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위해 핍박받는 사람들

                                                                               -리챠드 범블란트


                                 5 성장하는 지하교회 (3)


   지하교회의 주된 특징은 진지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한 목사는 지하교회에 관한 책에 다음의 글을 적었습니다. 한 소련 군관이 헝가리의 한 목회자를 찾아가 단독적으로 만날 수 없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군관은 젊고 성격이 급했으며 정복자로써의 지위를 매우 의식했습니다. 그가 작은 방으로 안내되고 문이 닫히자 벽에 걸린 십자가를 향해 머리를 흔들어 암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가 속임수라는 것을 알고 있는 거지? 당신들 목사들은 이것을 이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부자들의 이익을 지켜주고 있소. 지금 우리 둘 밖에 없으니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고 시인하시오."

   그 목회자는 웃으며 "젊은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분명하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군관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를 속이려 하지 마오. 나는 농담을 종아하지 않으니 정직해 주시오." 그는 총을 빼들어 목회자의 몸에 갔다 댔습니다. "당신이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시인하지 아니하면 쏘겠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우리의 주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 군관은 권총을 버리고 목회자를 포옹했습니다. 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나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 눈으로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을 보지 못했으므로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형제님께서 저의 믿음을 굳건히 하였습니다. 형제님의 믿음처럼 나도 이젠 주님을 위해 죽을 수가 있습니다."

   나는 또 다른 실례를 알고 있습니다. 소련군이 루마니아를 강점하고 있을 때 무장한 두 소련 군인이 교회에 들어와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자는 죽여 버릴 테다. 지금이라도 포기할 자는 오른쪽으로 나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여러 명이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그들에게 빨리 집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목숨을 위해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나가자 두 군인은 나머지 그리스도인들과 뜨겁게 포옹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생명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이 지금도 철의 장막 속에서 복음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서방의 성도들은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세상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집에서 큰 소리로 음악을 틀어 놓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과 지하교회 사역을 할 때 이웃들이 듣고 보위부에 밀고 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서방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오면 우리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나는 지금 발언할 수 없고, 입을 가지고도 벌릴 수 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귀중히 여기며 신앙에 관한 문제들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와 물질로 공산주의 나라들에서 고난 받는 믿음의 지하교회를 적극 도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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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반드시 공산주의자들을 감화하여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영적으로 갈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필요를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일군의 포로로 잡힌 공산주의자들은 나에게 자기들도 어려움을 당할 때면 기도를 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심지어 많은 공산당 간부들이 "예수님, 예수님"을 외치며 숨을 거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산주의 문화 유산도 우리의 전도사역에 큰 도움이 되므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소련 정부는 근대의 기독교 서적들을 금지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은 톨스토이와 도스또에브스끼와 같은 작가들의 글 속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독에는 괴테, 폴란드에는 시엔키에뷔쯔, 루마니아에는 위대한 싸도부기누가 있습니다. 루마니아 정부는 그의 "성도들의 삶"이라는 책을 "성자들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바꾸어 출판하였지만 그 속에 담긴 성도들의 삶의 실례들은 책을 읽는 사람들을 고무시켰습니다.

   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 마음속의 영적 갈망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나의 물음에 대한 반박보다는 자신들의 양심의 가책을 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하교회 모임에 참가한 공산당원들을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일이 적발되자 그들은 그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런 후 용기가 없어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하지 못함을 인해 눈물을 흘리며 후회합니다. 그들도 사람입니다. 일단 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접했다면, 설사 그 믿음이 아주 기초적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은 발전하고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하교회가 승리함을 여러 번 보아왔으므로 믿음이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산주의자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들도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일은 철의 장막 속의 지하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계 모든 민족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가르치라"고 하셨지 철의 장막에서 멈추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우리 앞에 맡겨진 대 사명을 안고 철의 장막을 넘어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우리는 이미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지하교회를 통해 이 사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지하교회의 세 부류의 사람들


   첫 번째-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쫓겨난 사역자들

   지하교회는 세 부류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공산당과 타협하지 않아 교회에서 쫓겨난 수천 수만의 사역자들입니다. 그들 중에 많은 이들이 몇 년간의 감옥생활을 했으며 믿음으로 인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석방되면 바로 비밀리에 지하교회에서 주의 일을 합니다. 그들은 신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그들은 고문과 다시 체포될 위험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중하는 "살아 있는 순교자들"입니다.


