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확실한 차이가 무엇인가?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가?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의 약자(略字)이다(요한일서 2:25).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가? 생명이 아닌가? 눈이 있어 길을 다니나 참된 길이 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요, 세상 만물을 보고 있으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알지못하던 살았다 하나 죽은 자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이 죽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오늘의 기독교인이 생명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는 진정 슬픈 것이다.

   누구보다도 필자는 생명 없는 종교인 생활을 17년이나 하였던바 이 일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서두의 제목을 보면 허수아비 신자들을 제시하였다. 허수아비는 모양은 틀림없이 사람이라서 논 가운데 세워두면 참새가 처음에는 속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 생명 없는 것이 드러나면 그 때는 생명 있는 참새를 속이지 못한다.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자의 모양은 가졌으나 생명이 없으므로 사단의 조롱거리요 장난감으로 전락하여 사단에게 평생 농락당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지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터이니 그 절망이 어떠하겠는가?

   여기서는 사단에게 농락당하는 생명 없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생명 없는 종교인들의 첫 번째 모습은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성경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혹 깨닫는다 할지라도 더듬는 수준이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하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구원의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동네의 선배 목사님에게 가서 " 나 구원 받았다" 고 간증하였다. 그는 신앙경험이 아주 적었으므로 그가 당연히 구원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간증하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기가 막힌 말이었다. 함부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시한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2절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 성도는 교회 출석 경력이 많지 아니하므로 어리둥절하여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여 다시 그 말씀을 살펴보니 믿는 성도들의 상급에 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영적인 아이라도 깨닫는 것을 목사님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생명 없는 죽은 신자는 지도자건 평신도건 소경일 뿐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이므로 성경이 깨달아지지 아니하므로 고통 당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열심인 신자들이 여호와 증인을 비롯한 드러난 이단들에게 미혹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의 무지에서 오며, 생명 없는 죽은 신자이기에 오는 것이다.

   생명 없는 거짓 신자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하면서 쭉정이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쭉정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열심 없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그러할까? 그러면 기독교의 열심 있는 신자들은 여기에 해당 없는가? 정말 그러할까? 아니다. 분명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차이다. 알곡과 쭉정이는 생명의 차이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쭉정이는 죽은 곡식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대단한 열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생명 없는 쭉정이일 수 있다.

   말씀 부분에 관해 더 생각해 보자! 필자가 여호와 증인에 관해 언급하였거니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유치하고 억지인가는 거듭난 생명 있는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니와 성경은 너무도 명확한 증거들을 말하고 있다. 생명은 성경을 깨닫는 능력인 것이다.

   전도하면서 성경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신자들을 만나 왜 그토록 성경을 모르냐고 물으면 "우리가 전문가도 아닐 뿐 아니라 바빠서 언제 성경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다. 영생을 얻으면 살았으므로 자연히 성경이 깨달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요 당연한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당연한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의 두 번째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것은 거듭난 자의 당연한 변화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고, 사도들은 자기 시대를 다 보내고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직 지금은 그분들에 의해서 남겨진 성경과 성경을 깨닫게하는 성령님이 역사하실 뿐이다. 현대의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고는 결코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사실이 그러한데 현실은 어떠한가? 성경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순종치 아니한다.

   필자는 어떤 경우에 성경의 진실한 가르침을 말하면 그들은 자기 교회의 체제를 이야기하거나 목사님의 가르침이 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제도나 사람의 가르침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보다는 귀동냥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얻어들은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고백도 그러하다. 자세히 말씀으로 개인 교제를 하고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기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자신은 주일날이나 수요일 예배시간에 간단한 설교 듣고 집에 오면 그만이었다고 고백한다. 말씀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것이 생명있는 자의 기쁨이다. 그러나 생명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높이되 심지어 말씀의 내용과 반하는 이야기에도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따라가는 실정이다!

