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윌리암 맥도날드

                                            19장

                           비전은 이뤄진다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우리는 기꺼이 우리 자신의 계획과 야망을 포기하고 주님 뜻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립니다. 그런데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하는 우리의 기도는 여러 주, 여러 달, 때로는 여러 해 동안 아무 응답 없이 허공을 맴돕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처음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는 우리의 기도가 신속히 응답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성장해가면서 우리는 인내의 학교에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네.

   때로 마음이 약해졌을 때

   그분은 자녀가 원하는 그것을 주시네.

   그러나 종 믿음은 보다 깊은 신뢰를 배워야 하네.

   하나님이 아무 말씀하시지 않을 때

   그분의 침묵을 신뢰해야 하네.

   그 이름이 사랑이신 그분은

   가장 좋은 것을 주길 원하시네.

   별들은 타버리고 높은 산들은 닳아 없어질 수 있어도

   그러나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그분의 약속은 확실하네." (저자 미상)


   그렉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을만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원칙은 분명했지만 세칙은 분명치 않았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또 언제 가야 할까요?


   그가 기도를 시작한지 여덟 달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늘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기도목록에서 그 문제를 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여덟 달이 열여섯 달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확실히 기도를 중단해야 할 때였습니다.


   그렉은 경건의 시간에 소선지서를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하박국 2장을 읽다가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이 묵시(vision)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3절).


   그렉은 하박국이 말하는 묵시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으며,(후에 그는 그 이상이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위한 재림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브리서 10장 37절에서 그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 즉 이상이 '그' 즉 교회를 취해가기 위해 오시는 주 예수님이 된다.) 그장의 문맥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도 가운데 기다렸습니다. 얼마 후에 응답이 왔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잠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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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원, 새로운 출생 (BORN TO WIN)

                                                                                     -윌리암맥도날드


                                                     제2과

                                         본문 : 누가복음 10장 30-37절


                           선한 사마리아인

                      (The Good Samaritan)


   예루살렘과 여리고 사이를 가로지르는 사막 길은 종종 강도들이 출몰하는 지역을 통과해야 하는 아주 위험한 도로였습니다 인적이 드물고, 길가에는 집도 별로 없었으며, 치안경찰이나 군인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두 도시를 왕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도로 이외에 다른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이 사막 길을 따라 여리고를 향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수풀 속으로부터 강도들이 달려 나아와 그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에게 가장 값진 것은 그의 옷이었기 때문에 강도들은 우선 그의 옷을 벗기고, 그가 가지고 있던 소지품들을 모두 빼앗고, 그에게 심한 상처를 입힌 후 그를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며 거의 죽은 상태로 그곳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한 유대인 제사장이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강도들의 습격을 받고 길가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제사장은 그가 자기 회당의 한 회원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제사장은 그를 외면한 채 빠른 걸음으로 먼지를 일으키며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일반적으로 그와 같은 사람을 보면 돕는 것이 제사장의 임무였지만 그는 광야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탈 것을 두려워하여 그 강도 피해자를 외면한 채 그냥 사라져 버렸습니다. 만일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위험부담도 그 만큼 곱절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어느 한 레위 인이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장을 돕는 임무를 맡은 사람입니다. 그 레위인 역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신속한 응급조치가 필요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레위인도 그 곳에서 지체한다면 필시 강도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레위인도 그 강도 피해자를 보고도 급히 지나가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느 한 사마리아인이 나귀를 이끌고 그곳에 이르렀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뿌리는 같으나 사마리아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족이라 하여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지고 멸시했습니다. 따라서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에는 피차 대화조차 꺼리는 사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마리아인은 곤경에 빠진 사람이 유대인인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한 동정심을 품고 그 곁으로 다가가서 그를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적 편견도, 자신의 안전문제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꿇고, 그 사람의 상처를 닦아 주고, 그 위에 약(기름과 포도주)을 바르고, 상처를 붕대로 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나귀 위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인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밤새도록 정성껏 그를 간호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여행길을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기를 자신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 강도 만난 사람을 간호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만일 치료하는데 경비가 더 든다면 자신이 다시 돌아오는 날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 사마리아인의 이와 같은 훌륭한 행동에 대해서 당신의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특별히 인종적인 편견을 넘어서 유대인에게 보여준 그 사마리아인의 순수하고 아낌없는 그 큰 사랑에 대해서 경탄을 금하지 못하리라 믿습니다.


