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2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확신

                               Being Sure of Heaven


   별로 많은 지식을 갖지 못한 한 노부인이 교회 집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든 후, 그녀의 마음에 갑자기 의심이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한가?" "이와 같은 나의 경험은 진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진실로 구원은 우리 자신 스스로가 확신할 수 있는 분명한 체험일까요? 실제로 이 노부인의 마음 가운데 일기 시작한 의심들은 바로 사탄이 쏘아대는 것들이었습니다. 순간 그녀는 성경을 열고 요한복음 3장 16절을 손가락으로 짚었습니다. 그리고 침대 천을 제키며 그밑에 숨어 있는 악마에게 그 성경 구절을 들이 대면서 "자, 여기다. 네 자신이 이것을 똑똑히 읽어 보아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노부인이 취한 행동은 참으로 현명한 방법이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다음의 세 가지 진리에 근거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함 (Besides in the Word of God)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함 (Rests on the work of Christ)

   성령님의 증거를 받아드림 (Results from the witness of the Spirit)


   본과에서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위의 세 가지 기본적인 진리들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The Word of God)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구원의 확신에 대한 모든 의문들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바로 성경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이브를 유혹할 때, 사탄은 제일 먼저 그녀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해제시켰습니다. 이브는 자신을 꾀는 사탄에게 반드시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느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분명하게 사탄을 물리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신의 합리적인 생각으로 사탄의 공격을 받아넘겨 보려고 하였습니다(창 3:1-3).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에 빠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는 대신 사탄에 의해 그 마음이 해이해진 까닭입니다.


   1. 성경의 근본 저자 (The Authorship of the Bible)


   만일 우리가 성경의 근본 저자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다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심령과 의지와 양심에 그의 절대적인 권위로 말씀하십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2. 성경의 절대 무오성 (The Accuracy of the Bible)


   만일 성경의 절대 무오성을 의심하게 되면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은 가장 오랜 세월 동안 그 원본의 내용을 유지하며 지켜져 내려오는 유일한 책입니다. 그리고 한 권으로 된 책이 아니라 크고 작은 여러 책들을 모은 방대한 책입니다. 그 내용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도합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책이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인류 역사에 가장 크고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유일한 책입니다. 성경은 그 원본이 정확하며, 인간의 지혜와 명철도 초월하는 확고하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점에 있습니다(고전 1:18-31).

   성경에 오류와 모순이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회의론자들의 끊임없는 공격이 있었으나 끈질긴 조사를 통하여 그와 같은 오해는 사라졌습니다. 저명한 학자 웨스트콧(Westcott)과 홀트(Hort)는 신약 성경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낱말들 중에서 의문이 제기되는 낱말들의 비율은 사실상 무시할만하다. 실질적 변이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전체 변이의 적은 분량에 불과하며, 전체 성경 원본의 1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적어서 문제가 될 만한 여지가 없다" 또 다른 저명한 학자 역시 "신약 성경 사본들 간의 미세한 변이는 성경 전체의 풍부한 뒷받침으로 말미암아 의심의 여지 없이 단 하나의 믿음의 신조, 신앙적 교훈에 하등의 영향도 미칠 수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우리 주 예수님도 증언하셨습니다. 그는 항상 성경을 통하여 우리를 감화시키셨고, 성경을 인용하셨으며, 성경의 권위를 확증하셨고, 친히 그 교훈을 따르셨습니다. 그는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요한 10:35)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때 오직 우리는 성경으로 되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보고, 그 교훈 안에 거해야 할 것입니다.


   3. 성경 말씀의 신뢰성 (The Acceptability of the Bible)


   만일 성경 말씀에 대한 확실한 신뢰가 없다면 궁극적으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성경의 교리나 명령은 종종 우리 자신의 본성적인 욕구나 인간적 지혜와 충돌합니다. 우리는 이미 배워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무시하거나 부정하게 될 때 믿음의 확신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그것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 (딤후 3;16-17)에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임으로써 얻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요한일서 5: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터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요한 10:27-29).

   그 외에도 구원의 확신에 도움을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일부 난해한 구절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들에게 주신 새 생명(eternal life)은 세상의 물질처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하신 우리 주 예수께로부터 온 불변의 것입니다. 언젠가 변하고 끝나는 것이라면 영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듭난 자들에게 이러한 새 생명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자신이 이러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선물)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한 손으로 주시고 다른 손으로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8장은 구원의 확신을 위한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그 말씀은 "정죄함이 없다"로 시작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묵상하고, 암기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The Work of Christ)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이 구절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바라보게 하여 우리를 참된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기쁜 소식(복음- Good news, Gospel)입니다.


