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2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확신

                               Being Sure of Heaven


   별로 많은 지식을 갖지 못한 한 노부인이 교회 집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후, 그녀의 마음에 갑자기 의심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한가?" "이와 같은 나의 경험은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진실로 구원은 우리 자신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일까요? 실제로 이 노부인의 마음 가운데 일기 시작한 의심들은 바로 사탄이 쏘아대는 것들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성경을 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천을 제키며 그밑에 숨어 있는 악마에게 그 성경 구절을 들이 대면서 "자, 여기다. 네 자신이 이것을 똑똑히 읽어 보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노부인이 취한 행동은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다음의 세 가지 진리에 근거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함 (Besides in the Word of God)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함 (Rests on the work of Christ)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드림 (Results from the witness of the Spirit)


   본과에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진리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The Word of God)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구원의 확신에 대한 모든 의문들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이브를 유혹할 때, 사탄은 제일 먼저 그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해제시켰습니다. 이브는 자신을 꾀는 사탄에게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분명하게 사탄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사탄의 공격을 받아넘겨 보려고 하였습니다(창 3:1-3).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에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대신 사탄에 의해 그 마음이 해이해진 까닭입니다.


   1. 성경의 근본 저자 (The Authorship of the Bible)


   만일 우리가 성경의 근본 저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다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심령과 의지와 양심에 그의 절대적인 권위로 말씀하십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2. 성경의 절대 무오성 (The Accuracy of the Bible)


   만일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의심하게 되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그 원본의 내용을 유지하며 지켜져 내려오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고 한 권으로 된 책이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책들을 모은 방대한 책입니다. 그 내용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 역사에 가장 크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은 그 원본이 정확하며, 인간의 지혜와 명철도 초월하는 확고하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점에 있습니다(고전 1:18-31).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회의론자들의 끊임없는 공격이 있었으나 끈질긴 조사를 통하여 그와 같은 오해는 사라졌습니다. 저명한 학자 웨스트콧(Westcott)과 홀트(Hort)는 신약 성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낱말들 중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낱말들의 비율은 사실상 무시할만하다. 실질적 변이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전체 변이의 적은 분량에 불과하며, 전체 성경 원본의 1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적어서 문제가 될 만한 여지가 없다" 또 다른 저명한 학자 역시 "신약 성경 사본들 간의 미세한 변이는 성경 전체의 풍부한 뒷받침으로 말미암아 의심의 여지 없이 단 하나의 믿음의 신조, 신앙적 교훈에 하등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님도 증언하셨습니다. 그는 항상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감화시키셨고, 성경을 인용하셨으며,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셨고, 친히 그 교훈을 따르셨습니다.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한 10:35)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오직 우리는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고, 그 교훈 안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3. 성경 말씀의 신뢰성 (The Acceptability of the Bible)


   만일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의 교리나 명령은 종종 우리 자신의 본성적인 욕구나 인간적 지혜와 충돌합니다. 우리는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게 될 때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것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 (딤후 3;16-17)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요한일서 5: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 10:27-29).

   그 외에도 구원의 확신에 도움을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일부 난해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들에게 주신 새 생명(eternal life)은 세상의 물질처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께로부터 온 불변의 것입니다. 언젠가 변하고 끝나는 것이라면 영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자들에게 이러한 새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이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손으로 주시고 다른 손으로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8장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그 말씀은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묵상하고, 암기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The Work of Christ)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여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기쁜 소식(복음- Good news, Gospel)입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enalty)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고전 15: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수많은 희생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놀라운 예표입니다. 이들 희생 제물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에 의해 명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속죄나 혹은 예배를 원할 때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희생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특별히 번제(burnt offerring)와 속죄제(sin offerring)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잘 예표해 줍니다. 이와같은 제사들에 관해서는 레위기 1장과 4장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번제나 속죄의 제물들을 가져올 때, 죄인은 그가 드리는 희생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위한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들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속죄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번제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속죄제는 죄인을 위하여 준비된 하나님의 예물인 반면,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속죄제는 죄인의 모든 죄가 대속 제물인 동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나타내며, 번제는 대속물의 의가 죄인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제물들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대속자와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완전성과 확실성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0-21).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구원해 주셨습니다.


