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1


                 거듭남(중생)의 확신

                                     Being Born Again


   이탈리아의 로마에 힌두교도인 인도 노인이 이탈리아 태생의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 때 이집트에서 힐튼호텔과 고층빌딩 안에 있는 보석체인점들을 운영하여 큰 돈을 모았습니다. 그 후 그는 보석상점들을 팔고 이탈리아로 이사하여 로마의 고급 호텔안에 다시 새로운 보석상점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그의 아들을 로마로 초청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상점과 재산들을 관리하도록 위임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아들이 변호사와 결탁하여 자기 재산을 조직적으로 빼돌려 횡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재산을 스스로 지켜 장래를 대비해야만 했습니다.

   그 노인은 아들의 비행으로 말미암아 큰 실망과 비애와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 부부는 텔레비전을 시청하다가 우연히 이탈리아어 기독교 방송 채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흥미를 느낀 그들은 방송 프로그램 순서들을 살피는 중에 또 다른 여섯 가지의 외국어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엠마오 성경통신학교 교재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곧 엠마오 교재를 신청하여 진지하게 성경공부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점차적으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야 할 필요를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곧 자신들을 위하여 누군가가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침내 엠마오 성경통신학교 로마지부 담당자가 이 힌두교 노부부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노부부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힌두교도이던 이 노인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와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부인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들 노부부는 영 안에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계속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주님의 은혜 가운데 그 영혼이 성장하며, 더욱 깊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 이 노부부는 그들이 잃어버린 세상적인 물질의 부요 대신에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새로운 영적 보화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너 가지의 다른 언어의 성경들을 가지고 엠마오 성경통신 교재들을 계속 공부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과오를 저지른 그의 아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이와 같은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일들은 과연 진실일까요? 그렇습니다. 앞의  노부부는 그들의 삶을 통하여 이런 일이 명백한 사실임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삶의 중심과 목적이 새롭게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새 생명(Eternal life)을 얻는 일이며 그리고 그 새 생명 곧 영생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요 10:28-29). 이러한 새 싱명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Believe)을 통하여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디도서 3:5).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새 생명과 새 마음과 새 성품을 얻게 됩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얻은 생명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생명입니다. 이 신령한 생명은 거듭남(중생)을 통하여 시작되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보존됩니다. 이러한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계속 됩니다.

   본 성경 통신교재를 공부하는 분들 중에는 이미 이와 같은 중생의 체험을 가진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간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생은 그 시작이고 본질이며 기적이고 그 외의 모든 것입니다. 이러한 중대한 이유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님과 초자연적인 만남을 갖고, 그 결과 중생을 경험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하여 12개의 과 중 한 과의 분량을 할애하기 원합니다. 앞으로 함께 공부해 나아가면서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신령한 새 생명을 얻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거듭남의 조건 (The Requirement)


   1. 거듭남은 필수조건이다 (The Requirement Expressed)


   예수님께서는 거듭남이 모든 인간들에게 필수조건임을 아주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경건하고 양심적이며 성경을 믿으며 종교심이 강하며 또한 정통적 유대교인인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스스로 자기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볼 수 없느니라" "너는 거듭나는 게 좋다" (You should be born again), 혹은 "너는 거듭나는 것을 원하는가?" (Would you like to be born again?)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You must be born again) 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래서 약 일세기 전, "당신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라고 항상 외쳤던 위대한 전도자 조지 휫필드(George Whitfield)에게 한 부인이 그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부인, 그 이유는 당신이야말로 반드시(MUST) 거듭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2. 거듭남은 어째서 필수조건인가? (The Requirement Explained)


   거듭남이 필수 조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한 예화를 들겠습니다. 임금님의 왕궁이 가까운 산속에 한 벌목꾼이 살고있었습니다. 그는 임금님을 만나면 간청하고자 하는 특별한 소원 하나를 늘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그가 벌목을 하고 있는 가까운 곳으로 임금님의 행차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임금님 앞으로 재빨리 달려 나아가 엎드리며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께 복종하는 가장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저는 법을 잘 지키고, 정직하며, 도덕적이고, 양심적으로 깨끗하게 살며, 선하고 그리고 종교적인 사람입니다. 저는 제 아내에게 훌륭한 남편이며, 자녀들의 좋은 아버지이고, 이웃들의 좋은 친구로 살아왔습니다. 저는 결코 그 누구를 해롭게 한 적이 없으며, 빚진 것을 항상 제때에 갚았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베풀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폐하, 저는 폐하께서 이와 같은 저를 귀히 여기셔서 왕궁으로 데려가 주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를 폐하의 가족과 왕자들 중 하나처럼 대우해 주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가를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왕자 가운데 하나로서 왕궁 안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그는 반드시 임금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어야만 합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매우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오 하나님,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성경을 믿고 있으며, 기도를 하며, 가난한 자들에게 사랑과 자선을 베풀며, 충실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애쓰며, 도덕적이고 존경받는 삶을 살고자 노력합니다. 나는 산상수훈의 황금률을 따라 내 이웃을 사랑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죽는 날 하나님께서는 천국 문을 여시고 나를 영접하여 당신의 자녀들중의 하나로 삼아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강청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만 한다" (You must be born again).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가정 안에서 살고, 천국 시민권을 얻으려 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요한 1:12).


   거듭남에 대한 논증(論證) (The Reason) 


   위대한 설교자 토레이 박사(Dr. R. A. Torrey)는 스스로의 선행으로 능히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토레이 박사에게 자신은 그가 알고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중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생활을 하며 살아왔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때 토레이 박사는 두 개의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했습니다. "이 첫 번째의 사각형은 거듭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이를 거듭난 자의 주라고 부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사각형은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는 계속 말하였습니다.

