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는

                                                              H. A. 아이언사이드


                                                  3장


                              영과 혼과 몸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신성한 한 분 하나님이자, 또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 곧 그 위엄과 능력과 모든 속성이 동등하신 영광스러운 세 위격으로 존재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가리켜 "삼위일체 하나님" 이라고 부릅니다.

   이 단어 자체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이 사실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반복되어 있으며, 특별히 이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식에서 신조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Father, and dof the Son, and of the Holy Ghost) 세례(침례)를 주노라"는 문구에서 확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비록 세 분의 위격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복수형인 이름들(names)이 아닌, 단수형의 이름(the Name)이 사용 된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세 분이 합하여 한 분이신 것입니다(요일 5:8 참조).

   사람도 우리가 삼위일체라고 부르는 세 부분으로 된 한 인격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곧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존재입니다. 몸만으론 사람이 아닙니다. 혼만으로도 사람이 아닙니다. 영만으로도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영과 혼과 몸이 함께 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이 각각의 의미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바가 무엇이냐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몸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몸은 인간의 물질적인 부분이며, 물질적인 창조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분입니다. 몸은 속사람이 거주하는 집입니다. 몸의 현재적인 상태는 노화와 죽음에 의해 좌우되고 있지만, 장차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을 것이며, 그때에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몸이 모두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은 부활의 몸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몸으로 행한 바에 따라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는 천년이 지난 후에 부활하게 되며, 백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되고, 그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 보면, 태초에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인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세 번이나 하나님이 "창조하셨다"(created)고 말씀하신 사실을 보게 됩니다. 1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물질(matter)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물질의 두 번째 창조에 대해서 발견하지 못합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바로 여기 1절의 창조시에 형성되어 나온 것입니다.


   21절에서 우리는 두 번째 창조 행위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여기 "움직이는 모든 생물"은 "살아있는 혼(living soul)을 가진 모든 존재"로 번역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시작을 보게 됩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죽은 물질로부터 저절로 생성된 생명 따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죽어있는 것과 살아있는 존재 사이에는 절대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진화과정을 겪는다 해도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이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의존적인 생명이 우주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창조주로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게 될 혼은 하등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부분입니다. 혼은 욕구, 감정, 그리고 본능의 능력을 가진 자연 생명입니다. 동물의 혼은 몸이 죽을 때 같이 죽게 됩니다. 반면에 인간의 혼은 영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년 전에 저는 캘리포니아의 로스 가토스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집회가 있어서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몰몬교도들도 거대한 천막을 치고 수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수양회 장소를 지나다가, 한 쪽에 세워둔 매우 인상적인 간판을 보게 되었습니다. 매우 큰 글자로 다음과 같이 써있었습니다.


   "10,000불 상금을 드립니다."

   "성경에서 불멸하는 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을 찾아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미국 금화로 10,000불을 드립니다."


   저는 강사를 만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의자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밖에 있는 간판을 보고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꽤나 흥미 있어 하면서 "그래요? 10,000불을 벌고자 왔단 말이죠?" 라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이 사용한 용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성경 어디에도 불멸하는 존재인 혼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는 셈이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묻기를 '성경은 불멸적인 혼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인간의 혼이 멸한다고 믿으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물론입니다. 성경이 불멸하는 혼에 대해 말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혼은 멸해서 없어지는 것이지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로 하여금 성경이 불멸적인 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소멸하는 혼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직면하도록 했습니다. 성경이 소멸하는 혼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혼이 멸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합리적임을 그에게 지적하며, 그의 견해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제가 만일 몸이 죽을 때 혼은 결코 죽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는 성경구절을 보여드린다면 제게 10,000불을 주시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당신이 먼저 제기했던 불멸하는 혼에 대한 문제는 결국 몸은 죽어도 혼은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명함으로써 해결 될 것 같은데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는 즉시 당황해하며 "그것은 해석상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했고, 나는 10,000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사라져 감을 예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본문을 제시했습니다. 당신도 마태복음 10장 28절에서 이에 대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주님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몸이 죽을 때 혼은 죽을 수 없다는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논의해온 "불멸하는 혼"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몰몬교도는 잠시 주춤하더니, 침묵으로 10,000불 주기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멸하게 될", "죽을" 혹은 "불멸하는"과 같은 단어들은 오직 몸과 관련해서만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께서 하늘로서 재림하실 때까지 살아있다면 이 죽을 몸은 죽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 1장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세 번째 창조행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27절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사람이 만일 인간보다 하등 동물로부터 진화한 것이 사실이라면, 왜 이와 같은 독특한 창조행위가 필요했겠습니까? 사실 하나님과의 교통이 필요 없었다면 몸과 혼만을 소유한 피조물은 생각하고 사유하는 기능을 가진 영이 필요치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을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으뜸이 되게 하는 진정한 이유입니다.