   2.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ower)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믿는 우리를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습니다"(롬 1: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주장하는 죄의 권능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살아계십니다. 이는 기독교가 내세우는 단순한 신화나 무미건조한 종교적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심으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4-25).

   우리는 구원함을 받은 후에라도 우리 마음 속에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될 때 그에게로 나아가 고백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1서 1:9, 2:1).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으로 우리 안에 지금 함께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18,20). 이 세상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곧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인격적으로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신비스러운 관계로 영원히 함께 하심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믿는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정말 감격적인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 14:11,20).


   3.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resence)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죄의 존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된 백성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그 곳은 현재에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요한 14:2)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의 삶을 통해 체험하는 모든 경험들은 장차 하늘나라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하늘나라는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심판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53:5; 히 10:17).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내 구주로부터 모든 죄 값을 취하시고 또 다시 나에게 죄 값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믿는 자들의 준비는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 진행됩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약속은 영구 불변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머물고 있는 동안 현실적으로 우리의 상태는 종종 불완전하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계속적인 준비가 요구됩니다(빌 2;12, 엡 4:15). 이러한 과정은 주님의 재림으로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에야 우리들은 완전한 나라에서 완전한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죄가 들어 올 수 없는 완전한 장소로 우리를 옮겨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요한1서 3:2).

   천국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여기서 잠시 천국의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원자(atom)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설명으로 우리는 원자의 존재를 믿습니다. 현대의 어느 사람 중에 나폴레옹이나 아브라함 링컨과 악수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보존된 그들의 개인적인 기록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북극에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북극의 존재를 믿습니다. 흥미 있는 보고중의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 까지 이르렀던 사람들의 천국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체험을 실제적으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증언하는 천국에 대하여 전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초대형 망원경을 통해 우주 정거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시대를 여는 과학의 힘을 믿는 우리는 이를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마련하신 천국은 실제적으로 저곳(3층천)에 존재합니다. 망원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는 실존하는 천국을 볼 수 있으며,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그 찬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그 나라에 이르게 될 날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는 우리가 거하기에 충분한 것 그 이상으로 많은 집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너희를 위하여 내가 준비하러 가노라는 말을 내가 할 수 있었겠느냐?" (요 14:2 역자 의역)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이 놀라운 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집으로 불리움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그 나라에 들어 갈 준비가 되었다면 언젠가 당신과 나도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묻기를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하나뿐이신 그의 독자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않고 그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요 3:16 역자 의역) 실존하는 보이는 것들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훨씬 더 큰 능력을 줍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받아드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죽으실 때 나의 죄를 지시고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게 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영생의 시작입니다. 천국의 실존은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을 위해 그곳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그곳에 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바로 지금이 그 기회입니다.

   "진실로, 절호의 때는 바로 지금이로다. 오늘이 바로 그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역자 의역). (Have a Good Day, November 2006 중에서)


   성령님의 증거 (The Witness of the Spirit)


   진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제 3의 위격이신 성령님을 그 마음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육체를 성전 삼고(고전 3;16, 고후 6:16). 그 속에 함께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고 단언하였고,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참조구절; 딤후 1:14, 요한 14:16 엡1;13 등)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구원의 확신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엡 4;30, 롬 8:26). 우리가 성령님의 거룩한 성품과 일치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때 성령님은 탄식하고 근심하며 슬퍼하십니다. 근심한다(grieve)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슬퍼하게 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 그 자체를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단지 구원의 기쁨을 잃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다시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10:28, 요 5:24, 히 10:12-18).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은 자들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도 결코 우리들에게서 다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잘못을 범하여 구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앞으로 나아가 아뢰어야 합니다(요한 1서 1:9-2:2).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먼저 우리 속에서 근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곧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킴으로 깨끗함을 받은 후,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5과에서 더욱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하시는 사역은 사실(Facts), 믿음(Faith), 감정(Feeling) 이 세 단어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성령님의 세 가지 사역에 대해서 좀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성령과 사실 (The Holy Spirit and Facts)


   첫째로, 성령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사실(facts)을 보여 주십니다. 히브리 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게시며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한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2-17).