   두 번째-성도들

   지하교회의 둘째 부류는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소련이나 중국에는 유명무실한 그리스도인, 이름만 있는 그리스도인,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것입니다. 공산치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핍박은 더 좋은 그리스도인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영혼들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만듭니다. 이들은 자유세계에서는 보기 힘든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면 당연히 자기 생활 속에서 주님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붉은 별" (소련 육군에서 출판하는 신문)은 소련의 그리스도인들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습니다. "예수를 숭배하는 자들은 욕심 많은 손을 아무데나 뻗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빛을 내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웃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모범 주민들입니다. 만약 어머니가 앓아서 어린애들을 돌보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찾아가 애들을 돌봐주며, 어느 집에 세대주가 앓아서 장작을 패지 못하면 그리스도인이 대신 해줍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복음을 전하면 뭇사람들은 이들의 생활에서 예수님을 보았기에 듣고 믿습니다.

   수백만의 열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여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공산당 신문들은 "그리스도인 고기 판매원들이 포장지 속에 복음 책자들을 넣어 배포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출판물들도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저녁 늦게 출판에 들어가 몇 천권의 기독교 서적들을 인쇄하여 놓고 날이 밝기 전에 다시 정돈하여 자리를 뜬다"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의 그리스도인 어린이들이 복음서들을 받아 다시 필기하여 학교 옷걸이에 걸린 선생님들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둔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힘 있고 효과적인 복음 전도자들입니까?


   세 번째-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사역자들

   세 번째 지하교회의 생동하는 부분은 공식적인, 그러나 억눌림 당하고 침묵을 지킨 "교회"의 수많은 신실한 사역자들입니다.

   지하교회는 국영교회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고슬라비아, 폴란드, 헝가리와 같은 많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국영교회의 많은 사역자들이 비밀리에 지하교회에서 사역을 합니다. 이들 사역자들은 그들의 작은 교회 밖에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전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으며, 주일학교나 청소년모임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병이 든 교인 집에 심방을 갈 수도 없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규율에 따라 모든 면에서 울타리를 쳐야 하므로 교회라는 이름은 있으나 의미가 전혀 없는 교회의 모습만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의 자유"를 비웃는 여러 가지 제한된 체제에서 용기 있게 비밀 스러운 일들을 수행하므로 그들의 자유를 박탈당할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비밀스럽게 청소년들과 아동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그들은 몰래 성도들의 집이나 지하실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들은 또한 아무도 모르게 신앙서적들을 주위에 있는 갈급한 영혼들에게 나누어주는 일도 감당합니다. 그들은 이와같은 비밀사역을 감당하므로 그들이 누리는 자유를 내놓을 위험에 항상 직면해 있습니다.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고 순종하는 듯 보이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역을 위험을 무릅쓰고 감당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 중 많은 사역자들이 최근에 발각되어 러시아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들은 수년간 감옥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들은 지하교회의 활력 있는 한 부분들입니다.

   이 전날의 사역자들, 지금은 교회에서 쫓겨나서 공산당의 고문을 받고 있는 성도들, 정부의 허락 이외의 일을 하고 있는 사역자들, 이 세힘이 모여 지하교회를 형성합니다. 이 지하교회는 공산주의가 없어질 때까지 존재할 것입니다.

   공산국가를 자주 왕래하며 또 종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그는 지하교회를 지금껏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교육을 받지 못한 중앙아프리카의 부족들을 방문하고 돌아와 "나는 그들에게 산문시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들은 모두 모른다고 답변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사실인즉, 그들은 다 산문을 쓰고 있으나 그것이 "산문시"라고 부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을 몰랐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들의 신앙에 대해 묻는다면 그들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자들, 형제들, 성도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하교회"라는 단어는 공산주의자들과 서방의 동구권 나라들의 종교정황을 주시하는 연구원들에 의해 불리어졌습니다. 지하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인,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비밀리에 집회하고, 비밀리에 복음을 전파하고 있으므로 혹 방문한 외국인들은 지하교회를 보지 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서방에서 여러 해 동안 다니면서도 소련의 간첩들을 만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만나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들이 당신의 눈에 띄지 않을 뿐입니다.

