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기독교와 비기독교와의 확실한 차이가 무엇인가?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닌가?
영생이 무엇인가? 영원한 생명의 약자(略字)이다(요한일서 2:25). 우리의 자랑이 무엇인가? 생명이 아닌가? 눈이 있어 길을 다니나 참된 길이 되신 주님을 보지 못하던 소경이요, 세상 만물을 보고 있으나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를 알지못하던 살았다 하나 죽은 자가 아니었던가? 이와 같이 죽은 생명이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랑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오늘의 기독교인이 생명을 얻지 못하였다면 이는 진정 슬픈 것이다.
누구보다도 필자는 생명 없는 종교인 생활을 17년이나 하였던바 이 일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이다. 서두의 제목을 보면 허수아비 신자들을 제시하였다. 허수아비는 모양은 틀림없이 사람이라서 논 가운데 세워두면 참새가 처음에는 속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 생명 없는 것이 드러나면 그 때는 생명 있는 참새를 속이지 못한다.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자의 모양은 가졌으나 생명이 없으므로 사단의 조롱거리요 장난감으로 전락하여 사단에게 평생 농락당하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지옥에 가서야 이 사실을 깨달을 터이니 그 절망이 어떠하겠는가?
여기서는 사단에게 농락당하는 생명 없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고자 한다.
생명 없는 종교인들의 첫 번째 모습은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성경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혹 깨닫는다 할지라도 더듬는 수준이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하겠는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구원의 즐거움을 이기지 못하여 동네의 선배 목사님에게 가서 " 나 구원 받았다" 고 간증하였다. 그는 신앙경험이 아주 적었으므로 그가 당연히 구원 받았으리라 생각하고 간증하였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은 기가 막힌 말이었다. 함부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시한 말씀은 빌립보서 3장 12절의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를 인용한 것이었다. 그 성도는 교회 출석 경력이 많지 아니하므로 어리둥절하여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여 다시 그 말씀을 살펴보니 믿는 성도들의 상급에 관한 말씀인 것이 분명하였다. 그가 영적인 아이라도 깨닫는 것을 목사님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생명 없는 죽은 신자는 지도자건 평신도건 소경일 뿐이다. 수많은 신자들이 죽은 자들이므로 성경이 깨달아지지 아니하므로 고통 당하고 있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 열심인 신자들이 여호와 증인을 비롯한 드러난 이단들에게 미혹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의 무지에서 오며, 생명 없는 죽은 신자이기에 오는 것이다.
생명 없는 거짓 신자에 대하여 성경은 여러 경로를 통하여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사역을 예언하면서 쭉정이에 관해서 언급하였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태복음 3:12).
"쭉정이",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기를 열심 없는 기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 진실로 그러할까? 그러면 기독교의 열심 있는 신자들은 여기에 해당 없는가? 정말 그러할까? 아니다. 분명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차이다. 알곡과 쭉정이는 생명의 차이다. 농사를 지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쭉정이는 죽은 곡식이다. 오늘날 기독교에서 대단한 열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 모습으로 보일지라도 생명 없는 쭉정이일 수 있다.
말씀 부분에 관해 더 생각해 보자! 필자가 여호와 증인에 관해 언급하였거니와 그들의 주장이 얼마나 유치하고 억지인가는 거듭난 생명 있는 신자라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들이 삼위일체를 부인하거니와 성경은 너무도 명확한 증거들을 말하고 있다. 생명은 성경을 깨닫는 능력인 것이다.
전도하면서 성경에 대하여 너무도 모르는 신자들을 만나 왜 그토록 성경을 모르냐고 물으면 "우리가 전문가도 아닐 뿐 아니라 바빠서 언제 성경을 배울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문가의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이다. 영생을 얻으면 살았으므로 자연히 성경이 깨달아진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요 당연한 것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젖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당연한 것이다.
생명 없는 신자의 두 번째 모습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 것이다. "말씀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난 것은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두려워하여 순종하는 것은 거듭난 자의 당연한 변화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셔서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고, 사도들은 자기 시대를 다 보내고 부활을 기다리고 있으며, 오직 지금은 그분들에 의해서 남겨진 성경과 성경을 깨닫게하는 성령님이 역사하실 뿐이다. 현대의 기독교에 있어서 성경의 권위가 세워지지 않고는 결코 바른 교회가 세워질 수 없다. 사실이 그러한데 현실은 어떠한가? 성경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지할 뿐 아니라 알아도 순종치 아니한다.
필자는 어떤 경우에 성경의 진실한 가르침을 말하면 그들은 자기 교회의 체제를 이야기하거나 목사님의 가르침이 제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이 만든 제도나 사람의 가르침이 우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깨달음이 있기보다는 귀동냥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얻어들은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의 실제적인 고백도 그러하다. 자세히 말씀으로 개인 교제를 하고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자기 교회에서는 들어보지 못했으며 자신은 주일날이나 수요일 예배시간에 간단한 설교 듣고 집에 오면 그만이었다고 고백한다. 말씀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말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아가는 것이 생명있는 자의 기쁨이다. 그러나 생명 없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와 그들의 이야기를 더 높이되 심지어 말씀의 내용과 반하는 이야기에도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더 따라가는 실정이다!