   비유를 통해 주는 놀라운 교훈 (Get The Big Picture)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그는 언제나 어떤 분명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가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찾아와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랍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가 이러한 질문을 한 목적은 예수님에게 어떤 교훈을 배우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이미 다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한가지 질문을 하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너는 거기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율법이라면 이미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 율법사는 의기양양하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대답이 옳다" 고 하실 때, 그 율법사는 그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대며 자신의 율법지식에 대해서 만족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예수께서는 다시금 그에게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그 율법사는 율법 지식에 대해서 그 누구보다도 자랑할 수 있었지만 "그 율법대로 행하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영 그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은 대화의 함정에서 벗어나 보려고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그를 올바로 깨우쳐 주기 위해 예수께서 교훈해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은 인종이나, 신조나, 피부색깔이나 그 어떤 것도 상관없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한편, 예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은 절망적 상태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사랑과 자비를 주셨는지 우리들에게 나타내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금 본 비유의 말씀으로 돌아가 그 속에 감추어진 구원의 놀라운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란 "평화의 도성"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요단강 물이 흘러 들어오는 사해 바다 인근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평화의 도시로부터 죽음의 땅을 향하여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잠언 14:12)고 성경은 우리들에게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 사람은 이 길을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등을 돌려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내려 가는 길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범죄 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 (잠언 14:12)고 하였습니다. 죄는 단단하게 고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셋째, 강도들은 이 가련한 사람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습니다. 이 사람은 인간의 순결함과, 기쁨, 자유 그리고 그 생애의 가치 있는 모든 것을 강탈당하였습니다. 범죄 한 후의 우리에게 오는 결과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강도들은 또한 그에게 상처를 입혔고, 그를 반죽음의 상태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죄가 인간의 삶에 슬픔, 고난, 죄책감, 상처, 그리고 후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율법과 종교의 무력함(You Can't Cop a Plea)


   제사장과 레위는 강도만난 자를 보고서도 도움을 주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버렸습니다. 이는 몇 가지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을 구원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 (시편 60:1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 목사, 제사장, 랍비등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영혼을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요 14:6, 행 4:12).

   셋째,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의 대표적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의해 직임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특히 십계명은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계명들을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목적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은 그것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그의 얼굴의 더러움을 보여주지만, 그 더러움을 씻어줄 힘은 없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 몇 가지 유사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참고로 말씀드릴 것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를 가리켜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이라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요한 8:48).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께서는 절망 중에 빠져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하늘나라로부터 먼 길을 떠나 잃어버린 죄인들을 찾아 구원하시려 죄악의 소굴인 이 세상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예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마리아인이 곤경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 준 사실은 진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배척을 빋으시면서도, 경건하지 않은 이 세상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며, 속죄의 피를 흘려주신, 그 희생과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8:9)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영적으로 부요케 해 주셨습니다.


   희생을 무릎 쓰고 우리를 구원한 사람 (The Man Who Didn't Duck Out)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위험을 무릎 쓰고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돕기 위해 그의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실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 사는 것이라" (갈 2:20)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 가에 쓰러져 있는 피해자의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은 이보다 훨씬 더 놀랍습니다. 그는 심령이 상한 자를 치료해 주시며, 영적으로 소경된 자에게 빛을 주셨습니다 (눅 4:18).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의 상처 위에 부은 기름은 하나님께서 그가 구원하신 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이 부상당한 자의 상처에 부어준 포도주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로 인해 상처받았던 사람에게 기름(성령)과 포도주(기쁨)를 부어 주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의 새로운 친구를 길가에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를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원받은 자들을 다른 믿는 지체들 가운데로, 특별히 지역교회의 따뜻한 교제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받은 후, 홀로 떨어져 있으면 위험한 죄의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깨끗한 생활과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여관을 떠나기 전, 그가 자신의 여행을 마치고 다시 돌아 올 때까지 그의 새 친구를 돌봐주며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줄 것을 여관 주인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그리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말씀 곧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의 교회를 주시고, 가르침과 성도들과의 교제와 기도 시간과 주의 만찬을 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날마다 힘을 주시고, 그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 또한 다시 오셔서 우리를 친히 그의 나라로 데려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는 소망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로 말미암아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위해 이루어주신 그의 모든 구속 사역들을 아주 실감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이야기는 세 종류의 현대인의 인생관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무엇이든 네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빼앗고 말 것이다" 이는 강도의 인생관입니다.