   다음 장에서 나는 소련 신문들에 실린 글들을 인용하여 지하교회가 존재할 뿐 아니라 전점 더 커져가고 있음을 입증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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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천하를 얻고도


             그것을 왜 복음이라 하는가?


   이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기사거리도 많습니다. 아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것은 슬프고 또 어떤 것은 즐겁고 기쁜 이야기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이야기나 소식을 듣고 싶으십니까?

   절망적이고 슬픈 소식은 듣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죽음에 관한 것일 것입니다. 참으로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아무도 같이 할 수 없는 나만의 마지막 걸음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에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어떤이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고 죽는 자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전도서를 기록한 전도자는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전11:9)고 했고 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전 12:1) 그리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준비하지 않은 채 죽음 저편으로 가는것처럼 두렵고 무서운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쁜 소식! 그것은 복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된 소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복된 소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바라시며 바로 당신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에게도 영원한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지옥에 떨어지거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당신이 구원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복음은 무슨 심오한 철학자나 많이 배운 사람들이라야 깨닫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배운자나 못배운자, 부자나 가난한자, 건강한자나 연약한자,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야말로 모든 사람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쁜 소식이라면 그 기쁜 소식이 쉬워야 하겠습니까? 어려워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하시고는 그 구원 받는 것을 어렵게 하셨다면 어떻게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왜 이렇게 구원받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있는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아직도 무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있어서 부족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도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언가 이루어 놓으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 받을 수 있을 만큼 온전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롬 3:20)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갈 3:11)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갈 5:4)

   그러기에 사람이 구원 받는 이 일을 사람쪽에서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하겠다고 하니까 부족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이 부족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넉넉히 구원 받을 수 있도록 일을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예! 바로 모든 사람입니다. 이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도 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끄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고후 5:14)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딤전 2:6) 당신은 제외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당신도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죄값을 주님으로부터 충분히 받으신 것입니다. 당신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는데도 부족함을 느끼십니까? 당신이 주님보다 크신 이 입니까? 당신이 양이나 염소보다는 클지라도 주님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양이나 염소로는 부족을 느껴도 주님으로는 부족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직도 부족을 느낀다면 당신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막 1:15)

                                                                                                                     -김우종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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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7 건너편 지역들(13-15장)


요절 : 사도행전 13장 39절, 15장 11절

요점 :

1.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3. 핍박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4. 선행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5. 선행은 구원받은 어떤 사람도 지켜줄 수 없습니다.

6. 선행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필수요소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1.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됨(13:1-12)


안디옥 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이외에도 세명의 다른 성경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시킬 특별한 일을 위해 그 두 사람을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 부르심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교회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파송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전도자들과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첫번째 장소는 구브로 섬이었고 마가 요한은 수종자로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온 섬 가운데로 지나갈 때, 그들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라 불리는 그 지방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지만 박수 엘루마가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결국 바울이(Paul : 이때부터 계속 이 이름으로 불리워짐) 엘루마를 얼마동안 소경이 되도록 벌함으로 복음의 빛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기오 바울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방해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얼마 후에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마치 소경과 같이 되므로 더 쉽게 사단의 거짓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증거- 그리스도의 죽으심(13:13-29)


그들은 구브로에서 더 위험한 지역인 대륙으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역을 아주 용감히 시작하지만, 곧 떠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신실한 일꾼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이일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곧 두 사람은 비시디아 땅에 있는 안디옥이라 불리는 다른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으로 먼저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구약 내용을 제시하고는 가능한 빨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23절). 바울은 주님께서 다윗 왕의 직계였다는 것과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것, 그분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 자체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임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잘 말하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두가지는 우리의 구원자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이 전한 말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13:30-41)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영광스런 부활하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이 분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그분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에 대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원에 대해 주님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4. 안디옥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결과(13:42-52)


그 다음 안식일에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 원했기 때문에 거의 온 성이 그에게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들으려고 그런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없었기 깨문에 그들에게는 너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논쟁을 시작했고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기쁘게 했지만 유대인들을 더욱더 분노하게 했고 결국 매우 큰 소란이 일어나 사도들은 그 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한 무리의 행복한 제자들을 뒤에 남겨두었습니다.