   여기에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과 믿는자들의 죄 사함에 대한 사실(fact)들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2. 성령과 믿음 (The Holy Spirit and Faith)


   둘째로,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확증해 주십니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1서 5:6, 9-11).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각자의 개인적인 축복으로 이어주는 생명의 고리가 믿음(believing)이며 성령님은 그러한 믿음을 확증해 주고 계십니다.


   3. 성령과 감정 (The Holy Spirit and Feelings)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감정을 통해(feelings)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5-17).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 넘치는 기쁨, 평안, 사랑의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해 아바(Abba)라고 부르짖게 합니다. 아바란 어린 아기들의 부르짖음으로 오늘 날 아빠(papa 혹은 daddy)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는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앞으로 그 자신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을 내다보시고 동일한 감정으로 부르짖으셨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감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셨습니다(막 14:36). 성령님은 주 예수님께서 그의 아버지를 향하여 가지셨던 똑같은 심정으로 우리 믿는 자들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도록 하십니다. 이 이상 우리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생각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위에 두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하는 것이며, 인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증거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 자신에게 자문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의지하는가? 사람의 감정이 아니고, 성령의 증거에 의해 심령에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당신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빛처럼 증거하고 자석처럼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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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5장

                            분명한 확증


    그는 한 이름 없는 작가이자 설교자였는데 9개월에 걸친 세계 순회 집회에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 대부분 나라와, 중동의 이란과, 태국, 네팔, 싱가폴, 인도네시아, 호주, 필리핀, 홍콩, 대만, 한국, 일본 등지를 순회하는 계획이었습니다. 엄청난 일정이었지만 그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시간계획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인도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여행과 집회일정, 음식, 건강, 예전에 외국여행에서 맛보았던 좌절감 등을 생각하면서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확신을 얻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 매순간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발걸음을 내디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계획을 진행시켜야 하는지 확실한 응답을 달라고 주님께 구했습니다.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말씀을 읽고 있는데 두 구절이 눈에 띠었습니다. 시편 139편 9,10절이었습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 다윗은 주님의 편재하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세상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어디나 계십니다. 새벽날개란 낮의 해가 온 세상을 비출 때까지 하늘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동틀 즈음에 비추는 빛줄기를 말합니다. 바다 끝은 땅 끝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가 어디를 가든지 주님께서 거기 계셔서 인도하시고(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힘을 주셨습니다("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 말씀이 어떻게 그 성경교사의 마음에 말씀했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새벽날개는 그로 하여금 하늘을 가로지르며 달리는 비행기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비행기가 그를 지구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나른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이 모든 잠재된 문제를 해결해주실 줄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그분의 오른손이 그를 붙들어줄 것입니다.


   이 시편 139편을 기록할 당시에 다윗은 오랜 세기 후에 비행기 여행을 앞두고 고민하는 주님의 종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평안과 확신을 줄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문맥을 뛰어넘어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늘 그렇듯이 주님은 자신이 하신 약속에 충실하셨습니다. 9개월 후에 그 성경교사는 피곤하긴 했지만 주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많은 증거로 기뻐하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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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1장

                        영광스러운 진리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롬 15:4)


   이 구절에는 명백한 한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광범위한 구약성경을 통해 자신의 영적분량과 영적 필요의 성격이나 깊이에 따라 교훈과 위로를 얻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또 다른 신약성경의 구절은 이것입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신약성경을 읽을 때와 같이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도, 성경을 기록하도록 성경기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신 성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의지하며 게속해서 주의 깊게 자신의 생각을 비우고 읽어야 합니다. 상상을 함부로 할 때, 잘못된 생각이나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유익을 얻기는커녕, 우리 영혼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할 말씀의 능력을 약화시켜 영적인 성장을 방해할 뿐입니다.


