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성경을 고치려는 신자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기독교의 생명을 무엇인가? 성경의 완전함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고치겠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

   필자가 만나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자는 다양한 질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교회의 여러 가지 형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들은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의전통을 중시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과 그의 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주님을 대적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의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새로운 자기들의 전통을 접목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일이며 고치려는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도 동일하다. 필자와 함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인용하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경에 보이는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몸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몸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배웠는데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 하였거니와 오직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인 무리일 뿐이다.

   절대로 건물은 교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다든지 성전 봉헌식을 한다는 말들은 소경의 넋두리요 성경을 고치려는 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교회 구조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가? 성경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각양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의 기능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체가 교회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가 되어서 교회를 대표하고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교리는 어떤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만인은(구원받은 자는) 다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치지 아니하였던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 단정코 말씀하셨다. 신부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신부 대신 목사로 명칭만 바뀌었지 아니한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중보일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잘못된 전통일 뿐이다.


   셋째로, 교파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서 누군가는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파를 나누어서 당을 짓고, 담을 쌓고, 경계선을 그리고, 명칭을 붙이고, 대표를 뽑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할 헌법을 만들라고 가르쳤는가? 헌법이 성경을 대신하고, 대표가 예수님을 대신하며, 조직이 성령을 대신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조직을 통하여 대신하면 하나님의 할 일은 무엇인가?

   1900여 년 전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종 바울은 교파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린도전서 1:11~13).

   바울은 당파를 짓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유아적 발상이며 시기와 질투의 소산이며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발버둥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1,3).

   말씀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당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파주의를 주장하고, 종파에 속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 사람들은 성경을 능멸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교파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파로 모이는 것은 정확하게 닮은 모습이다.

   넷째로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와 그의 지도자들은 대답해 보라. 오늘날 명단을 공개하는 헌금은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헌금제도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시중에 돌고 있는 여론은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 예배당에 나가도 돈 없으면 행세하지 못한다. 예수도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한다" 하지 아니한가?

   헌금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 그냥 헌금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물질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헌금하면 되지 아니한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이름 쓰면 헌금하고 쓰지 아니하면 헌금하지 않는 믿음의 수준이겠는가? 필자가 속한 교회를 40여 년간 지켜보는데 한 번도 기명헌금을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하고 교회도 잘 운영되고 불편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헌금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경계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심을 기억하여 은밀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엄청난 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하며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지 필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 하나님은 산동네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복음으로만 돌아보는 허름한 예배당의 허름한 차림의 주의 종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다섯째로 복음의 변질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을 지금 언급하고 싶다. 지옥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옥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파고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기복신앙은 한국 토속신앙의 산물이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타락시켜도 누구 하나 외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기복신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정성껏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황당에 정성껏 빌면 복 받고 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토속신앙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으니 속죄에 대한 감격도 없다. 지옥의 절망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는데 지옥에서 건져주는 핵심 진리인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분석이다. 속죄를 그냥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많은 시간 사용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모든 설교시간에 지옥을 언급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1200도가 넘는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에 간 가룟 유다에 대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토록 무섭고 끔찍한 지옥을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경고하지도 않고 지옥에 대한 대책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한국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으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눈물이 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 체험도 아니고 감정적인 어떤 경험도 아니고 환상이나 꿈이나 기타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통하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날이다. 존 뉴턴도 우리 찬송가 405장에서 이 놀라운 날을 간증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로새서 1:6).

   얼마나 분명한가. 여러분에게 이런 날이 있는가? 어떤 집사님은 구원받았는가 물으니 자기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은 다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다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전체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와 같은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는 천국에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예배당에 출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어떠한 변질보다도 무서운 변질이다. 복음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도 관계가 없다. 복음이 잘못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 핵심이 복음이요 성경 중심이 복음이며 결론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떠난 기독교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외에도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를 향하여 할 말이 많다. 성경을 고쳐가는 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진리는 성경뿐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죄 용서받고 성경대로 구원받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단회적이고 실제적이다. 교파를 초월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다 같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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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갈라디아서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 허윤욱-

                                           서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인하여 십 년 전에 횃불에 연재된 채 묻혀 있었던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게 됨에 한없는 감사와 눈물이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때는 학자들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서기 55년경으로 본다.

