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받았느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태복음 1:21).
"구원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으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작금의 한국기독교의 현주소인데 이것은 바람직한 모습인가? 성경적인 행동인가? 과연 주님의 뜻인가? 여기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살펴보면서 참된 믿음의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지극히 성경적인 질문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기독교 역사에서 첫 번째 설교제목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사도행전 2장에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성령으로 방언하는 것을 가리켜 요엘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중대한 범죄를 드러냈다. 그리고 죄인들의 손에 애매히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신 사실을 외치며 결론을 내린 것이 "구원을 받으라"였다. 그리고 이날 3,000명이 구원을 받았다.
기독교의 시작이 이럴진대 "구원을 받으라", "받았느냐" 하는 질문은 당연하지 아니한가?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에서 "구원 받았느냐"는 질문이 충만해질 때에 한국의 기독교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풍성한 발전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으라"는 질문과 함께 "구원을 받았는가"를 서로 확인하며 도와주며 주님 앞에서 영생의 문제를 위해서 서로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때에 필자는 전도하다가 어떤 기독교인을 만나 "구원 받았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눈을 덩그렇게 뜨고 떨리는 목소리로 "구원파가 아니요?"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를 받아서 194장을 찾았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려
주 예수 십자가 지셨으니
기쁘게 부르세 할렐루야
나 구원 얻었네."
여기까지 읽어주고는 "당신도 구원파요?" 하고 물으니 그는 찬송가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을 하지 못하였다. 구원을 주제로 파를 만들거나 또 다른 조직을 만드는 데는 필자가 동의할 수 없으나 "구원 받았느냐"고 물으면 "구원파요?" 하고 질문하여 잘못된 믿음을 가진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오늘의 기독교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194장뿐 아니라 여러 찬송가들이 구원 받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기독교가 구원의 기쁨을 잃는다면 이는 알맹이 없는 선물 상자일뿐이다. 아무 쓸모없는 종교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둘째로, 구원을 얻었다는 말씀이 성경 여러 곳에 보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는 "구원을 얻었나니"이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의 여러 교회에 서신을 보내면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유다서 1장 3절에서도 "얻은 구원" 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이미 얻었다는 것이며 얻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역시 구원을 얻었다고 간증하고 있다면 얻었느냐고 묻는 것 또한 당연하지 아니한가?
바울의 서신서를 잘 살펴보면 그로 하여금 그처럼 열정적으로 힘있게 신앙생활을 하게 한 원동력은 구원받은 기쁨이었음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어느 경우에 또 기독교 신자를 만나서 "구원 받았느냐?" 고 물었다. 그는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어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고 되묻는 것이었다. 필자는 담대히 말하기를 "그것을 모르면서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가는가?" 하였다. 월급을 받는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이 무작정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간다는 보장도 없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지 아는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나님 믿느라고 온갖 희생 다하고 헌신하고 이방인들에게 온갖 핍박 다 받고 애매한 고난을 당하면서 슬픔을 참고 천국에서 위로 받을 줄 알았는데 천국에 가지도 못하고 지옥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인가?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느냐고? 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못 믿겠으면 마태복음 7장 21절 이하를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주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병고치고 주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한 충실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평생 하나님의 이름으로 살았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으며 온갖 희생을 다 치루면서 주님을 위해 한 평생 바친 자들이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지옥에 가는 마당이니 그 밑에 딸린 양들의 형편을 어찌하려는가?
성경은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천국의 약속을 보장해 주고 있다. 그와 같은 말씀의 근거 속에 거듭난 성도들은 이 말씀의 뜻을 이해 할 것이다. "그 사랑 받은 자만이 그 사랑 알도다"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
사랑하는 그대여, 구원 받았는가? 진정 구원받았는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조심스런 마음으로 자기를 살펴야 할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한 구도자를 만나서 상담하였다. 그는 자신은 구원받았으니 교리적인 부분만 자세히 가르쳐서 자신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정확하게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을 지적하여 주어도 그는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여 말씀을 순종할 영력이 없고 성령의교통도 없는 사실을 보면서 필자는 말해주었다. "선생에게는 교리적인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문제가 있네요" 하니 얼굴색이 변하였다. 다시 말하기를 구원 받은 것 같지 않아요" 하니 그는 얼굴을 붉히면서 "왜 내가 구원 받지 못했습니까?" 하였다. "보세요. 그대가 구원 받지 못한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그대의 언어입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 과격하고 저돌적이다가도 구원 받으면 순한 양으로 변하지요. 당신에게는 영원한 지옥에서 건짐 받은 기쁨, 건저 주신 자에 대한 감사, 전해준 자에 대한 감사 등 구원 받은 자의 기본적인 모습들이 없어요. 구원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요 막연한 교리 정립이 아닙니다."
