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26장

                 하나님이 어떻게 꽃가게 일을 도우셨나?


   조안니는 5년간 꽃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한 후에 그 가게를 사들이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그것은 그녀로서는 큰 결단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오후 다섯 시면 주인과 상관없이 퇴근해서 집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점원을 고용해서 감독하고, 가게 세를 내고, 매주 사들일 꽃 종류를 결정하고, 그리고 수량 견적을 내야 했습니다.


   꽃을 주문하는 일은 특히 휴일에는 전략을 잘 짜야 합니다. 너무 많이 주문하면 시든 꽃다발에 파묻히게되고, 너무 적게 주문하면 수입이 줄어듭니다. 물론 예년의 판매기록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런 기록은 예민한 꽃시장에서 항상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가게 일을 한지 3년이 지나서 조안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큰 결단이었습니다.이제 그녀는 그리스도인의 원칙대로 가게를 운영해야 했습니다. 가게 일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동업자로 의지할 수 있었습니다. 추측이나 예감에 의지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발렌타인데이가 임박해서 꽃을 주문해야 했습니다. 그 날은 1년 중 가장 꽃이 많이 팔리는 날 중 하루였습니다. 그날은 사람들마다 꽃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녀의 가게를 비롯해서 많은 꽃가게들이 목요일에 엄청난 매상을 올렸습니다. 이제 도매시장에 가서 더 사와야 하는지, 아니면 남은 물량으로 만족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동업자인 예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주님께서 그런 문제에 대해 그녀에게 대답하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성경을 펴고 주님께 인도를 구했습니다. 물론 성경은 꽃 장사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때 그녀는 출애굽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36장을 읽다가 그녀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있는 재료가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하여 남음이 있었더라"(7절).


   그녀는 그 말씀을 의지해서 추가 물량을 구입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토요일에 장사를 마감할 즈음에 고객의 필요를 충당하고 남은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음 목요일에 도매시장에 나가보니 그녀와 경쟁하는 사람들이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잔뜩 꽃을 갖다 놓았는데 얼마 팔리지 않아 시든 꽃에 파묻혀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수백 달러 어치 꽃이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꽃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물론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그 꽃 하나에 비교되지 못할 만큼 그렇게 공들여 꽃을 만드셨습니다(마 6:29).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세속적인 사업에 관심이 있으실까요? 물론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분은 어린아이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그분께 여쭙고, 또 극히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 대해 그분께 인도하심을 구하는 자들을 돕기 위해 나서기를 기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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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13장

                     구원받고 만족하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스코틀랜드의 루이스 섬입니다. 때는 1922년입니다. 제시 맥도날드와 그녀의 두 아들, 이언과 윌리암이 남편이 일자리를 잡기 위해 메사추세츠로 돌아가고 없는 동안 세 독신 여동생을 찾아가 함께 1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그 지역 목사의 사택으로 사용되던 집에 기거했습니다.


   반년쯤 지났을 때 다섯 살 난 윌리암이 치명적인 전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걸렸습니다. 오늘날은 다행히도 알려지지 않은 질병으로, 유아에게 놓은 면역주사 덕택에 단 한 건도 발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아주 치명적인 질병이었습니다.


   윌리암의 상태는 매우 위독했습니다. 근처에는 병원도 의사도 없었고, 치료에 도움이 될만한 약도 없었습니다. 다섯 살배기의 상태는 절망적이었습니다. 목구멍에 점액질의 막이 형성되어 공기가 폐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습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가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망 중에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바로 그 때 노크 소리가 났습니다. 이웃 마을에 사는 그녀의 형부인 머드 맥도날드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여호와의 친밀함을 알고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시 25:14).


   그녀는 경황이 없었지만 스코틀랜드 가정의 손님 접대 예를 따라 서둘러 차를 준비했습니다. 그는 식탁에 앉아 그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습니다. 아침에 난롯가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편 91편 끝에 이르러 주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


   그는 믿음으로 마지막 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주장했습니다.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시 91:14).