   제도를 이야기하였거니와 생명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도와 조직이 필요할 뿐이다. 무슨 뜻인가? 생명 없는 마네킹을 생각해보자! 마네킹 10개를 세워놓고 아무리 말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이리저리 옮겨놓으면 움직이는 피동적인 물체일 뿐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사람을 세워두고 있으면 자신의 분별력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제목처럼 허수아비는 생명이 없으므로 언제든지 거기에 머물 뿐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이므로 성경을 읽고 깨닫고 존경하고 순종하고자 한다.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주님 앞에 죄송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생명이요 생명의 활동이다. 오늘날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조직을 만들어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운영을 해나가면 다 교회인줄 아는가? 참된 교회는 거듭난 생명체들이 모여 조직과 규칙이 없어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다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아간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생명 있는 자들의 특징은 성경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에서부터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산사람이 꼬집으면 통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무슨 통증이 있겠는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들으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사람의 말을 주의 종의 말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숭배하는 오늘의 현실은 기독교에 사람 우상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증거인 것이다.

   세 번째로 생명 있는 자는 생명의 근원을 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피에 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으므로 구약이 지시하는 동물들의 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진들은 부지런히 속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사는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지 못했다. 히브리서에는 이와 같은 구속의 진리가 분명하게 다루어져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사 죄인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이것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의 피가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 교파를 초월하여 누구를 만나든지 생명의 근원되는 피의 공로를 사랑하는가를 살펴보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피의 능력을 알고 전하고 사랑하며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떤 집사님을 만나서 대화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고자한다. 필자는 "거듭난 경험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당연히 거듭났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거듭났느냐" 고 물으니 "예수님을 믿으니 거듭났지 않는냐?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니 당연히 구원 받았으며 거듭났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거듭남에는 증거가 있지 않겠는가?" 하니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필요하느냐"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덧봍이기를 자기도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잘 믿지 못하였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마음속에 주님을 틀림없이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주장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아니한 것을 생명 있는 자는 이미 알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영혼의 생명은 십자가의 피에 있다. 거듭난 사람들이 피를 사랑하고 피를 전파하고 피를 노래하는 그 감격을 아는가? 바울은 이 일에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 여러 곳에서 외치고 있다. 피의 가치를!(로마서 3:25, 에베소서 1:7, 골로새서 1:20, 히브리서 9:11~22 등). 그는 단정코 외치기를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브리서 9:22)고 하였다.

   거듭난 경험 있는 어떤 찬송가 저자는 피의 속죄가 맘속에 증거가 된다고 찬송하고 있다 (찬송가 186장 5절). 그리고 184장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피를 증거하고 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 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 얼마나 놀라운 찬송인가! 이외에도 수많은 찬송들이 피의 공로를 증거하고 있다. 교회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십자가의 피 공로를 노래하였다. 그렇다. 거듭난 생명은 피의 가치를 안다. 거듭났다고 말하거나, 구원을 주장하거나, 영생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가치를 양심과 인격으로 깨닫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깨끗하게 씻음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 책은 생명 있는 자들의 이름만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은 생명체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의 뜻도 "에클레시아"라고 하여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생명 있는 자들이 따로 모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신성한 모임인 것이다. 만약 이글을 읽는 독자 중에 생명의 활동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대의 영원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 쭉정이 신자가 아닌지 자신의 구원 문제를 냉정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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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몽학선생 아래서 착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여!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성경의 주제는 구원이다. 성경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고자 기록되었다(디모데후서 3:15, 요한복음 20:31). 만약 성경을 읽고도 구원의 길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이는 성경의 주제를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니, 그는 마땅히 성경을 다시 읽되 구원의 길을 알고자 하는 목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성경의 총체적 내용이 구원을 말하고 있으며,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구원을 이루는 부분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중 갈라디아서 3장 25절의 몽학선생도 구원받기에 이르는 한 단계를 말하고 있다.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우쳐서 구원에 이르도록 인도하는 안내자 역할을 몽학선생이라고 하는데, 이는 곧 율법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몽학선생은 구원자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단의 간계로 말미암아 초대교회의 수많은 사람들이 몽학선생, 즉 율법에 의해서 구원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이러한 부분을 깨우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구원을 증거하는 성경의 단계를 4단계로 압축 정리함으로 중간 단계에서 마치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 중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것은 알기 쉽게 하기 위하여 필자가 구원의 단계를 편의상 4단계로 나눈 것임을 밝혀둔다.


