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6과


                                     이상적인 여성상


   신약에서 몇몇 여성들의 특성을 살펴 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성들에 관해 계속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개개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여성이 하나님이 보시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완전히 보여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여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었던 여러 특징을 찾아, 종합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그려 보고자 합니다.


                                                              순복과 복종의 여성


   이 주제에 있어서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상고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젊은 여성이 남달리 우리 주님의 어머니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만 마리아가 요셉의 정혼한 처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마리아는 고결한 생활을 했고, 하나님을 향해 헌신된 심령의 소유자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천사에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라고 대답한 것을 보아서 어렴풋이나마 그의 인품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마리아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리아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오고 있지만, 그중 한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 2:1~11)고 말했습니다. 이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충고였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 전폭적으로 순복할 때에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한편 마리아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은 자였으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아야만 했음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 (눅 1:47)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의롭고 흠이 없는 여성


   침례 요한의 어머니이며, 마리아의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노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니"(눅 1:6). 이것은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갖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엡 1:4,5).


                                                              헌신적 여성


   안나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연로한 여성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눅 2:37)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성전에 있던 안나는 예수님을 뵙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안나는 주님을 뵈올 때 이스라엘의 구속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기쁨에 넘쳐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자랑했습니다. 안나는 평생 동안 시간과 정력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고 강권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마 6:33)를 구해야 하며, 위엣 것" (골 3:2)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자신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사랑과 감사의 여성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 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 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눅 8:2)라 하여 다른 여인들보다 맨 먼저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3)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대 대한 그의 사랑과 감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은 돌아보지 않았고, 다만 주님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막달라 마리아가 슬픔을 못 이기며 주님의 십자가를 응시하는 모습과 (마 27:55,56), 무덤에 이르러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 20:1~18).  그러나 바로 그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뵈옴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던 마리아의 심령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아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최초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마가는 기록했습니다(막 16:9).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에 대해서 실로 훌륭하게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 주님께서 인생의 감사에 대해 보답을 잊지 않으시는 실례를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7)고 물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심령이야말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자들의 성품이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여성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딤후 1:5)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을 통해서 유명해진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평생에 역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교훈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디모데가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의해서 성경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딤후 3:15). 오!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나 할머니나 그 밖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배의 여성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를 보면, 그는 매번 주 예수님의 발 아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주님께 배우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에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도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온 집안을 진동한 향유의 향기! 마리아가 드린 이 경배의 향기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였으며,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어떤 사람은 예배를 가리켜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심령이 넘쳐 흐르는 것'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선행의 여성


   베다니의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보여서, 때로는 가사에 분주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등한히 했던 신령하지못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요 11:5), 주님께 대한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 11:21~27).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다 인정하셨고, 다 필요로 하셨습니다. 다만 마르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 (눅 10:40) 했던 점이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균형을 잃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발생하기가 쉬운 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해치면서까지 봉사하는 것을 귀히 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의 발 아래 앉는 일과 봉사하는 것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9장 36~41절에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 이 심히 많았던 여제자 도르가에 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성경이 도르가의 선행에 관한 전모를 기록해 주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겉옷과 속옷을 만들었다든지, 그가 베풀었던 친절을 기억하며 그의 주검앞에서 과부들이 슬피 울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그의 선행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여제자' 라 불리웠으며, 내적 새 생명의 실제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그는 야고보 사도가 말했던, "행함이 있는 믿음" 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약 2:14~16).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히 13:16)


                                                           접대의 여성


   빌립보에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 (행 16:14)가 살고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 여자들과, 또는 자기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다른 이방 여인들로 더불어 정기적으로 기도하러 모였습니다. 당시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으므로 바울 일행은 이 여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고, 그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 열린 마음이 가정을 열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강권하여" 유숙하게 하고는 접대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 최초의 교회가 루디아의 가정에서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려진 한 여인의 마음은 곧 열려진 한 가정이 되었고, 마침내 한 대륙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 고 권면했습니다(벧전 4:9). 더 나아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 고 강권하십니다(히 13:2). 우리가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천사들을 접대하지 못했던 경우는 참으로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복음적인 봉사의 여성