   1.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enalty)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고전 15: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수많은 희생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한 놀라운 예표입니다. 이들 희생 제물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에 의해 명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속죄나 혹은 예배를 원할 때 하나님의 제단 앞으로 희생 제물을 가져왔습니다. 특별히 번제(burnt offerring)와 속죄제(sin offerring)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잘 예표해 줍니다. 이와같은 제사들에 관해서는 레위기 1장과 4장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번제나 속죄의 제물들을 가져올 때, 죄인은 그가 드리는 희생 동물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위한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징적 행위들은 이제 끝이 났습니다. 속죄제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번제는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속죄제는 죄인을 위하여 준비된 하나님의 예물인 반면, 번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속죄제는 죄인의 모든 죄가 대속 제물인 동물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나타내며, 번제는 대속물의 의가 죄인에게로 전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제물들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대속자와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완전성과 확실성을 예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0-21).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구원해 주셨습니다.


   2. 죄의 권능으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ower)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믿는 우리를 죄의 권능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께서는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 되셨습니다"(롬 1: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낸 바 되었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을 이기신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주장하는 죄의 권능까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진실로 살아계십니다. 이는 기독교가 내세우는 단순한 신화나 무미건조한 종교적 교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으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예수는 영원히 계심으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 7:24-25).

   우리는 구원함을 받은 후에라도 우리 마음 속에 죄와 허물을 깨닫게 될 때 그에게로 나아가 고백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1서 1:9, 2:1).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계심으로 우리 안에 지금 함께 계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 28:18,20). 이 세상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경우라도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그가 곧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셔서 인격적으로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십니다.  성부와 성자께서 신비스러운 관계로 영원히 함께 하심 같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믿는 자들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은 정말 감격적인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 14:11,20).


   3.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 (Salvation from Sin's Presence)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장차 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죄의 존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준비된 백성들을 위해 예비 된 곳입니다. 그 곳은 현재에도 준비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요한 14:2)고 말씀하셨습니다. 즐겁거나 슬프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믿는 자들이 이 세상의 삶을 통해 체험하는 모든 경험들은 장차 하늘나라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때, 하늘나라는 영구적으로 머무를 수 있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모두 심판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사 53:5; 히 10:17).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내 구주로부터 모든 죄 값을 취하시고 또 다시 나에게 죄 값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장차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믿는 자들의 준비는 전 생애를 통하여 계속 진행됩니다. 다시 말해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천국에 대한 약속은 영구 불변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직 이 세상에서 육체 가운데 머물고 있는 동안 현실적으로 우리의 상태는 종종 불완전하며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계속적인 준비가 요구됩니다(빌 2;12, 엡 4:15). 이러한 과정은 주님의 재림으로 비로소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날에야 우리들은 완전한 나라에서 완전한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죄가 들어 올 수 없는 완전한 장소로 우리를 옮겨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라" (요한1서 3:2).

   천국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여기서 잠시 천국의 실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대부분의 우리는 원자(atom)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설명으로 우리는 원자의 존재를 믿습니다. 현대의 어느 사람 중에 나폴레옹이나 아브라함 링컨과 악수해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보존된 그들의 개인적인 기록들을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북극에 가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북극의 존재를 믿습니다. 흥미 있는 보고중의 하나는 죽음의 문턱에 까지 이르렀던 사람들의 천국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체험을 실제적으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이 증언하는 천국에 대하여 전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초대형 망원경을 통해 우주 정거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주시대를 여는 과학의 힘을 믿는 우리는 이를 믿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해 마련하신 천국은 실제적으로 저곳(3층천)에 존재합니다. 망원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우리는 실존하는 천국을 볼 수 있으며,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그 찬란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차 그 나라에 이르게 될 날을 믿음으로 기다립니다. 예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는 우리가 거하기에 충분한 것 그 이상으로 많은 집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너희를 위하여 내가 준비하러 가노라는 말을 내가 할 수 있었겠느냐?" (요 14:2 역자 의역)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장은 이 놀라운 천국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그 집으로 불리움을 받고 있습니다. 만일 그 나라에 들어 갈 준비가 되었다면 언젠가 당신과 나도 그곳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마 당신은 묻기를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요?"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하나뿐이신 그의 독자를 우리에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들은 멸망하지않고 그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 (요 3:16 역자 의역) 실존하는 보이는 것들을 믿는 것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훨씬 더 큰 능력을 줍니다.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받아드릴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가 죽으실 때 나의 죄를 지시고 내가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게 하는 첫 번째 단계이며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영생의 시작입니다. 천국의 실존은 사실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피로 구속하신 자들을 위해 그곳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그곳에 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바로 지금이 그 기회입니다.