   구도자가 구원받기 위하여 넘어야 할 제 1단계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깨닫는 것이다. 성경은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고 있다. 불신자가 구원을 받으려면 우선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분이 우주의 창조자요 주인이심을 발견하는 과정이 필수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를 증거하고 계신 것이다.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 가지 초능력적인 기적이나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기도응답으로 자신의 실존을 증거하신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제 1단계,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경험하고 믿게 된 것만으로 구원받은 증거인 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신비한 경험, 기도응답 등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니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사단은 아주 지혜롭고 영리하여 수많은 거짓 그리스도인들을 이러한 방법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강한지 도대체 구원의 진리를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자기의 경험만 꼭 붙잡고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분명히 믿으나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제 2단계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발견한 사람은 곧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나의 근본은 무엇인가? 타락한 죄인 아닌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며 양심의 악을 깨닫지 못하는 죄인인 것이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도서 7:20).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으며, 아담을 통하여 인간 세계에 들어온 죄가 어떻게 번창하여 나갔는가 하는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아담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래로 인간과 죄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의 어느 인간이나 죄와 싸워서 완전히 승리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우선 믿음의 조상이요 우리 신앙의 표본이 된다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생각하여 보라. 조상 대대로 살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하루아침에 정리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새생활을 시작하는 일이 작은 일이겠는가? 이것은 생명을 건 모험이요 죽음을 무릅쓴 새로운 도전이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 아니고는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믿음의 간증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브라함도 두 번이나 인간을 무서워하며 자기의 아내를 아내가 아니라고 속임으로 하나님과 아내에게 죄를 지었다. 참으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그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가 없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로마서 4:2).

   다윗을 보라. 다윗은 이스라엘의 성군이었다. 그같이 선정을 베푼 왕이 역사 이래로 없었다. 참으로 다윗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표상 중 한 인물로서 성경은 다윗의 훌륭한 인격과 신앙심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다윗도 몇 번의 실수가 있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우리아의 아내를 불법으로 취한 사건이 바로 그 실수 중 하나이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취하고 또한 그 죄를 회피하여 보려는 간사한 꾀에 빠져서 결국은 악한 방법으로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믿음이 있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갑자기 악한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음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성경은 다윗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야 할 죄인임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혹자는 "노아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하기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것이다(창세기 6:9). 물론 성경에 기록된 이와 같은 말씀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더욱 자세히 보라. 창세기 6장 9절에 이 말씀이 나오는데 이말씀 전에 8절에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는 말씀이 먼저 기록되어 있지 아니한가? 은혜가 무엇인가? 불쌍한 처지, 좋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동정이 아닌가? 또한 노아는 술취해서 벌거벗고 누우므로 실수를 나타내지 아니하였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로마서 3:10). 하나님은 인생을 부패하고 썩은 정죄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라고 단언하셨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예레미야 17:9).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 한다. 그대가 죄인인 것을... . 자신이 죄인인 것을 심장으로 깨달았다면 그 단계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2단계만 깨닫고 구원받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2단계를 깨닫고 죄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하여 예배당에 가서 울고불고 탄식하는 것을 마치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이요 구원받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죄인인 것을 깨달은 것은 수영을 못하는 사람이 물에 빠진 것을 깨달은 것과 같다. 그가 '물'에서 구원받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죄'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마태복음 1:21).