   우리는 또한 로마서 15장 4절에 우리를 위해 기록된 하나님의 뜻, 즉 "무었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 이라는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의 능력 안에서, 이제 독자들을 여호수아서의 서론 부분으로 인도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제시되어 있는 놀라운 교훈들을 함께 상고해보고, 거기에 계시되어 있는 귀한 영적인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만일 성령님이 도우신다면, 요단강변에서 몇 가지 고상한 영적인 교훈들을 배우게 될 것이며, 영적인 성장을 위한 건강하고도 상쾌한 길갈의 체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요단강을 죽음에 대한 모형, 즉 신자의 죽음(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는)으로 보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찬송가를 읽거나 들어본 일이 있을 것입니다.


모세가 서 있던 곳에 서서

그가 보았던 곳을 내려다 볼 수만 있다면

요단강물이나 죽음의 찬 물결이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할 것이라네.


   하지만 이 소절에 나타나 있는 생각이나 느낌, 그리고 경험은 참된 기독교의 신앙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 영혼에 비추는 참된 빛 가운데서 잠시만 생각해보아도, 이런 요단강에 대한 대중적인 생각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성경적인 통찰력이 부족한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신자의 죽음으로 볼 때, 그렇다면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가게되면, 그는 전쟁을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영원한 평안과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바다에는 잔물결조차 없고, 그 순결하고 거룩한 곳에는 우리를 놀래킬 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전쟁이 없기에 갑옷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옷이 편하기 때문에 허리띠도 필요 없습니다. 의의 흉배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신성한 의로움이 항상 머물기 때문입니다. 신발도 필요 없습니다. 그 아름답고 행복한 곳에는 거친 길이나 가시밭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무서운 화살이 날아다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방패 또한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성하고 영원한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도 필요 없습니다. 그 복되고 햇빛 찬란한 천국의 어느 곳에도 원수나 악한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검도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단강은 신자들이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자마자 전쟁이 시작된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광야에서 아말렉과 싸우기는 했지만 그들의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이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단강이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요단강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신자들은 그것을 건너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그들이 건너려고 했을 때 그들은 요단강이 마른 땅이 된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주님께서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셔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영원한 기업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비스가 산꼭대기에 서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내려다보기만 했듯이,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나님의 신령한 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누릴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도, 또는 신성한 기독교 신앙 전체를 훑어보더라도 찾을 수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치리 아래 있는 경륜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모형적으로 볼 때,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기에 율법은 사람들을 영적 가나안으로 인도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여호수아이신 그리스도는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뿐 아니라 구속함을 받은 무리들이 하늘의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마른 땅으로 통과하도록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과연 건너갈 수 있는지를 의심하며 죽음의 강둑에 떨며 서 있으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강물은 믿음이 있는 자에겐 마른 땅에 불과합니다. 그 세력은 사라졌습니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주님은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딤후 1:10)" 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영광스러운 진리입니다! 이것을 인해 주님을 찬양합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그 큰 능력을 인해 주님을 경배합시다. 사망의 쏘는 것을 제하시고 사망의 권세를 가진 자인 마귀를 멸하신 주님을, 생명과 빛과 썩지 않음과 영광으로 충만한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의 온 마음을 다 합시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우리는 이제 이 위대한 주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좀 더 자세히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친히 가르치시는 교사가 되어 주시길 빕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 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수 3:1-4)


   이스라엘 역사에는 독자들이 깊이 생각해야만 하는 세가지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애굽 땅에서 집문 좌우 설주와 이방에 바른 피, 둘째로는 홍해, 그리고 세 번째로는 요단강입니다.