   "자, 이제 한 가지 예화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신이 현재 미국 콜로라도주에 살고 있다고 가정합시다. 당신은 그 콜로라도 주 안에서 해발 1만 4천 110 피트 높이의 정상(Pike)에 살 수도 있고 아니면 그와 반대로 정상에서 훨씬 아래의 지역에 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정상으로부터 900 피트 쯤 더 아래 지역에 살 수도 있으며, 아니면 이상의 어느 위치들과도 다른 어느 한 지점에 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는 지점이 어느 곳이든지 당신은 어쨌든 콜로라도 주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그린 이 두개의 사각형의 주(States)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가령 그가 아주 높은 도덕적 표준 위에서 깨끗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혹은 평균적인 삶을 살고 있던지, 아니면 그 어떤 중간 상태의 삶을 살고 있던지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여전히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born again)까지는 거듭나지 못한 자의 주 속에 여전히 남아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반면에, 거듭난 자는 거듭난 자의 주를 상징하는 사각형 속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승리하고 열매 맺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혹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고 있던지, 심지어 실패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그는 여전히 거듭난 자의 주 안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당신에게 더 중요한 것은 현재 당신이 어느 주에 속한 사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거듭난 적이 있습니까? 과연 당신은 지금 거듭난 자의 주 안에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거듭나야 하는 이유는 우리 인간은 모두가 처음부터 그릇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그는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 1:26)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인간 한 쌍을 만드시고, 또한 그들을 완전한 장소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우리 조상 아담과 이브는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인류의 타락 후 아담의 후손에 대해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 (창 5: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은,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아니라 이미 타락한 아담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우리들은 모두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시 51:5)고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인간은 출생에 의해,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그리고 스스로의 행위로 인해 모두 죄인들입니다. 성경은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하였느니라." (사 59: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타락한 심령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을 보응하느니라" (예레미야 17:9-10).

   이러한 이유로 범죄한 첫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인류는 마지막 아담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고 거듭나야만 합니다(롬 4:12, 17). 우리의 죄는 반드시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방법으로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독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변화되게 하시며, 범죄한 아담의 가족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년 전 한 의사가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저명한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준비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한 그리스도인 친구가 그의 병상 곁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대해 힘써 증거했습니다. 그 친구는 곧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서 설명하였습니다. 그 때 그 의사는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야" 그는 계속 이어서 "나는 거듭남이 필요해. 나는 많은 아기들이 새로 태어나는 것을 보았지. 그리고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과거가 없고, 오직 미래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지. 내가 어떻게 아기처럼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거듭남의 법칙 ( The Rule)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나이까?" (요한복음 3:4)라고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이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 (요한복음 3:6)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바로 "(그가)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1:11-13)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1. 세 가지의 놀라운 부정 (Three Starting Contradictions)


   요한복음 1장 13절은 거듭남에 관해서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분명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란,


   가족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amily Influences)

   선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ine Intentions)

   육적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님 (Not by Fleshly Impulses)


   첫째로 거듭나는 것은 가족의 영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 나는 것은 혈통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요,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 해도 그 자녀가 거듭난 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이던 자녀이던 우리 모두는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는 많은 자녀들이 있으되 손자들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나는 것은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신실한 그리스도인 부모라도 그의 자손에게 거듭남을 유산으로 물려 줄 수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우리가 물려받는 것은 단지 죄의 성품입니다. 아무도 어린아이에게 반항심, 불순종, 고집, 성냄, 부정직함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특성들은 자연적인 출생을 통하여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성품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된 곳으로 들어 간 어느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고통 중에 저 멀리 아브라함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어떤 도움을 기대하여 탄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을 향하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그런 혈연 관계가 잃어버려진 죄인인 그를 구원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의 간청에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하였습니다. "내 아들아 기억하라. 너는 네게 주어졌던 가족의 특권을 저버리고 구원의 기회를 놓쳤노라" 그러므로 성경은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출생하는 일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큰 기회인 동시에 믿지 않았을 때 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거듭나는 것은 자신의 선한 의지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즉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요한복음 1:13). 많은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노력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그릇된 관념은  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릇된 종교들은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사람의 뜻을 앞세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그 누구도 어떤 종교적인 노력이나 행위 혹은 어떤 계획에 따라서 하나님의 가족의 신분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순례, 참회, 금식, 육체적 고행, 규칙준수, 결단들로써 우리의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의지와 결심은 그 영혼을 거듭나게 만들 능력이 없습니다. 거듭남은 단지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의 시작입니다.

   셋째로 거듭나는 것은 육신적인 감정이나 욕망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백만장자의 자녀가 되고자 하는 욕망만으로 백만장자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육의 의지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행위들을 제거시킬 힘이 없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로마서 8:7) 비록 육체가 그 최선을 다 한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옷과 같을 뿐입니다(이사야 64:6).

   사도 바울은 한 때 자신의 인간적인 노력으로 쌓아온 종교적인 모든 공로들을 열거하면서, 그렇지만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하여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 (빌립보서 3:4-8)고 말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 자신의 의지에 의해 그 행위가 어느 정도 달라진다 해도 근본적으로 육적인 본성 자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내 속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8)고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9)고 말씀하십니다. 거듭남은 반드시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질 뿐 결코 육적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2. 거듭남의 세 가지 조건 (Three Simple Conditions)


   우리는 결코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없는 세 가지 부정적인 조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한복음 1:12 말씀을 잘 주목해 보기 바랍니다. 이를 체계적인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믿음 (Believe)

   영접 (Receive)

   변화 (Become)


   자연적 출생을 위해서는 사람에 속한 기능과 역할 또 하나님께 속한 기능과 역할이 필요합니다. 육체적 출생을 위해서 일부분에는 인간의 기능과 역할이 있어야 하고 또한 생명의 출생을 위해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간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 있으며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감당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이러한 역사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첫째는 믿음(Believe)입니다. 특별히 그의 이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이름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예고하실 때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 1:21)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Savior)라는 뜻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죄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감출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자책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범한 죄로부터 도망할 수 없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피할 수도 감출 수도 없는 괴로운 짐이라서 때때로 죄짐의 무게로 몸부림칠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양심의 평안과 해방을 찾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사" (고전 15:3-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던 수많은 영혼들이 이와 같은 말씀들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이는 얼마나 분명하고 놀라운 기쁜 소식(복음)인지요! 우리는 이와같은 복음(Good News)을 믿음(Believe)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죄사함과 구원을 얻게 됩니다.