   순수하고 깨끗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나,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했던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에게 사단의 역사가 시작되니, 지도자들이 변질된 교리를 받아들이고 양들이 그것을 좋게 여겨 급속도로 썩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사단이 가라지를 뿌린다고 하신 주님의 예언의 성취였다.

   이 때에 바울은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대변인이 되어 악을 제거하고 진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이 서신을 쓰게 되었다. 이 분노는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가 일어날 때에 창으로 시므리와 고스비를 찔러 악을 제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받았던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분노와 같다(민수기 25장).

   오늘날은 갈라디아 시대보다도 더 혼탁하여 복음을 듣고자 하여도 정직한 복음을 듣기 힘들며, 진리를 왜곡하여 성경과 전혀 관계없는 종교로 만들고, 그 집단 속에서 순응하지 아니하면 이단으로 정죄 당하는 슬픈 현실이 되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성경적으로, 양심적으로 진지하게 믿으려 발버둥쳐도 거대한 종교 집단에 순응하지 아니하면 정죄 당하는 현실 아닌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기도 부끄러운 현실이 아닌가? 성경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서 성경의 가르침보다 자신의 종파의 헌법을 더 주장하면서 사람의 가르침을 더 따르지 아니한가?

   필자는 썩을 대로 썩어 가는 한국 기독교 현실을 바라보면서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양떼들의 길잡이요 등불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어 이글을 읽고도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비극은 없었으면 하는 기도와 바람이 있다.

   다소 직설적이고 강력한 책망의 표현이 있을지라도 비느하스가 가졌던 거룩한 분노로 받아서 소화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 글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 기도해 주신 동역자들에게 감사하고 전도출판사 직원들에게 감사드린다.

                                                                                                                             2001년 8월


             사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기독인들이여!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갈라디아서 1:1)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경도 사람이 기록한 책이 아니냐?"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냐?" "특별한 지능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겠느냐?" 하며 근거도 없는 자신의 외고집 생각만가지고 질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은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성경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의 진실은 하나님이 보장하시고(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증명은 성경이 담당하고 있다. 성경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깨우치심 없이 성경을 깨달을 수 없다.

   우리는 말씀이 하나님 자신인 것을 요한복음 1장 1절을 통해 알고 있다. 또한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주체가 된다고 요한복음 12장 48절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모든 신자가 읽고 순종하고 높이고 신앙의 지표로 삼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사람에 의해서 좌우되고, 사람 중심으로 모여지며, 사람에 의해서 건설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본래 초대교회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하심으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계획하신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을 통하여 죄인을 구원하기 시작하심으로 초대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창세전에 계획되었으며, 구약에서 예언되고 준비되어 신약교회 시작 전에 이루어져 신약교회를 이루는 초석이 되었다. 이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주님께서는 이 일에 사람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금일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사람의 이름과 가르침을 중심으로 종파를 만들어 여기에 소속하면 잘 믿는 것이고 이 종파에 소속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처럼 가르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각 종파들은 대부분 불과 3,4백년을 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그들만이 순수하고 정통인 것처럼 착각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렇다면 그들 전에 순수하게 믿었던(종파와 소속없이) 사람들은 무엇이었던가? 초대교회의 12제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은 금세기에 있는 아무 종파에도 속하지 아니하였는데, 그렇다면 그들 모두는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인가?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 중에 필자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잘 설명하여 주어도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목사님의 말은 무조건 따르지만 성경말씀은 따르지 않는다.

   슬프다, 현실이여! 어쩌다 성경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졌단 말인가? 성경이 사람의 말보다 못하단 말인가? 성경을 사람의 말과 가르침보다 푸대접하는 이 세대는 정죄 받아 마땅한 세대다.

