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맥도날드
제2과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은 종종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도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길가에는 집도 별로 없었으며, 치안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로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 사막 길을 따라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속으로부터 강도들이 달려 나아와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 후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거의 죽은 상태로 그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그가 자기 회당의 한 회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그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지만 그는 광야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 피해자를 외면한 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위험부담도 그 만큼 곱절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한 레위 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신속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레위인도 그 곳에서 지체한다면 필시 강도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레위인도 그 강도 피해자를 보고도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같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멸시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대화조차 꺼리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이 유대인인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편견도, 자신의 안전문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상처를 닦아 주고, 그 위에 약(기름과 포도주)을 바르고, 상처를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귀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인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길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만일 치료하는데 경비가 더 든다면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와 같은 훌륭한 행동에 대해서 당신의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인종적인 편견을 넘어서 유대인에게 보여준 그 사마리아인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는 놀라운 교훈 (Get The Big Picture)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어떤 분명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랍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한 목적은 예수님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율법이라면 이미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하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고 하실 때, 그 율법사는 그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율법지식에 대해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금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그 율법사는 율법 지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 율법대로 행하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영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를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은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깔이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절망적 상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과 자비를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본 비유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사해 바다 인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평화의 도시로부터 죽음의 땅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은 이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등을 돌려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내려 가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범죄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언 14:12)고 하였습니다. 죄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강도들은 이 가련한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순결함과, 기쁨, 자유 그리고 그 생애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강탈당하였습니다. 범죄 한 후의 우리에게 오는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강도들은 또한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를 반죽음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슬픔, 고난, 죄책감, 상처, 그리고 후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무력함(You Can't Cop a Plea)
제사장과 레위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는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1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목사, 제사장,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요 14:6, 행 4:12).
셋째,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직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특히 십계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의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줄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8:48).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께서는 절망 중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부터 먼 길을 떠나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죄악의 소굴인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 준 사실은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빋으시면서도, 경건하지 않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과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해 주셨습니다.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를 구원한 사람 (The Man Who Didn't Duck Out)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을 무릎 쓰고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 가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그는 심령이 상한 자를 치료해 주시며, 영적으로 소경된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눅 4:18).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의 상처 위에 부은 기름은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자의 상처에 부어준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에게 기름(성령)과 포도주(기쁨)를 부어 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새로운 친구를 길가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른 믿는 지체들 가운데로, 특별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깨끗한 생활과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여관을 떠나기 전, 그가 자신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새 친구를 돌봐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교회를 주시고, 가르침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기도 시간과 주의 만찬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고,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그의 모든 구속 사역들을 아주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세 종류의 현대인의 인생관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네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빼앗고 말 것이다" 이는 강도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무엇이든 내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관입니다.
셋째, "무엇이든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 한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인생관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따르고 싶으십니까?
'믿음,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 제4과 돌아온 탕자 (0) | 2016.01.18 |
---|---|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제3과 바리새인과 세리 (0) | 2016.01.17 |
산림욕이 몸과 마음을 치유한다? (0) | 2016.01.15 |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 제1과 잃어버린 양 (0) | 2016.01.15 |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0) | 2016.0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