   둘째는 주를 영접(Receive)하는 일입니다. 거룩한 진리에 대한 지적인 긍정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젊은 여인이 결혼을 통하여 한 젊은 청년을 자신의 남편으로 받아 들임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해야만 합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절차의 한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천불짜리 수표를 주겠노라고 제의했다고 합시다. 당신이 그와같은 제의를 전혀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고(believe) 있다 할지라도 그 돈을 당신 손 안에 실제로 받아들기(receive) 전까지는 그 선물은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가 만인의 구주이심을 믿고 있다 할지라도 바로 당신 자신의 구주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당신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구주되심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어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당신 개인의 구주로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마음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영접(receive)하십시오.


   셋째는 신분적 변화(Become)입니다. 한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하나님이시며 구주가 되심을 믿고(요한 20:28), 또한 그를 자신의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become)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운 신분과 영생을 얻었으며, 거룩한 성령님께서 개인적으로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시고 하나님의 가정 안에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거듭남의 결과(The Result)


   거듭남은 자연적인 사람의 인격 속에 하나님으로 인한 새 생명이 넣어진 것입니다. 산림 속의 하찮은 한 그루의 나무일지라도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작은 동물은 그가 지닌 동물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산림 속의 가장 거대한 나무들보다 더 위대합니다. 아주 연약한 어린 아기는 그 고귀한 인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가장 영리하고 가장 힘센 그 어느 동물들 보다 더 위대합니다. 가장 부족하고 연약하며 믿음이 보잘 것 없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가 가진 신령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비록 온갖 지혜와 재능과 큰 권세를 가졌을지라도 거듭나지 못한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위대합니다.

  이 신령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 각 사람들 속에 심으시는 것으로서 영원하고, 결코 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생명입니다. 이 영적 새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과 어떤 면에서 닮았습니다. 한 어린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생명 속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 갓난아기에게는 부모의 사랑과 보호와 보살핌과 음식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거듭난 사람은 영적 갓난아기입니다. 그에게는 반드시 영적 양식과 보호와 인도와 그리고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벧전 1:23 ; 2:2).

   이것이 본 성경공부 교재를 만들게  된 이유입니다. 당신은 거듭나셨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본과의 과정은 당신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영적 생명의 성장을 돕고, 신앙적으로 장성하여, 하나님의 쓰임받는 사람들이 되며, 더욱 장성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 가도록 당신을 도와 줄 것입니다.그러나 만일 당신이 아직 거듭나지 못하였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당신의 죄를 위하여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대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마음 가운데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시기를 진심으로 빕니다 (고전 15:3, 요한 1:12, 롬 10:9-10).

                                                                                                                                                                  -엠마오성경학교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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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9장

                               생각해볼 문제들(1)


   이어서 우리가 구원을 온전히 확신하며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러한 의문점 내지 반론들은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이 거듭해서 나에게 물어온 것들입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단순한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문제들 중 상당 부분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 설명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만일 당신이 마음과 양심에 안식을 얻지 못했다면 아마 당신이 안고 있는 문제가 여기서 설명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1. 내가 충분히 회개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종종 회개의 의미를 오해한데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회개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참회 즉 죄를 슬퍼하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또 죄를 다소간 보상해보려는 고행이나, 죄에서 돌이키는 개선과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회개란 죄와 자신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말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문자적으로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지적인 견해(관점)의 변화가 아니라 태도의 완전한 변화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점검해봅시다. 전에는 죄 가운데 거하고 죄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합니까? 전에는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이 제법 선하다고 믿었습니까?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전에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하나님의 권위를 거슬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고, 하나님께 자신을 굴복시킵니까? 만일 당신이 이러한 질문들에 "예"라고 정직히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회개를 한 것입니다. 당신의 태도는 이전의 태도와 전혀 달라졌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회개의 양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자신에게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 그것이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은혜를 힘입는 위치로 인도합니다.

   엄격히 말한다면 우리 중 아무도 충분히 회개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중 아무도 하나님이 보시는 만큼 우리의 죄악의 엄청남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구주를 믿을 때 그 구주의 공로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그분의 무한한 가치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을수록 회개가 깊어집니다.


   "당신의 회개의 눈물도 기도도 아닐세.

   영혼을 속하는 피,

   그 피를 흘리신 분의 공로로

    당신의 무거운 죄짐이 사라지네."


 2. 나는 하나님께 합당치 않아요.  나는 정말 무가치해요. 하나님이 나 같은 자는 하늘나라에 데려가시지 않을 거예요.


   만일 당신이 스스로 하늘나라에 합당하거나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상상한다면 그건 얼마나 가증한 태도일까요! 바로 당신이 그렇게 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죄가 되사 당신이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스스로 조금이라도 합당한 것이 있었다면 구주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로마인 백부장은 그의 종을 위해 예수께 치료의 능력을 구 할 때 자기 대신 유대인 장로들을 그분께 보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나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주님을 대면했을 때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외쳤습니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한 그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할 때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에게 즉시 구원이 베풀어집니다. 죄인은 회개 없이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양심이 당신을 주저하게 하지 말라.

   합당한 것이 있나 미련을 갖지 말라.

   그분이 원하시는 합당함은

   당신이 그분을 필요로 하는 것 뿐이라."


 3. 나는 너무 흉악한 죄인이라 영영 구원받지 못할 거예요.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부르기 위함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선한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며, 사실 세상에는 나면서부터 선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2).

   만일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죄는 건강한 자를 사로잡는 더러운 질병 같으나, 예수님은 그 어떤 질병도 고치시는 위대한 의원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어떤 사람도 너무 사악하거나 너무 죄가 많지 않습니다. 그분의 치유의 능력은 한이 없습니다. 그분은 큰 죄인에게 큰 은혜를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다소의 사울은 죄인 중 괴수였으나 주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구원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죄악 됨이 크면 클수록 당신은 더욱 구주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상태가 나쁘면 나쁠수록 그분이 당신을 위해 죽으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그 갈보리 십자가에 달렸을 때 우리의 모든 죄를 그 아들에게 넘기셨습니다. 그 아들께서 그 모든 죄를 위해 고난 당하셨습니다. 당신의 죄 중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화목사역은 무한한 가치가 있기에 이제, 주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흉악한 죄인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내 죄가, 일부가 아닌 모든 죄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혔네.