   당신이 스가랴 12장 1절을 읽어보면,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말씀의 경고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spirit)을 지으신 자가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하늘을 펴시고 땅의 터가 놓여진 위대한 창조 역사 뿐 아니라 인간의 영이 지어진 일이 나타나 있음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 가운데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사람 속에 있는 영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서 이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는 구절은 고린도전서 2장 1절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여기서 사람의 영은 지성의 자리(seat of intelligence)로 보여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아는 것은 영의 기능에 의해서입니다. 이성적으로 분별하는 것도 영의 기능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것도 영이 하는 일입니다. 몇 성경 구절들을 통해 이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로마서 8장 16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그리고 로마서 1장 9절의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또 욥기 32장 8절의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등등.

   여기 보면 우리의 이해나 깨닫는 일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아 영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잠언 18장 14절의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는 말씀과 잠언 20장 27절의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영을 통해 사람의 내적 깊은 부분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영에 당신의 진리의 말씀으로 교통하심으로써 우리 존재를 밝히십니다.

   그밖에 더 많은 말씀을 인용할 수도 있지만, 이상의 말씀들로도 충분히 요점을 강조했다고 봅니다.

   생각하는 일도 영의 기능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을 놓고 비교. 분석하는 일도 영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영은 바로 영이신 하나님이 자기 마음을 전달해주는 부분입니다.

   임종시에 영은 몸을 떠나게 됩니다. 사실상 이것이 바로 죽음(몸과 영의 분리)입니다. 야고보서 2장 26절에서 우리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는 구절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짐승은 죽을 때, 그 몸과 연결되어 있던 혼도 따라서 죽게 됩니다. 즉 존재의 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에는 죽을 때, 그가 구원받은 사람이건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건 모두 다 그 영이 몸을 떠나게 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the spirit)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지상의 집(몸)은 빈 채로 남겨지고 영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며, 그 지으신 하나님과 만나게 됩니다. 이일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구원받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에게 임하는 일입니다. 두 부류 모두 다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해야 합니다.


   물질주의자들은 영이란 단순한 생명력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 "호흡", "바람", 그리고 "영"이 모두 같은 단어라는 점을 들어서, 그 단어가 사용된 곳마다 무조건적으로 "호흡"이라는 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이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만도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고, 이러한 다양한 의미들을 무시한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 한 단어만으로 사용한다면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a man of spirit"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과감하고 열정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a spirit"이라고 할 때는 유령이나 혹은 귀신을 가리킵니다. 문맥이나 전후관계가 그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the spirit of man)이라고 할 때, 그것이 단순히 사람의 호흡(the breath of man)을 가리키는 것인지를 결정하는 최상의 방법은 우리 자신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로 든 것처럼 다양한 본문 속에서 "호흡"이라고 하는 단어로 바꾸어보고, 그 의미가 잘 통하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즉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호흡과 혼과 몸이...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할 때 그 의미가 잘 통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우리의 호흡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사모하고 있으며, 여기서 사도 바울도 그러한 의미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호흡 외에는 누가 알리요?" 우리 가운데 이성을 가지고 사리를 분별하는 호흡에 대해 들어본 분이 계신가요? 또한 "사람의 '호흡'은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성령이 친히 우리 호흡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호흡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

   이렇게 하는 저의 의도는 이러한 것을 즐기거나 그저 웃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허무한 이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그들 스스로 밝히 보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 속에 있는 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혼을 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음의 구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영과 혼 사이에 접속사 "...과"(and)가 사용됨으로써 이 사실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은 혼과 영을 구분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둘이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둘은 사는 동안, 혹은 죽음에 처해서도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영은 인간 존재의 최고한 부분입니다. 즉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영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혼은 인간 존재의 좀더 낮은 부분으로 몸과 영 사이를 연결하는 부분입니다. 단순한 자연생명에 속한 부분이 아니라,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그 이상의 부분입니다. 혼은 사람의 감정적인 본성이 자리하고 있는 부분(seat of emotional nature)입니다.

   또다시 몇 가지 성경말씀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다음의 말씀은 하나님도 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my soul)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0:38).

