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맥도날드


                                                     제2과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은 종종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도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길가에는 집도 별로 없었으며, 치안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로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 사막 길을 따라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속으로부터 강도들이 달려 나아와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 후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거의 죽은 상태로 그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그가 자기 회당의 한 회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그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지만 그는 광야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 피해자를 외면한 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위험부담도 그 만큼 곱절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한 레위 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신속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레위인도 그 곳에서 지체한다면 필시 강도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레위인도 그 강도 피해자를 보고도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같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멸시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대화조차 꺼리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이 유대인인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편견도, 자신의 안전문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상처를 닦아 주고, 그 위에 약(기름과 포도주)을 바르고, 상처를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귀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인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길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만일 치료하는데 경비가 더 든다면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와 같은 훌륭한 행동에 대해서 당신의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인종적인 편견을 넘어서 유대인에게 보여준 그 사마리아인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는 놀라운 교훈 (Get The Big Picture)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어떤 분명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랍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한 목적은 예수님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율법이라면 이미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하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고 하실 때, 그 율법사는 그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율법지식에 대해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금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그 율법사는 율법 지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 율법대로 행하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영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를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은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깔이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절망적 상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과 자비를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본 비유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사해 바다 인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평화의 도시로부터 죽음의 땅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은 이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등을 돌려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내려 가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범죄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언 14:12)고 하였습니다. 죄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강도들은 이 가련한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순결함과, 기쁨, 자유 그리고 그 생애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강탈당하였습니다. 범죄 한 후의 우리에게 오는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강도들은 또한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를 반죽음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슬픔, 고난, 죄책감, 상처, 그리고 후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무력함(You Can't Cop a Plea)


   제사장과 레위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는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1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목사, 제사장,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요 14:6, 행 4:12).

   셋째,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직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특히 십계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의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줄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8:48).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께서는 절망 중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부터 먼 길을 떠나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죄악의 소굴인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 준 사실은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빋으시면서도, 경건하지 않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과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해 주셨습니다.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를 구원한 사람 (The Man Who Didn't Duck Out)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을 무릎 쓰고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 가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그는 심령이 상한 자를 치료해 주시며, 영적으로 소경된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눅 4:18).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의 상처 위에 부은 기름은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자의 상처에 부어준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에게 기름(성령)과 포도주(기쁨)를 부어 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새로운 친구를 길가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른 믿는 지체들 가운데로, 특별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깨끗한 생활과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여관을 떠나기 전, 그가 자신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새 친구를 돌봐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교회를 주시고, 가르침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기도 시간과 주의 만찬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고,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그의 모든 구속 사역들을 아주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세 종류의 현대인의 인생관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네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빼앗고 말 것이다" 이는 강도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무엇이든 내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관입니다.

   셋째, "무엇이든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 한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인생관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따르고 싶으십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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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통신교재     말씀의 올바른 분별


                                                                          C.I. 스코필드 저



                         머리말


   "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은 일군으로 인정받기 위한 첫째 조건입니다. 간혹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진리의 말씀을 그릇되게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힘써 하나님의 뜻에 복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진리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분별이 없다면, 성경 공부가 도리어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봉사나 헌신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본 강좌는 신앙 생활의 기초가 되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올바른 분별을 위해 근거로 제시한 여러 성경구절들은 일일이 찾아 보시고, 단 하나의 교리라 할지라도 이 강좌의 가르침이나 인간적 권위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베뢰아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상고해 보시고 깨달아지는 대로 삶에 적용하시며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한국엠마오성경학교


                         제1과


             유대인, 이방인 및 하나님의 교회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2)


   성경을 주의해서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성경 내용의 반 이상이 하나의 민족 곧, 이스라엘 민족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게 됩니다 또한 이 민족이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위치에 있음도 동시에 알게 됩니다. 이들은 실제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들에게 다른 어떤 민족에게도 준 적이 없는 특별한 약속들을 주셨습니다. 오직 이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만이 구약의 역사와 예언에 전하여 지고 있고, 다른 민족들은 유대인과 관련이 있을 때에만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은 지상과 관계가 있음도 알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과 순종을 조건으로 지상의 명예와 부와 권력을 약속 받았었습니다. 또 반면에 신실치 못하고 불순종할 경우에는 이스라엘 민족은 온 땅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만민 중에 흩어지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신 28:64). 심지어는 이스라엘에게 주셨던 메시아의 약속도 " 지상에 있는 모든 족속" 에게 축복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을 계속 상고하노라면, 성경에는 교회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집단으로서의 무리가 거듭 언급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무리도 역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나 상호 유사성은 그것뿐이고, 이 둘은 뚜렷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과는 대조적으로, 교회는 아브라함이 보인 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서 택함을 받은 하나의 민족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별 없이 한 몸을 이룹니다.

