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는


                                                         H.A. 아이언사이드


                                               1장

                              그리스도인에게


   신실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많은 궁금증을 주고 있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 5장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집니다. 4장의 마지막 세 구절은 5장에 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 우선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곧 이 본문이 매우 대조적인 내용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 가운데 열두 가지 정도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조심스럽게 본문을 분석해보면 몇 가지 차이점들이 드러나게 되고, 제가 언급하고자 하는 몇 가지 사실들은 더욱 세분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첫 번째, 우리는 "속사람" 과 대조되는 "겉사람" 에 대해 보게 됩니다. 이것은 조심스럽게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겉사람은 옛사람(몸)을 가리키며, 속사람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여러부류의 물질주의자들은 영혼의 인격성을 부인하지만, 10절은 그에 대해 명백하게 확증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후패하다""새롭다" 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겉사람(몸)은 늙고 쇠하여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시작하자마자 곧 죽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영혼)은 날로 새로워져가고 있습니다.

   이제 17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명백히 대조적인 세 가지 내용을 보게 됩니다. "경한 것""중한 것", "환란""영광", 그리고 "일시적인 것""영원히 있는 것" 이 그것입니다. 환난은 시련 중에 있거나 고난 속에 있는 성도에게 매우 버겁고, 오래 지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 이라고 부르시는데, 이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으로서, 그 결과가 가져올 복된 결말을 깨닫게 됩니다. 곧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이 장차 올 여러 세대 가운데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조는 18절에 있는데, 곧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전자는 일시적인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한 것으로 선언되어 있습니다. 이 여섯 번째 대조는 현재 다루고 있는 논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종종 조건적인 불멸을 옹호하는 사람들과 몇몇 물질주의 체제 아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는것은, 신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영원하다" 는 말이 꼭 그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 끝이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이라는 말은 그 끝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만일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여 몇 가지 사례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면, 하고 있는 말의 진실성과 엄중성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영원한 성령, 영원한 구속, 그리고 영원한 유업에 대해서 읽습니다. 또 한편 영원한 형벌,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읽고 있습니다. 과연 성경의 영감성과 그 권위를 믿고 있는 사람이 영원하다는 한가지 말이 때로는 선하다는 의미로, 또 때로는 신성 자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더군다나 악한 자의 형벌에 관해서 쓰일 때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대조는 5장 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 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 과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전자는 "무너지는" 것으로, 그리고 후자는 "영원히" 있는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주목할만한 대조에서 "영원하다" 는 단어가 여기서 세 번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는 '사라져 버리다'. 혹은 '끝에 이르다' 라는 단어와 완전히 대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일시적인 것은 무너지게 되지만, 영원한 것은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죽음과 관련된 '벗다" 라는 말과 분명히 부활과 관련된 "입는다"는 말 사이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죽을 것은 장차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세 가지 쌍은, 이제 제가 여러분의 관심을 집중시키기를 바라는 것인데, 곧 6절부터 9절가지 나옵니다. 6절부터 9절까지 살펴보면 우리는 "몸에 거하다" "몸을 떠나다". "믿음으로" "보는 것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와 함께 거하다""주를 떠나" 가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하나님께 가르침 받기를 소원하는 진지한 성경학도들이 이 연속적인 대조 내용들을 진지하게 살펴보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고 믿는 자들의 장래 상태에 대하여 분명한 결론을 얻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을 전체적으로 주의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저는 우리가 "겉사람" 과 "속사람" 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고자 합니다. 제 자신과 제 몸은 다릅니다. 사람은 독특하게 영과 혼과 몸으로 되어 있습니다. 몸은 겉사람입니다. 영과 혼은 모두 속사람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은 지적인 존재의 자리이며, 독특한 실체로써, 우리가 이 특별한 주제를 따로 다룰 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혼은 사람의 감정적인 본성이 자리한 곳입니다. 이 둘, 즉 영과 혼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성경만이 이 둘 사이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우리에게 그 둘이 구분은 되지만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새로운 본성을 받았는데, 이 새로운 본성을 가리켜 "영" 이라고 부릅니다. 영이야말로 속사람의 주요한 특징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6).


   우리가 만일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께서 그의 성도를 모으시기 위한 호령과 함께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날까지 살아있지 않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모두 육체를 떠나게 되는 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무너지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몸은 죽음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신자의 상태는 어떻게 될까요? 나의 몸이 죽음으로 인해 자게 된다면, 나 곧 속사람도 몸과 같이 자게 될까요? 아니면 몸을 떠나 다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요?