   이제 제 3단계로 넘어가 보기로 하자. 죄인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죄값이 멸망의 지옥인 것을 알아야 한다.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수치심과 잘못됨을 깨닫고 두려워하고 있지만 지옥의 형벌과 연결시켜 깨닫고 있는 면은 매우 빈약하다. 죄에 대한 두려움과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죄인이 저주의 지옥에 들어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외로 덤덤한 반응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 필자를 놀라게 한다.

   왜 그런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기복신앙의 흐름에 잡혀 죄와 회개와 하나님의 복을 가르치지만 지옥의 끔찍한 상황은 가르치고 있지 아니한 결과라고 필자는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필자는 많은 기독교인들을 만나 지옥에 대해서 약간 들은 것,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듣고 깨달아 본 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졌을 때 10명중 8,9명이 "없다"고 답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슬프고 탄식할 일이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태복음 4:17)는 말씀이 아닌가?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여 보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이 아닌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는가? 멸망의 지옥을 증거하려 함이 아닌가? 그리고 멸망의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는 죄인을 그곳에서 건지려함이 아닌가? 그런데, 집사, 장로 직분을 받은 사람들 중 상당수가 지옥에 대하여 전혀 관심조차 없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사실인가?

   양떼들은 지옥과 천국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지도 모르고 "우리 교회 교인은 다 천국 가겠거니..." 착각하고 안일한 생활을 즐기는 목사님들이 우리 시대에 얼마나 많은가?

   오늘의 기독교의 상황은 사랑 많으신 주님이 아니더라도 양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릴만하다.

   멸망의 지옥을 우리는 마가복음 9장 43절 이하에서 볼 수 있는데 이 지옥의 끔찍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지옥은 영원히 불타는 곳이다. 세상의 어떤 불도 지옥 불보다 뜨겁고 무서운 불은 없다.

   (2) 지옥은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다. 어떤 사람이 말한 대로 모든 소망이 사라진 곳이다. 성경은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당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요한계시록 20:10). 거기에는 후회와 탄식과 눈물과 원망과 저주만 가득할 뿐이다(마태복음 13:42).

   (3)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인격을 완전히 무시당한 채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역사상 가장 극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곳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지옥에 "던지운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던지운다'는 뜻은 속된 말로 "쳐 넣는다"는 뜻이다(마가복음 9:45). 얼마나 절망적인 말인가 생각해 보기 바란다. 또한 '던지운다'는 뜻은 강제로 쳐 넣는다는 뜻 아닌가? 이토록 끔찍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지옥에 대해 두려움이 없는 거짓 선지자들을 보고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영혼의 문제를 지금 당장 검토하여 보기를 강력하게 촉구한다. 그리고 다음 단계를 깨닫고 구원을 받으므로 영원한 지옥을 면하게 되기를 바란다. 멸망의 지옥과 거기에 가게 되는 원인인 죄 문제를 깨달았다면 비로소 구원받을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인 제 4단계, 즉 구원받는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죄 문제에 대해 논할 때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도 죄를 정복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예외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째, 신분상 죄를 정복한 분이시다. 아담의 피를 받지 아니한 최초이자 최후의 인간이 되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처녀 마리아의 몸을 의탁하사 이 땅에 오심을 말한다.

   둘째로, 도덕적으로 죄를 정복하신 분이시다. 복음서를 보라.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언행 중에서 허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모든 죄의 유혹을 완전하게 정복하셨다.

   셋째, 능력으로 죄를 정복하셨다. 이것은 죄의 삯은 사망인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 값으로 죽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맛보셨으나 3일만에 당당히 살아나심으로 사망의 권세, 즉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히 2;14).

   넷째, 예수님은 실제로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 예수님은 죄와 싸워 이기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인생들의 죄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하셨다. 인간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짊어지고 가셔서 무덤에 묻어버리셨다.

   당신의 모든 죄가 갈보리 십자가에서 해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께서 무덤에 묻힐 때 다 묻어버리시고 주님은 부활하셨다. 그것은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몸으로 묻히신 주님께서 인간의 모든 죄를 묻어둔 채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심으로 입증되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나의) 죄를 담당하셨으니..."(베드로전서 2;24).