   또한 교회는단순한 언약이 아닌 출생의 관계 맺고 있습니다. 순종에 대한 상급도 이스라엘처럼 지상의 위대함과 부의 축복을 받는 대신에, 교회는 지상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하게 여기고 천상에 속한 자로서 천상에 소망을 두고 핍박과 미움을 각오하라는 교훈을 받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현세와 지상의 것에 특별하게 관계가 있는 반면, 교회는 내세에 대한 강한 소망과 영적이고 천상적인 것과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은 이스라엘이나 교회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각각이 시작 된 때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부름 받음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이제껏 아담과 이스라엘 족장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라고 생각해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지상생애 동안이나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결국 당시에는 아직 교회가 없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웠다" 거나 "세우고 있다" 가 아니라 "세우리니" 인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 3:5-10의 말씀과 같이 교회는 구약 예언서에 단 한 번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그 때에는 "하나님 속에 감추어 있던 비밀" (엡3:9)이었습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의 출생은 사도행전 2장에, 그리고 그 종결은 데살로니가 전서 4장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자주 언급되어 있지는 않으나 모든 면에서 이스라엘이나 교회와 구별된 또 하나의 집단인 이방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과 하나님의 교회의 위치는 대략적으로 다음의 성경 구절들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교회                                         이방인

    롬 9:4~5                                   엡 1:22~23                                엡 2:11~12

    요 4:22                                     엡 5:29~33                                엡 4:17~18

    롬 3:1~2                                   벧전 2:9                                    막 7:28~29


   이스라엘과 교회에 관해서 성경에 언급된 말씀을 비교해 보면 기원, 소명, 약속, 생활원칙, 그리고 미래의 모습에 있어서 모두가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소명에 대해


이스라엘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신 8:7-9)

"그가 가로되 나는 아브라함의 종이니이다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창 24:34-35)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 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신 28:7)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 28:13)


교회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히3: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빌 3: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마 8:20)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 1:4)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고전 4:11)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럽도다 하시니" (막 10:23)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약 2:5)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요 16:2)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이는 물론 아무리 경건해도 그 사람이 유대인이라면 누구이든지 천국에 가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단지 유대인의 경우에 경건의 동기가 천상적인 축복이 아니라 지상적인 축복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은혜 시대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다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은혜 시대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요 3:3, 16) 교회 인(엡 1:22, 23) 한 몸에 연합됩니다 (고전 12:13). 따라서 교회안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없습니다 (고전 12:13 ; 갈:28 ; 엡 2:14). 사도 바울도 에베소 사람들에게 편지하는 가운데 그들을 가리켜 "너희는 그 때에 이방인이" (엡 2:11)라고 말했고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역시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고전 12:2)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교회의 차이는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품행규범 한층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품행규범에 대해


이스라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 . . 일곱 족속을 쫓아 내실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신 7:1, 2)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 지니라" (출 21:24,25)


교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  .  ." (고전 4:12, 1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39)


               

* 신명기 21:18~21과 누가복음 15:20-23도 읽어 보십시오.


   보시다시피 예배에 대한 규정에 있어서도 이스라엘과 교회는 여전히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오직 한 곳에서만 예배드릴 수 있었고, 그것도 하나님 존전에는 가까이 갈 수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제사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두세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이 있고, 또 구성원들 모두가 제사장들입니다.


   - 레위기 17:8,9을 마태복음 18:20과 비교해 보십시오.

   - 누가복음 1:10을 히브리서 10:19, 20과 비교해 보십시오.

   - 민수기 3:10을 베드로 전서 2:5과 비교해 보십시오.


   이스라엘과 교회의 미래에 관한 예언에 있어서는 그 대조가 한층 더 경이적입니다. 교회는 지상에서 완전히 휴거되는데 반해, 회복된 이스라엘은 앞으로 지상에서 최대의 영화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바를 살펴봅시다.