   나는 더 이상 그 죄를 담당하지 않네.

   내 영혼아, 주를 찬양하라. 주를 찬양하라!"


4. 그러나 만일 내가 택함 받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하죠?


   그 문제는 당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정과 같은 심오한 교리에 심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그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다 택함 받은 사람이라고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단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전반부 말씀에 너무 오랜 시간을 끌지 마십시오. 후반부 말씀에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의 책임이 거기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예수께로 나왔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결코 당신을 내어쫓지 않겠다는 그분의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께로 나왔다는 사실이 아버지께서 당신을 그리스도께 주셨음을 증명합니다. 즉, 당신은 자신이 그 영광스런 택함 받은 백성의 무리에 속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D.L. 무디는 이것을 이렇게 간단히 표현했습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이고, 택함 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든지 원하지 않는 자'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초청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초청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택함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씀은 결코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어떻게 말할까요?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당신은 경건치 않은 자인가요? 그렇다면 그분은 당신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제 그 사실을 의지하고 평안을 누리십시오.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선언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담으십시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 1;15).

   성경 어디에서도 그리스도께서 택함 받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인"이란 말은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말인데, 이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롬 3;23). 당신은 자신이 죄인임을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자신이 구원받을 줄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너무 차원 높은 문제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그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시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인가!

   죄 중에 방황하던 모든 이들이

   거듭해서 외치는 말,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영접하시네!"


5. 때때로 내가 버림받기로 예정된 것이 아닌가 염려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 두려운 운명을 도저히 바꿀 수 없을 거예요.


   아무도 버림받기로 예정되지 않았습니다. 예정은 올바르게 이해하면 무한히 가치 있고 무한히 위로가 되는 소중한 진리입니다. 성경을 펴서 "예정하다"는 말이 나오는 두 장을 직접 확인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로마서 8장 29,30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다음 장은 에베소서 1장입니다. 먼저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리고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상 네 구절에는 하늘나라나 지옥에 대한 언급이 일절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를 본받는 문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도록 예정하시고 어떤 사람은 버림받도록 예정하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거나 영원히 버림받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예정은 언젠가 모든 구속받은 자들이 주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소중한 사실이 아닌가요! 구주를 믿는 자들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기 위해 주어진 말씀에서 괜한 근심거리를 끌어내지 마십시오! 그분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본받도록 당신을 예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가 그 아들을 닮게 된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영광의 아버지께서

   당신의 최고의 형상을 닮는 영광을 허락하셨네."


6. 믿으려 애써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어요.


    누구를 믿으려 애쓴다는 거지요?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분을 김히 믿으려 애쓴다는 말인가요? 그것은 하나님을 면전에서 모독하는 말이 아닐까요? 가령 절친한 친구가 어떤 이상한 얘기를 들려주며 사실이라고 강조한다면 당신은, "네 말을 믿어보려고 노력할 거야"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그를 전혀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 아닐까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시고 그분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믿어보려 노력하겠다는 말은 제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만일 당신이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사실 당신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다면, 즉시 그분께 나아가 그 동안 범한 그 큰 잘못을 고백하고 이후로는 그분의 말씀을 단순히 믿겠다고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느낌이나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 어린 소년처럼 말입니다.


   "나는 믿어요, 이제 나는 믿어요,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셔서

   죄에서 나를 해방하신 것을."


7. 그러나 뭔가 특별한 느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약성경에서 "느끼다"(feel)라는 동사가 단 한번 발견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전한 설교 가운데 그 단어가 나오는데,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을 은과 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기는 그들의 모습을 꾸짖고, 참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증거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if haply they moght feel after him, '혹 그를 찾고픈 느낌이 들면')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6~28).

   여기서 드디어 "느끼다"라는 단어를 찾았지만, 그것은 복음과 아무 관계가 없으며 이교도들이 어둠 가운데서 "혹 더듬어 찾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당신은 이교도들의 무지한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사시고 참되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뭔가 느끼라는 요청이 아니라 그분의 기록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느낌"(feeling)이란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두 번 발견되며, 구원의 메시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에베소서 4장 19절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일부 믿지 않는 이방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past feeling)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것은 죄 가운데 탐닉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말해줍니다. 그들은 무감각해집니다. 이러저러한 방탕에 걔속해서 빠지므로 더 이상 양심이 그들을 일깨우지 못합니다.

   "느낌"이란 단어가 나오는 또 하나의 본문은 이와 전혀 문맥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에는 이런 복스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the feeling of our infinities)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밖에 신약성경에는 느낌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습니다! 반면에, 믿음, 신뢰, 의지함, 확신 등은 얼마나 자주 나오는지요! 그렇습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위한 단어들입니다. 당신의 느낌을 완전히 무시하고 이제 그분을 믿고 그분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주 예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예수님, 내가 당신을 믿습니다.

   내 마음을 다해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힘없고 곤하고 지친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당신 같은 이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으니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8.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할 일을 하신 것을 알아요.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 편에서 할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사람이 성경 반에 참석해서 성경공부를 마친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놀랍게 구원하셨는지 간증을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로 충만했고 그의 입술은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와 주로 고백했습니다. 간증이 끝나자 율법주의자인 성경공부 인도자가 말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하신 일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구원받기 위해 한 일은 빼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역할을 하시고 우리는 우리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형제님,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형제님을 구원하시기 전에 형제님의 할 일을 했나요?"

   그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습니다.

   "물론 제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죄가 이끄는 대로 빨리 하나님으로부터 달아났습니다. 그것이 저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뒤를 따라와서 결국 저를 붙잡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두 우리 역할을 했으며, 그것은 매우 슬픈 역할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범죄요 하나님이 하신 것은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후 우리는 그분의 은혜가 행한 일을 생각하며 밤낮 이렇게 감사를 올립니다.