   사람을 무조건 따르다가 망한 사람들의 교훈이 구약에 기록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사무엘하 15장부터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이 자기의 세력을 넓히고 다윗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사전에 헤브론으로 사람을 모을 때, "청함을 받은 200명이 그 사기를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예루살렘에서 저와 함께 갔으며..."(사무엘하 15:11)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왜 가야하는지, 자기를 청한 압살롬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아무 뜻 없이" 사람만 보고 몰려갔던 것이다. 압살롬은 그 외모가 다른 왕자보다 뛰어났으며, 그는 다윗의 왕자였으니 차마 아비를 배반하랴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외모와 상황과 신분만 보고 바보처럼 따라갔던 이 사람들의 말로가 처참했다. 이 사건은 오늘날 기독교의 상황을 잘 예언하여 주고 있는 한 폭의 그림이요 거울이다.

   금일에도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자로 위장하는 자칭 하나님의 종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있다. 그들은 오늘날 각 종파들이 만들어놓은 모든 절차를 다 밟아서 정상적으로 목사의 직분에 이르렀으나, 성경은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들 중 거짓 종들이 얼마든지 섞여 있을 수 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태복음 7:15).

   조심하여야 한다. 반드시 조심하여야만 할 것이다. 어린 양떼들이여! 저들이 지극히 거룩하게 보일지라도 거짓 목자이며, 거짓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말씀은 거짓일 수 없으니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는 이리"라는 말씀을 잘 묵상하기 바란다. 자식된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할 줄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오늘에도 입만 열면 하나님을 높이고 거룩한 하나님의 종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찌 거짓 종일 수 있느냐고 의심할지 모르나 압살롬을 따랐던 자들처럼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버지를 반역하여 모반한 압살롬과 다윗의 싸움은 18장에 나오는데,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 모른다. 2만을 헤아리는 백성이 희생되었으며,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기록이 주는 교훈이 크다고 생각한다(사무엘하 18:8).

   오늘날 영적인 세계의 혼탁한 상황은 수풀을 가리키는바, 이 영적인 세계의 수풀 속에서 사람을 따라 방황하다가 죽어 가는 불쌍한 양떼들을 말함이 아닌가? 그들은 진리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 이 종파, 저 종파로 몰려다니며 방황하다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며 죽어간 것이다. 자신들은 잘 믿는다고 알았는데 왜 지옥에 갔는지 그 이유를 지옥에 가서야 비로소 알 게 될 것이다. 성경은 그들이 "울며 이를 간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태복음 13;50).

   오늘의 기독교인들이여! 양떼들이여! 사람을 따르지 말고,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

   "이 땅에 괴이하고도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예레미야 5:30,31).

   이와 같은 일은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 욕심대로 가르치고 인도하여도 사람들은 분별없이 따르니 도대체 어찌 하려는가? 선한 양떼들이여, 불쌍한 소경들이여!

   이 말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로 그들의 행위는 괴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가르침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금일의 기독교계서 행해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 기본 상식과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따르고 있다. 비성경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육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하여 교회가 물질화, 인본주의화 되어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모습은 지극히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들은 에서의 망령된 길을 스스로 따르고 있다.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처럼 스스로 팔린 사람들이다. 사람의 생각대로 믿으며, 이권을 따라 움직이는 현실은 신구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죄악이다.

   둘째로, 그들은 거짓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발표하였다가 부끄러움을 당했는데 아직도 그러한 거짓 것을 따라가는 우매한 교인들이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복음 24:36).

   그들이 거짓 것을 예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해방자라 하여 폭력적 권력이나 독재자들로부터, 억압자나 가진 자들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늘날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정치운동을 하거나 사회운동을 하여 예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

   예수님께서 해방자인 것은 성경도 가르친다(로마서 8:1,2). 그러나 예수님은 죄와 사망(지옥)으로부터의 해방자이시지, 독재자나 착취자로부터 해방자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또 그들은 거짓 것을 가르치되, 열심히 노력하고 교회 제단에 충성하면 은혜 받고 천국에 갈 것처럼 가르치나 성경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다. 오직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은혜와 사랑을 통해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 구원을 받을 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다만 이 엄청난 구원을 단번에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감격, 감사하여 자의적 충성으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성도들의 무리인 교회가 있을 뿐이다.