3. 미래에 대해


   1) 교회에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 14:2, 3)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5~17)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빌 3:20, 21)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 3:2)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계 19:7~9)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행 15:14~16)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 11:1, 11, 24~26)


   "그 날에 주께서 다시 손을 펴사 그 남은 백성을.  .  . 돌아 오게 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를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이산한 자를 모으시리니" (사 11:11, 12)

   "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사 14ㅣ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렘 16:14,1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렘 23:5, 6)


2) 이스라엘에게


"보라 내가 노와 큰 분노로 그들을 쫓아 보내었던 모든 지방에서 그들을 모아 내어 이곳으로 다시 인도하여 안전히 거하게 할 것이라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렘 32:37, 38)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고 너의 원수를 쫓아내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너의 중에 있으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습3:14, 15)


   이상으로 보건대 교회를 유대교화 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사명을 곡해하며, 그 영성을 소멸하는데 있어서 다른 모든 요인을 합한 것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성별되어 위로부터 부르심에 합당한 그 소명대로 주님 좇기를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가 유대교 성경을 사용함으로서 스스로 그 목적을 낮추는 일에 정당화함을 의미합니다. 즉 교회의 목적을 세상을 문명화 하는 일에 두고, 재물을 모으는 일에 두고, 거창한 의식을 거행하는 일에 두고, 거대한 교회당을 건립하는 일에 두며, 국가간의 전쟁에 하나님의 축복을 비는 일에 두며 평등해야 할 형제들을 성직자평신도로 구분하는 일에 두는 등의 자신의 모든 오류들을 스스로 정당화함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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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5 과

                           주 예수님과 여성들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던 당시의 여성들은 희랍에서도, 로마에서도, 유대에서도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습니다.  즉, 희랍에서 여성은 노예와 동등한 지위에서 남편의 지배와 권위 아래 있었습니다. 로마에서 아내는 법적으로 남편의 소유였습니다. 로마의 여성들이 희랍의 여성들보다는 자유가 있었지만, 이것은 오히려 도덕적 방종과 이혼률의 증가를 초래했습니다. 물론 유대에서도 여성은 남편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었으나, 가정에서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여성들에게는 법적 권리가 거의 없었고, 종교 교육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일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과는 달리 여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매우 특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에 대해 편견을 보이신 적이 없으셨고, 경멸의 어조로 말씀하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 특유의 능력을 인정하셨으며,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의 소원에 대해서 동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마 8:14)와, 자기의 겉옷을 만졌던 혈루병 걸린 여자(마 9:20)와, 18년 동안이나 꼬부라져서 펴지 못한 가련한 여인(눅 13:11) 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나인성에서 예수님은 과부의 죽었던 아들을 살리셔서 과부에게 돌려 주셨습니다(눅 7:12~15). 심지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에도, 주님은 그여인을 신중하면서도 은혜스럽게 대해 주셨습니다(요 8:3~11). 이렇듯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당하던 여인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이끌려 주님께 나아온 여인들은 "내게 오라...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에서 틀림없이 큰 위안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은 십자가 상에서 까지도 모친에 대한 연민의 정을 보이셨습니다(요 19"25~27).

   한편 주님께서는 몇몇 여인들을 칭찬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귀신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구하던 가나안 여인에게 주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마 15:21~28)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어느날 성전의 연보궤 옆에 앉으셨던 때에, 부자가 푸짐하게 헌금하는 모습과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지켜 보시고서 주님은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1~4)라고 이 과부의 희생적인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헌금의 분량을 보신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자의 중심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부자는 별 손해가 없을 정도로 바쳤지만, 이 여인은 그의 소유를 모두 바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여성들의 지성적이고도 영적인 능력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별도로 소녀들이나 부인들을 교육하신 적은 없으셨으나, 주님은 개인적으로 대중적으로 여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주님 자신에 관해서나 성부에 관한 깊은 계시를 여인들에게 개인적으로 주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실례로 요한 복음 4장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으로 더불어 우물가에서 대화하시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비록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했으며(요 4:9), 유대인 선생들은 자기의 부인과도 여럿 앞에서는 대화를 하지 않았으나, 주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이 여인과 대화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예배에 관해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에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요 4:24). 이로써 주님은 자신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기다리고 있는 바로 그 메시야임을 계시하셨는데, 이러한 계시는 이 여인 외에 아무에게도 계시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 여인은 이것을 믿었으며, 자기가 살고 있던 동네에 가서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여러 이웃 사람들도 주님께로 나와 믿게 하였습니다.