   오 그대여! 그대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 그대의 모든 죄가 그대의 어깨에서 다 사라졌으니(주님이 대신 담당하셨으니) 그대를 지옥가게 하는 모든 죄가 사라지지 않았는가?

   그대가 제 3단계까지 다 깨달았다 할지라도 만약 이 속죄, 곧 영원한 속죄 사실을 깨닫지 못하여 죄에서 해방 받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몽학 선생 아래 있는 것이요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옛날 몽학선생은 어린아이를 성년이 될 때까지 잘 보살펴주고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는 성년이 되는 과정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3단계까지는 몽학선생의 관점이지 구원은 아닌 것이다.

   모든 죄의 완전 속죄를 믿음으로 그대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인이 되었다면 그대는 몽학선생에서 이미 벗어나 구원에 이른 것이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갈라디아서 3:25).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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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다른 복음으로 고통받는 기독교인들이여!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라디아서 1:6).


   바울은 갈라디아의 여러 교회들이 진리에서 떠나 급속히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슬프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음이 분명하다. 앞에서 필자는 사람을 따라 다니는 불쌍한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여 본 바 있다.

   여기서는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갈라디아인들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보고자 한다.

   다른 복음! 이것은 분명 복음은 복음인 것 같은데 다른 복음이다. 쉽게 생각할 때 복음과 비슷한 가르침이지만 실상은 그 질과 내용에 있어서 가짜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하여 다른 복음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의 증상을 살펴봄으로 우리의 신앙을 진단하여 확실한 깨달음이 있기를 원한다.

   참 복음을 듣지 못하고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첫 번째 증상은 교회에 다니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보다 뛰어난 것이 많은데 그 중에 폭포수같이 쏟아져 내리는 큰 기쁨이 신자들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27절에 약속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하셨다.

   이 약속은 신실하여 오늘날 예수님을 통하여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상 종교들의 특성은 인생의 모든 고뇌와 죄악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학대하거나 심신을 단련하는 등, 스스로의 부단한 노력을 권장하고 있다.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의지한 자기 노력으로 평안을 이루려고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원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수양하는 과정에 있는 종교인들에게 무슨 평강과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인의 얼굴은 세월이 갈수록 심각하여지고, 거듭남으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사람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기쁨으로 가득 찬 밝은 모습이다. 우리 자신의 인격이나 성격, 그리고 육신을 들여다 볼 때 기쁨과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근심과 절망이 있을 뿐이다.

   어떤 종교는 참 도를 찾아서 방황하다가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여 심지어는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보게 된다. 생각하여 보라! 아무리 종교적 업적을 훌륭히 쌓고 종교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하여도 그의 중심에 참 평안이 없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는 세상 종교는 그렇다하여도 주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이 참 평강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이것은 껍질만 있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다른 복음에 잡혀있는 종교인의 모습은 쭉정이 그 자체다. 쭉정이의 특징은 겉으로는 알곡처럼 보이는데 속은 텅 비어있는 가짜다.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인 듯하나 속에는 내적인 변화가 없이 스스로 자신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고, 세상을 속이는, 변화된 기쁨이 없는 쭉정이 기독교 교인은 물론이요 지도자들도 포함되고 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음을 주목하기 바란다(마태복음 7:21~23).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최근에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어떤 성도는 죽기 위하여 자살 장소로 가다가 친구 집에 잠시 들러 구원받고 주님을 만난 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어 큰 기쁨 중에 주님을 섬기고 있다.


   다른 복음에 붙잡힌 자의 두 번째 증상은, 기쁨이 없을뿐만 아니라 거듭난 확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입술로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지만 그들의 생활에서는 천국의 소망에 붙잡혀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지 실제로는 세상 일에 빠져서 천국에 대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사는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죄 용서받는 십자가의 진리를 기독교 교리 중 하나로 이해하고 있을 뿐 구원의 근원, 즉 생명의 근원이 되는 천국의 열쇠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 받고 천국에 가는 진리는 성경의 주제이며 모든 믿는 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깨달아야 하며 늘 감사해야 할 놀라운 말씀이다.