   셋째로, 그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옛날 타락된 제사장들은 제사장직을 하나의 권력으로 생각하여 권위주의를 발전시켜 나갔었는데, 금일의 기독교 상황은 목사를 공공연하게 제사장으로 비유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처럼, 가르치는 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마태복음 15장 4절 말씀을 읽지 못하였는가? 성경은 구원 받은 자면 다 제사장이라고 선포하고 있지 아니한가! 루터가 만인제사장주의를 부르짖은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잊었는가!

   "너희도...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베드로전서 2:9).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닌가? 금일의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신을 제사장처럼 가르쳐 교인들 위에 군림하여 자신을 잘 섬기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며, 자신의 말을 불순종하면 하나님께 저주 받는다고 협박하여 양떼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서운 죄악이 백주에 자행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섬기면 복 주고 자신의 마음에 안 들면 저주해 버리는 독재자인가? 무서운 심판자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모습인가? 물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 양면의 조화가 필요한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혀 성수주일 안 하고 십일조나 기타 헌금실적이 부실하면 당장에 저주를 퍼붓는 무서운 하나님으로만 보이게 하는 현실은 탄식할 일임에 틀림없다.

   오늘날 기독교를 병들게 한 권위주의, 즉 일인목회주의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성경은 그와 같은 가르침을 동조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중보이시다. 이 일에 필요하다면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겠으나 중보는 한 분 예수님뿐이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의 죄사함에 대한 중보이시다. 그분은 인간 편을 바라보실 때 죄 속에서 죽어서 죄값으로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딱한 처지를 보셨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의 죄 문제와 싸우다 죽어 가는 슬픈 존재인 것을 주님이 보셨던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 하나님의 편을 바라보실 때 인간을 사랑하시나 죄는 사랑하실 수 없고, 인간과 같이 계시고 싶으시나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보셨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을 천국에 데려가고 싶으시나 죄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죄인을 데려가실 수 없는 하나님의 입장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해결하셔서 하나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다 충족시켜주신 완전한 중보자(중재자)가 되셨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브리서 9;12)

   영원한 속죄! 독자여, 이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깨달은 적이 있는가! 만약 그대가 마음속 깊이 이 말씀을 깨달았다면 그대는 구원 얻은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있다. 그대의 과거,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미래의 모든 죄가 영원히 해결 되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모든 죄를 씻었다! 말끔히 씻었다! 이제 그대가 할 일은 이 십자가의 속죄를 단순히 감사하여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받았으며, 거룩해졌다고 성경은 이미 선포하고 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이 말씀으로 의로워졌고 구원받았기를 바란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중보가 되신 것은 천국의 하나님과 우리를 만나게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주님은 공중에 오셔서 우리를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데려가셔서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인도하실 것이다(데살로니가전서 4:15~18). 구원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가 그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비록 어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일지라도 구원받은 모든 자가 이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복스러운 영생의 소망이다. 주님은 친히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 14:2~3).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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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의 원리

 

                            7장 교회 선택

               Choosing a Church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참여해야 할 교회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사람이 구원 받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참 교회와 연합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이름이 하늘에 있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계 21:27). 참된 교회는 인종이나 피부색에 상관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구성됩니다. 비록 모든 교회가 한 자리에 모여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참된 교회의 구성원들은 전 세계 각처에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가까운 곳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그들의 안내자로 삼고, 한 교회의 지체로 함께 모여 봉사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들의 가정에서 모였습니다(롬 16:5, 몬2). 그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보면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골 4:1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지체로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은 아주 분명한 주님의 뜻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5절에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라는 경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말은 몇몇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함께 모이는 습관을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때때로 갓 구원받은 성도가 어느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릴지 분별하는데 있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것은 한 지역 혹은 한 도시 내에 지역교회가 둘 이상 있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몇 몇 도시에는 그 가르침에 있어서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는 기독교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참여해야 할 지역교회를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먼저 교회 선택의 문제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음으로써 지역교회에 대한 참된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전해준 가르침을 검증하기 위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사 8:20).