   성경은 이에 대해 모호하게 증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몸은 곧 속사람이 거하는 장막입니다. 장막은 무너질 수도 있고, 또 살던 사람이 이사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분명히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바이며, 동료 사도인 베드로도 이에 대해 베드로후서 1장 13~15절까지에서 확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다음을 주목해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 땅에 아직 남아있는 동안 그의 몸이라고 하는 장막 집에 있었고, 임종시에 베드로는 그 장막을 "벗는 것" 으로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이 "죽음" (decease)이라는 단어는 "세상을 떠남" 또는 "벗어남"(exodus)으로 번역되었는데, 이 표현은 성경의 두 번째 책(출애굽기)의 제목과 같습니다. 그 책을 출애굽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벗어남"은 그 속 사람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을 벗어날때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놀라운 성경인 빌립보서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 1:21~25).


   이제 동일한 진리를 약간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여기 이 땅에서의 삶은 육신 가운데서, 곧 몸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죽음은 "떠나는 것"으로, 곧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기 위해 더 좋은 곳으로 이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삶에 대해 사도 바울은 몸 안에 사는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요점은 바로 사람 그 자체와 몸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살아 숨쉬는 진흙 덩어리"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실제로 살아있는 영이 잠시 동안 이 진흙집에서 살다가 죽을 때, 빠져나가게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 몸이 영광 가운데 하늘나라에 살기에 적합하도록 부활하게 될 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며, 그때에 부활의 몸은 우리의 혼과 영의 영원한 거처가 될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제 매우 쉬운 예화 하나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수년 전에 제가 전도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중이었습니다. 제 아내가 역에 마중을 나왔고, 우리는 함께 마을을 지나서 집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막 보수공사(補修工事)를 시작하는 건물 한 동을 보게 되었고, 그 건물 전체의 상점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모든 상점의 주인들은 공사를 위해 일시적으로 이사간 상태이지만, 건물수리가 마치게 되면 곧 다시 입점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창문마다 다음과 같은 문구가 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건물이 완전히 수리가 되고 새로 단장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

   저는 제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신자의 죽음에 대한 이 얼마나 멋진 그림인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하늘 집으로 부름을 받는다면, 나의 묘비에 다음과 같이 새겨주길 바라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헨리 아이언사이드는 새롭게 단장하고 수리가 될 때까지 잠시 이사했노라.'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전부라오."


   몇 달이 지났고, 저는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여행길에 올랐고, 제가 돌아올 즈음에 다시 한번 이 건물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전 모습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물론 같은 건물이고 벽이나 바닥도 같은 것이었지만, 건물 안팎이 너무도 놀랍도록 바뀌어 있었으며, 모든 상점들은 예전의 자리에서 같은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았을 때, "이것은 참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는' 놀라운 부활에 대한 그림이구나. 그리고 속사람은 새로워진 몸, 곧 동일한 몸이지만, 허물어진 이전의 몸과는 전적으로 다른 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에게는 하나님의 장막의 속사람이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입고 있는 일종의 영과 몸의 연합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나 다음의 구절들은 이러한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현재 우리가 이 장막 가운데서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며 간절히 갈망하는 것은 죽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공중으로 끌어올리게 될 때,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집을 덧입고자 함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첫째 부활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일어나고 변화될 때 우리는 벌거벗은 자로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은 구원문제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부활, 곧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이 있게 될 것입니다(요 5;29). 부활의 몸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몸을 입게 될 것이며, 그 날에는 지금은 가난하고, 불쌍하고, 소경되고, 궁핍하고, 그리고 헐벗은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일지라도 탄식하는 일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 우리는 우리 죄짐으로 인해서 고통 가운데 탄식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신자는 그러한 탄식으로부터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현재 삶의 쇠퇴와 영적인 성장을 방해하는 상황으로부터 건짐 받기를 탄식하며 갈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 몸이 종종 우리의 영적인 갈망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까? 따라서 우리가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님의 몸과 같은 몸으로 덧입고자 하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죽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바울과 같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덧입게 될 복된 시간을 갈망하고 있으며,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고, 우리 몸이 그분의 영광의 몸과 같이 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죽을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복된 순간에 그분의 살리시는 말씀이 바로 우리 몸 속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바로 이 순간까지 우리 속에서 역사해 오시고, 그 부활의 날에 우리에게 주실 축복의 보증으로 우리 속에 거하시도록 성령님을 주신 것도 바로 이것을 위해서입니다. 그 때까지 연약함에 둘러싸여 있는 우리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몸에 거하는 동안은 주님과 따로 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몸을 떠나라는 부름이 있게 되면, 우리는 우주 속을 떠다니게 되거나, 무의식 속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즉시 주님과 함께 하늘 집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에 뿌리내린 믿음으로 행하되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해 가지고 있는 확신은 바로 바울처럼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입니다.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이여, 아무도 여러분이 가진 특권인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 이라는 네 글자의 귀중함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더 나은 번역은 "주와 함께 사는 것" 이 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장막 집(몸)에서 살고 있으며, 주와 따로 거하고 있지만, 장차 우리는 장막 집(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간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고무적인 생각으로 마음을 편히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지금 집에 있습니다. "집이라!" 아, 이 얼마나 감미로운 단어입니까! 그들은 이 땅에서 순례자요,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복된 이름을 위하여 그들은 자발적으로 세상에 속한 모든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시험과 환난 속에서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집에서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일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무의식적인 상태 가운데 있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참으로 그처럼 냉담한 생각이 참된 것이라면,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이 "더욱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확실한 것은 바로 바울은 영혼의 무의식적인 잠에 대한 것은 몰랐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잠을 잔다는 것은 곧 깨어날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몸이 잠을 자게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다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에수님의 몸을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신 것처럼, 우리 몸도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실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다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4절에 사용된 "에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라는 표현은 "예수에 의해서 잠자게 된 자들도" 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보채다가 피곤하여 지친 어린아이를 어머니가 품에 안고 부드럽고 다정하게 잠재우듯이, 주 예수님도 그 사랑하는 백성들을 잠자게 하시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주께서 하늘로 좇아 강림하실 때, 주님은 그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때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8절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늘 집에 가있는 사람들이 과연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과연 성경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이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에 대해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일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하늘에서 죽음과 부활 사이에 있으면서 적어도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 암시라도 되어있지 않을까요?