   "내 죄를 스스로 씻으라 명하지 않았네.

   나는 어리석고, 연약하고, 무력하여

   도저히 죄를 씻을 수 없네.

   그러나 나는 복스런 진리를 아네.

   죄로 타락한 이 몸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 당하셨네.

   그리스도께서 내 모든 죄를 씻어주셨네."


9.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진짜 믿는 것인지 확신이 없어요.


   믿음이 구주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구주입니다. 그분은 변치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믿음이란 그분을 붙잡는 손에 불과합니다. 당신 자신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 자신은 덜 의지할수록 좋습니다. 주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십시오. 그분은 진실하십니다. 당신의 믿음이 그분께 초점이 맞춰져 있는 한 당신은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에수님, 나는 당신을 의지합니다.

   당신께로 피합니다.

   죄 짐에 눌린 이 몸이

   어디서 안식하리이까?

   당신의 온유하고 겸손한 품에서만

   내 영혼이 쉼을 얻습니다."


10. 하지만 성경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고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데요? 아마 내게는 그런 믿음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요.


   믿음은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받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원하면 모두가 믿음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거절하며, 그런 까닭에 불신앙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제시하시지만 우리편에서 성령의 은혜로운 손길을 거절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 말씀을 듣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까닭에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유대인의 제단에서 죽임 당한

   모든 짐승의 피로는

   범죄한 양심을 평안케 할 수 없고

   죄의 흔적을 지울 수 없네.

   그러나 하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셨으니

   그 모든 짐승보다 더 나은 제물이요

   더 값진 피일세.

   나는 믿음으로

   어린양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내 죄를 자백하며

   참회자로 거기 서 있네.

   나는 저주가 사라졌음을

   믿음으로 보고 즐거워하며

   어린양을 즐거이 송축하며

   구속의 사랑을 노래 부르네." (아이작 왓츠)


11. 내가 과연 그리스도를 영접했는지 확신이 가지 않아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믿음으로 그분을 당신의 주와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열납하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우리 죄를 지우셨으며, 그리스도께서 그죄를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영광 가운데 취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온전히 만족히 여기신 증거로 그리스도를 열납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영혼은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나는 단순히 그 아들에 관해 품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계시니

   하나님과의 화평이 이뤄졌네.

   하나님은 빛이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대적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토록 물러갔네."


12. 내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믿어지긴 해요. 하지만 내가 지은 죄를 잊을 수가 없어요. 밤낮 그 생각에 시달려요. 내가 정말 용서받았다면 과거를 잊을 수 있을 텐데요.


   오, 번민하는 영혼이여, 당신이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면 할 수록, 당신의 죄를 더욱 깊이 뉘우치고 그 죄로 인해 자신을 더욱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죄를 잊으셨다는 그 복스런 사실로 인해 위로 받으십시오.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각이 당신을 괴롭히고 어지럽힐 때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잊으셨다는 사실을 의지하고 다시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고 평안을 누리십시오.


   "두려운 죄의 형벌이 영원히 치러졌네.

   예수께 영광 돌리세.

   그분의 이름을 송축하세.

   구주께서 죽으셨을 때

   형벌의 일부가 아닌

   모든 형벌이 치러졌네."


13. 나는 종종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을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그 결단을 끝까지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뒤로 물러나곤 해요.


   마일 결단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면 두려워할 만합니다  사실 당신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순간 당신은 다시 태어납니다. 그 때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에 거하여 새 생명의 능력이 되기 위해 들어오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능히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하십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당신 자신을 의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그분의 뜻대로 행하시게 하십시오. 그분께 굴복할 때 그분께서 당신을 승리 가운데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 안에 안전하네.

   그분의 피로 인해 아무 의심 없네.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은

   아무것도 해하지 못하네!"


14. 하지만 내가 끝까지 지켜야만 마침내 구원받지 않을까요?


   내가 성경 이야기를 좀 바꿔도 되겠습니까? 만일 노아의 방주 기사가 이런 식으로 기록되었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는지요? 가령 방주가 완성된 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가정해봅시다.

   "노아야, 이제 커다란 철심 여덟 개를 구해서 방주 옆에 박으라."

   "이제 너와 온 가족은 그 철심에 매달려 있으라."

   그래서 노아와 그 아내와 세 아들과 세 자부가 각각 철심에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왔습니다. 방주가 물 위에 뜨면서 그들은 철심에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팔이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홍수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매달려 있으면 구원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 과연 안전하게 홍수를 지날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성경 이야기는 얼마나 다른지요!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이 얼마나 철심에 매달리는 것과 다른지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그 방주가 폭우를 지나는 동안 안전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능한 손길 안에서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자기 노력을 그만두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십시오. 방주를 의지하고 하나님의 큰 구원을 즐거워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붙잡고 계시지, 당신이 그분을 붙잡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히 13:5).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10).

   당신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셔서 당신을 지키시며,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바라보십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 안에서 열납되게 하셨습니다.(엡 1:6),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라고 되어 있음-역주). 이보다 더 확실할 수가 있을까요?


   "그분의 선하심이 시작한 일을

   그분의 능력의 팔이 완성하리

   그분의 약속은 예요 아멘이니

   결코 빼앗기지 않으리."


15.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힘써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냥 믿기만 하는 것은 너무 쉬운 길로 보여요.


   우리 주님의 말씀은 물론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진지한 태도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느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생각도 목적도 없이 방황하며, 생명으로 가는 문을 그냥 지나쳐버리며, 오직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는 데만 열중합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영적인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된 일을 가장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위험을 자각하고, 무거운 죄짐을 통감하고, 옛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리고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생명, 생명, 영원한 생명!"이라고 소리치며 멸망의 성을 도망쳐 나오는 천로역정의 순례자와 같습니다. 당신도 역시, 아무것도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그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 일을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모든 자기 노력을 중단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그 일을 하실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주 예수님의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이 가련하고 죄악된 모습 그대로 그분께 나오라고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모든 죄에서 당신을 깨끗케 하사 천국의 영광에 합당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절대로 이 약속을 저버리지 마십시오.모든 장애물을 물리치고 지금 구주께 마음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구원 얻을 만한 말씀을 주시네.