   이와 같이 확실한 구속의 진리를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거듭남의 기쁨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과의 사귐 속에서 확신 중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천성을 향하여 살아간다. 이것을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한다. 이말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생활에 무책임하거나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에 가는 자들의 세 번째 증상은,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생활을 할뿐만 아니라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상담 중 18년 동안 교회에 다녔다는 한 종교인을 만나 성경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말씀이지요" 하고 대답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대답인가!

   12년 동안 교회에 다닌 어떤 사람에게 구약은 "옛날에 주신 약속", 신약은 "새로 주신 약속" 이라고 말하니 " 그 말이 그 뜻입니까?" 하고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거듭나지 못하였으니 성령이 그 속에 없는 것이요, 그 속에 성령이 없으니 성경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들은 성경을 도대체 읽지 않는다. 성경은 예배당에서 설교 때 한두 번 찾아보기 위하여 소지하고 있을 뿐 도대체 읽지 않는다. 바빠서도 그렇지만 그들의 중심에 주님의 영이 없으니 성경을 읽을 의욕이 없는 것이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안타깝고 불쌍하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성경은 교회 지도자나 기타 특정 자격이 있는 사람만 깨달아지는 책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도자 또한 그렇게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그들은 성경을 읽어도 깨달음이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이 소경이기 때문에 깨달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정상적인 성도라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문제나 잘못을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을 바른 길로 깨우치고 인도하는 지침서이다. 모름지기 거듭난 신자라면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깨닫고 실천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디모데후서 3:16).

   성경에 대한 정상적인 깨달음이 없으니 내적인 기쁨과 평강이 없을 뿐 아니라 외적인 변화도 없는 것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있는 종교인들의 네 번째 증상은, 기도응답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혹은 광신적인 체험을 경험한 것으로 구원 얻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들 중에는 양보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이 있으나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어려운 상황에서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심을 몇 번 경험한 것으로 구원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알 것은 구원받지 아니한 이방인도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도응답이 구원의 궁극적인 증표가 될 수 없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이나 기타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구원으로 주장하고 있는바 이것은 다 위험한 신앙관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에 특수한 목적으로 주어진 방언이 오늘날 그러한 목적성이 사라진 때에도 존재한다고 보기 힘들다. 방언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계시 받고 하나님을 섬겼고 그러한 섬김의 모습 속에서 서신서들이 기록되었다. 오늘날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할만한 분명한 근거도 없거니와 그것이 구원의 증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신비한 체험들이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으니 이러한 것들 또한 다른 복음에 잡혀 있는 불행한 현상이다.


   다른 복음에 붙잡혀 지옥으로 가고 있는 종교인들의 다섯 번째 증상은 그들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집사님과 대화한 내용을 소개해 보겠다. 그 집사님은 자신의 신앙을 나에게 관철시키려고 변론하는 가운데 있었다. 그는 필자에게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길이며, 고난의 길이며, 어려운 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에게 마태복음 11장 28절을 펴서 보여 주면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짐과 인생의 짐을 다 풀어 주셔서, 나는 기쁘고 평안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는데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무슨 짐을 오히려 지워줍니까? 그 예수님은 나의 예수님과 다른 이상한 예수님이네요?" 하고 말하니 그 후에는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고뇌를, 모든 죄를 다 담당하셨다. 주님은 거짓말하실 리가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인가! 죄의 짐에 눌려 웃을 날이 없고, 평강이 없으며, 고통 가운데 살던 자에게 주신 기쁜 소식이 아닌가!