   이 세 가지 모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모형입니다. 각각은 매우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고귀한 죽음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고 있는 심오한 비밀을 연구하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습니다. 또한 여기엔 엄청난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을 끄는 다른 일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이런 비밀은 영원세계에서만 풀릴 수 있는 깊이와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 아래서, 성경의 완전한 빛 안에서,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하고 안위를 받도록 해주고, 또한 우리 영혼이 새롭게 되는 역사를 기대하면서 이러한 것들을 상고해 본다면, 우리의 기쁨은 넘치도록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서 모형화된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가려주는 효력을 보게 됩니다.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 12;12-13)


   굳이 말씀드릴 필요도 없지만, 죄에 익숙하고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영혼에게 장차 올 진노와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이 피난처를 예비하셨음을 아는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에 이르렀습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합당하게 잘 배운 사람이라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대한 이런 측면을 과소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스라엘 민족이 안전한 상태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피에 그 가치를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자가 피를 보았습니다. 심판자는 피의 가치를 알았고, 그 집은 심판을 면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죄가 가려졌고 심판을 면했습니다. 즉 피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사실입니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해 생각 할 때 하나님의 생각보다는 우리의 생각으로 가득차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우리는 그 보배로운 피에 대해 마땅히 귀하게 여겨야 할 만큼 여기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 피에 대한 정당한 가치를 산정했습니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리는데서, 또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애정을 품는 일에서 실패하는 우리를 보면서,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안전한지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비록 지극히 적은 정도일지라도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우리의 평가나 또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거나, 아니면 율법준수 여부에 달렸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매우 심각한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해지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해야만 하고, 또 우리가 그리스도를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만일 이 모든 것이 의롭게 되는 것의 근거가 된다면, 그리고 우리의 안전이 그 요구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달려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율법을 범한 터 위에 서 있는 것보다 우리는 더욱 큰 위험 가운데 처하게 되며, 더욱 공의로운 정죄 아래로 떨어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요구가 모세의 율법의 요구보다 더 높은 만큼, 또 기독교 신앙의 수준이 율법의 수준보다 더 높은 만큼, 우리의 상황은 더 나빠지고, 더 큰 위험에 빠지게 되며, 평안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이 이같이 더 높은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달려 있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러한 요구에 대해 응답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응답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한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요구에 직면해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이에 관련되어 있는 한, 우리의 타락과 범죄는 다만 더욱 현저히 드러나게 되며 우리를 정죄하는 정죄는 더욱 공의로운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요구에 대한 우리의 응답에 따라서,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감사여부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모세 율법의 공의로운 요구 아래 있을 때보다 더욱 나쁜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우리는 그런 상황 아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 그리고 신성하고도 영원한 은혜에 의해서 구원받았습니다. 은혜에 대한 우리의 느낌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피에 대한 우리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피 자체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무섭고 두려운 밤에,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가 피를 볼 때에, 피에 대해 너희가 바른 평가를 할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기를 원하셨고 그들이 완전하게,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문제를 전적으로 신성한 기반 위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문제를 그들의 손으로부터 취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안전이 단순하면서도 전적으로 피에 있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있음을 확신토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직접 피난처를 준비할 필요가 전혀 없음을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피난처를 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따라서 기념할만한 그 밤에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피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과 이제 예수님을 단순히 믿고 신뢰하는 영혼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나 우리의 평가나, 우리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구원받으며, 피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의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피를 바른 좌우 문설주와 인방 안에서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심판하는 자의 칼에서 안전하게 되어 불에 구운 어린양을 먹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신자들도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완전하게 보호를 받아 모든 위험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되어,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고 주님 자신의 모든 귀중함 속에서 안전을 누리며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장차 임할 심판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한지에 대한 확신이나 평안을 얻지 못한 독자라면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온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이루신 일 가운데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물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것이지만) 또한 아시길 바랍니다. 회심 후에도 우리는 참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자기 의(義)라는 누룩이 들러붙어 있는 지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평안과 은혜에 대한 누림을 방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의해 구원받았다는 생각을 버렸을 때 우리는 자기 의를 끝냈다는 착각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살펴본 대로, 우리가 마땅히 생각해야 할 만큼 피의 가치를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다는 느낌 때문에 우리의 안전을 의심하게 되는 것보다 더 교묘한 것은 없습니다. 이 또한 자기 의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자아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우리는 우리의 행위가 우리의 구주가 될 수 없음을 알지만 우리의 느낌이나 감정들로는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명분 때문에 우리에게 무슨 자격이 좀 있지 않을까 하고 우리도 모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모든 것은 포기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단지 그리스도의 피와 그 피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피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 피에 합당한 가치만을 인정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족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만족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네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볼 때, 또 내가 무교병과 쓴 나물과 허리에 띠를 띠고 신발을 신은 것을 볼때에, 내가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확실히 이 모든 것들은 다 합당한 자기 위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합당한 위치는 안전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교통의 비밀에 대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절기를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보호받은 백성으로서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지, 그런 백성이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들이 절기를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그들이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확신을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통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 말씀을 믿는다면, 그들은 평안과 안전 가운데서 절기를 기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여기에 모든 문제의 깊고도 귀중한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유월절을 지켰던 것은 믿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고, 또 그런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 두렵고 무서운 밤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리카락 한 개라도 심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 자신이 계획한 자신의 복된 치유책을 부인하는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반복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상태나 그들이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피의 가치에 의한 것이었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의 진실성과 말씀의 권위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안전이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평안과 안식인지요! 여기에 우리 확신의 견고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말씀! 이 두 가지는 신성한 진리로서 참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고, 또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령님의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또한 다가오는 심판의 문제를 생각 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것이며 다른 것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심판이 이미 집행되었다는 완전한 증거로서 피가 은혜를 베푸는 보좌인 시은좌(the mercy-seat)에 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무에 달려 나를 위해 심판을 받았네.