   또한 베다니에 살던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에서 마리아는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 을 들었습니다(눅 10:39).  주 예수님은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음식을 장만하라고 타이르시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가르침을 사모하는 그녀의 열의와 태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다의 봉사를 무시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봉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마르다에게 부드럽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 을 배우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봉사' 보다 '우리 자신' 을 더 원하십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보다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후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5) 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위로와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은 여자들의 봉사를 기뻐하셨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주님은 베다니에 있던 가정에서 헌신적인 두 자매의 영접과 접대를 받으셨습니다. 그 밖에도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좇아 온 많은 여자" (마 27:55)나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눅 8:2,3) 섬겼던 사실도 볼 수 있습니다. 한 무리의 여자들이 주님을 좇아, 순회하면서 사역하는 데 따르는 갖가지 불편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주님과 제자들의 신변을 보살펴 드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해 라이리(C. C. Ryrie)는 "예수님을 측근에서 섬긴 자들에 관한 기록을 보게 되면 예외없이 여자가 아니면 천사였다. 주님을 섬기는 무리 중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일까!" 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여성들의 호의와 친절을 고맙게 여기셨습니다. 누가복음 7장 36~50절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으셨을 때 일어났던 사건을 보게 됩니다. 식사 중 죄 많고 가련한 한 여인이 주님의 발치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눈물이 주님의 발에 떨어졌을 때 이 여자는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으며, 아주 값비싼 향유를 그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이 여인을 부정한 것이나 되는 것처럼 쫓아 버리려 하였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사랑의 선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처럼 나를 생각해 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보여준 호의에 데해서 칭찬하셨을 뿐 아니라, 바리새인의 냉담한 반응에 대해서는 묵살하고 계심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눅 7:44~46). 그렇다면 주님이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는 무엇을 받고 계실까요?

   주님의 지상에서의 사역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무렵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었습니다(마 26:6~13 ; 요12:1~8). 주님이 베다니에 있는 그의 사랑하는 친구의 집에 계셨을 때, 주의 발 아래 앉아 있던 마리아가 값진 향유를 가져다가 그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사람은 낭비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있어서는 주님께 드릴 수 없을 만큼 아까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도 마리아에게 좋은 일을 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주님께 드리기에 너무 귀하고 값진 것이 있을까요? 더욱이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이 가까왔음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그때에 마리아의 헌신이야말로 주님께 너무나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바름으로써 주님의 죽으심을 예표했던 것입니다. 주님을 돌보던  다른 여인들은 너무나 늦게 향품을 갖고 왔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눅 23:55 ; 24:3). 그러므로 구속을 받은 자들은 바로 오늘 '찬미의 제사'로, 그의 이름에 감사함으로, 사랑과 경배로 주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히 13:15).

   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여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여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뵙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그 여인들에게 자신이 부활한 희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특권도 주셨습니다(마 28:1~10 ; 막 16:1~10 ; 눅 24:1~10 ; 요 20:1~18). 우리가 아는 바로는, 요한을 제외한 어느 제자도 십자가 곁에 없었으나 여인들은 있었습니다(마 27:55). 그리고 부활하시던 "아침 일찍 아직 어두울 때" 에도 여인들은 무덤에 왔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낙심 가운데 있었음을 볼 때 그들의 믿음이 제자들의 믿음보다 더 위대했던 것 같지도 않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과는 다르셨던 주님, 그들의 생애를 변화시켜 주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주님이 계셨던 곳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나신 승리의 주님을 뵈었을 때, 그들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고, 애곡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달음박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찾는 자는 그 보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위대한 자나 유능한 자나 똑똑한 자에게는 자신을 숨기시고, 비천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자에게는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주님을 더욱 잘 뵐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디에 계실까?' 하며 애타게 찾아 부르짖던 마리아에게 주님께서 친히 "마리아야" 하고 부르셨으며, 그 순간에 마리아는 애타게 찾고 있던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사모하여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주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과에서 인용된 대목을 더 자세히 연구해 보시고 각각의 사건에서 여성들에 대한 주 예수님의 태도를 묵상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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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0 바울이 붙잡힘(21-24)


요절 : 사도행전 22장 15절, 24장 25절

요점 :

1.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을 얻으려고 그들을 기쁘게 해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2. 대다수의 사람들이 잘못될 수 있습니다.