   "진실로, 절호의 때는 바로 지금이로다. 오늘이 바로 그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역자 의역). (Have a Good Day, November 2006 중에서)


   성령님의 증거 (The Witness of the Spirit)


   진정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제 3의 위격이신 성령님을 그 마음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육체를 성전 삼고(고전 3;16, 고후 6:16). 그 속에 함께 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고 단언하였고, 다른 구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참조구절; 딤후 1:14, 요한 14:16 엡1;13 등) 그리스도인들이 때때로 그들의 신앙생활에서 실패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구원의 확신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근심하며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엡 4;30, 롬 8:26). 우리가 성령님의 거룩한 성품과 일치하지 않은 행동을 하게 될 때 성령님은 탄식하고 근심하며 슬퍼하십니다. 근심한다(grieve)는 말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 슬퍼하게 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은 어떤 경우에도 구원 그 자체를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단지 구원의 기쁨을 잃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 얻은 구원은 결코 다시 잃어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요 10:28, 요 5:24, 히 10:12-18).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 받은 자들 속에 들어오신 성령님도 결코 우리들에게서 다시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잘못을 범하여 구원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앞으로 나아가 아뢰어야 합니다(요한 1서 1:9-2:2).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먼저 우리 속에서 근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곧 자신의 잘못을 자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킴으로 깨끗함을 받은 후,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 5과에서 더욱 자세히 공부하겠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하시는 사역은 사실(Facts), 믿음(Faith), 감정(Feeling) 이 세 단어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들과 관련된 성령님의 세 가지 사역에 대해서 좀더 상고해 보겠습니다.


   1. 성령과 사실 (The Holy Spirit and Facts)


   첫째로, 성령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확실한 사실(facts)을 보여 주십니다. 히브리 저자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게시며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거하시되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한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2-17).

   여기에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하나님의 말씀과 믿는자들의 죄 사함에 대한 사실(fact)들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2. 성령과 믿음 (The Holy Spirit and Faith)


   둘째로,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믿음에 대하여 확증해 주십니다.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의 증언을 받을 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요한1서 5:6, 9-11).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각자의 개인적인 축복으로 이어주는 생명의 고리가 믿음(believing)이며 성령님은 그러한 믿음을 확증해 주고 계십니다.


   3. 성령과 감정 (The Holy Spirit and Feelings)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믿는 자들의 감정을 통해(feelings)역사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하기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5-17).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심령 속에 넘치는 기쁨, 평안, 사랑의 감정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향해 아바(Abba)라고 부르짖게 합니다. 아바란 어린 아기들의 부르짖음으로 오늘 날 아빠(papa 혹은 daddy)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장성한 자녀는 아버지(father)라고 부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앞으로 그 자신이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을 내다보시고 동일한 감정으로 부르짖으셨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감정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으셨습니다(막 14:36). 성령님은 주 예수님께서 그의 아버지를 향하여 가지셨던 똑같은 심정으로 우리 믿는 자들의 영과 더불어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도록 하십니다. 이 이상 우리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생각 위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위에 두는 것이며,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의지하는 것이며, 인간의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증거에 의한 것입니다.

   이제 당신 자신에게 자문해 보기 바랍니다. 나는 성경을 정기적으로 읽는가? 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적으로 의지하는가? 사람의 감정이 아니고, 성령의 증거에 의해 심령에 기쁨을 누리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당신은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다른 사람들에게 빛처럼 증거하고 자석처럼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끄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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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 맥도날드

                                              제 6 과

                                       본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나무위로 올라간 난쟁이

                                (The Little man Who Was Up a Tree)


   예수께서 여리고를 통과하신다는 소식이 온 성내에 퍼졌을 때,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기 위해 길가에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그 군중들 가운데에는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세리장이며, 돈 많은 부자였으며, 나름대로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그 역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급히 길가로 달려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이미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어 큰 혼잡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가 보려고 애를 썼지만, 도저히 그 틈을 뚫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키가 매우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아이가 길거리 구경을 나왔다가 수 많은 어른들에게 가로막혀 그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것처럼 키 작은 한 남자가 군중들 뒤에서 갈팡질팡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상상만해도 웃음이 절로 나게 만드는 장면입니다.