   둘째, "무엇이든 내 것은 내 것이고, 나는 그것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제사장과 레위인의 인생관입니다.

   셋째, "무엇이든 내 것은 당신 것이고, 나는 그것을 당신과 함께 나누기를 원 한다" 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인생관입니다.

   당신은 어떤 인생관을 따르고 싶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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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천하를 얻고도


                        선생이냐? 주님이냐?


   어떤 분들은 성경을 오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성경 말씀대로 다 살수 있나요?" 라고 말하는 것을 흔히 봅니다. 그들은 성경을 무슨 도덕책이나 윤리 강령으로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분들은 알고 보면 대부분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잘 읽어보지도 않고 그냥 대충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는 분이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사실 성경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인 것을 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은 결코 그런말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그리고 성경을 여러번 읽어본 자로서 분명히 말씀 드립니다. 성경은 도덕이나 윤리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경전과 다른 점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도덕과 윤리를 지키지 못하여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일을 알려주는 책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경전이 있고 또 인류의 등대가 되는 수많은 스승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쳤으며 본이 되었습니다. 자비를 가르친 석가나 인의를 가르친 공자는 어둠을 깨친 인류의 스승이요 선각자들입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으로 인해 인류는 그만큼 밝았고 또 문명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스승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범주에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시켜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스승인가를, 그분은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나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젊은이였습니다.

   그분이 무슨 가르침을 주었다고 인류의 스승입니까? 그분은 세상에 사시면서 단 한권의 책도 친히 쓰신 것이 없었습니다. 또 무엇을 하라고 가르치신 것 보다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에 대해서 더욱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자기 자신을 '인자(人子)' 라고 표현하셨는데 그분은 말하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28) 고 하셨습니다.

   대속물이라함은 "대신 죽어주는 희생의 제물" 이라는 뜻입니다.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눅 9:22)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마 26:2)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8)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 10:1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롬 4:25)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 5:6)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갈 1:4)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3)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딤전 2:6)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벧전 3:1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히 9:28)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왜 오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대신 죽어주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기 위한 스승이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기 위한 희생 제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을 모르는 채 무엇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스승이라 생각하여 교훈을 받고자 하는데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훈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죄를 대신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여러 인류의 스승에 대해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그분을 믿고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이는 스승으로 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장 1~11절에 보면 물고기를 잡던 베드로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예수님을 "선생님" (5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깨달은 뒤에는 "주님"(8절)으로 부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은30에 팔아넘긴 가롯유다는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로 헤어질때까지 단 한번도 "주님" 이라 불러 본 적이 없고 항상 "랍비" (선생)라고 호칭했습니다.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마 26:25)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9)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의 "선생" 입니까? "주님" 입니까?

                                                                                                                        -김우종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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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고보서


   머리말


   이 서신의 주제는 "믿음의 시련" 입니다. 이 짧은 다섯 장에서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믿음이 진품인지 아니면 값싼 모조품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D. A. 헤이스(Hayes)는 "이 서신은 우리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알 수 있는 말로 말해주고 있다. 이 짧은 문장들은 마치 표적을 향해 곧장 날아가는 화살과 같아서 우리는 그 말씀에서 충격과 감동을 느낀다. 그 말씀 뒤에는 어떤 힘이 있으며, 그 말씀 속에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 그 말씀이 생동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실체가 있다" 고 말했습니다.

   이 서신은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위대한 근본적인 교리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성육신이나 부활 등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의 이름도 단 두 번만 나올 뿐입니다(1:1과 2:1).

   그러나 그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기록자가 가진 목적은 우리에게 교리를 가르치거나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말씀이 우리의 삶에 구현되어야 하는 것인지, 어떻게 우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야 하는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자들이 이 공부를 즐거워할 것이며 성령님께서는 주님께서 이것을 기록하실 때 가지신 목적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제 1 과


시련과 시험(야고보서 1:1-17)


서론


   야고보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주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비교에 의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마태복음과의 병행구절                                 주제

   1:2, 12; 5:10                                      5:10-12                                                     고난

   1:5; 4:3; 5:13-18                                6:6-13; 7:7-12                                             기도

   1:8; 4:8                                            6:22, 23                                                   바른 눈

