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자유주의로 하나님을 떠난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1)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여러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중에 예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자유, 즉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다. 예수님께서 인생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자유의 본질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와 같이 참 자유는 진리를 통하여 나는 것이며, 진리 안에서 나는 것이다. 진리를 벗어난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진리의 본질과 방종의 모습을 고찰하여 우리의 신앙의 지표로 삼고자 한다.
진리는 무엇인가? 우선 쉽게 말하여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 조상 아담은 에덴에서 범죄하기 이전에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았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그들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자유를 하나님께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셨고 따먹은 후의 결과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0).
그들은 말씀 안에서 자유를 받았다. 그들은 말씀을 통하여 자유를 받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국민들은 자유가 있다. 그들은 자유를 보장받고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나라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유이다. 법을 벗어나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는 것은 방종이지 자유가 아니다. 아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주신 말씀(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어떤 종파에서는 선악과 자체에 무슨 독이 있는 것처럼, 혹은 그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을 들었는데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심지어 어리석은 종파의 지도자는 복숭아가 선악과라고 하며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들었는데 바보스럽고 우스운 일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부모가 아이에게 학교에 내야할 납부금을 1,000원 주었는데 그 아이가 그 돈을 학교에 내지않고 마음대로 과자를 사먹었다 하자. 그 아이가 부모에게 혼나고 매를 맞을 때 돈 때문에 맞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 부모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욕심과 고집대로 한 것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분의 말씀안에서만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두에서 요한복음 8장 32절의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소개한 바 있는데, 성경에는 수많은 진리가 있어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요한 복음 8장에서 몇 가지 언급하신 진리와 그에 따르는 자유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로, 요한복음 8장 1~11절에 나오는 진리는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러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정죄에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을 증거한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은 율법적으로 볼 때 정죄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그는 재판 절차 없이 당장에 죽여도 할 말이 없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의 정죄를 물리칠 뿐만 아니라 자신도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앞서 예수님은 요한 복음 3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혹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3장의 이 약속을 8장에서 이루셨다. 예수님이 인생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음이 분명한 진리이거늘 필자가 만나본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죄에 대한 정죄"에 사로잡혀 고통하고 있는 모습은 무슨 일인가?
필자도 17년전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교파에 속하여 날마다 "정죄감" 에 사로잡혀 예배당에만 가면 울고 통곡하는 것이 일이었고, 새벽기도에 가서 탄식 기도로 울면서 소리지르므로 이웃집 이방인들을 괴롭혔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금일의 수많은 눈뜬 소경 목자들은 예배당에서 많이 울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믿음 있는 사람이라고 선전하며 인정하며 가르치고 있다.
물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고 통곡과 탄식하는 심령으로 죄에서 돌이키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를 깨달아 구원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의 역사는 개개인의 일생에 한번 있는 것이다.
날마다 예배당에 가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은 "정죄하러 오시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불쌍한 거짓 그리스도인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소경이요 거짓 목자임이 분명하다.
찬송가에도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보혈의 능력, 주의 보혈" 하고 찬송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이 말씀처럼 주님이 우리를 정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왜 아직도 정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는가?
오! 불쌍한 소경 목자들이여, 소경 양들이여, 정신을 차리라! 정신을 차리라! 말씀을 읽고 말씀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영원한 속죄" "완전한속죄"가 분명하게 있거늘 왜 가르치지 못하는가? 왜 믿지 못하는가?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0;14).
그대들은 말씀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가르치지 아니하고 그대들의 생각대로 가르치므로 양들을 지옥으로 끌어가고 있지 아니한가!
둘째 8장 21절에 나오는 진리를 주목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죄인이 주님을 찾다가 죄 가운데서 죽고 그 후에는 주님 곁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요한복음 8:21).
금일의 수많은 소경기독교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열심히 따르며 주님 때문에 죽을 준비는 갖추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죄 문제는 분명히 해결하지 못하고 조 가운데서 고민하고 정죄하고 눈물 흘리고 있는 모습은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짝사랑하는 달콤한 가운데 있다가 결국은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받아주지도, 받아줄 수도 없는데 꿈 많은 소녀처럼 천국의 소망에 부풀어 있다가 지옥에 던져지는 불쌍한 기독교인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든지 있다. 이글을 읽는 그대도 믿음을 점검해 보기 바란다(고린도후서 13:5).
이들의 문제는 23절에 있는 대로 세상에서 죄 가운데 난 것이므로 근본적으로 죄 가운데 있다. 또한 34절에 있는 대로 행동으로 죄를 범하므로 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나 행동으로나 죄인이며 죄 속에서 죽어 지옥에 던져지는 순서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죄의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부르고 있는데(마태복음 11:28) 왜 죄의 짐을 예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있는가?
천국에는 죄가 있는가? 죄 있는 자가 천국에 갈 수 있는가? 왜 그대는 세상 죄(당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포함)를 다 지고 가신 예수님 앞에 나아가서 죄 문제를 해결하여 죄 용서함 받지 아니하는가?
당신의 죄가 "호리라도 남김없이"(마태복음 5:26) 다 갚아지기 전에는 결단코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죄 가운데서 죽은 기독교인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지옥에 모일 것이다.
오! 그대여, 속히 이 지옥에서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라. 건지라. 주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나니 주님의 십자가 속죄를 속히 받아들이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라.
예수님은 죄의 종이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이땅에 오셨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에서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천국 갈 것으로 착각하는 모습을 볼 때 필자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35절에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 이며 36절에는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말씀하시고 있다.
죄의 종에서 자유를 얻으라! 이것은 분명히 성경에 기록된 불멸의 진리다. 이 불멸의 진리가 인생들을 멸망의 지옥에서 건지는 열쇠요 그대 자신이 이 죄의 종에서 해방되는 것은 44절의 "마귀의 자식" 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식이 아비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대가 죄에서 해방받지 못하였다면 마귀의 자식이니 마귀를 따라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셋째, 8장 58절에 나타난 진리를 살펴보자. 우리를 죄와 멸망의 지옥에서 해방시키는 이 모든 일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있었던 분이라고 소개되고 있다. 실제 이 말씀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예수님보다 2,00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0년 후에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영원 전부터 계시다가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며, 그분은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이며,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운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만유를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창조주께서 그대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분이 영원히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의 구원도 영원하다. 구원은 종종 소멸되었다가 다시 받는 것이 아니고 한 번 받으면 영원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보장하신 주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0:28).
이것은 구원을 잃을까 걱정하는 자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진리이다. 금일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열심히 믿어서 구원을 얻고 그 구원을 잘 보존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들이 구원을 잃을까 불안해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구원은 십자가 속죄로 말미암아 단번에 얻는 것이며 우리가 그것을 보전하기 위하여 고생할 필요가 없다. 영원부터 계신 주님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용서하심으로 그대를 구원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영원히 그대의 구원을 보장하셨다. 그대는 이제 모든 정죄와 지옥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오! 그대여, 이 놀라운 진리를 통해서 그대가 자유를 얻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한복음 8: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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