   이 삭개오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과 유대관계가 별로 좋지 못한 처지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면 손가락질을 하며 수근 거렸습니다.

"유대인이 어떻게 우리를 압제하는 로마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가?" 이처럼 이웃과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는 그는 매우 고독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세리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많이 거두어 그 일부 중 얼마를 착복하곤 했습니다. 삭개오도 이런 불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이력을 가진 삭개오는 이제 예수님을 만나보기를 원하는 아주 강한 열망에 차 있었습니다. 근래에 어느 한 젊은 유대인 전도자가 나타나 각처에서 많은 기적들을 행하며, 당시 일반 종교 지도자들과는 다른 하나님의 진리를 전한다는 소식을 그도 들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그 사람을 몹시 시기하고 미워하며 적대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수많은 일반 백성들이 그가 가는 곳마다 항상 그 주위로 모여들고 그를 따르며 환영한다는 사실도 들었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단순한 호기심 이외에 내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심령의 갈급함에 목말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예수님을 만나야겠다는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절호의 기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이 예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삭개오의 분명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것이 그에게 큰 난관이었습니다. 그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 나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그 앞길을 막는 장애물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는 그냥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그곳 길가에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섬광등처럼 놀라운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주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적어도, 그는 세무장이라는 지방 유지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러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할 만도 했습니다.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세무장이 나무위로 기어 올라가다니!"


   체면을 대던져 버려라 (Forgetting Your Image)


   그러나 일생에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가 아닌가? 그는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기회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예수께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계신다." 고 하는 군중들의 외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금은 그에게 있어서 결단의 순간이었습니다. 더 이상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체면이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지체할 수 없는 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재빠르게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길가로 가장 가깝게 뻗어 있는 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자신의 발밑으로 군중들의 머리가 들어왔습니다.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휩싸이어 그 지점으로 점점 다가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과의 거리가 아주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내려다 보고 있을 때, 그 앞을 지나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무 위를 쳐다보셨습니다. 예수님과 삭개오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삭개오야" 예수께서 분명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자의 이름을 이미 아십니다.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밤을 유하실 집은 오직 한 곳, 삭개오의 집뿐이었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삭개오는 급히 뽕나무에서 재빠르게 내려와 자랑스럽게 주님을 안내하여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날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웃 사람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처럼 의롭고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의 집을 지나쳐 세리와 같은 불의한 죄인의 집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향해 수군거리며 비웃었습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의 집으로 돌아 온 삭개오는 이제까지 자신이 재산을 다 불법적으로 모으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부당하게 취득한 것을 되돌려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 예수님께 두 가지를 약속하였습니다. 첫째로 자신의 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둘째로 자신이 누구에게든지 부당하게 취한 돈에 대해서 네 배를 되돌려 갚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실제로, 율법은 그와 같은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율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삶의 원리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삭개오가 변화되어 참으로 믿는자가 된 것을 아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너도 너의 조상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나타내었도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비난하던 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주위의 장애물들 (Getting Around The Obstacles)


   이제 다음으로, 이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그 이면에 숨겨진 몇 가지 귀중한 교훈들을 더 배우게 됩니다. 삭개오는 비록 세상 적으로는 부자였지만, 세상물질 보다 더 귀중한 것에 대한 궁핍과 갈급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자는 세상에 더 많이 관심을 갖고, 가난한 자는 하나님께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물질이 부족할 때 오히려 영적으로 부유해 질 수 있습니다. 특히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될 자들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위해 그에게로 다가가려 할 때 거기에는 장애물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를 막는 장애물은 군중들이었습니다. 때로는 교만이 그 장애물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에 대한 두려워하는 마음과 체면이 장애일 수도 있습니다(잠 29:25). 때로는 부(富)도 장애가 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좋아하는 죄의 쾌락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장애물이 생길지라도, 참된 믿음은 예수께로 나아가는 사람을 방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의심에게는 장애물들만 보이지만, 믿음에게는 길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은 우리 구주에 의해 결코 외면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어느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게 될 때 주께서 그를 아시며 그의 이름을 그의 생명책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큰 소리로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그의 손을 들거나, 집회 중에 앞으로 나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 마음속 중심으로 그 앞에 참되게 아뢴다면 주님은 그의 마음을 다 아시며, 그의 간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는 일입니다. 물론, 그렇게 한 후, 그는 주님 앞에 그가 원하는 다른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 더 이상 아무것도 숨기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지하려면

   반드시 그 앞에 고백해야만 하오.