3.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돌보시는데 신실하십니다.

4.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어느 때든 보호하실 수 있습니다.

5. 많은 사람들이 너무 오랫동안 미루기 때문에 잃어버려질 것입니다.

6. 자기가 행하지 않은 어떤 것을 고백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1.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가지말 것을 경고함(21:1-14)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에베소에서 예루살렘까지 계속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잠깐 두로와 가이사랴에서 멈추었는데 그것은 물론 그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고자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두로에서 제자들이 성령에 감동되어 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아가보라 불리우는 선지자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들려 이방인 통치자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물질을 전달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는 또한 순전한 복음을 전하고 그 성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치고자 했습니다. 그곳의 많은 사람들은 구원을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구원받는 방법에 관해서는 매우 불분명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히거나 죽을 준비가 되어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는 주님을 증거하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일까요?


2. 형제들이 기쁨으로 그들을 영접함(21:15-26)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형제들은 그들을 만나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의 복된 소식을 듣게 되어 매우 기뻐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전도자들이 가져온 구제헌금을 받고도 기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성에는 바울이 더이상 구약성경의 율법에 대해 주의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수천의 믿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 형제들은 그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고 그들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바울에게 어떤 의식을 행하도록 제안했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신앙 간증을  해칠만큼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작은 일들을 행하는 것은 현명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서 밝힌 자신의 전도 원리, 선교 원리에 따라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되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 보여 주었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온전히 순전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원하여 이 의식을 행하였지만 이번에 행한 이 의식을 통해서는 바울이 원했던 유대인도 얻고 율법 아래 있는 자도 얻고자 했던 기회를 제공받지 못했습니다.


3. 바울이 붙잡힘(21:27-40)


7일이 거의 되자 몇몇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는 그를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이 소동을 듣자 그는 즉시 이 폭도를 안정시키려고 일단의 병사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두 쇠사슬로 결박하여 영문 안으로 데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바울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헬라말을 알고 있는 것에 놀란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기가 중요한 도시인 다소의 유대인이라고 말하고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도록 말할 허락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주 무리들이나 폭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종을 공격하거나 죽이려고 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다수가 언제나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과 비록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반대할지라도 진리를 세우는 사람에게 주님의 복이 임한다는 것에 주의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4. 바울의 변론 : 그가 빛을 받음(22:1-10)


바울은 처음으로 돌아가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저명한 교사인 가말리엘에게서 바르게 교육받았으며 자기가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가두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으로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하늘로부터 밝은 빛을 보았고 왜 주님을 핍박하는지를 묻는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에게 다메섹으로 들어가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듣게 될 것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는 앞의 9장에서 이 이야기에 대해 읽었지만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말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아주 놀랍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주님의 구속받은 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고 말했습니다. 당신 가정과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당신은 학교에서 또는 직장에서 친구들에게 주님을 시인했습니까? 어느날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께 속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부끄러워해서는 안됩니다.


5.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본 환상에 대해 말함(22:11-21)


바울이 다메섹에 들어가자 경건한 사람인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그들 조상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하사 모든 사람들에게 증인이 되게 하셨다고 말해주었으며 그래서 그가 침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가 예루살렘, 사실상 성전으로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사람들이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성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대신 그는 더 멀리까지 가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아직까지도 거절하고 있는 구원의 복된 소식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고 바울은 그들 중에 수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어떤 사람들이 주님께서 주시려고 하시는 복을 거절한다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을 거절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6. 천부장이 유대인들에게서 바울을 구함(22:22-30)


여기까지 오자 유대인들이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복을 더많이 받게 된 것을 생각하자 그들은 다시금 소리를 지르며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천부장은 그들의 증오를 이해할 수 없자 바울을 때리면 참 이유를 말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의 시민이라고 말하자 로마의 시민을 때리는 것이 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보호하게 하고 그 밤에 파숫군을 두어 보호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그 신실한 종을 계속 주목하고 계신 것을 볼수 있으며, 그 주님은 오늘도 동일하신 분입니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감


1. 예루살렘에 있는 공회 앞에서(23:1-11) 