 

   다음에 열거된 사항은 새 신자가 바른 교회를 찾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모든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지 확인 하십시오. 모든 성경은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은 성경을 쓴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딤후 3:16, 벧후 1:21). 이것이 바로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하는 근거입니다(성경의 기본진리 1과 참조) 몇몇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일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나머지는 인간의 말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하며, 또한 성경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에 관한 모든 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최종적인 권위이며, 우리가 하는 일들을 항상 성경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진리들을 가르치는지 확인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위대한 지도자 혹은 이 세상에서 산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께 "성" 이란 칭호를 붙여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구주에 대한 가장 큰 진리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성육신 하셔서,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이 성부, 성자, 성령 3위 하나님 가운데 제 2위의 위격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곧 성자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골 2:9). 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인정해야 합니다.

 

   3)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성경은 주 예수님께서 죄 없는 삶을 사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더 이상 썩지 아니하시고 죽지 아니하시는 부활의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은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15:1~4).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며, 우리의 어떠한 공로나 선행도 구원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엡 2:8~9).

 

   4) 그리스도의 귀중한 보혈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빠진 죄 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골 1:14, 갈 1:6~9).

 

   이상의 네 가지 외에도 지역교회가 그들의 설교와 행동으로써 다음의 중요한 진리들을 인정하는지 확인하십시오.

 

    1)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골 1:18~19, 엡 1:22~23). 누구도 이 자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인 곳에서 신자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되, 오직 그분의 계명을 이해하고 따르는 데 있어서도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모든 신자는 몸 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고전 12:12~13). 하나님의 참된 자녀는, 모두 지역교회 안으로 기쁘게 영접되어야 합니다. 다만, 지역교회의 교제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을 믿지 않는 사람들(요이 10).

   <2> 죄 가운데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고전 5:13).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에 참석할 수는 있으나, 예배나 교회의 일에는 참여할 수 없습니다.

 

   3) 불신자들을 교회의 교제 가운데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4) 신자들은 모두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5,9). 구약 성경을 보면 제사장들과 나머지 백성들 간에는 구분이 있습니다. 백성은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가지고 올 수는 있었으나, 그분 앞으로 그것을 가지고 직접 나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희생제물을 제사장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희생제물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는 것은 바로 제사장들의 의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돌아가심 이후, 신약 성경에는 더 이상 제사장들과 백성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점도 없습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며,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져가는 희생제물은 예배와 찬양과 봉사입니다. 또 신약성경은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위해 부지런히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성령님의 권위가 인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인도자가 되셔서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봉사, 가르침, 징계를 직접 인도하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지배가 인간의 생각이나 의식으로 제한 되어서는 안됩니다(고후 3:17, 엡 4:3).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정리해보면, 신자들은 마땅히 성경을 그들의 유일한 안내자로 삼고, 그리스도의 사역과 위격*에 관한 모든 가르침을 믿으며, 또한 교회와 교회의 사명에 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하는 지역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들에 동의하는 신자들이라면 성경적인 "성도간의 교제"를 나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위격: 그리스도는 성육신 하셔서 완전한 인격을 가지고 오신 완전한 사람이셨지만, 동시에 삼위 하나님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의 위를 가지고 오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위를 가지시고 성육신하여 오신 완전하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 완전한 인격이 그리스도의 위격입니다. (역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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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인의 단순성

                           그리스도인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얼마나 놀라운 신분을 소유한 자인가!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도 교파의 구분이나, 나아가 교파를 나누는 분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무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분열과 분란을 일으키고 교파나 분파를 만드는 데 원인이 되는 문제들이란 대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지키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문제는 가급적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교회 질서를 위해 비성경적인 명칭이나 체제를 거부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자로 구성되어 있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믿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으로 적용되지 않는 명칭은 어떤 것이든 파명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초대 교회 성도들이 모였던 것과 동일하게, 성경을 연구하고, 함께 교제하고, 주님을 기억하며 떡을 떼고 기도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습니다.(행 2:24).