   하나님이 뭔가 이뤄진 일,

   곧 사랑하는 아들께서 갈보리에서 이루신 일을 가리키시네.

   내 행위는 들어갈 공간이 없네.

   행위가 더해진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니네."


16.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분이 나를 구원하실 준비가 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지금입니다. 그분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고후 6:2). 다른 때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읽고 있는 바로 그 순간이 그분께는 당신을 구원할 더 없이 좋은 시간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그 순간보다 더 그분께 나아가기에 합당한 시간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 하루 시간을 연장할 때마다 당신은 당신의 죄의 목록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시간 시간 그분을 계속해서 거절할 때마다 당신은 그분의 복스런 아들을 영접하기를 거절하는 죄를 키우고 있습니다. 순간 순간 그분을 멀리할 때마다 그분의 사랑을 거절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그 분 앞에 무릎끓고, 자신의 곤고함을 자백함으로써 그러한 죄의 목록에 종지부를 찍고,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을 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나는 용서를 기다리고 있었네.

   구원받기를 바라고 있었네.

   마음은 비록 단단했으나

   위경에서 건짐 받기를

   기다리고 바라고 있었네.

   마침내 하나님의 진리가 내 속을 비취었네.

   나는 죄인이라 고백했네.

   그분의 은혜는 정말 풍성했네.

   예수께서 내게 온전한 안식을 주셨네."


17. 정말 예수님께 나아가고 싶지만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복음의 단순한 초청 앞에 주저주저한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셨을 때와 똑같이 지금도 살아 게시며, 사랑이 풍성하시며, 하나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그분이 친히 우리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왜 주저하고 멀리 서 계십니까? 그분께 나아가는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기도로 당신의 마음을 그분께 이뢰십시오. 당신이 바로 그분께서 위해서 죽으신 그 죄인이라고 말씀드리십시오. 이제 "오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는 그 분의 은혜로운 초청을 받아들이겠노라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받아주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분께서 그리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당신은 찬송시 작가인 샤롯트 엘리옷트에 대한 일화를 아마 들으셨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영혼 문제로 고민했으나 막상 누군가 도와준다고 하면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를 만나러 온 한 프랑스 목사가 "예수님께 나아갔습니까?" 하고, 직접 묻자 그녀는 "나아가고 싶지만 어떻게 나아가는지 몰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프랑스 목사가 간단히 답해주었습니다. "그냥 그모습 그대로 나아가세요." 그녀는 울면서 방에 들어갔다가 후에 구원받은 영혼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그때 그 경험을 아래 인용된 유명한 시로 표현했습니다. 이 시를 당신 것으로 삼지 않으시겟습니까?


   '변명치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 하시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분이

   그분에게 나오라 부르시네.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내가 나옵니다, 내가 나옵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 하시네.

   그 사랑이 모든 막힌 담을 헐었네.

   이제 나는 그분의 것, 오직 그분의 것이 되었네.

   하나님의 어린양이여!

   내가 나옵니다, 내가 나옵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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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희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돈으로 천국을 사려는 신자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누가복음 16:14).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몽땅 바리새인이 되었다고 하면 지나칠까? 지나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실하게 살고자하는 목자들이나 신자들도 있으니까. 그러나 왠지 그런 경우는 가뭄에 콩 나듯 드물고 모두가 바리새인이 되어 버린 것 같은 생각에 아픈 가슴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가 돈 없이 팔렸으니 값없이 속량되리라"(이사야 52:3) 하였거늘,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한국 기독교에는 돈으로 천국을 사는 일이 벌어졌다. 물론 그들도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으며, 값없이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가르친들 무엇 하랴. 현실은 돈 없으면 예수를 믿을 수 없는 세상인데...

   좀 심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을 머리요, 주인의 자리에 앉혀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몰아내고 돈을 그 자리에 앉혀 놓고 있는 현실이다. 돈에 의해서 교회의 직책이 정해지고 직분과 질서가 정해진다면 기가 막히지 않는가?

   세상의 타락을 배금주의라 하여 돈에게 절하는 풍토를 말하지 않는가? 작금의 기독교 상황은 돈이 교회 주인이요, 돈이 하나님이요, 돈이 천국 가는 차표가 된다.

   어떤 구도자는 교회에 나갔다가 놀라서 그만 두었다고 고백하였다. 왜냐고 물으니 그 대답이 슬프다. 모름지기 하나님 말씀을 듣고 예수 믿어보고자 참석하였는데, 상당 시간 헌금에 관한 광고를 하더니 또 한 사람 한 사람 헌금자의 이름을 발표하는데 나중에는 시간에 쫓겨서 정작 말씀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 기막힌 모습을 보고 그는 말했다. 자기는 불우이웃을 도울 때도 이름을 숨기고 도왔다는 것이다. 이 구도자는 교회를 이상한 단체로 보고 있었다.

   세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든 부정한 죄악에는 돈이 개입되어 있다. 돈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인격이 썩고, 양심이 썩고, 행동이 썩어간다. 돈으로 사람을 팔고 사고, 돈 앞에서 자존심도 던져버리고, 심지어 아내나 자식들까지도 팔아넘기는 무서운 세상이다. 인간 세상의 모든 계급이 돈에 의해서 결정되고, 인간 사회의 모든 체계가 돈으로 결정되지 아니한가. 공산주의는 돈을 공동관리 하자는 것이요, 자본주의는 개인관리 하자는 것 아닌가.

   국제질서도 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아니한가. 미국의 힘은 돈에 있다. 큰 경제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지 않는가. 일본은 인도보다 작은 나라지만 돈이 있으니 큰 소리 치고 있지 아니한가. 돈으로 모든 질서가 결정되는 세상, 돈에 의해서 우방이 원수가 되기도 하고, 원수가 우방으로 바뀌기도 한다. 세상의 구조는 돈으로 말미암아 엮어져 있다.

