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2 과

                           결론(6:11-18)


거짓 선생들의 목적(6:11-13)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권위역 성경에는 "내가 친필로 너희에게 얼마나 긴 편지를 썼는지 보라" 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개역성경이 더 나은 번역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긴 편지를 썼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서신은 아주 짧은 서신입니다. 이 서신은 그가 항상 하던 대로 대필자에게 대필하게 한 것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큰 글자들은 율법주의자들을 대적하려는 그의 깊은 감정과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의 잘못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든지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로부터 추측하는대로 그의 시력이 나빴던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후자의 견해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유대주의자들은 많은 무리의 추종자들을 형성함으로 육체의 모양을 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주장함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습관을 바꾸라고 요구받지 않는 한 종종 예식과 의식을 기꺼이 지키고자 합니다. 오늘날에도 낮은 표준으로 많은 교인들을 형성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위선을 보고 그들이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피하려한다고 비난했습니다. 십자가는 육체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노력을 저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육체의 성품과 그 고결한 노력에 대한 죽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는 악으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십자가의 은혜의 메시지를 싫어하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것입니다.

6:13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실제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많은 추종자들을 자랑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으로 회심자를 얻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산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사려고 하는 시도이기 때문에 할례자인(즉, 유대인) 그들 조차도 율법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제임스 보이스).


바울의 목적(6:14-17)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의 자랑의 근거는 사람의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은 바울에 대해 죽었고 바울은 세상에 대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 받으면 세상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며, 그도 세상에 대해 작별을 고하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덧없는 쾌락에 더 이상 관심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며, 그가 완전한 만족이 되시는 분을 발견했기 때문에 세상은 그에 대하여 매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핀들레이는 " 그는 세상을 결코 믿을 수 없으며, 세상을 자랑하지도 않고, 더 이상 세상에 경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세상의 영광에 대해 벗어버렸으며, 그를 다스리고 매력을 주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에 있는 커다란 장애물이며, 구분선입니다.

6;15 (할레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비록 처음 볼 때는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이구절은 이 서신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가장 중요한 선언 중의 하나입니다.

   할례는 외적인 의식, 예식입니다. 유대인 선생들은 모든 것을 이 의식을 준수하는 것에 의존하게 했습니다. 할례는 유대교의 기초입니다. 바울은 "할례나...아무것도 아니로되" 라고 함으로 그것을 일소해 버렸습니다. 예식이나 유대교나 율법주의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다음 바울은 "무할례가" 라고 덧붙였습니다. 의식이 없는 것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모든 교회봉사는 예식에 대해 반대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하나님께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화된 생활을 보기 원하십니다.  핀들레이는 "참된 기독교는 악한 사람들이 선한 사람들로 바뀌는 것이며, 죄의 종이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하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두 창조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들은 타락한 아담을 머리로 한 옛 창조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한 사람들은 죄악되고, 도울 자가 없으며, 저주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구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이나 선한 행위나 선한 성품으로 자신들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는 것은 쓸데없으며,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며, 주님 안에서 죄에서 구속을 받고 새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 새 창조는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에 성품이나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어떠한 사상도 배제합니다. 거룩한 삶은 단지 의식을 지킴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신자들 안에서 주님께서 사실 수 있도록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옛 창조를 개선하거나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6: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사도바울이 여기에서 말하는 규례는 무엇입니까? 새 창조의 규례입니다. 그는 "이것이 새 창조에 속한 것인가?" 라고 질문함으로 가르침들을 판단하며, 그렇지 않은 모든 것을 거절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강과 긍휼의 두가지 복이 있을 것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유대인으로 태어나 메시야이신 주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평강도 긍휼도 없으며, 이 두가지는 새 창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율법의 종 되었던 바울은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속박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는 기꺼이 종되기 원하여 주님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종들에게 그 주인의 낙인을 찍는 것과 같이 바울은 그의 몸에 주 예수님이 주인되신 흔적들을 가졌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대인 핍박자들에게서 받은 상처입니다. 이제 그는 "누구도 나를 되사려고 하지말라. 나에게 율법에게 매였음을 나타내는 할례의 낙인에 대해 말하지 말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새로운 주인의 낙인을 가졌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은혜의 축복 기도