   로마서 16장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여인을 보호자 또는 동역자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 였습니다. 브리스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 였으며, 그의 남편과 함께 고린도와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모이던 교회를 가르칠 능력이 있었으며, 사도 바울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바울은 "많이 수고한 마리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가리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 (빌 4:2,3)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일군이라든가 보호자라든가 동역자라는 낱말로 보아 후원하는 사역을 했다고 분별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여인들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다는 견해는 성서적 주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수고했다거나 많이 수고했다는 말씀은 주님을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으로 섬겼음을 보여줄뿐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했으며, 이와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히 13:16).


   이외에 성경에서 다른 여성들에 관한 구절을 찾아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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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월리암 맥도날드 저


                          1과   하나님의 복음

                                                                       (1장1절~17절)


   로마서의 주제는 무엇인가?


   본 서신서의 주제는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은 먼저 이것을 밝히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본 서신서의 저자임을 밝힌 후에,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가지고 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 1장에서 복음이라는 말을 1절외에도 세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9, 15, 16절)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선 이 복음의 사전적인 의미를 알아보면 "기쁜 소식" 이라고  정의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단원에서 복음에 대하여 최소한 여섯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이 복음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1절)

   이 말은 기쁜 소식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며, 인간에 의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 이 복음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된 것입니다(2절)

   이 말은 구약만을 믿고, 복음을 한낱 새로 나온 사이비 교리로만 여겨 복음에 대해 적개심을 가진 유대인들을 위하여 특별히 언급된 것 같습니다. 만약 이 같은 유대인들이 있다면, 신명기 18장 15절이나 이사야 7장 14절 말씀들을 찾아봄으로써 복음이 매우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이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3절)

   사실상 복음이란, 예수님에 관한 모든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영원하신 아들로 입증되신 위대한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4절).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4.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6절).

   이 복음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입니다.


   5. 이 복음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바울로부터 자주 복음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말을 매우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기쁜 소식이야말로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거듭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으로써 이를 증명하였습니다.


   6. 이 복음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입니다(17절)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행위가 아닌 믿음만 근거로 사람을 구원하십니다.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의(義)


   17절에 의라는 단어가 본 서신 서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그 뜻을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사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여러 다른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중, 세 가지만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이 단어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의로써 옳고, 공정하고, 정당한 일을 항상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는 말은 하나님은 불공평이나 부정적이거나 그릇됨이 없으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17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난 사실을 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으며, 어떻게 여전히 공정하실 수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한 표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롬 10:3). 하나님 자신은 의롭기 때문에 천국에서 그와 함께 거하고자 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의를 요구하십니다. 앞으로 상고할 것이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는 의를 얻을 수 가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완전한 신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고후 5: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지 못한 자들을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시기 때문에 마치 의로운 자들처럼 여기십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서의 처음 1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주제로 소개한 후, 앞으로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자 하는 몇 가지 요점들을 아주 간략하게 진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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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12과 밖을 보고, 위를 보라!


                                         히브리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확실치 않으나, 본서를 바울 서신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바울 서신에 포함시키지 않고 제 12과에 본서를 배치했습니다. 결국 본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가장 무난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초로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파되는 복음을 듣고 이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기독교는 지극히 단순하여 유대교의 복잡한 예식과는 지극히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대부분은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기독교를 버리고, 성전이라든가 제단이라든가 제사장이라든가 제물 등의 볼 수 있는 유대교로 돌아 가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저자는 이제껏 세상에 있던 어떤 종교보다도 기독교가 우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이들에게 보여 주려 했던 것입니다.

   1.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장막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 예배를 드립니다.