그에게 구원의 증거를 말해달라고 하니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으니 구원받은 것 아닙니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니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니 믿는 것 아닙니까?" 하는데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한지 안타깝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예수님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우기는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글를 읽는 독자여, 그대의 모습은 어떠한가?
세 번째로 구원 받으라는 질문이 합당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를 믿었다는 뜻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뜻은 구원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서두에 예시한 말씀은 이 시실을 말해 주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구원할 자이심이라." 주님의 이름의 뜻이 그러하고 주님의 오신 목적이 그러하다면 구원을 질문하고 구원을 답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한가?
다시 말하거니와 예수께서 오신 목적을 바울도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고 증거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그렇게 증거하고 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얼마나 정확한 말씀인가. 해석이 따로 필요 없는 분명한 선언이다.
구원을 물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 전체가 구원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복음 5장 39절에는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다고 직접 증언하신 말씀이 있다. 말씀은 예수님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구원이다. 그렇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도 성경은 구원을 말하고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다. 이 부분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구원 프로그램이 나와 있다. 이 계획은 아담의 범죄 직후에 발표되었다. 여자의 후손(예수님)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실 것을 이미 선언하신 것이다. 이 발표 후 하나님은 이 구원 계획을 실천하셨으며 그 과정을 기록한 것이 신구약 성경이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실제로 구약에 나타난 수많은 인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의 수많은 사건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의 경우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셨다. 왜일까? 아벨의 제사는 정성스러웠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정성이 부족했기 때문인가? 어떤 목회자는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분별은 소경이요 구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인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넋두리인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피가 없고 아벨의 제사는 피가 있는 차이였다. 그 피가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있으며 이 피는 죄인을 죄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을 말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사로 드리려하는 사건은 무엇인가? 외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지 아니한가? 하나님은 외아들을 내어주셔서 죄인을 구원하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
구약의 사건 중에서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주님의 구원 모습을 나타내는 사건 중의 사건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출애굽 사건이다. 바로가 끝까지 이스라엘의 해방을 거절했을 때 하나님은 유월절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그리고 심판이 지나가는 밤에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에는 장자를 죽이는 재앙이 지나갔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애굽기 12:13).
오늘날도 여러분의 마음의 문에 예수님의 피를 발랐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려니와 그 피가 없으면 심판 받고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뿐이다. 이것 또한 구원의 모형이다.
찬송가 가사에도 "그 피가 맘속에 큰 증거 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찬송가 가사만 제대로 깨달아도 구원받기에 충분하다.
구약의 사건뿐만 아니라 인물들도 구세주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중의 모형이다. 그 이름이 모세 즉 건져냄을 뜻하였으니 곧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손에서 건져냈으니 우리의 구주 예수께서 우리를 마귀와 그의 나라로부터 구원하심과 같다.
그 외에도 구약의 수많은 인물, 수많은 사건이 예수님과 그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은 온통 구원을 나타내고 있거니와 성경을 말하면서 구원에 대한 관심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에게 "구원 받았는가?" 물으니 말하기를 "그것은 기초요 기본인데 왜 묻느냐"고 반문하였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 말이 맞다. 더구나 그가 만약 구원을 받았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치고 구원을 확실하게 받은 사람을 필자는 보지 못하였다. 구원은 신앙의 기초일 뿐만 아니라 전부이다.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잃어진 인생들을 되찾아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성경이 쓰여졌고 성경대로 역사는 진행되고 있다. 구원은 성경전체요 성경의 주제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인들이 구원을 기초 및 초보라 하여 가볍게 여기는 풍조를 보는데 이것은 한심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구원이 없으면 천국도 없고 영생도 없고 부활도 필요 없으며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아무것도 아니다.
구약은 구원의 약속이요 신약은 약속의 성취이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발견해야 한다. 구약의 구원의 그림자 중에 확실한 그림자는 제사법이다. 구약의 거의 모든 제사는 동물의 피를 통하여 제사를 지낸다. 레위기 17장 11절에는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피 없는 제사가 속죄를 이룰 수 없다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브리서 9:2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9).
이로 보건대 양은 예수요 피는 예수님의 피임이 틀림없다.
이제 결론을 내리려 한다. "구원 받았느냐" 하는 질문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서두에 기록하였거니와 이제 분명히 말하노니 그렇게 묻지 아니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요 어쩌면 구원 없는 이단이기 쉬우리라. 그대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이제는 죄인이 가야 하는 멸망의 지옥에 갈 걱정이 전혀 없어졌다는 확신 가운데 기뻐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즐거움이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빌립보 간수처럼 정직하게 묻게 되기를 바란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사도행전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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