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제2장

                     죄와 사단과 세상으로부터의 해방


   앞에서 우리는 피의보호 아래 놓여 있는 이스라엘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굉장한 축복이며, 매우 확실한 구원의 보증입니다. 누가 그 진정한 의미를 합당하게 측량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어떤 언어가 어린양의 피로서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가려줌을 받은 사람의 그 엄청난 축복을 다 설명할 수가 있을까요?  그런 사람은 진노와 심판이 결코 임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 안에서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에서 우리를 완벽히 안전하게 건져내신,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어린양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의 특권에 대해 제대로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하지만 이 모든 것 외에도 훨씬 복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안에는 심판과 진노로부터의 구출 보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들이 사함 받았다는 온전한 확신과 하나님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를 결코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주는 즐거움에는 훨씬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모양으로 우리 자신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 찰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내주하는 죄, 사단의 권세, 그리고 세상의 영향력에 대한 자각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앞에 문제가 되어 이로 인해 우리 마음은 엄청난 두려움으로 가득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 14장에서 우리는 굉장한 슬픔 가운데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움에 압도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그 순간만큼은 자신들이 피의 보호아래 있어온 사실을 잊어버린 듯이 보입니다.


   성경본문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다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찌라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혹이 백성의 도망한 것을 애굽 왕에게 고하매 바로와 그 신하들이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가로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고 하고 바로가 곧 그 병거를 갖추고 그 백성을 데리고 갈새 특별 병거 육백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발하니 장관들이 다 거느렸더라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 장막 친데 미치니라 바로가 가까와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출 14:1-10)


   이제 우리는 '과연 이들이 피의 보호 아래, 완전한 안전 가운데 있었던 그 사람들이 맞단 말인가?'라는 질문이 하고 싶어 질 것입니다. 바로 그들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두려움이 임하였으며 이처럼 강력한 공포를 느끼고, 또 이처럼 고뇌에 찬 울부짖음은 무엇 때문에 일어난 것일까요? 그들은 여호와께서 결국 자신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신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이 두려웠던 것일까요? 그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 14:11-12)


   이 모든 일은 참으로 우울하고 침울한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들의 가련한 마음은 애굽에서의 무덤과 광야에서의 죽음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듯이 보입니다. 여기엔 구원의 여망도 없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구원, 그 둘 중 어느 것 하나도 확실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두움이고 완전한 절망일 뿐입니다. 그들은 막다른 곳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는 듯 보입니다. 그들은 전심으로 애굽에서 벽돌 찍고, 그루터기만 남은 밭에서 이삭 줍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 양 옆에는 산들이, 앞에는 바다가, 뒤에는 바로와 그의 무서운 군대가 있었습니다.

   상황은 전적으로 소망 없어 보입니다. 그들의 머리로 생각하는 한, 그것은 정말 소망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무력했고 그 상황에서는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는 매우 유익했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두를 위해 지극히 필요했던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겐 능력이 없다는 사실의 진정한 의미와 그 깊이를 배워야 합니다. 무력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가 알아내는 것에 비례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합당한 때(due time)를 깨달을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경험을 통해 무언가 배울 것이 있는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한 것들이 우리의 교훈을 위한 본과 모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 홍해에서의 장면 또한 우리를 위한 교훈으로 가득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상태와 전망에 대해 얼마나 깊이 낙심하며 얼마나 자주 절망 가운데 빠지는지를 발견하곤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이나 예수님의 피의 효력에 대해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더더욱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시거나 그래서 자신들을 심판하실 지도 모르신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보다는 완전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들의 악한 본성에 적용할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광스러운 사실, 곧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자신들이 악한 세상, 내주하는 죄의 통치, 심지어는 사단의 권세로부터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신들을 가려주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압니다. 하지만 영원한 구원으로부터 오는 완전하고, 밝고, 행복하며, 해방된 확신은 아직 없습니다. 모형적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홍해를 건너기 전 애굽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세상 임금의 손에 다시 떨어질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그들의 모든 대적이 죽은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구속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홍해를 건너 광야 쪽에 서있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그 노래를 부를 수는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이 죄와 세상과 사단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받았음을 알기 전에는 구속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처음부터 15장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기까지 전혀 찬송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의 감독들의 잔혹한 채찍질과 애굽의 벽돌 굽는 고역 아래서 극심한 고통으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우리는 믹돌과 홍해 사이에서 큰 두려움으로 부르짖는 소리도 듣습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홍해 바다물이 사망과 어둠의 땅과 자신들 사이를 엄몰하여 대적의 모든 권세가 깨어지고 사라지기까지 그들에게는 찬송 한 소절도, 승리를 기념하는 한 줄의 축시도 없었습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베푸신 큰 일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출 14:30-15:1)