   또 다음 구절은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우리 영혼을 구원함(saving of the soul)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혼은 우리 혼의 구원을 바라고 계십니다. 즉 무한한 사랑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감정적인 본성이 그분 자신의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몸의 정욕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서 우리는,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the soul)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권면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룬 우리 혼은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이 일을 통해 우리 혼은 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 46절에서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my soul)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my spirit)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이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혼은 고통을 느낍니다. 누가복음 2장 35절은 " 또 칼이 네 마음(soul)을 찌르듯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07편 26절은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soul)이 녹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그 마음(soul)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창 42:21)습니다. 에수님도 "내 마음(soul)이 민망하니" 하고 말씀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심한 고통을겪으시면서 "그 영혼(soul)을 속건제물 드리"셨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poured out his soul) 사망에 이르렀고,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으셨습니다(사 53:12 참조).

   혼은 사랑합니다. 아가서에서 신부는 "내 마음(soul)에 사랑 하는 자를 너희 보았느냐"(아3:3)고 묻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무엘상 18장 1절에서 "요나단의 마음(soul)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혼은 미워합니다. 사무엘하 5장 8절은 "다윗의 마음(soul)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혼은 슬퍼합니다. 욥기 14장 22절은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혼은 무언가 하고자 갈망합니다. 욥기 23장 13절은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이라고 말씀합니다.

   혼은 사모합니다. 시편 119편 20절은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라고 했으며, 시편 42편 1절은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했고, 그리고 시편 63편 1절은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시간이 허락된다면 더 많이 인용할 수 있는 말씀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말씀들은 영이 지적인 본질의 자리인 것처럼 혼이 감정적인 본질의 자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몸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크게는 감정적인 존재이며, 혹은 인간의 구조상 거의 전체를 차지하도록 조직되었습니다.

   인간은 독특하게 혼이라고 불리는 존재입니다. "사람이 생령"(living soul; 살아있는 혼- KJV 참조)이 된지라"(창 2:7). 누가복음 12장 20절에서 주님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오늘밤에 네 영혼(soul)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반면에 요한게시록 6장에서 요한은 "죽임을 당한 영혼(souls)들이 제단 아래 있"는 것을 환상 가운데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가리켜, "구원받은 혼"과 잃어버린 바 된 혼"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적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3층으로 지은 집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1층 또는 지하실은 몸에 해당합니다. 2층 또는 일할 수 있는 공간은 혼에 해당합니다. 교제와 연구의 공간 또는 다락방인 3층은 영에 해당합니다. 무죄한 상태에서 인간은 영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하며, 완전무결하신 성령님과 교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타락 후에 도덕적 지진을 경험한 인간은 마치 큰 충격을 받은 집과 같이 3층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은 혼적인 사람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 혹은 육적"(natural and sensual)이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혼적"(soulish)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혼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취한 형용사입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했을지라도, 영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며, 다만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엡 4:18) 것입니다. 그 영이 합당한 위치로 회복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활동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모든 기능이 타락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영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죄로 인해 더럽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에 대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혼도 전적으로 타락하였고 부패되었습니다. 인간은 이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도 세상에 죄가 들어온 직접적인 결과인 질병과 질환에 의해 약화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으며,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간은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리 떠난 절망적인 멸망 상태에 처한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이 타락하고 패역한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을 타락하기 이전 아담의 상태로 회복시킬 뿐만 아니라, 타락된 인간이 결코 알 수 없었던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이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아들의 인격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셨을 뿐 아니라, 참으로 인간의 영과 혼도 취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참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신성한 로고스, 영원한 말씀이 그리스도의 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의 영과 혼이 우리 몸과 맺는 관계와 같은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신성이 거하시기 위한 장막으로서 한 몸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신성과 하나로 연합된 완전한 인성도 취하셨는데, 곧 인성과 신성 이 두 가지 본성이 완전히 연합된 한 분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인간 혼을 취하셨다는 것은 이미 인용한 성경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 주 예수님은 "내 마음(soul)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다른 곳에서는 "심령(spirit)에 민망하여"(요 13:21), 또는 "예수께서 성령으로(in spirit) 기뻐하사"(눅 10:21)로 기록되었고, 예수께서는 그 영혼이 돌아가실 때 큰소리로 "아버지여 내 영혼(spirit)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라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전체, 곧 몸과 혼과 영을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대신하여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속을 위한 속전을 지불하기 위해 필요했던 속죄하는 피는 죄로 인해 더럽혀지지 않은 인간의 피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그 몸은 거룩하고, 정결한 인간의 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혼이 겪었던 고통은 우리도 느낄 수 있는 인간 혼의 고통이었지만, 그분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 속에서 고뇌하며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든 다정다감했던 감정과 정서들조차도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실 때, 극도로 상하고 찢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압도하는 어두움도 물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두려움으로 가득하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느낄 뿐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영도 우리를 대신하여 완전히 희생이 되신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 전에는 멸망과 영적 파산 가운데 있었던 그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이 주어지게 되며, 모든 부분에서 이 생명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됩니다. 각성된 영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며, 그 사람은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졌습니다. 집이 새로 개축되었을 뿐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은 이제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과 영적인 것들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말씀에 의한 분별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혼도 구원받았습니다. 그 감정과 정서도 깨끗케 되었고, 그 마음의 갈망과 원함도 이제는 악하고 세속적인 것에서 돌이켜, 거룩하고 천국에 속한 것들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만이 변화되지 않은 채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새로운 생명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 된 이 육신의 장막을 타락으로 이끌었던 육체적인 욕망을 억제시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께서 우리의 이 낮고 천한 몸을 변화시켜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케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완전한 구원, 곧 영과 혼과 몸이 다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 육(natural)의 몸을 벗고,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4절을 읽어보면, 제가 생각하기에 물질적인 몸과 비물질적인 몸이 대조되어 설명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이나, 성령님의 의도는 아닙니다. 육의 몸은 우리 혼에 합당한 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육"(natural)이라는 단어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단순히 "혼"(soul)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혼적인 몸으로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에 우리가 입게 될 몸은 영의 몸(bady of spirit)이 아니라, 신령한 몸(spirituak body)을 입게 될 것이며, 그 신령한 몸은 영에게 합당한 실제적인 몸인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영은 간절히 원하고 바라지만 육신이 약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 몸과 영은 완전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과 같아질 때, 이것이 우리의 완전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연약함과 죄로 인한 싸움이 있지만