   비록 자신이 티끌 같은 존재임을 알지라도

   만일 그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말씀드리시오,

   바로 지금,


   그가 했던 가장 현명했던 일 (The Smartest Thing He Ever Did)


   나무 위에 오른 것은 삭개오에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믿음의 선택은 그가 결코 바랄 수 없었던 놀라운 축복을 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예를 들면, 삭개오는 그날, 그의 집에 하나님의 아들을 손님으로 맞이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가 성경의 일부로 기록되게 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21세기 이후의 우리 후세들에게까지 그의 이름이 전해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마침내 삭개오는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으며 영원한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될 때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영적 축복을 얻게 됩니다.

   또한 이 이야기를 통하여 또한 우리가 얻게 되는 중요한 교훈은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잘못했던 일들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만일 그가 지난 날 연장기구들을 훔친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이를 그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돈을 훔친 일이 있다면 그는 이를 갚아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저지른 일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로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일을 실행하는 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놀라운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약 7년 전, 내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의 도구들을 훔친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나는 지난달에 구원함을 받았고, 그 후로 주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은 것들을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물건들을 훔쳤던 잘못을 용서해 주십시오."

   물론 실제적으로 우리가 과거 지난날을 바로 잡는 일은 항상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당신은 그 사람의 옛 주소를 잊었을 수도 있고 혹은 이미 그가 이 세상을 떠난 후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하간에 언제든지 가능한 일이라면 지난날의 그 잘못들을 바로 잡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삭개오는 죄인이었으며 그는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려 하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실제로 본성적으로 죄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받아드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거절함(unwillingness)과 무관심이 구원의 문을 닫아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정하는 자들만이 구원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리고 방문은 삭개오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선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이었고, 십자가를 향한 최후의 여행길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삭개오에게는 구주를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그 기회를 잃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제로,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마지막 기회를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초청을 받았을 때 그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미루고 지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주님을 영접해야만 할 시간이며,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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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구원을 배운 신자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한복음 17:3)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아서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위에 열거한 두 가지 내용은 복음을 깨닫는 것과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을 말한다. 깨닫는 것과 발견하는 것은 동일하게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서두에 기록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는데 '안다'는 말은 곧 경험을 통해서 안다는 뜻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기노스코"라는 단어로써 "...에 의하여 ...을 알게 되다", "발견하다", "깨닫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지식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경험적으로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상담하면서 느끼는 것은 구원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았으며, 혹 구원의 진리를 아는 사람을 만나보아도 그들은 구원을 배웠을 뿐이었다.

   구원을 배운 사람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을까? 결단코 아니다. 구원은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예전과 달라서 오늘날은 각 교회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여 성경 지식수준이 상당히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구원을 지식적으로만 배워서 이론으로는 알지만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심각한 문제요, 근심거리이다.

   사단의 입장에서보면 대 성공을 거둔 것이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단의 속삭임에 속고 있다. 사단은 구원의 지식을 가르쳐주고 말하기를 "너는 구원의 진리를 알고 있으니 구원받은 거야. 더구나 한국에서 제일 이름있는 교파에 속했으며 유명한 목사님도 너와 같이 생각 하고 있지 않느냐? 너는 너의 목사님에게도 인정받고 있지 않느냐" 라고 한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 현상을 여러 방면에서 조명하여 규정지을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단에게 속아서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기가 막힌 사단의 전략에 속아서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필자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이제 본론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구원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구원을 얻으라" 혹은 "구원을 얻었나니" 등으로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성경 어디에도 구원을 이론적으로 배우라는 가르침은 없다. 원칙적으로 복음은 외치는 것이며 경고하는 것이며 깨닫게 하는 것이다. 학술적으로 가르쳐서 지식을 습득하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과 다르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구원에 관해서 자신이 없으며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 생각하여 자신 없는 대답만 한다. 혹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도 알고 보면 자존심 때문에 말하거나 착각으로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주제, 즉 구원을 배운 사람들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서 이글을 읽는 독자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먼저 성경에서 경험을 통하여 구원받은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사마리아 사람들이 불쌍한 여인의 안내를 받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여인을 통해서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배움의 단계이다. 배움은 듣는 것이며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며 소식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확인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소문일 뿐이다. 누군가가 그것의 사실성을 물어볼 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은 메시아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라고 믿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배운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왜 메시아이며 왜 구세주인가, 그가 메시아라면 나와 어떤 관계가 있으며, 나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냥 구세주라고만 알고 있는 것이다.