   그렇다면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적용될까요? 홍해 바닷가의 장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었일까요? 과연 홍해는 어떤 것의 모형으로 보아야 할까요? 그리고 피를 바른 인방과 갈라진 홍해 바다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홍해 바다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모형으로 우리의 모든 영적인 원수인 죄와, 세상과, 사단에게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신자는 온전히 또한 영원토록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신자는, 아! 죄의 존재를 의식합니다. 이제 그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가 어찌 죽은 사람에 대하여 힘을 행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닥에 누운 시체처럼, 자신을 죄의 통치로부터 해방된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죽은 사람에게 죄가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역사하지 못합니다. 죄는 신자 안에 거하고 여전히 그러할 것이지만, 죄의 통치는 사라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옛 주인의 손에서 통치권을 획득하셨고 그 본체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없이 해주었고,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 위에 군림하는 죄의 권세를 깨뜨려버렸습니다.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죄의 몸이 멸망을 당했다", 즉 죄의 통치가 끝났고, 죄의 지배가 끝났다는 것을 아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죄가 사함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내주하는 죄에 대해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죄 때문에 심판받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모형상, "바다와 믹돌 사이" 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아직 영적인 지각과 이해에 있어서 홍해의 부활 국면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이제 독자들은 특별히 사도 바울의 "여기라(reckon)"는 말의 힘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이 단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깨달으라(realize)"라는 말과는 모든 면에서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깨달으라는 단어는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의미로 많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사실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진리에 관한 일은 깨닫는 문제가 아니라, 여기는 문제입니다.


   내 자신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내 자신의 모든 경험과 느낌, 내적인 자각은 이 진리에 대해 전혀 동의할 수 없어 보입니다. 나는 내가 죽은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죽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나 또한 죄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여기신다고 내게 확증하십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는 내가 그것을(사실처럼)느끼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그대로 나도 여기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무죄라면, 또 내 속에 죄가 없다면, 나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다음과 같이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와 같은 말씀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 안에 내주하는 죄가 있기 때문에, 그 죄의 통치로부터 실제적인 해방을 얻기 위해선 죄의 통치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깨어졌다는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나는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내가 그것을 느끼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그것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몸이 살아있는 동안 그것을 스스로 자각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내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나는 그에 대해 이성적으로 따지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그 진리에 대한 증거를 조금도 발견할 수 없다고 해서 그에 대해 믿을까 말까 망설이지도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하나님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신대로 내 자신을 그대로 생각합니다.


   나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죄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애쓰거나, 노력하거나, 또는 투쟁하지 않습니다. 또 그 상태에 이른 것처럼 상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망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으로 죽었다가 다시 사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믿음이 내게 할당해준 그 복된 터(blessed ground)를 취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나 자신에 대해 표현한 그대로, 신성한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을 봅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해서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다봅니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바로 불신앙과 신앙의 차이이며, 율법과 은혜의 차이이며, 인간 종교와 신성한 기독교 신앙의 차이입니다. 만일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이치를 따진다면 그 과정은 어둠 가운데서 헤맬 것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전적으로 거짓말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이치를 따진다면 그 과정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의 빛 가운데서 수행될 것이며, 내가 내린 결론은 참으로 거룩하고 합당할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면에서, 자신의 모든 일에서, 자아를 끝내고 단순하게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고 또 그말씀이 우리 영혼에게 제시하는 그리스도 안의 안식으로 옮겨준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자비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혀 있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통에 치명적이며 영혼의 안식에 철저한 방해물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있는 한 누구라도 평안을 누리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은 자아를 끝내고 조금의 의심도 할 수 없는, 순수하고, 보배롭고, 영원한 기록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안에서 쉼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단코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 자신은 변합니다. 나의 생각, 나의 느낌, 나의 경험, 나의 환경 등은 지속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신자들의 신분에 대한 유일한 해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사항입니다. 이 사실은 엄청난 능력과 자유와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요일 4:17)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완전한 일입니다. 그 사실을 깊이 묵상해봅시다. 우리 한번 가련하고, 비참하고, 죄악 되고, 죄의 종이며 사단의 노예이며, 세상 숭배자이기에 영원한 심판, 즉 영원한 지옥 불못에 빠지게 된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택함을 받아 사단의 지배와 죄의 통치와 악한 세상의 권세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는 용서받고, 깨끗이 씻김을 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여졌으며, 완전하고 영원하게 그와 동일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어떠하심과 같이 신자도 세상에서 그러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너무 좋아서 사실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확실히 너무 좋은 것이어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찬송을 받으셔야 하고, 또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께서도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실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무가치함과 사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합당한 방법대로,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존중하시는 방법대로 행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지옥의 가장 깊고도 어두운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을 주시려고, 그리스도의 가치에 대한 그분의 높은 평가에 따라 천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계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아들의 보배로우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원한 복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확실하게 하고 또 대적의 모든 송사에 대해 승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 처리되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문제가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사하셨습니다.


   죄가 문제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죄책감이 문제가 될까요? 십자가의 피로써 죄책감을 해결하셨습니다.


   죽음이 문제가 될까요? 하나님은 사망의 쏘는 것을 제거하셨습니다.


   사단이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은 사단을 멸하셨습니다.


   세상이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에서 건져내셨으며, 우리와 세상과의 연결된 모든 고리를 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그리스도인 독자 여러분들이여. 우리가 만일 성경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말씀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복된 사실은 우리와 함께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죄의 권세 아래 있으며, 사단의 손아귀에 있고, 죽음에 매여 있으며, 악의 일부로서 같은 부류로 남아 있게 되며, 그리스도도 없고, 하나님도 없으며, 세상에 속해서 영원한 불의 심판인 하나님의 극렬한 진노에 노출되어 있음을 한 번 더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오, 복되신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부활하신 후 영광 가운데 들어가신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으로 우리가 들어가게 된 것과, 부활에 근거한 우리들의 정확한 신분과 우리들의 합당한 분깃을 알게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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