   2. 사람들은 죄인으로서 언젠가는 죽게 될 사람을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으나, 우리들은 거룩하시고 불의가 없으시며 쇠하지 않고 죽지않는 대제사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3. 유대교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일시적이고 불완전하며,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의 그림자요, 모형이요, 그림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없을지라도 참되고 영원합니다. 기독교는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으며,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도 없습니다.


                                     야고보서


   본서는 우리 주님의 형제로 생각되는 야고보가 당시 세상 끝까지 흩어져 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쓴 서신인데, 서신서 중에서 최초의 편지로 분별됩니다. 아마도 본서는 교회 성도의 대부분이 유대인이었고, 그래서 유대인의 관습이 많이 남아 있던 초대 교회 시대에 씌어진 듯합니다.

   이 야고보서는 아주 실제적인 편지로서, 저자는 계급적인 차별이나 길들이지 못한 혀나 시기나 다툼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압제 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저 입술로만 믿는다는 믿음과 선한 행실이 동반하는 믿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야고보의 가르침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믿음이 있으면 선한 행실은 따르게 마련이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 인내하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하면서 본서를 끝맺고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베드로 전서는 핍박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이 고난을 당하고 있던 소아시아 지방의 유대 성도들에게 씌어진 편지로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고난 저 편에 있는 영광을 바라보게 될 때에는 아무리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떠한 큰 핍박이 몰려온다 할 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누리게 될 성도의 기업은 결코 쇠하지도 아니하고 빼앗아 갈 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거룩하게 생활하셨던 주님을 본받으라고 강조하고,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 때에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로서, 종으로서 충성하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또한 장로들에게는 충성할 것을 권면하는 동시에 청년들에게는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 후서


   베드로 후서는 데살로니가 후서나 디모데 후서와 더불어 완전히 타락하게 될 기독교계의 말세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분명히 임할 것이며, 선악 간에 행한 것을 따라 상급을 받게 될 터이니, 모름지기 성도들은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2장에서는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할 것이지만, 필경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으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3장에서는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날 것이나 주님의 재림과 세상의 심판은 너무나 자명한 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더욱 부지런해야 하고 거룩해야 하며 믿음을 굳게 하고, 주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은혜 주시는 대로 자라가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요한 일서


   이 책에서 요한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성도가 지닌 특성에 관해 상세히 기록해 줍니다.

   인간적으로도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 자녀인 우리가 하나님과 닮은 성품은 어떤 것들일까요?

   1. 성도는 어두움 가운데 행하지 않고 빛 가운데 행합니다. 성도라면 습관적으로 계속해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2. 성도가 범죄했을 때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 그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성도는 모름지기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합니다.

   4. 성도는 성도 상호 간에 형제애로써 사랑합니다.

   5. 성도는 언행심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6. 성도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7. 성도는 세상을 능히 이깁니다.

   아울러 사도 요한은 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오해를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신에대한 모든 개념은 이방 종교라고 했습니다.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 


   요한 이서와 요한 삼서는 그 내용이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어 자못 흥미롭습니다.

   요한 이서에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경고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반면, 요한 삼서에서는 참 신자들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러한 자들을 접대하며, 이들에게 친절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요한 삼서에는 세 인물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이오는 경건하고 손님을 잘 접대함으로 칭찬을 받았고, 디오드레베는 이기적이었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으며, 데메드리오는 꾸준한 생활 간증에 대해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다서


   유다서에는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멸시하는 배도의 죄에 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는 타락했던 이스라엘과 타락했던 천사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등의 세 가지 사건을 인용하여 배도자들은 반드시 벌을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울러 유다는 구약 인물들을 인용하여 세 부류의 배도자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가인은 인위적인 종교를 고집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했습니다.

   2. 발람은 신령한 일을 핑계삼아 돈 벌 궁리만 했습니다.

   3. 고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칙을 어기고 반역했습니다.