   1:10, 11; 2:6,7                                   6:19-21, 24-34                                             부

   1:19, 20; 4:1                                     5:22                                                           진노

   1:25; 2:1, 12,13                                 5:17-44                                                      율법

   1:26,27                                            6:1-18                                                  말뿐인 고백

   2:8                                                 7:12                                                       최고의 법

   2:13                                                5:7                                                            자비

   2:14-26                                           7:15-27                                                  믿음과 행함

   2:11,12                                           7:16-20                                                   뿌리와 열매

   3:13                                               7:24                                                           참 지혜

   3:17,18                                           5:9                                                      화평케 하는 자

   4:11,12                                           7:1-5                                                     남을 판단함

   5:2                                                 6:19                                                        녹슨 재물

   5;12                                             5:33-37                                                          맹세


   이 서신은 율법에 대해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온전한 율법"(1:25), "최고한 율법"(2:8), "자유의 율법"(2;12) 등입니다. 야고보는 율법을 이서신을 읽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것 또는 생활규범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의 위치를 은혜 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의로운 교훈으로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잠언과 매우 비슷한데, 문체에 있어서도 잠언처럼 꾸밈이 없고, 생동감 있고, 사실적이어서 요약하기에 어려우며, 지혜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또 한가지 중요한 단어는 "형제"로 이 서신에 15번 나오고 있는데, 이것으로 우리는 야고보서가 구원받지 않은 자들에게도 해당되지만, 주로 신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 점에서 야고보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권위적인 책입니다. 즉 야고보가 다른 기록자들보다 지시사항을 더 많이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108구절의 짧은 내용 속에 54번의 명령어가 나옵니다.


문안(1:1)


   야고보서의 기록자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야고보는 누구입니까? 신약성경에는 여러 야고보가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 누가 이 야고보서를 기록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생각하지만(마 13:55; 막 6:3), 분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이 서신의 영감에 영향을 미치거나 우리가 여기에서 얻는 유익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서신의 기록자가 우리가 추측하는 것처럼 주님의 동생이라면 그의 삶에 아주 놀라운 변화가 온 것입니다. 일찍이 그는 주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요 7:5) 그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하는 일밥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막 3:21).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위대한 원리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뿌려졌던 씨가 야고보의 삶 속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회의론자가 종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종으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여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동등한 위치에 올바르게 놓았습니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존중한 만큼 그 아드님도 존중하였습니다(요 5:23). 야고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마 6:24)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님의 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같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유대인으로 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본토에서 쫓겨나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 흩어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흩어짐은 BC. 721년에 10지파가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간 것과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나머지 지파가 포로로 끌려간 것이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들 중 얼마가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 돌아오게 되었으나, 남은 자 뿐이었습니다. 오순절날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 당시 잘 알려진 각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행 2:5). 아마도 이들을 흩어진 유대인들이라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인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8:1에서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대부분 유대 혈통) 사울의 핍박으로 인해 유대와 사마리아 전역으로 흩어지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흩어짐이 다시 한번 일어나게 되는 데 신자들이 뵈니게(페니키아)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으로 쫓겨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난의 시기에 흩어졌던 사람은 누구든지 야고보서의 수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들은 이 세상의 나그네요 순례자이기 때문에(빌 3:20; 벧전 2:11), 우리는 이 서신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기록된 것이 아닐지라도 우리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한가지 더 어려운 문제가 있는 데 그것은 야고보서가 비 그리스도인 유대인에게 쓰여진 것이냐는 것으로, 그리스도께 회심한 유대인에게냐 아니면 믿는 유대인과 믿지 않는 유대인 모두에게냐 하는 것입니다. 기록자는 우선적으로 참으로 거듭난 신자들에게 쓴 것으로 보이지만(1:18), 고백적인 그리스도인이나 아직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쓴 것으로 보여지는 때도 몇 번 있습니다.


시련과 시험(1:2-17)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유혹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그 단어를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2-12절의 시험은 경건한 시련 또는 하나님께로서 온 문제들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시험하므로 그리스도를 닮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13절과 17절의 주제는 경건치 않은 시험으로, 죄로부터 나와서 죄로 이끄는 것입니다.