   여인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여인을 따라가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 그분의 말씀을 들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경험했다).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요한복음 4:42).

   이 얼마나 확실한 경험인가.

   또 다른 경우도 있다. 누가복음 19장의 삭개오의 경우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에 관해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들었다. 그분은 메시아라고 들었다. 또는 선지자라고 들었다. 여러 기적들에 관해서도 들었다. 가르친 말씀에 대해서도 들었다. 그는 들은 상식으로 예수님을 알뿐이었다. 만약에 누군가가 삭개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물었으면 자신 없는 대답을 하되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하였을 것이다.

   금일에 필자가 만나본 교인들이 오랜 교회생활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 없이 어정쩡한 대답을 하거나 분명한 대답을 한다 하여도, 학생이 배운바를 대답하듯 지식적인 대답에 머무르고 있다.

   필자는 언젠가 교인을 만나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그는 "갈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또 묻기를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가?"하니 "구역집회에서 전도사님에게 배웠다"고 하였다. "무엇을 배웠느냐?" 물으니 "여러분이 에배당에 나오는 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니 구원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하였기 때문이라고 배웠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또 묻기를 "그러면 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십자가에서 모두 용서되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또 계속해서 죄를 짓는데 어떻게 되는가?" 그는 "죄를 짓지 않아야지요" 하였다 "그래도 실수로 죄를 짓지 않는가?" 하니 "그러면 회개해야 하지요" 하였다. 또 끈질기게 묻기를 "회개하지 못하고 죽거나 죄를 짓다가 죽으면 어찌됩니까?" 하니 "할 수 없지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면 당신은 지옥으로 가는데 어찌 하렵니까?" 하였을 때, 너무나도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수십 년 교회 다닌 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을 들었다. "지옥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어이가 없어서 "지옥을 못 믿습니까?" 하니 "아니, 믿기는 믿는데 지옥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여기까지 대화를 들으면서 독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 그는 지식으로 구원을 배웠을 뿐 구원받은 적이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삭개오는 자신의 알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뽕나무 위에서 기다리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그의 생애는 달라졌다. 그는 구원받은 성도의 대열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여! 그대는 거듭났는가? 구원을 경험했는가? 속죄를 경험했는가? 지옥을 경험했는가? 진지하게 묻고 싶다. 그대가 하나님의 실존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들 되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앞에 질문한 질문들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구원받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독자들도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렇게 경고할 수밖에 없는 전도자의 마음을 아는가?


   구약의 예를 보자. 열왕기상 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 관하여 많은 소문을 들었지만 솔로몬의 위대함에 대해서 오히려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그는 진실을 알아보기 위하여 멀고도 힘든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솔로몬을 만나게 되었다. 솔로몬을 만나서 그가 한 고백은 무엇인가?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하였다. 그는 소문을 확인한 것이다. 예수님도 이 여왕을 칭찬하지 아니하였던가(마12:42).

   여기에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단어가 있다. "소문"이다. 소문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소문은 알고 있는 지식일 뿐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소문적 신앙에 머물러 있음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 말했던  구도자의 경우 지옥을 믿는데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소문적 신앙의 전형이다,

   오늘의 기독교 현실이 수요일과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목사님의 설교말씀을 일방적으로 듣고(배우고) 끝나면 집에 와서 자기의 삶을 살고, 이렇게 살다 보니 들은 것은 많은데 내 것이라고 할만한 지식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직은 믿음이 없다고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억지로 세례 주고 교인을 만들면 천국에 가는가? 교회를 몇년 다녔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자격도 없으므로 직분을 맡을 수 없다는 사람들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인용하여 협박하다시피 집사 직분을 맡기면 천국에 가는가? 그것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필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와 어머니가 목사님의 강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세례 받고 직분 맡으며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자라왔다. 나의 부모뿐만 아니라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통 속에 있는 것을 보아왔다. 얼마나 잘못된 현실인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되며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집사를 맡기면 교회 망하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예로부터 관료주의에 젖어서 감투를 좋아하는 속성이 있다. 오늘의 기독교가 이 속성을 이용하여 성경에도 없는 수많은 종류의 감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나누어주고, 교인들은 그 속에서 위안을 받으며 천국에 갈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집사, 장로 임명을 받으면 얼마만큼의 헌금을 해야 하는 의무는 자연스러운 관행으로 요구되고 있다. 이것은 중세 천주교에서 속죄권을 팔았던 사실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또한 성직을 매매했던 슬픈 기독교 역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이다. 영생의 비밀에 관해서는 가르쳐 주지 못하고, 가르쳐도 이론적으로 가르쳐 줄 뿐 그들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하는 현실 아닌가.