   이러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면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사도 요한이 본 계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될 미래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분별에 도움이 될까 하여 본서를 몇 부분으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1 - 3장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로서, 당시의 교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교회사에 나타나게 될 여러 교회의 모습을 간략하게 묘사해 주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  5장에서는 하늘에서 성도들이 보좌를 중심으로 모여 어린 양께 경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많은 성도들은 이 사건이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데려 가신 후에 일어날 것으로 분별하고 있습니다.

   6 - 19장에는 야곱의 환난의 때요, 대환난으로 알려진 기간에 불신 세상에 쏟아지게 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심판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최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심판들로 대적들을 진멸하시기 위하여 친히 오실 것입니다.

   20 - 22장은 그리스도께서 사단을 무저갱에 감금하시고 천 년동안 세상에서 통치하실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가 끝나게 될 때 주님은 창세 이래의 모든 악인들을 심판하시어 불못에 던지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도 없고 죽음도 없는 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마지막이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에 반하여,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 이라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결국 신구약 사이에 갈보리 십자가가 있었음으로 저주가 은혜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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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의  기 본 진 리


              제10과  믿 음


   누구나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하면 얼마가지 않아서 믿음의 중

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죄인도 믿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엡 2 : 8,9). 그러므로 이 믿음이란 단

어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1.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개인적인 신뢰입니다.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그 말

을 다음과 같이 사용합니다. " 저는 제 병을 돌보시는 그 의사

선생님을 완전히 믿어요." 이 경우에 그의 믿음은 그 의사가 그

의 병을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이와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

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으며, 그가 우

리를 구원하시며 지키실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2.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가 우리의 주변을 살펴볼 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므로 구원을 얻지 못한 채 살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

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엄밀한 의미

에서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요 3:27). 하나

님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믿을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받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

은 로마서 10:17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라도 믿음이 없을 때는 성경을 읽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는 다음과 비슷한 요지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 만일 이 책이 하나님의 말씀이면, 그리고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 예수님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제가 이 책을 읽는 동안에 그 사실들을 보여 주시

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진

리를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7:17).


3. 믿음의 참 대상은 무엇인가?


   믿음은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만 합니다. 이 대상은 친척이나

친구와 같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비행기나 승강기와 같

은 사물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신뢰할 가치가 있는 대상에 두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

들은 자기의 자동차가 어느 일정한 곳에 자기를 데려다 주리라

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자동차가 수리를 요할

정도로 고장이 나 있다고 한다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속담처럼 터무니 없는 믿음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의 참 대상으로 제시하고 있

습니다(행 20:21). 중요한 점은 믿음의 비중이나 종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이 그리스도에게 있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는 모든 사실들

을 다 인정하면서도 정작 그리스도 자신을 믿지 않을 수 있습니

다. 당신은 어느 기차가 오전 11시에 시발역을 출발하여 오후

5시에는 종착역에 도착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기차에 올라타고 나서 그 기차가 당신을 당신

의 목적지까지 데려다 줄 것을 믿지 않는 한 그 기차를 진실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같이 당신은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가 베들레헴에서 탄

생해서 갈보리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다 믿고 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분이  당신을 죄에서 구원하

여 천국으로 데려다 주실 것을 믿지 않는 한, 당신이 그리스도

를 진실로 믿은 것은 아닙니다.


4. 믿음의 실례


   성경은 믿음의 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 11장

은 "믿음의 수상자 명부" 라고 불리워져 오고 있습니다. 왜냐하

면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산 유명한 남녀들의 이름이 열

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다른 예를 봅시다. 그 첫째 것은 마태복음 8:5-10에

나오는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그 백부장은 그리스도께서 단지

말씀만 하심으로도 병든 자신의 종을 고쳐 주실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또 다른 예는 가나안 여인의 믿음입니다(마 15:22-28). 그

여인은 선민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예비된 떡을 이방인인 자기

게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겸손하고 끈기가

었습니다.


5. 믿음의 보상


   보상을 받지 못하는 참 믿음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헛되이 믿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 죄를 회개하

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은 누구나 다 구원을 받았

습니다.


   구주께서는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

라" (요 6:37)고 말씀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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