   그때는 육신과 지각을 속이는 일이 없다네.

   우리가 생명의 주를 뵙게 되는 그때,

   그 은혜의 모든 경륜이 밝히 드러나리라."


   우리는 온전히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이며, 영원히 그분과 같은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되고, 그분의 합당한 배필이 될 것입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또한 성경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우리 전체 곧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의 이루신 사역의 완전함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 속에 서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 없이 나타나게 될 때, 바로 그때에 우리의 구원은 완전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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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에는


                                                         H.A. 아이언사이드


                                               1장

                              그리스도인에게


   신실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많은 궁금증을 주고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4장의 마지막 세 구절은 5장에 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 우선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곧 이 본문이 매우 대조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 가운데 열두 가지 정도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조심스럽게 본문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차이점들이 드러나게 되고,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실들은 더욱 세분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우리는 "속사람" 과 대조되는 "겉사람" 에 대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조심스럽게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겉사람은 옛사람(몸)을 가리키며, 속사람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여러부류의 물질주의자들은 영혼의 인격성을 부인하지만, 10절은 그에 대해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후패하다""새롭다" 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겉사람(몸)은 늙고 쇠하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시작하자마자 곧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영혼)은 날로 새로워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1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명백히 대조적인 세 가지 내용을 보게 됩니다. "경한 것""중한 것", "환란""영광", 그리고 "일시적인 것""영원히 있는 것" 이 그것입니다. 환난은 시련 중에 있거나 고난 속에 있는 성도에게 매우 버겁고,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가 가져올 복된 결말을 깨닫게 됩니다.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장차 올 여러 세대 가운데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조는 18절에 있는데, 곧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자는 일시적인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한 것으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대조는 현재 다루고 있는 논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종종 조건적인 불멸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몇몇 물질주의 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는것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원하다" 는 말이 꼭 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 끝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이라는 말은 그 끝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만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말의 진실성과 엄중성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성령, 영원한 구속, 그리고 영원한 유업에 대해서 읽습니다. 또 한편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읽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의 영감성과 그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영원하다는 한가지 말이 때로는 선하다는 의미로, 또 때로는 신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더군다나 악한 자의 형벌에 관해서 쓰일 때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대조는 5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무너지는"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히"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주목할만한 대조에서 "영원하다" 는 단어가 여기서 세 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는 '사라져 버리다'. 혹은 '끝에 이르다' 라는 단어와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시적인 것은 무너지게 되지만, 영원한 것은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벗다" 라는 말과 분명히 부활과 관련된 "입는다"는 말 사이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죽을 것은 장차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쌍은, 이제 제가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바라는 것인데, 곧 6절부터 9절가지 나옵니다. 6절부터 9절까지 살펴보면 우리는 "몸에 거하다" "몸을 떠나다". "믿음으로" "보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와 함께 거하다""주를 떠나" 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가르침 받기를 소원하는 진지한 성경학도들이 이 연속적인 대조 내용들을 진지하게 살펴보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고 믿는 자들의 장래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전체적으로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는 우리가 "겉사람" 과 "속사람" 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제 자신과 제 몸은 다릅니다. 사람은 독특하게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몸은 겉사람입니다. 영과 혼은 모두 속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은 지적인 존재의 자리이며, 독특한 실체로써, 우리가 이 특별한 주제를 따로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은 사람의 감정적인 본성이 자리한 곳입니다. 이 둘, 즉 영과 혼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이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그 둘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받았는데, 이 새로운 본성을 가리켜 "영" 이라고 부릅니다. 영이야말로 속사람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6).