   그 당시는 윌리암이 장수를 누리거나 언젠가 구원을 받는 것이 인간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죽을 때가 임박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처럼 멀도는 믿음이 견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는 윌리암이 디프테리아를 극복하고 장차 거듭날 것이라고 그의 어머니에게 확신 있게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과연 살아서 거듭났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무 의료적인 도움 없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료로 그는 그 치명적인 질병에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13년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주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습니다. 그는 지금 83세의 나이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장수의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장수함으로 나를 만족케 하고 그분의 구원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약속하신 이는 미쁘십니다



* (윌리암 맥도날드는 2007년 12월 25일, 만 91세의 생일을 불과 약 12일을 앞두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이 에비되어 있는 주님곁으로 가셨습니다. 형제님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잘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사실 그것이 그분의 바램이었습니다. 형제님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영광스러운 신약교회의 성도로서 일생을 신약교회 진리를 연구하고 가르치고 실천해온 성경교사로서 참된 모본을 보였습니다. 형제님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람들이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드러나길 원하여 살아 생전에 약 84권의 성경주석 등에 관한 책을 쓸 때에 처음에는 대부분 익명으로 쓰고 후에 그분이 저자인 것을 밝혔다고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이 권면 한 것처럼 평생 홀로 침대 한개만 있는 단칸 아파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참 행복과 참 자유와 참 안식을 누리며 살아오셨습니다.

   형제님은 19세기에 있었던 신약교회 운동이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거치면서 오늘날 정통 기독교 교리의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은 기초 위에 20세기까지 이어서 이때까지 발견된 모든 신약교회 진리를 체계화 하되 평이하면서도 그 진리의 깊이를 훼손함이 없이 문서화함으로서, 그 빛을 더욱 발하게 하는데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분이십니다.


1917년: 1월 7일 미국 매사츠세츠 레오민스터 출생.

1924년: 가족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이주했다가 다시 메사츠세츠로 돌아옴.

1935년: 18세에 구원을 얻음.

1938년: TUFT 대학 졸업(21세).

1940년: HAVARD 대학 경영학 석사(MBA) 취득.

1940~42년: 보스톤 FIRST NATIONAL BANK 투자분석가 재직.

1942~46년: 제2차 세계대전 미 해군으로 복무.

1947~65년: 일리노이 오크 파크의 엠마오 성경학교 봉직.

1959~65년: 엠마오 성경학교 교장.

1965년~72년: 미국, 유럽, 아시아에서 순회하며 성경을 가르침.

1973~99년: 캘리포니아 Fairhaven Bible Chaple DITP(the Disicipleship Intern Training Program)제자 훈   련       교육 프로그램 진행. 현재는 캘리포니아 South Bay에 있는 Grace Bible Chaple과 Hillview Blble Chaple 계속 진행중.

1996~2007: 성경 가르침과 저술 활동.

                 생전에 약 84권의 책을 씀.

                 수 많은 잡지와 설교, 방송 강연록 있음.

                  2007년 12월 25일 21:20분 주님의 부르심을 받음).

                                                                                       -엠마오 성경학교 교재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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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4장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한 버트


   버트는 처음 클라우디아를 만났을 때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마음과 양심에 역사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아주 가까운 마음 상태가 되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전혀 믿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버트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이 끌렸으며 버트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버트는 생각했습니다. 그는 둘이 함께 구원받고 함께 주님을 섬길날을 고대했습니다. 그녀는 쉽게 그를 따라 교회에 갔고 그리스도인들과 쉽게 어울렸습니다. 버트는 그녀와의 관계가 원만하게 진전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모든 일이 아주 순조로웠습니다.


   여러 주가 지나면서 버트의 마음에는 죄에 대한 각성이 생겼습니다. 그는 더 이상 그런 상태로 머물 수 없었습니다. 어느 주일 복음을 듣다가 버트는 마음에 결정을 내려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는 집회 후에 전도자를 찾아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클라우디아가 그 일을 보고 자기도 구원받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여러 자매님들이 그녀에게 몰려와  이제 두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버트는 원래 열정적인 기질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말씀을 파고들고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클라우디아는 한 동안 열심을 내다가 이내 시들어버렸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성경을 읽는데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일시적인 상태로 넘겨버렸습니다. 버트가 장로들에게 침례상담을 청하자 클라우디아도 함께 침례 받겠다고 자청했습니다. 장로들은 그녀와 상담하기 위해 여러 번 시간을 마련했지만 번번이 그녀의 시간에 맞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그녀의 경우를 예외로 인정하고 그녀를 버트와 함께 침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침례식 자리에서 버트는 그녀의 간증이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회개를 했다든지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천국 소망이 되었다든지 하는 말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얘기뿐 주 예수님에 대한 얘기는 거의 없었습니다.


   버트는 의심을 애써 무시하고 약혼과 결혼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사랑이 문으로 들어오자 이성(理性)이 창문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확신은 없었으나, 만일 클라우디아가 참 신자라면 주님께서 결국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경건의 시간에 이사야 30장 1,2절을 읽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으니 죄에 죄를 더하도다."

   주님께서 버트에게 직접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주님께 여쭙지 않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는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결혼을 막아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버트는 결혼하고픈 소망이 남달리 강했습니다. 그는 혼자 될까봐 두려웠습니다.