   예수님이 그대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나 교리적으로는 알지만 그 말씀이 그대의 생활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면 그대는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대의 모든 죄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그대를 죄와 죄의 고통에서 실제로 해방시켜주셨다. 이제 죄의 굴레가 결단코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설정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다. 그분에게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며 예배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그분 뵈올 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천국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이다.

   "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요한계시록 21:3).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동참하게 될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무슨 역할을 하고 계시는가? 하나님이 궁극적 신앙의 대상이라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구원자요, 인도자이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며, 기도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들림 받을 때에도 예수님께서 친히 공중까지 마중 나오셔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6 ; 요한복음 14: 2,3 참조).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셔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셔야만 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이며, 유일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죄악이다.

   "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이사야 59:2).

   이 말씀과 같이 인간의 죄악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교제를 끊는 걸림돌이 되었으니 주님의 십자가의 속죄는 인간에게 최고의 복음(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이 단번에 이루신 십자가 사역으로 인간의 모든 죄가 완전하게 청산되었고 그러므로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이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다. 또는 아주 악질적인 죄인도 천국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인류 역사 6,000년에 최고의 경사가 있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역이다. 이일로 말미암아 죄인이 그의 죄로 인하여 지옥에 갈 그 어떠한 이유도 사라졌다. 다만 완전한 속죄와 영원한 속죄(히브리서 10:17~18, 9:12)를 믿지 아니함으로만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대가 만약 영원한 속죄로 말미암아 죄인의 굴레를 벗어버린 사실을 심령으로 깨닫고 믿었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말씀드리건대 그대는 의인이 되었으며 구원을 받은 것이다(히브리서 10:10~18 ; 요한복음 5:24 참조). 그러므로 지옥과 인연이 끊어졌고 죄악과도 인연이 끊어졌다. 하나님은 그대의 영원한 아버지와 보호자가 되신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의 영원한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그분은 세상에 계실 때에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복음의 실체다. 당신에게 참된 기쁨을 주실 수 있는 구세주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그대도 받아들이고 주님의 참 제자가 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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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갈라디아서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허윤욱-

                                           서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십 년 전에 횃불에 연재된 채 묻혀 있었던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게 됨에 한없는 감사와 눈물이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때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본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했던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사단의 역사가 시작되니, 지도자들이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양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이 되어 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이 분노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일어날 때에 창으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찔러 악을 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았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분노와 같다(민수기 25장).

   오늘날은 갈라디아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여도 정직한 복음을 듣기 힘들며, 진리를 왜곡하여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로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순응하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정죄 당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믿으려 발버둥쳐도 거대한 종교 집단에 순응하지 아니하면 정죄 당하는 현실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기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닌가?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종파의 헌법을 더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더 따르지 아니한가?

   필자는 썩을 대로 썩어 가는 한국 기독교 현실을 바라보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의 길잡이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어 이글을 읽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는 기도와 바람이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강력한 책망의 표현이 있을지라도 비느하스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로 받아서 소화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기도해 주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전도출판사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2001년 8월


             사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기독인들이여!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갈라디아서 1:1)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냐?"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냐?" "특별한 지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근거도 없는 자신의 외고집 생각만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진실은 하나님이 보장하시고(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성경이 담당하고 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깨우치심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주체가 된다고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든 신자가 읽고 순종하고 높이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고, 사람 중심으로 모여지며,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 초대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으며,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어 신약교회 시작 전에 이루어져 신약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이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금일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사람의 이름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종파를 만들어 여기에 소속하면 잘 믿는 것이고 이 종파에 소속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 종파들은 대부분 불과 3,4백년을 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만이 순수하고 정통인 것처럼 착각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들 전에 순수하게 믿었던(종파와 소속없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던가? 초대교회의 12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은 금세기에 있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 모두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필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잘 설명하여 주어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따르지만 성경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현실이여! 어쩌다 성경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졌단 말인가? 성경이 사람의 말보다 못하단 말인가? 성경을 사람의 말과 가르침보다 푸대접하는 이 세대는 정죄 받아 마땅한 세대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의 교훈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부터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이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다윗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헤브론으로 사람을 모을 때, "청함을 받은 200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사무엘하 15:1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가야하는지, 자기를 청한 압살롬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사람만 보고 몰려갔던 것이다. 압살롬은 그 외모가 다른 왕자보다 뛰어났으며, 그는 다윗의 왕자였으니 차마 아비를 배반하랴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외모와 상황과 신분만 보고 바보처럼 따라갔던 이 사람들의 말로가 처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잘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요 거울이다.