그 다음날 천부장은 바울을 대제사장과 공회 앞에 세우려고 데려갔습니다. 바울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가졌다고 진술하자 대제사장은 매우 화를 내며 옆에 서있던 병사들에게 그의 입을 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부당한 것이기에 바울은 화가 나서 그를 회칠한 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가 대제사장이었음을 알게 되자 곧 사과했습니다. 성경에 기록 되어 있는 대로 백성들의 통치자들에 관해서 나쁘게 말해서는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입을 치려고 할 때에 잠잠히 서 있는 것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같은 장소에 서 계실 때 얼마나 인자하셨고 오래 참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로마 병사는 주님을 때렸지만 주님은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셨습니다(요18:23절을 보십시오). 이제 법정에서 더 큰 말싸움이 일어나게 되었고 결국 천부장은 바울을 구해내서 다시 영문에 두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주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로마에서 주님을 증거하게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사십명이 바울을 죽일 것을 맹세함(23:12-24)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는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 중에 몇사람이 음모를 꾸며 바울을 죽일 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 계획은 천부장에게 바울을 대제사장에게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그 도중에 그를 죽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울의 조카가 그 음모에 관해 듣게되어 그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천부장이 그 사실을 알게되자 470명의 사람들에게 바울을 보호하도록 명령했고 그를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로 데려갔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종을 공격하는 사단의 여러가지 방법을 보게 됩니다. 자신들이 매우 종교적이라고 생각하는 이 사람들이 살인을 자행하려고 실제로 준비했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준비하시며 주님의 충성스런 증인을 도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성부께서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일어날 수 없으며 먼저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조카 이름을 알지도 못하지만, 그는 자기의 임무를 알고 그것을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약 9년 정도 주님을 더 섬길 수 있었습니다.



3. 천부장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냄(23:25-35)


 

벨릭스는 유대를 통치하도록 로마의 임명을 받은 총독이었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벨릭스의 보호하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써서 바울이 로마 시민권이 있고 또한 그가 죽거나 구속될 만한 어떤 일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을 총독에게 보내는 이유인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보병들은 그들과 함께 중간까지 간 뒤 돌아갔고 마병들이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총독에게 데려 갔습니다. 벨릭스가 편지를 읽고는 바울에게 어느 지역 사람인지를 물은 뒤 재판때까지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로마 사람들은 법과 질서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많은 통치자들이 타락했고 불의했습니다. 우리는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가 유대인들이 주님의 죽음을 요구하자 그들에게 넘겨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로마의 법을 지켜야 할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돈을 벌수 있다면 그 법을 부정하게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4. 더둘로가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고소함(24:1-9)


5일 후에 대제사장이 바울에 대해서 고소하려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부터 내려왔습니다. 더둘로라 이름한 전문 변사가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재판이 시작되자 그가 벨릭스 앞에서 바울을 대항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 총독에게 아첨을 하고는 바울이 나사렛 이단의 괴수이며 이방인들을 거룩한 성전에 데리고 가려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은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동의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사실이었지만, 그는 할 수 있는대로 나쁘게 보이도록 하여 바울이 총독을 괴롭게하는 자가 되도록 애를 썼습니다. 다소 사실을 말하긴 했지만 그것은 더욱 나쁜 인상을 주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에 진실함을 원하십니다"


5. 벨릭스 앞에서 바울의 답변(24:10-21)


바울은 답변의 첫부분에서 그가 예루살렘에서 어떤 소동을 일으켰다는 것을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루살렘에 온지 12일 밖에 안되었고 사람들을 위해 희생제물을 드렸으며 그가 성전에서나 성중에서나 군중들에게 변론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예수를 따르는 자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약성경과 부활을 믿었고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행한 잘못이 있다면 시인할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어떤 고소에 대해 거짓된 자백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또한 (여전히) 주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시인하는 것을 기뻐했으며 만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해도 그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6. 벨릭스는 두려웠지만 바울을 감옥에 둠(24:22-27)


이제 벨릭스는 천부장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내려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상당한 자유를 허락하였고 친구들의 방문도 허락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누가가 그와 함께 있었던 것을 알고 있으며, 빌립이 가이사랴에 거하고 있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다녀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벨릭스의 아내가 오자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주어졌고, 벨릭스가 듣자 실제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장 주님을 영접하지 않고 다음으로 미루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제안을 미루기 때문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잃어버린바 될 것입니다. 벨릭스는 물질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기에 바울이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 그에게 뇌물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는 또한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를 원해서 바울을 2년 동안 감옥에 두었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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