   누가복음 15장에는 이와 관련된 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운 본문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에서 우리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저는 개역성경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였는데, "이와같이"라는 표현이 특별히 강조되어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은 사람은 그 벗들과 이웃을 불러모아 다시 찾은 기쁨을 나누고 싶어합니다. '이와 같이" 선한 목자도 한 영혼의 구원에 대한 그 기쁨을 나누고자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부자가 온전한 정신 가운데서 아브라함은 낙원에, 그리고 부자는 음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부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사이에 두고서, 비록 영적으로 분리된 상태에 있었으나 대화를 나누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장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받고 하늘에 있는 자들의 경우에는 상호 교제와 사귐 뿐 아니라 그들의 주님과의 교제와 사귐이 얼마나 풍성하겠으며, 더욱이 한 죄인이 회개할 때 주님의 기뻐하심과 같이 그들은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천사들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모두가 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가졌던 집회 끝 무렵, 허랑방탕한 삶에 빠졌던 한 청년이 그리스도께 돌아온 일이 있었습니다. 몇 시간 동안 우리 몇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를 돕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의 죄악된 삶으로 인해 애통해 하며 큰 번민 가운데 있었지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단순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완성된 속죄사역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리게 되었고, 그의 영혼 속에는 평안이 찾아들었습니다. 그의 얼굴은 기쁨과 비통의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저를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어머니가 지금까지 살아 계셨다면, 오늘 제 자신이 그리스도께 드려진 이 사실을 전보로라도 알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머니는 저를 위해 수년간 기도해오셨습니다. 저의 죄악이 어머니의 마음을 많이 상하게 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마침내 응답되었다는 이 소식을 어머니께 알릴 수만 있다면 제 마음이 얼마나 기쁠까요?"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그렇게 근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가 확신하는 바로는 형제가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 순간, 형제의 어머니는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은 회개한 죄인으로 인해서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성경말씀들을 통해서 확신하는 것은 죽음을 맞아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신자가 무의식적인 상태에 있다는 그 어떤 암시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몸을 떠나는 순간, 신자는 주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되며, 그 가운데서 주께서 재림하실 때 일어나게 될 첫째 부활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의 그 날에 잠자던 성도들의 몸은 다시 일어날 것이며, 살아 남은 자도 일순간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부터 영원세계 내내, 성도의 몸은 영화롭게 되어, 복된 주님과 같이 온전하게 될 것이며, 성도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끊임없는 행복과 지극한 기쁨을 누리며, 성도의 집인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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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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