렇지도 못함이라. 이런 현실 속에 잡혀 있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그는 믿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요한복음 19장 30절에 " 다 이루었다" 즉, "모든 죄를 다 갚았다", "다 용서했다"고 말씀하시지 아니하였는가? 다 용서한 사실을 믿지 않고 죄 때문에 울고 있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상 죄를 지고 갔다" 하였는데 그러면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세상 안에 속하지 아니하였는가?

   죄 용서해 주심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왜 울고 있는가? 이것은 분명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거짓 신자다. 그들의 인격이 거짓 신자가 아니고 신분이 거짓 신자다.

   히브리서 9장 12절에 "영원한 속죄"라고 하였는데 영원한 속죄라 함은 과거와 미래로 영원한 속죄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이다(히브리서 13:8).

   진정 믿는 자는 모든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며, 모든 죄를 용서받은 아들의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순간순간 짓는 죄를 자백하고 뉘우치면서, 그러나 죄에 대한 형벌 때문에 고통하거나 지옥에 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참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요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진지하게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길 바란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히브리서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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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기복신앙으로 소경된 기독교인들이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나는 집에 너무 우환이 많고 살림이 어려워 예수를 믿었으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건강 축복, 물질 축복, 가정 축복 받았습니다. 예수님 참 감사하지요."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필자 뿐 아니라 독자들도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금일의 기독교를 병들게 하는 기복신앙, 즉 육신적 축복에 매달려 있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기복신앙".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소망에 빠져서 여기에만 매달려 하나님의 근본 뜻을 저버린 길 잃은 양떼들이 여기서 헤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수많은 방황하는 양떼들이 겉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지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불쌍한 거짓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 기복신앙의 실제문제를 성경에서는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다. 그중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울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에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자들의 중심 뜻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이 놀라운 능력 있는 분을 왕으로 모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문제 뿐 아니라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능히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육신적으로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이들의 청을 당연히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그들이 끈질기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온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표적을 베푸신 경우가 신구약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 분명하다. 표적이 표적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거나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만 있을 때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예수님이 26절의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통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떡을 먹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육신적인 떡보다 생명의 떡이 되신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셨으나 그들이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어서 알아듣지 못함을 볼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은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육신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무리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 되었으면 대부분 물러갈 수밖에 없었겠는가(요한복음 6:66).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질문하심에 대해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놀라운 답변을 하므로 오늘까지 성도들의 갈 길을 예시하신 훌륭한 가르침이 되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영생을 가르치고자 원하시는 주님과, 보이는 육신적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우매한 유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잘 묘사해 준다.

   독자여,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드러났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받을 복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지 않는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몇 년씩 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믿음(정성)이 가상하여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니 부디 새벽기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소망하라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참고할 것은 필자가 새벽기도를 부정하거나 무조건 질타하는 뜻이 아님을 알기 바란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보고 기도하고 혹은 예배당에서 새벽집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하루가 기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심령이 평안을 잃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지적 받아 마땅하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옛날부터 새벽마다 물 한 그릇 떠놓고 각종 신에게 빌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벽기도로 변하여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필자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혹은 여행 경험을 통해서 아는 바로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건물이 떠나갈 듯 통곡을 하면서 울어대는 교회는 대한민국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독교 문화는 확실히 잘못 발전되었다.

   헌금을 드리는 문제도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경우 복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가?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야 마땅하거늘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주심을 생각하고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인이었으나 양심의 악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주님께 찬양이 넘치므로 진정한 헌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예를 더 들어보자.

   어떤 신앙잡지에서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어 여기 줄거리를 소개한다.

   "다리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양약과 한약으로 수없이 치료하였으나 소용이 없고 다리는 계속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며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갔다. 평생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며칠 있으면서 찬송을 배우고 말씀도 배우니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제법 울면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울부짖어 보기도 하였다. 며칠을 보낸 후 철야기도를 하는데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귀에 들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갑자기 불덩어리가 머리로부터 온몸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그후 다리가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렸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께 눈물로 감사찬송 드립니다. 아멘'."


   이것이 간증의 전부이다. 여기에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믿어졌고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십자가가 빠진 구원, 보혈이 빠진 속죄, 이것은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단번에 분별이 가는 잘못된 간증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물질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을 기도하는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신앙의 순서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다시 오심도 모두 영적인 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위한 것이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면하게 하고 영생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부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복을 위하여 나간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요 거기에는 아주 적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탄식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요한삼서 2절에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순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적은 "영혼의 잘됨" 에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누가복음 12:6~21).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에스겔 18:4) 하신 말씀처럼 죄를 범한 영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의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질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로마서 5:1)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거룩한 자도 하나도 없다(시편 14: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18). 그런데 더럽고 형편없는 죄인이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었다(로마서 3:24)는 것은 천지를 진동시킬 놀라운 사건이다. 이제는 (신분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베드로후서 1:4). 바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큰 구원" 이라고 놀랍게 표현하고 있다(히브리서 2:3). 영혼구원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을 계산할 수가 없다(마태복음 16:26).

   생각해 보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하고 무서운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영원히 눈물과 고통과 이별이 없는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복음 3:16).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의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이 확증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받은 자로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육신과 함께 잠시 기다리고 있는 나그네 인생이다(베드로전서 1:7)

   잠시 기다리는 동안 육신에 필요한 것이 있기에 영생을 얻은 자녀에게 육신적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육신적인  복을 공급하신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먼저는 영적인 복이고 나중은 부수적으로 육신의 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한 삼서에서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하고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 독자여! 부디 권고하노니 그대의 영혼의 문제는 확실히 해결을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라! 필자가 만나본 독자들 중에는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하나 실제 말씀 앞에서 볼 때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가 너무나 많았다. 이글을 읽는 그대는 부디 쭉정이가 아니길 바란다.

   그대는 하나님을 믿되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닌가? 분명히 거듭난 경험도 없이 기도응답 몇 번 받았거나, 병 고침을 경험했거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그것으로 천국에 가겠거니" 하고 착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이 십자가 속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명히 "연결된 사실" 이 없다면 그대의 신앙은 기초 없는 집이요, 물 없는 구름이며, 열매없는 가을나무이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새 생명으로 변화된 성령의 열매가 있기를 바란다. 그대의 육체적 욕구를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면 그대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성령과 진리의 인도하심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그대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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