제도를 이야기하였거니와 생명 없는 사람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제도와 조직이 필요할 뿐이다. 무슨 뜻인가? 생명 없는 마네킹을 생각해보자! 마네킹 10개를 세워놓고 아무리 말해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이리저리 옮겨놓으면 움직이는 피동적인 물체일 뿐이다. 그러나 생명 있는 사람을 세워두고 있으면 자신의 분별력을 가지고 움직일 것이다. 생명이기 때문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다. 제목처럼 허수아비는 생명이 없으므로 언제든지 거기에 머물 뿐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생명체이므로 성경을 읽고 깨닫고 존경하고 순종하고자 한다.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면 마음이 불편하고 주님 앞에 죄송하며 스스로 고통스러워한다. 이것이 생명이요 생명의 활동이다. 오늘날 생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종교인들을 모아놓고 조직을 만들어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고 운영을 해나가면 다 교회인줄 아는가? 참된 교회는 거듭난 생명체들이 모여 조직과 규칙이 없어도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아름다운 성경적인 교회를 이루어 나아간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생명 있는 자들의 특징은 성경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으면 양심에서부터 통증을 느끼는 것이다. 산사람이 꼬집으면 통증을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무슨 통증이 있겠는가? 성경을 읽으면서도 들으면서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며 사람의 말을 주의 종의 말이라는 미명 아래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숭배하는 오늘의 현실은 기독교에 사람 우상이 깊숙이 침투해 있는 증거인 것이다.
세 번째로 생명 있는 자는 생명의 근원을 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 피에 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보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명의 근원이 피에 있으므로 구약이 지시하는 동물들의 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진들은 부지런히 속죄의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사는 한계가 있으므로 우리의 죄를 영원히 속죄하지 못했다. 히브리서에는 이와 같은 구속의 진리가 분명하게 다루어져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브리서 10:4).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 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인의 모든 죄를 영원히 사하사 죄인에게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한을 주셨는데 이것이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의 피가 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필자가 교파를 초월하여 누구를 만나든지 생명의 근원되는 피의 공로를 사랑하는가를 살펴보면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피의 능력을 알고 전하고 사랑하며 자랑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어떤 집사님을 만나서 대화한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고자한다. 필자는 "거듭난 경험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그는 당연히 거듭났다고 대답했다. "어떻게 거듭났느냐" 고 물으니 "예수님을 믿으니 거듭났지 않는냐? 구원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니 당연히 구원 받았으며 거듭났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거듭남에는 증거가 있지 않겠는가?" 하니 "그냥 믿으면 되지 무슨 증거가 필요하느냐"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덧봍이기를 자기도 처음에는 교회에 나가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잘 믿지 못하였는데 질병으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겪고 난 뒤에 확실히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기는 마음속에 주님을 틀림없이 믿으니 구원 받았다고 주장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
그러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아니한 것을 생명 있는 자는 이미 알고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고 영혼의 생명은 십자가의 피에 있다. 거듭난 사람들이 피를 사랑하고 피를 전파하고 피를 노래하는 그 감격을 아는가? 바울은 이 일에 교회들에게 보낸 서신 여러 곳에서 외치고 있다. 피의 가치를!(로마서 3:25, 에베소서 1:7, 골로새서 1:20, 히브리서 9:11~22 등). 그는 단정코 외치기를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히브리서 9:22)고 하였다.
거듭난 경험 있는 어떤 찬송가 저자는 피의 속죄가 맘속에 증거가 된다고 찬송하고 있다 (찬송가 186장 5절). 그리고 184장에서는 더욱 강력하게 피를 증거하고 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 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예수의 흘린 피 날 희게 하오니
귀하고 귀하다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이 얼마나 놀라운 찬송인가! 이외에도 수많은 찬송들이 피의 공로를 증거하고 있다. 교회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시인들이 십자가의 피 공로를 노래하였다. 그렇다. 거듭난 생명은 피의 가치를 안다. 거듭났다고 말하거나, 구원을 주장하거나, 영생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의 가치를 양심과 인격으로 깨닫고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대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서 깨끗하게 씻음 받았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그 책은 생명 있는 자들의 이름만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 받은 생명체들의 모임이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의 뜻도 "에클레시아"라고 하여 "불러낸 무리"라는 뜻이다. 생명 있는 자들이 따로 모여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신성한 모임인 것이다. 만약 이글을 읽는 독자 중에 생명의 활동이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대의 영원을 위해서 자신의 구원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허수아비 신자, 쭉정이 신자가 아닌지 자신의 구원 문제를 냉정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생명 없는 자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한복음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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