   은혜의 때가 주어질 때마다 사단이 소동을 일으키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한다는 것을 학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 후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만 주님을 알게 된다면 믿지 않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받을 약간의 모욕을 염려하시겠습니까?


5.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처음에는 경배를 받았지만 후에는 돌에 맞음(14:1-18)


사도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머물렀으며 그 결과는 매우 비슷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대적했고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알고 피신하여 이웃한 큰 성 루스드라로 도망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치유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이방신임에 틀림없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물론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절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적인 경배를 받는 것은 매우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그렇게 선하신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을 그렇게 자주 기꺼이 경배하려 하는 것일까요?


6. 루스드라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옴(14:19-28)


그러나 루스드라의 군중들은 주위에 의해 곧 변화되어 유대인들이 바울에 반대하도록 선동시켰을 때, 분노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되자 버려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주님을 위해  해야할 큰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만을 섬겨 나가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더베로 갔었지만 그곳에서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가혹하게 취급했던 이 성들을 결코 피하지 않고 그들이 그곳에 있을 때 구원받았던 몇 사람들을 굳게 하면서 바울은 그 모든 성들을 다시 지나서 곧장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각처에 세워진 작은 교회들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서로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본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의


1.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15:1-5)


우리는 11장에서 믿은(적어도 믿었다고 말하는) 유대인 지도자들 중의 일부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것 때문에 그와 논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설명하자 그들은 더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들이 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할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복을 구한다는 구약 시대의 표시였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에는 선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고 폐해졌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떤 것을 더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필요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비참한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외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랄 수 없지만 할례. 세례, 또는 교회 출석과 같은 자신의 어떠한 선한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이며,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에 당신의 공로를 덧붙이겠습니까?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동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켰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매우 반갑게 영접했지만, 믿는 바리새인 중 일부는 모든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베드로가 어떻게 성령님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함(15:6-11)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이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그 문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와 논쟁들은 함께 모여 끝까지 대화한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사실상 이방인들을 받으셨는 가를 단순하게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받으신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라는 짐을 지우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유대인 자신들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까?


3. 바울, 바나바 그리고 야고보가 말함(15:12-21)


그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은 것과 같은 예를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는지 말했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베드로의 진술을 지지하기 위해서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으로 논쟁이 해결되었고 우리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음행과 우상과 어떤 음식들로 인한 죄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금지된 네가지 일들 조차도 구원의 방법이라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런 행위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제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의 구원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4. 이방인 신자들에게 쓴 서신(15:22-29)


야고보의 제안은 모든 교회에 잘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그 서신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유다와 실라 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 중에 인도자"(22절)로 표현되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나은 표현을 25절에서 보게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서신에서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될 것을 전하라고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네가지 필수적인 일들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5. 이방인들이 기쁨으로 그 서신을 받음(15:30-35)


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온 교회를 모아 서신을 읽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실제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결국 옳았으며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더우기 유다와 실라도 그 사람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했습니다. 얼마 후에 형제들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려 보냈지만, 실라는 계속 머물며 주님의 사역을 돕고자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되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더하려고  매우 먼곳까지도 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직면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있습니다.


6.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함(15:36-41)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 성들을 다시 방문하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원했지만, 그 첫번째 전도여행에서 낙오한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므로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나 마가를 볼 수 없지만 바울은 그들 모두를 친구로 여겼습니다(고전 9 :6, 딤후 4:11).

   바울은 실라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와 함께 가기를 기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며 전송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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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4 순교자와 전도자(6-8장)


요절 : 사도행전7장 56절, 8장 22절

요점 :

1. 그리스도인은 물질 문제에 있어서 주의해야 합니다.