   독자여, 그대가 수 십 년 하나님을 섬겼는가? 구원의 교리를 배워서 잘 알고 있는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어서 내 죄를 용서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는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배워서 주장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장담하고 있는가? 그러나 필자는 권하고 싶다. 그대가 진정 멸망의 지옥에서 건짐 받은 경험 있는 성도들인가를 정직하게 점검해보길 바란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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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성경을 고치려는 신자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 5:18).


   기독교의 생명을 무엇인가? 성경의 완전함이다. 성경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고치겠다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현실은 성경을 고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지나치다 하겠는가. 필자는 오늘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한국의 기독교가 회개하기를 바란다.

   필자가 만나보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자는 다양한 질문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 중에는 성경에 없는 교회의 여러 가지 형식과 가르침에 대해서 질문하면 그들은 성경에 없더라도 교회의전통을 중시하고 따라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무모한 말인가.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과 그의 지도자들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그들은 다양한 말로 주님을 대적했는데 그 중에는  자기들의 전통, 즉 장로의 유전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그것은 성경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 새로운 자기들의 전통을 접목시키고 있었다. 이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일이며 고치려는 처사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도 동일하다. 필자와 함께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들을 생각하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첫째로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인용하는지는 몰라도 성경은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성경에 보이는 성전은 오직 예루살렘 성전만 있었을 뿐이다. 오히려 성경은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하셨고, 6장 19절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진정한 성전은 신자들의 몸이다. 왜냐하면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거룩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그러므로 의인의 몸에 성령님께서 거하시게 된 것이다.

   성령님은 누구신가.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몸은 성전이다. 필자는 어렸을 때 건물을 교회라고 배웠는데 목사님에게 물어보니 교회는 유형교회와 무형교회가 있다 하였거니와 오직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인 무리일 뿐이다.

   절대로 건물은 교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짓는다든지 성전 봉헌식을 한다는 말들은 소경의 넋두리요 성경을 고치려는 처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교회 구조를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문제이다.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가? 성경은 오직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각양 지체로 한 몸을 이루어 그 지체의 기능에 따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생명체가 교회임을 가르치고 있다.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가 되어서 교회를 대표하고 평신도와 하나님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는 교리는 어떤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마르틴 루터는 종교 개혁 당시 만인은(구원받은 자는) 다 같은 제사장이라고 외치지 아니하였던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5절과 9절에 단정코 말씀하셨다. 신부가 하나님과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종교개혁을 하였는데 오늘날은 신부 대신 목사로 명칭만 바뀌었지 아니한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예수 그리스도 외에 누가 중보일 수 있는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는 제도는 성경에 근거하지 아니한 잘못된 전통일 뿐이다.


   셋째로, 교파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한국의 기독교를 위해서 누군가는 외쳐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도대체 성경 어디에 교파를 나누어서 당을 짓고, 담을 쌓고, 경계선을 그리고, 명칭을 붙이고, 대표를 뽑고,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운영할 헌법을 만들라고 가르쳤는가? 헌법이 성경을 대신하고, 대표가 예수님을 대신하며, 조직이 성령을 대신한다면 과장된 표현일까?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조직을 통하여 대신하면 하나님의 할 일은 무엇인가?

   1900여 년 전 하나님을 섬겼던 신실한 종 바울은 교파 문제에 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고린도전서 1:11~13).

   바울은 당파를 짓는 것은 육신적인 것이라고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것은 유아적 발상이며 시기와 질투의 소산이며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육신적인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발버둥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린도전서 3:1,3).

   말씀이 이와 같이 분명하게 당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종파주의를 주장하고, 종파에 속하고자 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이 사람들은 성경을 능멸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분명히 말하거니와 교파는 성경에 없는 것이며 교파주의를 지향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을 뜯어고치려는 사람들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고린도 교회와 같이 오늘날도 사람을 중심으로 하여 교파로 모이는 것은 정확하게 닮은 모습이다.