   3개월 후 어떤 형제가 버트에게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여주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버트는 결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거렸습니다. 그 말씀은 그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행동을 멈추도록 계속 경고했습니다. 적신호가 깜박거렸습니다.

   클라우디아가 버트를 위해 생일파티를 준비했습니다.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술도 준비한 아주 떠들썩한 파티였습니다. 그녀의 친구들도 왔고 교회 사람들도 왔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했고 모두들 어색해했습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형제가 버트와 차를 마시면서 고린도후서 6장 14~18절을 간략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버트는 이번에는 주님께서 확성기로 그의 주의를 깨우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버트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갈 수 없다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클라우디아의 삶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삶에 이루시는 변화의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생활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런 얘기를 편지로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이제 끝나야 했습니다. 버트는 가능한 부드럽고 다정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왜 자신이 그런 갈등을 불러오는 행동을 그만두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는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된데 대해 미안함을 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호소의 글로 편지를 끝맺었습니다.


   불행히도 클라우디아는 그 일을 회개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완전히 불신앙의 길로 나갔습니다. 버트는 그녀가 얼마 후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도 그녀의 배우자도 주님을 시인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버트는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자들이 누리는 큰 평화를 경험하고 믿음이 급속히 성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감정적인 혼돈을 극복하고 주님을 삶의 첫째자리에 놓고 그분 안에서 만족을 발견하는 법을 배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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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3장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수 15:13)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피의 보호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두 번째는 홍해 바닷가에 서있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현 시대 그리스도인의 참된 위치를 나타내는 길갈에서 유월절을 기념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 심판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악한 세상에서 해방을 받고, 현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에 의해 주어진 다양한 관계와 책임 가운데 합당하게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또는 구름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땅에도 하늘에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꿈속을 걷거나, 안개속을 더듬거나,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날마다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미덕을 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 속에 반영하는 행복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성취된 구속의 견고한 터 위에서 무한한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명확하고 또 명백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용납되었으며(받아들여졌으며),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됨으로써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며,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자신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삶의 기쁨과 영적인 활력을 발견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날마다 고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흔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독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보시고, 과연 자신이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증거가 존재하는 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풍성하며 귀한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로 인한 어두운 불신앙과 잘못된 신학과 거짓된 종교심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합당한 위치와 마땅히 누려야 할 분깃을 강탈해갑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분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프게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특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여호수아 3-5장을 통해 모형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계시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1-4)


   이제 독자들은 순전하고 명쾌하게 요단강의 참된 영적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홍해바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듯이 요단강은 또 다른 면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서 광야 쪽에 서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구속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대적들이 바다에 빠져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승리에 찬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3-18)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장엄한 것이며 신성한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에 대해서는 아직 영광스러운 승리의 노래가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나 믿음의 판단에서나 그 땅은 참으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실제로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고, 요단강을 실제로 건너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영혼의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얼마나 끊임없이 보는지요! 처음 회심했을 때, 우리에겐 기쁨과 승리와 찬송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알았고 우리 마음은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송으로 가득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11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 높은 것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천국에서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높거나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로마서 8장이 로마서 5장보다 더 높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것" 보다 더 높을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갔다면, 우리 영혼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이며 안식이고, 처소이며 목적이고 또 우리의 모든 것으로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모든 자원을 소유하는 것,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들에겐 천국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5장과 8장은 차이가 있는데, 바로 6장과 7장이 그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로마서 6장과 7장을 실제적으로 통과하며 그 안에 담긴 심오하며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죄와 율법의 심각한 문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이라기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실제적으로 통과할 때" 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또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쉽습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단지 이론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러한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영혼에 실제적으로 적용해본 적이 있습니까? 놀라운 복과 특권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깊고도 보배로운 이러한 비밀들을 많은 사람들이 단지 지식으로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능력으로만 소유할 수 있고, 그럴 때 실제적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 주제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참으로 요단강의 영적인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요단강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요단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믿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해방을 받아 자유를 얻는 것으로는 아직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요단강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길!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우리 죄와 죄책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고, 또 사단의 권세와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동일한 무한히 보배로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 즉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분과의 살아 있는 연합 속으로 우리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에베소서 2장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4-6절)


   여기 "앉히시니" 에서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장차 앉히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입니다. 신자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고, 또한 영광을 받으신 머리이신 주님과 연합되어 영으로, 믿음으로 이미 천국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실제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던 것만큼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진리 만큼 사실이며 실제입니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 속에서 날마다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 만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독교를 신화나 속임수나 우화로서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신약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 후에 신령한 빛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환경을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 고백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를 그러한 영광스러운 위치, 곧 그분의 아들과의 연합과 사귐 속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 위치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것은 우리 인생 전체와 행동과 성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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