   1. 경건한 시련(1:2-12)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불청객이며 바라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문제들은 어떤 때는 홀로 찾아올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떼를 지어 몰려들 때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너희가 만일 시험에 빠지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그 시험들로부터 달아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시험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시험이나 시련을 만났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도전심과 자고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대항할 수 있습니다(히 12:4). 또 한편으로 우리는 그 위세에 눌려 낙심하여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히 12:5). 우리는 때로 "무슨 소용이 있어? 될 대로 되는 거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숙명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일과도 관계가 되어 우리의 고난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토로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고린도전서 10:10에서 우리에게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집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동정을 얻으려하는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삶의 어려움과 난관 때문에 번민할 수도 있습니다(히 12:11).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러한 시련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내게 어떤 목적을 가지셨는데 나는 그 목적을 모르지만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가 지지하는 것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대항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를 파괴하려는 대적들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도록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 모두가 다 그리스도를 닮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고난과 역경 그리고 난관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맑은 날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오는 날과 먹구름 낀 날도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련은 기쁘게 여겨지지 않고 매우 어렵고 당황스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가 맺어지는 것입니다(히 12:11).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매우 어려운 때를 지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 경험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라고 말하는 것을 듣는지요!

   야고보는 "믿음의 시련" 이라고 말했습니다(3절). 야고보는 믿음을 마치 금 제련사가(하나님) 순전한 것으로 여길 때까지 제련하는 금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금은 핍박의 불, 병의 불, 고난과 슬픔의 불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야고보는 "인내" 로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인내에 대한 가장 나은 말은 변함없는 또는 불굴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시험받을 때에 우리는 다가오는 문제들을 잠잠히 맞기위해 강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한 겨울에 바람을 맞는 것과 같은 과정일 것입니다. 겨울 한파는 뿌리가 더욱 깊이 박히게 해주므로 그 나무는 더욱 강하게 됩니다. 어러움이 없다면 우리는 인내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조차도 어려움은 성품을 강하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잘 알려진 사업가 찰스 커터링(Charles Kettering)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문제들은 진보의 대가이다. 나에게는 문제가 아닌 다른 것들은 가져오지 말라. 좋은 소식은 나를 약하게 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하게 되면 우리는 자포자기하거나 그 시련을 빨리 끝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그 사건 속에 있는 주님의 목적에 대해 주님께 묻지도 않습니다. 마치 의사에게로 달려가서는 고통을 줄이려고 한꺼번에 많은 약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므로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주님의 특별한 목적을 깨닫기 전에 장래에 있을 더욱 긴 시련 속으로 자신을 넣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짧은 인내가 만들어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우리는 성숙되고, 잘 다듬어진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의 은혜에 부족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4절).

   우리는 시련을 통과하는 동안에 낙심하거나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보다 더 큰 문제는 없습니다. 어떤 삶의 문제들은 결코 제거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들을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증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연약함을 제거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구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제거해 주시기보다는 그것을 견딜 은혜를 주셨습니다(고후 12:8-10).


   불같은 시험을 지나갈 때 너에게 좁은 길이 놓였어라.

   모든 것에 넘치는 나의 은혜가 네게 공급되리.

   불꽃이 너를 해치 못하게 나 홀로 계획하였어라.

   너의 더러운 것이 제거되니 너의 금은 정금같이 되었어라.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거하지 않으시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소경 찬송작가인 화니 크로스비(Fanny Crosby)는 8세의 소녀 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습니다.


   오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비록 나 볼 수 없을 지라도;

   나는 결심하였네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리라고.

   얼마나 많은 복을 나 누렸던가

            다른 사람들은 누리지 못한.

   나의 소경됨을 인하여 울고 한숨졌지만

            나 이제 할 수도, 하지도 않으려네.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때 평강이 옵니다.