   돈은 사람을 추하게도 만들고 귀하게도 만들며, 강하게도 하고 약하게도 한다.

   돈이 교회를 정복했다. 돈이 교회를 농락했다. 돈에 의해서 교회가 무너졌다.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상관없이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실이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신실한 신자가 평가받는 교회가 되어야 할 터인데, 헌금 실적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평가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이것은 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지도자들의 인격적인 문제도 있다.

   필자는 수십 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한번도 기명헌금을 강요한 적이 없다. 언제나 한결같이 무기명으로 헌금하게 하였다. 예배당 건축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큰 돈이 필요해도, 순수한 무기명 헌금으로 빚 없이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드렸다.

   성경에는 물질과 연관되어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거나 심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여호수아 7장 1절 이하에 보면 아간이라는 사람이 몰래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다가 심판 받는 장면이 있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두려움이 없이 훔쳤다가 무서운 심판의 형벌을 받았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게하시라는 사람이 물질 욕심이 나서 자기의 주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의 저주를 받게 된 일이 기록되어 있다.

   물질은 참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신약에서도 가룟 유다가 은 삼십 냥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사실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건이 아닌가?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또 다른 가룟 유다들로 채워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돈으로 진리를 팔고 사며, 양심을 팔고 사며, 인생을 팔고 사는데 결국은 영혼을 팔아먹는 타락한 오늘의 한국의 기독교여! 정신을 차려야 한다. 회개하여야 한다.

   가룟 유다의 경우는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돈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의 그 주옥같은 설교를 직접 듣되 3년 동안을 듣고도 결국은 지옥에 갔으니, 돈이 얼마나 무서운 사단의 무기인지, 끔찍하고도 끔찍하다. 이 돈이 한국의 기독교를 잡아먹고 있는 것이다. 가룟 유다는 돈에 의해서 귀가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모두가 막혀 지옥에 들어갈 때까지 깨닫지 못하다가 지금 지옥에서 깨닫고 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기독교인들이여! 부정하게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몇 푼 바치면 하나님이 갸륵하게 여기어 죄를 용서해 줄 것 같은가? 세상의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천국을 사려는 간사하고 악한 무리들이 예배당 안을 채우고 있으니 슬픈 현실이 아닌가.

   가룟 유다는 예수께서 그 많은 기적을 행하실 때 현장에서 보지 않았던가? 물위를 걷는 기적,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 등 수많은 기적들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인간의 지혜로, 힘으로 불가능한 역사, 상식을 초월한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보고도 주님을 믿지 못했다. 돈에 눈이 멀면 이렇게 되는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가 돈으로 말미암아 마비상태가 되었는데, 얼마나 비참하고 불쌍한 모습인가!

   집사, 권사, 장로 취임하는데 일정한 돈을 내어야만 하고, 모든 행사나 절기에 특별헌금을 해야 하며, 모든 명목으로 만든 헌금들을 해야 한다. 그것도 모자라서 약정헌금을 내야하며, 월정헌금, 주정헌금을 내야하며, 그 외에도 공사석에서 필요에 따라 돈을 써야만 한다. 현실이 이러하니 자연적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 행세할 수가 없고 멀어지다가 떨어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가 있다. 그는 오래 전에 헌금을 약정했는데, 사업이 망하여 낼 수가 없게 되었다. 집도 처분하고, 변두리에 초라한 집을 빌려 사는데 거기까지 약정헌금을 받으러 찾아오는 것도 보았다. 세금 징수하듯이... .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교회가 돈을 많이 거두어 엄청난 규모의 예배당을 짓고 기업적으로 움직여 몇몇 사람의 배나 채우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약간의 생색내기 봉사를 한다면 이게 될 말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종들을 잘 살펴보면 물질에 대해서 청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다. 그는 소돔성의 인민과 재산을 연합군의 포로된 가운데에서 되찾아왔을 때 사람 외에 모든 재산을 가지라는 제의를 거절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는 치부하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하신 역사를 돈과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영적인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에 돈이 개입되면, 하나님의 하신 일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어리석음의 행동임을 알았던 것이다. 어찌 성령의 역사를 돈으로 계산하랴(창세기 14장 참조).

   엘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을 고쳐주었다. 나아만이 사례의 뜻으로 엄청난 양의 물질을 주었지만 거절했다.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영적인 사람이었다(열왕기하 5장 참조).

   신약성경에도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던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사도행전 8:14~24).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함으로 성령 세례받은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자기도 안수하는 사람이 세례를 받도록 해달라고 요청하다가 사도들에게 무섭게 책망받은 장면이 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사도행전 8:20).

   사랑하는 독자여! 돈으로 직분을 사고, 돈으로 교회 안에서 일정한 위치를 확보하고, 돈으로... , "돈! 돈! 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들을 농락하다가 돈과 함께 망하여 지옥에 가면 어찌 하시려는가?

   회개하라. 오늘의 기독교 상황은 회개하지 아니하면 돈과 함께 망하게 되어 있다. 진정으로 회개하여 은혜로 주신 선물을 받으라.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에베소서 2:8)고 하셨다. 구원은 조건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던져질 불쌍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집사님은 "믿는 자들에 한하여 용서하지 않았는가" 하는데, 성경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일방적으로 이미 용서하셨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을 모르는 죄인들까지도... .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 참조).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이미 다 용서되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천국 가고,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로마서 3장 23,24절에서도 반복하여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값없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예수님 당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현실은 부한 자들, 넉넉한 자들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가? 도대체 무슨 일인가?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다 병이 나았다.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는 말씀을 순종하러 가다가 나았는데, 그 중 한 명만 돌아와서 예수님께 사례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다. 아무것도 드릴 것 없는 이 불쌍한 문둥병자, 그가 주님 앞에 단순히 회개하고, 사례함으로 구원받았다. 그의 행위는 전혀 참작되지 아니하고, 선물로만 구원받았다. 물질은 더욱 아무것도 없는 불쌍한 이 사람 문둥병자가 선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가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하여 모든 죄를 다 용서받음으로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었으며,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깨달았다면 구원받은 것이다. 멸망의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게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천국을 가는 데는 아무 조건도 물질도 행위도 상관없다.