   우리가 만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께서 그의 성도를 모으시기 위한 호령과 함께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까지 살아있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육체를 떠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신자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요? 나의 몸이 죽음으로 인해 자게 된다면, 나 곧 속사람도 몸과 같이 자게 될까요? 아니면 몸을 떠나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모호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곧 속사람이 거하는 장막입니다. 장막은 무너질 수도 있고, 또 살던 사람이 이사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분명히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바이며, 동료 사도인 베드로도 이에 대해 베드로후서 1장 13~15절까지에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다음을 주목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 아직 남아있는 동안 그의 몸이라고 하는 장막 집에 있었고, 임종시에 베드로는 그 장막을 "벗는 것" 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죽음" (decease)이라는 단어는 "세상을 떠남" 또는 "벗어남"(exodus)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표현은 성경의 두 번째 책(출애굽기)의 제목과 같습니다. 그 책을 출애굽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벗어남"은 그 속 사람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을 벗어날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놀라운 성경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1:21~25).


   이제 동일한 진리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은 육신 가운데서, 곧 몸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죽음은 "떠나는 것"으로,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더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삶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몸 안에 사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요점은 바로 사람 그 자체와 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살아 숨쉬는 진흙 덩어리"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로 살아있는 영이 잠시 동안 이 진흙집에서 살다가 죽을 때, 빠져나가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 몸이 영광 가운데 하늘나라에 살기에 적합하도록 부활하게 될 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때에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혼과 영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제 매우 쉬운 예화 하나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년 전에 제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역에 마중을 나왔고, 우리는 함께 마을을 지나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막 보수공사(補修工事)를 시작하는 건물 한 동을 보게 되었고, 그 건물 전체의 상점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모든 상점의 주인들은 공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이사간 상태이지만, 건물수리가 마치게 되면 곧 다시 입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창문마다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건물이 완전히 수리가 되고 새로 단장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신자의 죽음에 대한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 집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나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겨주길 바라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헨리 아이언사이드는 새롭게 단장하고 수리가 될 때까지 잠시 이사했노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라오."