 

   주의 만찬상에 둘러앉은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것은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이들은 오늘날 대형교회의 많은 모순을 없애고자 시작된 작은 교회 운동의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단순성과 사도들이 보여준 초대교회의 모본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님을 섬기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구합니다(요 4:23, 24). 매주 주의 첫날에 모임을 가지며(행 20:7) 의식이나 정해진 순서에 따라 드리는 예배를 배제하는 대신,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형제 중에서, 기도하는 일과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일, 예배에 합당한 찬송가를 택하고 부르는 일과 성경을 읽고 나누거나 권면하는 일 등  주의 만찬상에서 행해지는 모든 순서의 진행에 있어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라면 누구라도 잠잠히 있거나 침묵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모든 성도가 예배에 참여하되 아무도 주관하지 않습니다.--주관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고 말씀하신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나 예배를 드릴 때나 징계를 행할 때에 오로지 성경 말씀에 따라 모이고 성경 말씀에 따라 예배를 드리며 성경 말씀에 따라 징계를 단행합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행하신 대속사역을 믿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누구나, 그가 죄 가운데 살고 있거나 고의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가운데 살고 있지 않다면, 주의 상에 둘러앉아 먹을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롬 15:7, 고전 5:11, 요일 1:9-11).

 

   이들은 사람에게는 "목사님-Reverend, 본래 뜻은 지존자"(시 111:9)이나 "신부님-Father, 본래 뜻은 하나님 아버지"(마 23:8-9)같은 호칭처럼 사람을 하나님 수준으로 높이고, "사람에게 아첨하고"(욥 32:22),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기"(욥 32:21)위한 어떠한 직함도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성경의 말씀을  지지하고 믿습니다. 이들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계 2:6, 10). 다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하신 대로 그리스도인의 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를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들은 성경 말씀이 보여주고 있는 복수 장로제 또는 복수 감독제를 추구하며 일인 목회는 사람의 전통에 의한 것으로 교권체제와 성직자제도를 추구하는 비성경적이기에 폐하여야 한다고 분별합니다.

 

   이들은 일인 목회 또는 성직자제도가 들어올 수 있는 위험성 때문에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 정기적인 봉급은 지급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주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일꾼들이 믿지 않는 이방인들로부터 도움을 구하게 되지 않도록 돕고 공궤할 책임이 모든 성도에게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요삼 1:7). 이들은 어떠한 공중 집회에서도 헌금을 별도로 모금하지 않고 준비된 헌금함에 자원해서 개별적으로 넣습니다. 이들 가운데 헌금을 모금으로 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는데 보통은 주일 만찬 예배 때 합니다. 헌금을 모금으로 하는 경우 이때가 매 주일 한 번 헌금이 모금되는 유일한 집회가 됩니다.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21)을 기록한 책입니다. 결과적으로 성경은 결코 "사사로이 풀 것"(벧후 1:20)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는 성경, 즉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임의로 해석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이들은 말씀을 대할 때에 성령님께서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성경을 해석하는 데 사람이 만든 교리나 신조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모든 교리에 대하여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전적인 부패; 인간의 유죄성, 길을 잃고 소망을 잃은 절망의 상태; 독생자이신 구세주를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완전한 하나님의 신성과 완전한 사람의 인성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사람은 오직 피로만 구속받을 수 있기에 행위나 율법이나 개과천선과 같은 자기개혁이나 자기혁신으로 구속받는 것이 아니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흘리신 보혈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받아주심에 대한 증거인 그리스도의 부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자신이 받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으며, 이 확신은 느낌이나 외적 경험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오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영원히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결코 구원을 잃을 수 없으며 마치 그 자신이 천국에 이미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요일 3:2). 하지만 이들은 이러한 가르침의 오용에 대하여는 경계합니다 .이들은 성경 말씀이 구원받은 자는 그 열매로서 선한 일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씀하신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 곧 믿는 자에게 자기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로 그리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명백하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된 삶이며 이 세상의 길에서 완전히 분리되고 구별된 삶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이 세상 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고 산 자들도 죽은 자들과 함께 다시는 죽지 않고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하여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실 것입니다(살전 4:16-17).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천 년의 통치를 하시기에 앞서, 심판으로 이 세상을 깨끗이 정화하실 것입니다 그후에 천년왕국에서 "친히 만국을 철장으로"(계 19:15) 다스리실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항상 주와 함께 다스리는 자로 있을 것입니다(살전 4:17).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영원히 소멸되지도 죽지도 없어지지도 회복되지도 않은 채 존재하게 되는 영벌, 곧 "둘째 죽음"인 "불 못 속에" 있는 그들만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사실을 성경대로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매우 진지하고도 충성스럽게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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