   어떤 삶의 문제들은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게 될 때 사라집니다. 제련사는 그 녹은 금속에 자기의 얼굴이 비취게 되면 곧 불을 꺼버립니다. 우리 대부분은 삶의 압박을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우리가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면 즉시로 우리 자신은 불안에 빠지게 되어 하나님께서 서두르지 않는 것이 고난을 통해 우리를 원만하게 하려는 것임을 잊어버립니다(시 4: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혜로 삶의 문제들을 대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고난의 시기 속에 있는데, 우리에게 영적인 통찰력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우리의 곤란과 자신의 무지에 대해 모두 다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5절).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찾으려고 그렇게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후하게 보답 받을 것이며 또한 그는 하나님께 꾸지람을 받을 것이라는 걱정은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르칠 만하고, 다룰 만하게 될 때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지혜가 부족합니다. 성경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문제들에 대해 세세한 답을 해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문제가 일어나면 이러한 원리를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매일의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심 없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6절).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돌보시며, 그분께는 능치 못한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의심한다면 고난의 시간에 우리는 견고하게 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 분 동안은 하나님의 약속 위에 침착하게 머물 수 있겠지만 그 다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잊어버리셨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아주 높이 올랐다가는 이내 벼랑 끝으로 곤두박질치며, 헤매고 흔들거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낙천주의와 비관주의 사이를 왕래하는 믿음에 의해서는 존귀히 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요동하며 변덕스러운 사람들에게 신성한 통찰력을 주시지 않습니다(7 ,8절).

   다음으로 5-8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도로 구하면 꾸짖지 않고, 나무라지 않고 후히 주시는 지혜를 얻을 수 있는데, 그 가장 중요한 조건은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9-11절을 처음 보면 마치 삽입 구절처럼 전혀 새로운 주제를 소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특별한 예를 들어서 경건한 시련에 대한 주제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모두 삶의 어려움과 고비를 통해 영적인 유익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낮은 형제가 자신의 불만스러운 모습과 낙망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후사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인 것으로 인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9절). 그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고,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속했다는 진리 안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낮은 형제는 아마도 자신의 열악한 환경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형제가 게으르다거나 경솔한 자라고 볼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낮은 임금을 받는 그곳에서 일하는 자신을 합당하게 보시기에 그곳에서 줄곧 일해왔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부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모든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가 괴로워하고 부러워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환경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영적인 복들로 말미암아 기뻐해야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면서 그들의 성, 나이, 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반항하고 있습니다. 야구에 재능이 있는 소녀들은 그들이 남자였기를 바랍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들이 좀더 나이가 들었으면 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좀더 젊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키가 작은 사람들은 키가 큰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키가 큰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는 정말 어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신이 바꿀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 주신 것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복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라고 말해야 합니다(고전 15:10). 이를테면, 우리가 자신의 약점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열중하면 신령한 사람들이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야고보는 부한 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부한 자들이여 너희의 부유함을 자랑하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자들이 자신을 낮춤으로 자랑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레미야 9:23, 24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는 말씀과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부한 자는 사실상 자랑할 수 있는 이유를 그의 물질적인 소유를 잃어버렸을 때에 발견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10,11절). 그가 사업에 실패하게 되면 주님께 나아올 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가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사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하는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하늘에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히 10:34). 세상의 부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 버리는 것입니다(사 40:6, 7). 어떤 사람이 가진 것이 그저 물질적인 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의 모든 계획은 무덤에서 끝날 것입니다. 야고보는 부자의 생명이 빠르게 지나가고 그의 부요함도 쓸데없다는 것에 대한 예로 덧없이 왔다 가는 풀을 예로 들었습니다. 부자는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는 말씀처럼 그가 추구하는 것들 중에 사라질 것입니다. 물론 그 요점은 해나 뜨거운 바람도 영적인 가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들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시련이나 위의 것을 사모하게 하는 시련은 모두 동일한 은혜의 두 가지 모습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낮은 자를 높여주는 것이나(9절) 부한 자를 겸손하게 하는 것(10절)은 동일한 은혜입니다. 그 두 가지 다 자랑할만한 이유입니다.

   경건한 시련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12절). 그러한 것에 "인정하심" 을 받은 사람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입니다. 면류관은 왕의 왕관이 아니라 승리자의 화관으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받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시험을 견딘 것에 대한 상급이 영생이라는 어떠한 암시도 없으며, 인내로 견딘 자들은 그 삶으로 인해 존귀케 되고, 하늘에서 영생에 대한 더 깊은 감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사람의 그릇이 가득차게 될 것이지만 그 가진 그릇의 크기는 서로 다르며, 그것은 하늘나라를 누리는 크기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 이라는 표현이 하늘나라의 영광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것을 나타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경건한 시련에 관한 이 단원의 내용을 우리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한 불행에 대해 괴로워하며 불평합니까? 아니면 그에 대해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합니까? 그러한 시련을 알리고 다닙니까 아니면 잠잠히 견뎌냅니까? 우리의 환경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미래에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임한 모든 것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알려고 하며 현재에 살고 있습니까? 자기 연민에 빠져 동정을 구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삶 속에서 자신을 가라앉힙니까?