   몇 달이 지났고, 저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여행길에 올랐고, 제가 돌아올 즈음에 다시 한번 이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전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같은 건물이고 벽이나 바닥도 같은 것이었지만, 건물 안팎이 너무도 놀랍도록 바뀌어 있었으며, 모든 상점들은 예전의 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았을 때, "이것은 참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부활에 대한 그림이구나. 그리고 속사람은 새로워진 몸, 곧 동일한 몸이지만, 허물어진 이전의 몸과는 전적으로 다른 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장막의 속사람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입고 있는 일종의 영과 몸의 연합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나 다음의 구절들은 이러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장막 가운데서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며 간절히 갈망하는 것은 죽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공중으로 끌어올리게 될 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집을 덧입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첫째 부활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고 변화될 때 우리는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 곧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될 것입니다(요 5;29). 부활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이며, 그 날에는 지금은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경되고, 궁핍하고, 그리고 헐벗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탄식하는 일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우리는 우리 죄짐으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신자는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재 삶의 쇠퇴와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상황으로부터 건짐 받기를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몸이 종종 우리의 영적인 갈망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까? 따라서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덧입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과 같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덧입게 될 복된 시간을 갈망하고 있으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고, 우리 몸이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죽을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복된 순간에 그분의 살리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 순간까지 우리 속에서 역사해 오시고, 그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도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까지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몸에 거하는 동안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몸을 떠나라는 부름이 있게 되면, 우리는 우주 속을 떠다니게 되거나, 무의식 속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즉시 주님과 함께 하늘 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뿌리내린 믿음으로 행하되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신은 바로 바울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여, 아무도 여러분이 가진 특권인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이라는 네 글자의 귀중함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더 나은 번역은 "주와 함께 사는 것" 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장막 집(몸)에서 살고 있으며, 주와 따로 거하고 있지만, 장차 우리는 장막 집(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지금 집에 있습니다. "집이라!" 아,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입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된 이름을 위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에 속한 모든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험과 환난 속에서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집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무의식적인 상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처럼 냉담한 생각이 참된 것이라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바로 바울은 영혼의 무의식적인 잠에 대한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잠을 잔다는 것은 곧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몸이 잠을 자게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에수님의 몸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 몸도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실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4절에 사용된 "에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라는 표현은 "예수에 의해서 잠자게 된 자들도" 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채다가 피곤하여 지친 어린아이를 어머니가 품에 안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잠재우듯이, 주 예수님도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잠자게 하시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주께서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님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8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 집에 가있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에 대해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으면서 적어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 암시라도 되어있지 않을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이와 관련된 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운 본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개역성경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와같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은 그 벗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다시 찾은 기쁨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선한 목자도 한 영혼의 구원에 대한 그 기쁨을 나누고자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부자가 온전한 정신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낙원에, 그리고 부자는 음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부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서, 비록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 있었으나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고 하늘에 있는 자들의 경우에는 상호 교제와 사귐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얼마나 풍성하겠으며, 더욱이 한 죄인이 회개할 때 주님의 기뻐하심과 같이 그들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천사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두가 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가졌던 집회 끝 무렵, 허랑방탕한 삶에 빠졌던 한 청년이 그리스도께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우리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애통해 하며 큰 번민 가운데 있었지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단순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사역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었고, 그의 영혼 속에는 평안이 찾아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비통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오늘 제 자신이 그리스도께 드려진 이 사실을 전보로라도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수년간 기도해오셨습니다. 저의 죄악이 어머니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마침내 응답되었다는 이 소식을 어머니께 알릴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렇게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형제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순간, 형제의 어머니는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한 죄인으로 인해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성경말씀들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은 죽음을 맞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신자가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몸을 떠나는 순간, 신자는 주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그 가운데서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게 될 첫째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그 날에 잠자던 성도들의 몸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살아 남은 자도 일순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영원세계 내내, 성도의 몸은 영화롭게 되어, 복된 주님과 같이 온전하게 될 것이며, 성도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끊임없는 행복과 지극한 기쁨을 누리며, 성도의 집인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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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제10과

                     기쁘게 참으라(야고보서 5:7-12)


   야고보는 이제 압박 당하는 신자들에게로 방향을 바꾸어 그들에게 참으라고 격려하고 있습니다.


곧 오실 예수님(5:7-8)


   주님의 재림이 참는 동기가 됩니다. 이 재림은 휴거일 수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려고 오시는 재림일 수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다 참고 견디게 하는 동기로 사용되었습니다.

   인내가 요구되는 예로 농부가 사용되었습니다(7절). 농부가 곡식을 심은 날 거둘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먼저는 씨앗을 발아시키는 이른 비가 와야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계절에 알곡이 충실하게 맺어지도록 늦은비가 와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이른비와 늦은 비를 교회 시대의 시작에 있었던 오순절의 복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되는 것으로 보지만, 신약성경의 전체적인 경향은 그러한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위해 세계 전도에 열중하는 신실한 남은 신자들을 기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환영하는 보다 나은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땅의 잘못된 것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올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백성들은 농부처럼 참아야 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확실한 재림으로 굳게 되어야 합니다(8절).


원망하지 말라(5:9)


   핍박과 억압의 시대에는 희생자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게 되면 가장 사랑하는 자들에게 분노를 쌓게 되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의 알 수 없는 비틀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망" 이라는 말은 마지못해 허락한다는 뜻보다는 중심에 품고 있는 표현되지 않은 원한을 의미합니다. 이 구절은 어려운 환경에서 함께 일하는 주님의 종들을 위한 음성입니다. 우리는 원한을 쌓아서는 안됩니다. 심판자가 이미 문 앞에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다 아십니다. 곧 우리는 회계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가지 예(5:10-11)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이 고난과 참음의 본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고난이 참음보다 앞에 오는 것을 보십시오. "환난은 인내를" 이룹니다.(롬 5:3). 고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신약성경에서 의미하는 인내란 확고함과 견고함입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기 때문에 무자비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는 주님을 바라봄으로 견디었습니다(히 11:27). 히브리서 11:32-40도 함께 보십시오.