   이렇게 값없이 구원받은 성도가, 지옥에서 건짐 받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지옥에 갈 뻔했던 끔찍한 사실을 생각하며, 고마운 마음으로 성의를 표시하는 헌물, 헌금, 봉사 이것이 진정한 헌금이요, 신앙이다. 제도에 의해서 내는 헌금이 아니고, 주변의 분위기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구원에 의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나를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서 건져내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은혜를 평생 갚아도 다 갚지 못하여 눈물로, 행위로, 물질로 섬기는 섬김,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요, 헌금인 것이다.

   헌금을 내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거나, 사업 망할까 무서워서 드리는 헌금, 복 받기 위해서 조건적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들은 다 가증한 것이다. 우주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신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하여 헌금을 강요하겠는가.

   "깨어라, 정신을 차려라." 사람에게 속지 말라. 우둔한 자들이여! 평생 예수 믿고 목숨 바쳐 죽도록 충성하고 지옥에 가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기 바란다.

   성경은 좁은 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대다수가 쫓아가는 이 넓은 문을 따라가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날 그대들의 눈물과 통곡과 비참한 처지에서의 후회는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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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나아만의 육체 구원과  영혼 구원


   " 나아만이 가로되...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열왕기하 5:17).


   " 나는 예수 믿고 그 지긋지긋한 관절염 고치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구원받았느냐는 필자의 물음에 신앙생활을 10년이나 했다는 어느 집사님의 대답이었다. 집사님의 대답이 하나님 앞에서 왜 잘못되었는지 나아만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교훈을 받기를 원한다.


   나아만 장군이 처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문둥병 때문이었다. 인간의 방법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문둥병을 고치지 못하여 괴로워하고 있다가 계집종이 전해준 선지자의 소식을 듣고 먼 거리를 찾아와 고침받게 되지 아니하였던가! 나아만의 이 과정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우연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비록 적국의 장수였지만 하나님을 믿을만한 양심이 그 속에 있는 것을 보시고, 한 소녀가 포로로 잡히게 하시고 그 소녀를 통해 선지자의 소식을 듣게 하신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죄인들이 죄악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동안 하나님은 자기의 종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하여 자기 일을 진행하고 계신다. 죄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사랑스런 음성을 깨닫지 못하고 멸망의 지옥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하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아만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더 생각해 보자. 하나님께서 나아만을 부르사 병을 고치신 것은 병 자체를 고치시는 것보다 그 역사를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케하사 그분을 섬기며 그분을 통하여만 구원받음을 알게 하는데 목적이 있으셨던 것이다.

   서두에 말씀을 소개한대로 나아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하나님을 발견하고 구원받은 후 돌아갔다. 다시 말하면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친 것은 육체적 구원인데 하나님의 뜻은 이 육체적 구원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목적하셨던 것이다.

   그는 그의 육신의 고침받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는 큰 물질을 아낌없이 선지자에게 바치려 했다 (열왕기하 5:15,16). 선지자가 받기를 거절했을 때 그는 선지자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싶다.

   첫째는 나아만에 대한 계획이 2단계, 즉 육체 구원을 통한 영혼 구원이었으며, 금일의 수많은 구도자들도 이러한 경험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게 되는 과정은 다양할 수 있다. 병고침이나, 기도 응답이나, 능력 경험, 혹은 교육을 통해서 다양하게 하나님의 실존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험 자체가 곧 구원이 될 수는 결코 없는 것이다. 슬픈 사실은 필자가 상담한 많은 경우의 교인들이 이러한 경험을 붙들고서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결단코 아니다. 이 경우는 구원으로 가는 과정이지 구원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체적 구원이나 표적을 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러 오셨다.

   바울도 표적만 찾는 유대인, 지식만 추구하는 헬라인을 책망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22,23).

   독자여, 누가복음 17장 11절 이하를 보라. 열 문둥병자가 다 병고침 받았으나 구원받는 자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었음을 명심하시라. 만약 당신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으로만 구원받은 것으로 여긴다면 당신의 믿음도 검토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놀랄 일은 주님 나라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 중에 천국에 이르지 못할 자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이다 (마태복음 7:13~23). 당신이 지신의 영혼을 진정 사랑한다면 위의 말씀을 찾아 살피고 겸손히 당신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 이 일이 중요한 것은 만약 당신이 버리운 자라면 당신의 그 훌륭한 신앙 경력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서 통곡하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 장면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나아만이 하마터면 병만 고치고 영혼 구원에 이르지 못하였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엘리사가 그 물질을 받았다면 나아만은 자기의 병고침에 대한 값을 치렀다고 당당한 생각을 하며 하나님을 경배하지는 못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엘리사야말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의 모습이다. 엘리사는 영안이 온전히 열려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었던 것이다.

   구원의 문제, 영생의 문제에 돈이나 기타 인간의 생각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선물인 영생이 훼손되는 것이다. 영생은 온전히 선물로만 주어진다. 그 아무것도 우리들의 댓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며 순전한 하나님의 선물인 것이다(에베소서 2:8). 나아만을 감동시킨 이 하나님의 선물이 교회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죄인들을 변화시켜, 주 앞에서 주님을 사랑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이르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영생은, 돈으로나 기타 아무것이나, 심지어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순교하였다 하는 신앙 경력으로도, 그 어떤 댓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거져주시는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구원의 그림자를 구약에 두신 것은 온전한 자비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이 나아만 장군에게 임한 하나님의 역사를 거울 삼아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을 찾는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아만이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버린 것처럼 당신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나아만이 겸손해진 것처럼 당신도 그러해야 될 것이며, 나아만이 하나님을 경배한 자가 된 것처럼 당신도 구원받은 성도로 하나님께 알려졌기를 바란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당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전서 1: 8,9).

   당신은 분명히 영혼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육체 구원만 받았는지 겸손하게 점검해 보시기 바란다.

                                                                                                                        - 전도자 허윤욱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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