이제 죄인이 주님과 함께 자유케 되었네."


   그렇습니다. 모든 찬송을 그분의 이름에 돌려드립시다. 이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또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는 모든 영혼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모든 죄를 사했음을 믿고 의지하는 영혼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심판받을 수 없는 것처럼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피로써 보호를 받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안전하신 것만큼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 이는 심판받아 마땅한 가련한 죄인조차도 믿음으로 그런 말을 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참으로 경이로운 일입니다.


   참으로 복된 사실은 바로 이 방법이 아니면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의 안전에 관하여 어떤 문제가 제기된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시은좌에 뿌려져 있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 피가 중요치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 만일 안전이 우리의 상태, 우리의 가치, 우리의 감정, 우리의 경험, 우리의 행함, 우리의 사랑, 우리의 헌신, 그리고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 등에 달려 있다면,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선언은 이제 더 이상 아무 능력도, 아무 가치도, 또한 아무 진실성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어둡고 냉랭한 그림자가 천상세계를 뒤덮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피를 보고 또 거기에 추가하여 (.......)을 볼 때에"와 같이 변해야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을 갈망하는 사랑스런 독자 여러분, 결단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하게 만족시켜드렸으며,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단순하게 믿는 모든 영혼을 온전히 보호해주는 보배로운 피에 더하여 아무 것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깃털하나의 무게만큼도, 머리카락의 넓이만큼도, 심지어는 눈썹의 움직임만큼도 더할 것이 없습니다. 만일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 자신이 만족했음을 선언하셨다면, 죄를 범한 죄인 또한 확실히 만족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수님의 피로써 만족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도 만족될 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이고, 심판의 문제에 관한한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1)


   그리스도께서 이미 죄인을 대신해서 정죄를 다 받으셨는데 어떻게 정죄함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요? 신자가 심판으로부터 면제되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을 무효화하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지금까지 구원의 문제(매우 중차대한 문제인)만 다루어왔음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부터 자유를 얻는 축복(그 자체로서도 매우 복된 것인)보다 우리를 위해 훨씬 더 많은 다른 축복들이 이루어졌음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비할 데 없는 그리스도의 희생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건진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 멈추어 서서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음과 같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질문을 독자에게 드리고자 합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피로써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사랑하는 독자여, 당신이 분명하게 조금의 주저도 없이 "네 그렇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결코 마음을 놓지 말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피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든가 아니면 영원한 심판의 두려움에 놓여 있든가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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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4과 왕정의 몰락