   우리는 이사야나 예레미야,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을 큰 존경으로 회상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열정적인 삶과 헌신으로 인해 그들을 존경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들을 "은혜 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옳았고 세상이 틀렸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통과했지만 그들은 인내로 견뎌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은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그와 같이 해야 한다는 유일하고 합당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욥은 인내와 참음의 좋은 본입니다. 이 세상 유사 이래 욥과 같이 짧은 시간에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당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저주하지도 하나님에게서 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인내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늘 그러하시듯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일 "주께서 주신 결말" (주님께서 겪게 하신 최종적인 결말 또는 결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악한 질투의 유혹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삽은 악한 자의 형통을 보게 되었을 때 질투하게 되었습니다(시 73:3-17). 그가 이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혼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때 그들의 결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모든 질투를 쫓아버렸습니다. 다윗도 동일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시편 17:14에서 그는 금생에서 경건치 않은 자의 분깃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는 그와 대조되는 오는 세상에서의 신자의 분깃을 나타내었습니다. 이러한 것에 비추어 볼 때, 그 분깃은 신자들이 견딘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욥의 경우에서 "주께서 주신 결말" 은 하나님께서 욥이 이전에 가졌던 것보다 두 배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욥 42:1-5).


맹세하지 말라(5:12)


   시련의 시간에 조급해 하는 것은 맹세로도 나타납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나 저주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법정에서 선서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여기에서 금하고 있는 실제적인 것은 어떤 사람의 말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이나 어떤 다른 사람의 이름을 생각 없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물건 또는 하늘이나 땅으로도 맹세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은 그렇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는 사실에 근거할 수밖에 없는 자인 것을 압니다.

   물론 이 구절을 "제발" (For the heaven's sake), "맹세코" (By Jove) 등과 같은 쓸데없는 표현이나 예수님과 관련된 "깜짝이야(예수)" (gee), 하나님과 관련된 "어이쿠(하나님)" (gosh), "저런(하나님)" (golly) 등과 같은 저속한 말들을 금하는 데 적용할 수도 있습니다.

   야고보는 "죄정함을 면하라" 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셋째 계명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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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제 3 과

차별하지 말라(야고보서 2:1-13)


   2장 1-1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편애는 주님의 본이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앙 속에는 속물적인 것이나 차별대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을 금함(2:1)


   우선적으로 그런 행동은 명백하게 금지되었습니다(1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훈계가 신자들에게 주어진 점인데, 이는 "내 형제들아" 라고 한 인사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취하지말라" 는 말은 "품지 말라" 또는 "행하지 말라" 는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은 주님의 신실하심이나 미쁘심에 의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실체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 라는 구절은 차별대우하는 불신자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묶어보면,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행하면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물근성이나 카스트의 차별 등은 참된 기독신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에 굴종하는 것은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태생이나 인종, 성 또는 재산 때문에 멸시하는 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러한 명령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관원들이나 장로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정해야만 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롬 13:7). 또한 이 구절에는 어떤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거나 또는 다른 인위적인 구별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그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섬기는 문제도 들어있습니다.


차별에 대한 예(2:2-4)


   야고보가 2-4절에서 제시한 생생한 예화에 의해 그러한 모습이 분명해집니다. 가이 킹은 이 단락의 제목을 "짧은 안목을 가진 안내인" 이라고 멋지게 붙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개역 성경은 "교회" 라고 하지 않고 "회당" 이라고 하였지만 "회당" 의 곤본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사물을 함께 모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꼭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낀 우아한 신사로 보이는 사람이 막 도착하자 안내인이 허리를 굽히고 손을 비비며 그 귀한 손님을 앞자리의 훌륭하고 잘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내인이 문으로 다시 돌아오자 또 한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소박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2절의 "더러운 옷" 으로 번역된 말은 그 사람이 누더기 옷을 입었다든지 세탁을 해야 할만큼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삶을 나타내는 단순하고 소박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내인이 이번에는 그 사람을 뒤쪽에 세워놓든지 자기 자리 앞의 바닥에 앉도록 함으로써 회중들을 당황케 하지 않을 방법을 교묘하게 찾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을 수 없게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화를 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 가운데서 인위적으로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서 가장 분명한 예는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일 것입니다. 흑인 신자들은 많은 경우에 배척을 당하거나 적어도 달갑지 않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회심한 유대인들은 늘 진심으로 영접되지 않습니다.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대우를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민족적인 관계에 대한 모든 영역에서 막대한 사회적인 문제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원리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진리를 실제적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차별의 악함을 드러냄(2:5-11)