2. 사단은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교회를 공격합니다.

3.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든지 죽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4. 교회의 박해는 유익한 것일 수 있습니다.

5.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6.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지라도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스데반의 사역, 증거 그리고 죽음


1. 일곱집사를 택함(6:1-15)


이제 막 시작된 교회의 그 다음 어려움은 헬라인 중 몇 사람들이 불평을 할 때 오게 되었습니다. 이 신자들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들은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신자들이 돈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기 때문에 그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소홀하게 대해진다고 느꼈습니다.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항상 어떤 것에서 불일치 하게 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열 두 사도들은 교회의 돈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그들이 말씀 전하는 것을 중단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이 일을 위해 일곱 명을 지명하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삶에서든 교회에서든 돈 문제가 적절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어려움의 또 다른 형태는 또다시 교회 밖에서 오게 되었는데, 예루살렘에 온 순례자들 중 몇몇이 이 교리에 관해서 스데반과 논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논쟁에서 이기지 못하자 그들은 그가 성전에 대해 거스르는 말을 했다고 송사하였습니다. 논쟁은 좀처럼 어떠한 유익도 이루지 못합니다.


2.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에 응답함(7:1-8)


그들이 스데반을 고소하려고 공회에 끌고가자 스데반은 그들에게 처음부터 유대 백성들의 죄악을 보여줄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창세기 12-25장에는 아브라함의 전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데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고 순종했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이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주의 사자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거절한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했던 사람들보다 더 악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3. 요셉은 시기를 받았지만 영화롭게 됨(7:9-16)


그후에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증손자였던 요셉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요셉의 열 형제들은 그들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로 인해 그를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야곱의 아들들 중에 우두머리가 되도록 선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 요셉에 대한 이야기는 창세기 39-50장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요셉과 그 형제들의 자손들이었기에 스데반은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은 20에 노예로 팔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고 그리스도는 은 30에 팔렸지만 이제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높이셨습니다.


4. 처음에 거절된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됨(7:17-43)


이제 스데반은 유대인들이 위대한 율법 수여자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모세의 이야기로 이어갑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교육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어느날 그는 이스라엘 사람 하나가 애굽인과 싸우고 있는 것을 보자 자기의 형제를 돕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에는 두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고 도우려했지만 그들이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고 대들며 도움을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출하려고 애굽으로 다시 보내셨습니다(43절). 그리고 이제는 그 백성들이 모세를 기쁘게 영접했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백성들이 거절하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오래전에 모세가 한 말인 하나님께서 어느날엔가 자기와 같은 또다른 선지자를 일으키신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상기시켰습니다(37절).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요1:17) 이 약속이 성취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주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광야 여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불기둥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을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서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이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거절하여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는 복을 거절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주시는 복을 받아들이기 원하십니까?


5.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함(7:44-53)


유대인들은 스데반이 그들의 놀라운 성전이 파괴될 것을 말했다고 고소했습니다(6:14). 그러나 지금 스데반이 나타낸 것은 성전조차도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님을 거역했다고 분명하게 선언한 것입니다(51절).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였고, 지금은 그들이 하나님의 아드님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 조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 스데반의 용기를 찬양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들에게 자기를 죽일 권세가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찌하든지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이라도 자신의 엄청난 죄책을 깨닫고 용서받기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바랐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도 자기의 죄가 매우 악하다는 것도 끝내 깨닫지 못하고, 구세주에 대한 어떤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그것에 대해 영원히 벌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기를 기뻐할 것입니다.


6. 스데반이 깊이 잠듦(7:54-60)


그러나 받아들이지 않은 유대인들은 광분하여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갈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스데반에게 하늘의 환상을 보이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셨습니다. 백성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가서 죽기까지 큰 돌들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죽기 전에 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과(눅23:34) 동일한 기도를 했습니다.