   넷째로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기독교와 그의 지도자들은 대답해 보라. 오늘날 명단을 공개하는 헌금은 성경 어떤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는가? 수많은 부작용을 일으켜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인 사람들만 양산하는 헌금제도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한다. 시중에 돌고 있는 여론은 "돈 없으면 예수도 못 믿는다. 예배당에 나가도 돈 없으면 행세하지 못한다. 예수도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한다" 하지 아니한가?

   헌금의 종류는 왜 그렇게 많은가? 그냥 헌금하면 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주님이 주신 물질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헌금하면 되지 아니한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주신 놀라운 은혜가 있는데 이름 쓰면 헌금하고 쓰지 아니하면 헌금하지 않는 믿음의 수준이겠는가? 필자가 속한 교회를 40여 년간 지켜보는데 한 번도 기명헌금을 하거나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예배당도 짓고 선교도 하고 교회도 잘 운영되고 불편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초대교회는 구제헌금을 할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태복음 6:1~4).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외식을 경계하고 있고, 하나님의 보심을 기억하여 은밀하게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엄청난 헌금으로 인하여 많은 발전을 하며 거대한 예배당을 짓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지 필자는 확신할 수 없다. 아마 하나님은 산동네에 있는 가난한 자들과, 그들을 복음으로만 돌아보는 허름한 예배당의 허름한 차림의 주의 종들과 함께 할 것이다.


   다섯째로 복음의 변질이다. 성경이 말하는 정확한 복음을 지금 언급하고 싶다. 지옥에 대한 인식이 신자들에게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변질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지옥을 분명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막연하게 믿고 있을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기복신앙이 한국 기독교에 파고드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기복신앙은 한국 토속신앙의 산물이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다. 기복신앙이 기독교를 변질시키고 타락시켜도 누구 하나 외치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다. 기복신앙은 현실에 바탕을 둔 것이다. 정성껏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된다고 한다. 이것은 성황당에 정성껏 빌면 복 받고 잘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옥이 빠진 기독교는 토속신앙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지옥에 대한 깨달음이 분명하지 않으니 속죄에 대한 감격도 없다. 지옥의 절망을 뼈저리게 깨닫지 못했는데 지옥에서 건져주는 핵심 진리인 속죄에 대한 감사가 있을 리 있는가?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의 분석이다. 속죄를 그냥 교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강단에서 지옥에 대한 끔찍한 사실을 많은 시간 사용하여 경고하여야 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모든 설교시간에 지옥을 언급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한번 지옥에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다. 1200도가 넘는 펄펄 끓는 불 속에서 미친 듯이 뛰면서 영원히 고통을 당해야 하는데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지옥에 간 가룟 유다에 대해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아니하였던가. 이토록 무섭고 끔찍한 지옥을 오늘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경고하지도 않고 지옥에 대한 대책을 풀어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한국 기독교의 고질병이다. 이 고질병으로 인하여 영문도 모르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수천만의 기독교인들을 생각할 때에 눈물이 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성경은 분명하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능력 체험도 아니고 감정적인 어떤 경험도 아니고 환상이나 꿈이나 기타 기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다. 멸망의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고통하는 죄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죄 용서함 받고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을 갖게 되는 날이다. 존 뉴턴도 우리 찬송가 405장에서 이 놀라운 날을 간증하고 있지 아니한가?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골로새서 1:6).

   얼마나 분명한가. 여러분에게 이런 날이 있는가? 어떤 집사님은 구원받았는가 물으니 자기 교회 목사님이 자기 교회 교인은 다 선택받았을 뿐만 아니라 또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였는데 다 믿음으로 교회에 나오니 전체로 구원받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내몰고 있는가. 이와 같은 경우는 극단적이지만 실제로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는 천국에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으로 예배당에 출입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의 어떠한 변질보다도 무서운 변질이다. 복음이 잘못되면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을 뿐만 아니라 천국과도 관계가 없다. 복음이 잘못되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근본적인 이유가 변질되는 것이다. 성경 핵심이 복음이요 성경 중심이 복음이며 결론이 복음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떠난 기독교를 어찌 다 말하겠는가. 이외에도 필자는 한국의 기독교를 향하여 할 말이 많다. 성경을 고쳐가는 저들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제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진정한 진리는 성경뿐이다. 성경대로 믿고 성경대로 죄 용서받고 성경대로 구원받아 성경이 말하는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구원은 개인적이고 단회적이고 실제적이다. 교파를 초월해서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다 같은 천국시민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다. 여러분 개인의 구원 문제에 대해 점검하는 기회가 되었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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