   차별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전혀 조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야고보는 5-13절에서 그에 대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이 부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가난한 자는 업신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 네 가지 이유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사람을 괄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5, 6상).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 선출된 자요, 하나님께 선택된 자며,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임을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5). 주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이들은 부자나 귀인이 아닌 평민들이었습니다(막 12:37). 귀인들보다는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며, 경멸받고, 무시당하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26-29). 부유한 자들은 대개 믿음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있어서 부유한 자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을 조사해보면 아마도 대부분이 가난한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들이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우리의 주 곧 구주의 나라에서 높임을 받을 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부자에게 특별 대우하는 것이 어리석은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특징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6절 하).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과 약간의 혼란이 있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6절에 나오는 그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왜 그들이 부자라는 것으로 편애하느냐? 너희가 그런일을 한다면 너희를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어찌하여 너희를 죽이는 자들을 존중하느냐?" 라고 말하며 이러한 논쟁을 일축하였습니다.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은 습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쁜 말이나 욕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주님을 대적하여 욕하는 것이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핍박할 때 구세주에 대한 가장 악한 말로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특별 대우합니까? 부자들은 대개 주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 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계하여 봅니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바로 이 이름이 부자들이 습관적으로 망령되이 일컫는 이름입니다.

   야고보의 네 번째 주장은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사랑의 법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8절). 사랑의 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을 대접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만으로 멸시받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러한 이유로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씀은 신약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보듯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의 복되신 구주를 알게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따라 결정을 하는 매우 자기 중심적인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부자에게서 사회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보상을 기대하기에 그들의 비위를 맞춥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 가망이 거의 없기에 그들을 무시합니다. 이 최고의 법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최고의 법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눅 10: 29-37). 이 사랑의 법은 왕에게 속한 법이며, 모든 율법의 왕이기에 최고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 최고의 법에 저촉되므로(9절) 죄와 범법이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적합치 못한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범법은 알고 있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죄라는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지만, 범법은 그 죄된 행동을 금하는 특별한 법이 주어질 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범법하는 것도 되는데 그것은 그것을 금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10절). 율법은 10개의 고리로 된 사슬과 같기에 한 고리만 끊어져도 그사슬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계명은 어기면서 지킬만한 것들만 지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1절). 어떤 사람이 간음죄는 짓지 않을 지라도 살인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간음이 분명히 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살인도 역시 그러합니다. 또한 속물근성과 외모로 취하는 것 역시 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 중 어느 하나에 걸리더라도 율법의 명한 것을 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십계명을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십계명 중 후반 다섯 계명을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을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놓는 것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로마서 6:14에서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고 말씀하며, 로마서 7:6에서는 "우리가....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로마서 7:4에서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였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19; 3:13; 3:24,25; 디모데전서 1:8, 9; 히브리서 7:1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7-11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계명 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 은혜의 시대에 율법의 요소들로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모범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어긴 형벌을 갚고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과 그 형벌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원리 중 어떤 것들은 그 가치가 영구적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우상숭배, 간음, 살인, 도적질 등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십계명 중 한가지 계명을 제외한 아홉가지 계명이 여러 서신서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한가지 반복되지 않은 것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인 계명이기 때문에 안식일이나 한 주의 일곱번째 날을 지키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한 곳은 없습니다. 한 유대인이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께서 구별되게 하셨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서신서들에서 반복된 아홉 가지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의로운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적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자는 구원을 잃어버린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은혜로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너희가 나를 사랑함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한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바라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신약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너희가 십계명 중 반복되고 있는 아홉가지 계명을 보게되겠지만 실제적으로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주 예수의 가르침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신자들을 율법과 그 저주 아래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는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너희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속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 아래 있으니 옳은 일을 행함으로 자유하라. 모세의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도 않고 그 계명을 어긴 너희를 저주한다. 은혜 아래 있는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할 힘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 너희는 이것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하지 말고 너희를 사랑하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이러한 기준에 의해 너희가 상급을 받게 되든지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라는 것입니다.


편파적인 자가 되지 말라(2:12-13)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는 말은 말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12절). 말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편파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문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기에 이것은 죄의 영원한 형벌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형벌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치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행하지 못할 것이며, 타락된 상태가 초래할 고난을 맞게될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보다는 인애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심판이 "부자연스러운 일" 이십니다.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었다면 심판에 임할 때 자랑할 수 있으나, 혹 우리가 올바르게 비난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긍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긍휼은 언제나 심판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에서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심판은 우리를 넘어뜨릴지라도 긍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파성에 대한 중요한 주제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이든 사람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평범하고 못생긴 사람보다는 멋진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람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편을 들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신체적으로 장애를 갖고있는 사람들은 피하면서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보다 부자에게 더 호의를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들" 에게 냉대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장 하찮은 신자를 대하는 방법이 곧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마 25:40).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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