   신자가 깊이 잠들었다고 하는 것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또다른 표현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첫번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당신도 필요하다면 주님을 위해 기꺼이 순교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매일 그분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복음이 사마리아와 아프리카까지 전파됨


1. 사울의 핍박과 빌립의 기적(8:1-8)


우리는 사울에게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도울 때 처음 언급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회심했는지와 그의 이름이 어떻게 바울로 변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사울은 니고데모처럼(요3장) 유대인의 랍비(선생)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사단에게 속했다고 확신하여 그들을 진멸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울은 길리기아성 다소사람으로, 아마도 6장 9절에서 스데반과 논쟁했던 자들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일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을 흩어버리고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는 대로 감옥에 던져 넣었고 사도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여러 나라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복음을 더 멀리 전파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에 관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핍박은 그들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게 하려고 필요했을 것입니다. 어쨌든간에 이 일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구원을 얻게 되는 복된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교회의 물질을 관리하기 위해 사도행전 6장에서 선택된 집사들 가운데 한 사람(스데반)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 빌립은 지금 사마리아 성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믿게 되는 또 다른 특별한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8절).


2. 시몬이 믿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님을 받음(8:9-17)


이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사단의 능력에 의해서 사람들을 속이는데 사용되었던 시몬이라 불리는 마술사였습니다. 이제 그도 말씀을 듣고 믿어 침례를 받았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에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지역(유대)에서만 아니라 사마리아에서도 주님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그래서 지금 그들의 아주 오랜 대적의 땅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듣게되어 사도들이 사마리아로 내려갔으며 그들이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선물로 주심으로 그 사마리아인들을 받으셨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또한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며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때문에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거절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3.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사기를 원함(8:18-25)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안수함으로 성령님의 역사를 본 시몬은 놀라워 했습니다. 그가 갖고 있던 돈은 아마도 그가 전에 사단적인 힘으로 사람들에게서 번 것일 것입니다. 지금 그는 사도들의 특별한 특권을 사서 자기가 사용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지 않는다면 돈과 함께 망할 것이라고 하였고 시몬은 베드로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한 것은 시몬이 행한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안에는 돈으로 어느정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선물에 대해 값을 지불하려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던지 모욕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신 구세주를 영접하기를 원하시며 그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은혜에 대해 주님께 사랑을 나타내려고 우리의 물질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4.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8:26-29).


지금 이러한 모든 복과 기쁨이 사마리아에서 보여지고 있을 때 빌립은 갑자기 광야로 가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일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빌립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프리카의 큰 나라인 에디오피아로부터 온 권세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그의 나라로 병거를 타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 관해서 들었겠지만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고 평화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에는 신약성경이 아직 기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구약으로 된 성경을 읽으며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님은 빌립에게 병거에 있는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거룩한 도성으로 알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진리를 참으로 알았던 유일한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을 성공적으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까지 온 이 사람은 만족함 없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종(빌립)이 있었기에 이 내시에게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5. 빌립이 예언의 뜻을 설명해 줌(8:30-35)


지금 그 에디오피아 사람은 구약성경 가운데 다른 어떤 책보다도 예수님에 관해서 더 많이 말하고 있는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53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관해서 말하고 있었지만 에디오피아 사람에게는 그것이 선지자 자신에 관해서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지 확실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내시에게 그 선지자는 참으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에 우리의 죄를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고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고난을 받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셨더라도 주님께는 죄가 없었기 때문에 영광으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홀로 하늘에 영원토록 계셔야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곳은 어떤 죄도 들어갈 수 없는데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슬픈 일은 주님께서 십자가의 처절한 고통을 겪으셨는데도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주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이 당신에게도 헛된 것입니까?


6. 빌립이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침례를 주고 돌아감(8:36-40)


에디오피아 사람은 주 예수님에 관한 장엄한 이야기를 즉시 믿었으며 자기의 믿음을 나타내기 위해 바로 침례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빌립은 기쁨으로 침례를 베풀었고 그 일을 마치자 성령님께서 그를 데리고 가심으로 에디오피아 사람은 더이상 그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알게 된 기쁨으로 그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우리는 그가 고국에 도착했을 때 고난 받으시고 영화롭게 되신 구세주에 대해 여왕과 모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한 사람 빌립의 충성스러운 순종을 통해서 아프리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8장에서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복음을 퍼뜨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믿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보내시든 주님께 기꺼이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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