                                                 열왕기 상 . 하


   열왕기서에는 453년 간에 걸친 이스라엘 왕국(王國)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서는 다윗 왕이 죽고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사건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른 솔로몬은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또한 이 솔로몬이 이룩한 공적은 많으나, 그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한 것과 자신을 위해 궁궐을 건축한 사실은 매우 특기할 만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수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함으로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그뿐 아니라, 병마(兵馬)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확보하여 주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무력(武力)을 의지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하였습니다.

   한편 솔로몬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부왕 솔로몬이 당시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을 위해 거두어 들였던 과중한 세금을 이제는 경감시켰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무겁게 부과하려고 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북쪽에 있던 열 지파는 르호보암에게 반기를 들고, 여로보암을 또다른 왕으로 추대하고 사마리아를 수도로 삼아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이스라엘이라 일컬었습니다. 따라서 르호보암은 유다 지파와 레위, 시므온, 베냐민 지파들의 일부 사람들만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중 열 지파는 에브라임이라 불리우기도 한 북왕국으로, 나머지 지파는 예루살렘을 수도로 한 남왕국으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북 왕국에는 각기 여러 사람들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왕들은 한결같이 악하기만 했습니다. 물론 유다 왕들 중에도 악한 왕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선하게 다스린 왕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왕국은 주전 721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였고, 유다는 이보다 134년간 더 유지되다가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했습니다.

   분열된 남북 왕국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사실을 간추려 보고자 합니다.

   1. 주목할 만한 왕들의 활동

    1)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으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우상을 세웠다.

    2) 아합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으로서 그의 아내는 이방신 바알을 섬기는 이세벨이었다.

    3) 유다의 훌륭한 왕으로는 아사, 여호사밧, 요하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히스기야, 요시야 등이 있다.

   2. 주목할 만한 선지자들의 활동

    1) 엘리야는 아합 왕 때에 갈멜 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크게 쳐 부수었다.

    2) 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엘리사는 요람 왕 때부터 여호아하스까지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에게 예언하였다.

    3) 구약 성경의 후반에 있는 예언서를 기록한 선지자들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활동했다.


                                            역대상 . 하


   얼 핏 보기에 역대상 . 하는 구약의 전체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면 역대상은 사무엘상 . 하와 내용이 비슷한데, 솔로몬과 남북 분열 왕국의 열왕들에 관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대상 . 하는 사무엘 상 . 하나 열왕기상 . 하와는 다른면이 있습니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역대상에는 아담으로부터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때까지의 족보를 장장 9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2. 역대상 . 하는 역사적이거나 정치적 입장에서 기록되기 보다는 종교적인 면, 특히 제사장 제도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라든가 위인이라든가, 제사장이라든가, 문지기라든가, 성전 등에 관한 기록이 돋보이고 있습니다.

   3. 남왕국 유다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별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메시야가 탄생될 혈통인 다윗과 그의 직계 후손들에게 관심을 두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4. 다윗의 범죄가 대부분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순종으로 인하여 받은 축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역대하의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는 역대상 . 하가 기록된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는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만에 고레스가 예루살렘의 귀환을 허가하는 칙령을 내린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로 보아 역대상 . 하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씌어진 것이며, 고토(故土)에 귀환하는 유다인들에게 필요한 자신들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고자 씌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자신들의 기업을 알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족보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2. 성전에서 섬길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성별하기 위해서도 이들의 족보를 알아야만 했습니다.

   아울러 역대상 . 하는 귀환하는 유다인들에게 과거 조상들의 영적 상태를 보여 주고, 나아가 이들로 후에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실 메시야를 고대하게 하는 데 기록 목적이 있었습니다.