   금일에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로 위장하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오늘날 각 종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절차를 다 밟아서 정상적으로 목사의 직분에 이르렀으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조심하여야 한다. 반드시 조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어린 양떼들이여! 저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목자이며, 거짓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말씀은 거짓일 수 없으니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기 바란다. 자식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에도 입만 열면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찌 거짓 종일 수 있느냐고 의심할지 모르나 압살롬을 따랐던 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모반한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18장에 나오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모른다. 2만을 헤아리는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사무엘하 18:8).

   오늘날 영적인 세계의 혼탁한 상황은 수풀을 가리키는바, 이 영적인 세계의 수풀 속에서 사람을 따라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불쌍한 양떼들을 말함이 아닌가? 그들은 진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파, 저 종파로 몰려다니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죽어간 것이다. 자신들은 잘 믿는다고 알았는데 왜 지옥에 갔는지 그 이유를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알 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울며 이를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3;50).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여! 양떼들이여! 사람을 따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

   "이 땅에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이와 같은 일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여도 사람들은 분별없이 따르니 도대체 어찌 하려는가? 선한 양떼들이여, 불쌍한 소경들이여!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는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일의 기독교계서 행해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기본 상식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따르고 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교회가 물질화, 인본주의화 되어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에서의 망령된 길을 스스로 따르고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스스로 팔린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믿으며, 이권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은 신구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죄악이다.

   둘째로, 그들은 거짓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발표하였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아직도 그러한 거짓 것을 따라가는 우매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그들이 거짓 것을 예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라 하여 폭력적 권력이나 독재자들로부터, 억압자나 가진 자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정치운동을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해방자인 것은 성경도 가르친다(로마서 8:1,2).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자이시지, 독재자나 착취자로부터 해방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거짓 것을 가르치되, 열심히 노력하고 교회 제단에 충성하면 은혜 받고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만 이 엄청난 구원을 단번에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감격, 감사하여 자의적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셋째로, 그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 타락된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하여 권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었는데, 금일의 기독교 상황은 목사를 공공연하게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처럼, 가르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 15장 4절 말씀을 읽지 못하였는가? 성경은 구원 받은 자면 다 제사장이라고 선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는가!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9).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처럼 가르쳐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며, 자신의 말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는다고 협박하여 양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섬기면 복 주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해 버리는 독재자인가?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양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성수주일 안 하고 십일조나 기타 헌금실적이 부실하면 당장에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보이게 하는 현실은 탄식할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를 병들게 한 권위주의, 즉 일인목회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이시다. 이 일에 필요하다면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겠으나 중보는 한 분 예수님뿐이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중보이시다. 그분은 인간 편을 바라보실 때 죄 속에서 죽어서 죄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죄 문제와 싸우다 죽어 가는 슬픈 존재인 것을 주님이 보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편을 바라보실 때 인간을 사랑하시나 죄는 사랑하실 수 없고, 인간과 같이 계시고 싶으시나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셨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천국에 데려가고 싶으시나 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죄인을 데려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셔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다 충족시켜주신 완전한 중보자(중재자)가 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영원한 속죄! 독자여,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깨달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마음속 깊이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는 구원 얻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가 영원히 해결 되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었다! 말끔히 씻었다! 이제 그대가 할 일은 이 십자가의 속죄를 단순히 감사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해졌다고 성경은 이미 선포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 말씀으로 의로워졌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중보가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주님은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5~18).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구원받은 모든 자가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이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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