   2. 경건치 않은 시험(1:13-17)


   이제 경건치 않은 시험에 대한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13-17절). 경건한 시련이 우리에게서 가장 좋은 것을 이끌어내기 위해 계획된 것처럼 경건치 않은 시험은 우리에게서 악한 것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분명히 알아두어야 하는 한  가지는 우리가 죄를 짓도록 시험받는다면 그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13절). 하나님은 믿음에 관해서는 사람들을 시험하시고 검증하시지만, 어떤 형태일지라도 악을 범하도록 시험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탓하지 않으면 죄를 하나의 병이라고 말하는 현대 심리학의 접근 방식을 수용해 버립니다. 그렇게 함으로 심판을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결코 병이 아니며, 사람이 반드시 셈해야 하는 도덕적인 잘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죄에 대해 물질을 탓합니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체가 죄가 아니며 죄는 거기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사자 굴까지 추적해 갑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4절). 죄는 우리 안에서, 우리의 악하고, 타락하고, 거듭나지 못한 옛 성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5:19).

   실제로 야고보가 14절에서 사용한 욕심이라는 단어는 선한 것이든 혹은 악한 것이든 모든 형태의 갈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단어 자체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는 예외적으로 악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경우가 있는데 이 구절이 바로 그러한 경우입니다. 14절의 욕심은 유혹물들을 늘어놓고 거기에 걸리는 자들을 미혹하는 악한 여자로 비유됩니다. 우리가 갖고있는 비열한 욕심과 더러운 욕구는 우리를 계속해서 죄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속에 있는 욕심과 미혹됨에 이끌려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어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깨끗하고 거룩한 것들을 묵상함으로 우리 마음에서 모든 죄의 생각들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빌 4:8). 아주 강한 유혹이 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잠 18:10)는 말씀을 기억하여 주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죄를 범합니까? 그 대답은 15절에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우리가 더러운 생각들을 내쫓기보다는 오히려 더 생각해 보고, 마음에 품고,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암묵적인 행동은 결혼생활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라고 이름한 끔찍스러운 아이를 낳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될 행동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생각하면 실제적으로 그일을 행하게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는 과정과 죄가 태어나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예가 다윗과 밧세바의 사건입니다(삼하 11:1-27).

   야고보는 계속해서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불모지도, 아이를 못 낳는 것도 아닙니다. 죄는 자기와 똑같은 종자를 만들어냅니다.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아담의 죄는 그 자신과 후손들에게 육체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창 2:17). 또한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사람이 되는 영원하고 영적인 죽음으로 인도합니다(롬 6:23상). 이것은 또한 죄가 신자들의 죽음을 가져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5:6에서 일락을 좋아하는 과부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 과부가 자기의 삶을 허비하며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그리스도인의 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탓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실 자기를 만드신 창조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나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기만의 한 형태일 뿐입니다(16절). 좋은 은사는 하나님에게서 주어집니다(17절). 사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의 근원이십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빛들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7절). 성경에서 아버지라는 말은 때로 창조자를 뜻하기도 합니다(욥 38:28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빛들의 창조자요, 근원이십니다. 그런데 빛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분명히 해, 달, 별들의 천체를 포함하는 것입니다(창 1:14-18; 시 136:7).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영적인 빛의 근원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만유 가운데 있는 모든 형태의 빛의 근원이시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만드신 천체와는 다릅니다. 천체는 항상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마도 야고보는 해와 별들의 빛이 기우는 것을 생각했을 뿐 아니라 지구가 회전함으로 생기는 지구와 별들과의 관계의 변화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은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는 표현은 "회전함으로 생기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라고 번역해도 될 것입니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회전함으로 그림자가 땅위에 드리워지는 것을 생각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일식을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일식이 일어나면 달 그림자가 땅에 드리워집니다. 하나님은 이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하나님처럼 온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을 죄에 빠지도록 시험 하신다는 것은 생각할 가치도 없습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경건치 않은 시험에서 배운 것으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악한 생각이 우리의 마음속에 계속 머물게 하십니까 아니면 속히 쫓아 버립니까? 우리가 죄를 범하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십니까? 죄에 미혹될 때 하나님을 탓하십니까?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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