                                              에스라서


   유다 포로들이 이제 고토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고레스의 조서가 반포되었을 때, 스룹바벨은 귀환 희망자 50,000명을 이끌고 1차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일을 시작하여 성전 지대(地臺)를 놓았으나 얼마 못가서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자청해서 돕겠다고 했는데, 유다인들이 이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이에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에 선지자 스가라와 학개가 다시 성전을 재건하라고 백성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리오 왕 때에 성전이 재건되어 온 백성이 기쁨으로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60년 쯤 지나서 에스라가 1700명 내외의 귀환자들을 인솔하여 2차로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이전에 귀환하여 정착한 수 많은 유다인들이 심지어는 제사장이나 방백들까지도 이방 여인과 결혼한 사실을 보고 근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에스라가 개혁을 단행하자 백성들은 죄를 자백하고 이방 여인을 버리기로 작정하였습니다.


                                   느헤미야서


   이제 성전은 재건되었지만 성벽은 여전히 허물어진 상태라서 적의 침략을 당할 경우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이에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귀환과 성벽 재건의 허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벽 재건은 곧 사마리아인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느헤미야는 낙심하지 않고 계속 백성들을 훌륭하게 조직하고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52일 만에 재건 공사를 끝낼 수 있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백성들을 모아 율법을 낭독하였는데, 이에 백성들이 금식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큰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다가 페르시야에 돌아갔습니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 백성들은 죄악 생활에 깊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에는 성전에 이방인들이 출입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레위인들의 생계를 도와주지 않았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았으며, 이방 여인들과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느헤미야는 이러한 타락을 개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로써 구약사는 사실상 끝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건들은 주전 400년 경에 일어난 것으로, 그 후 400년에 관해서는 성경에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는 느헤미야와 동시대의 인물이며, 말라기서 역시 느헤미야서와 동시대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더서


   아슬아슬한 이야기로 엮어지는 에스더서는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영도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던 시기에 페르시야 왕궁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스더서의 사건은 에스라서의 6장과 7장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에스더서에는 유다인들이 그의 대적인 하만의 간교한 음모를 어떻게 분쇄하고, 구출되었는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에스더는 유다 소녀로서,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아내인 와스디를 폐위시켰을 때, 와스디를 대신하여 페르시야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는 대궐의 문지기로서 경건한 유다인이었고, 왕의 암살 계획을 사전에 왕께 알려준 적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한편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은 사실에 분개한 나머지 왕의 재가를 받아 날을 정한 뒤 모든 유다인들을 전멸하려고 계획하였습니다. 당시 메대와 바사에 있어서 이렇듯 왕이 인정한 법령은 어떤 경우에도 수정하거나 가감할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에 모르드개가 일러준 대로 에스더는 왕의 부름을 받지 않은채 왕 앞에 나아가려는 모험을 결행했습니다. 다음날 에스더는 잔치를 배설하고 왕과 하만을 초대했습니다. 잔치가 벌어지기에 앞서, 에스더는 일찍이 암살 음모를 사전에 왕에게 고한 모르드개에 대해서 아무런 표창도 하지 않은 사실을 왕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왕은 하만에게 '모르드개는 왕이 기뻐하시는 사람' 이라고 온 성중 거리에 나아가 반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음 연회석상에서 에스더는 비로소 왕에게 자신의 국적을 밝히고 유다인들을 전멸하려는 하만의 음모를 폭로했습니다. 이에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세워 놓았던 장대에 즉시 하만을 매달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에스더가 다시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유다인들을 전멸하도록 작정되었던 날에 유다인들이 정당방어를 할 수 있도록 왕의 허가가 내려졌습니다. 왕이 이렇게 조서를 내린 뒤, 정해진 날에 대적과 더불어 유다인들이 싸우자 오히려 유다인들의 대적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유대인들은 이 날을 부림절로 정하여 해마다 이 극적 구출을 기념해 오고 있습니다.

   한편 이 책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기적적으로 보호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 뚜렷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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