6: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이제 바울은 그의 펜을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가지 덧붙이는 말로 끝내야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은혜-그의 복음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은혜는 율법이 아닙니다. 그는 이 주제로 시작하였고(1:3) 이 주제로 마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 지어다"


율법과 그리스도인의 관계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며(출 20:2),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지지 않았으나(롬 2:14), 그들의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갖고 있습니다(롬 2:14,15). 각자는 이러한 근거에 의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롬 2:12). 하나님께서 인류의 표본으로 사용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인류의 실패를 증명하였습니다(롬 3:19).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합니다(롬 7:7, 12, 14, 16; 딤전 1:8). 그러나 율법은 행위라고 하는 나쁜 원재료로 되어있습니다(롬 7:7-9). 율법은 육체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할 수 없습니다(히 7:19).

   율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며 그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마 19:16-22; 눅 10:25; 롬 4:15; 5:20; 롬 7:7; 고전 15:56; 갈 3:19; 딤전 1:8,9). 율법을 이러한 목적으로 사용하면 선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곳에서는 죄가 죄되게(범법자로 만들지) 하지 못합니다(롬 5:13).

   율법을 듣는 것에는 아무 미덕도 없으며, 율법은 그것을 순종 할 것을 요구합니다(롬 2:13).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사형입니다(갈 3:10). 저주 아래 있지 않고는 율법아래 있는 것은 불가능합니다(갈 3:10; 5:3; 약 2:10; 11). 율법의 한가지를 범하면 모두를 범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말하면서도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을 주지않습니다. 율법은 사람 안에 잠자고 있는 욕망과 욕구를 깨우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롬 7:9, 10).

   율법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그 자손이 올 때까지 더하여진 것입니다(갈 3:19).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몽학선생입니다(갈 3:24).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마 5:17).

   주님은 주님의 생명으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셨으며 주님의 죽음으로 율법의 두려운 형벌을 치루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이루기까지 없어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5:18). 그러므로 신자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율법을 이룬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자가 없습니다(행 13:39; 롬 3:20; 갈 2:16, 21; 3:11).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날 이후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것도 요구하시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갈 3:2).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속하셨습니다(갈 3:13; 4:4,5).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7:4, 6; 갈 2:19). 이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3:25).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습니다(갈 5:18). 율법은 신자들에 대해서는 없어진 것입니다(고후 3:7-11).

   성령님을 좇아 행하는 자에게는 율법의 의가 이루어집니다(롬 8:4).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아래 있지만(롬 6:14, 15) 무법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법 아래있는 자가 되었습니다(고전 9:21).

   복음은 율법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세우는 것입니다(롬 3:31). 율법이 요구하는 형벌은 주 예수님에 의해 치루어졌습니다. "엄격한 의는 더 이상 요구할 것이 없지만 긍휼은 자기의 곳간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율법 자체는 죽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결코 폐해지지 않습니다.

   십계명 중 아홉가지가 신약에서 반복되었지만,형벌이 따르는 율법으로 반복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한 의의 교훈으로 된 것입니다.


       계명                                                                          신약성경의 참조구절

1.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있게 말지니라                                  마 4:10; 고전 6:9, 10; 10:7, 14; 요일 5:20,21

2.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등                              행 17:29; 롬 1:23; 고전 10:7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마 5:33-37; 약 5:12

4.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엡 6:2; 골 3:20

5. 살인하지 말지니라                                                               마 5:21, 22; 요일 3:15

6. 간음하지 말지니라                                                               마 5:27, 28; 살전 4:3-5

7.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고전 6:9, 10; 엡 4:28

8.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마 5:43-48; 엡 4:25

9.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롬 7:7


   한가지 계명이 반복되지 않았는데 그 한가지는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안식일을 지키라고 가르침을 받지 않았습니다(가령 우리가 말씀 안에 일주일 중 하루라는 원리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지라도).

   신자들의 생활 규범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이십니다(요일 2:6). 주님은 우리의 표준이시며, 우리의모범이시며, 우리의 본이십니다(요 13:15; 15:12; 엡 5:1, 2, 8, 15, 16; 요일 3:16).

   은혜와 율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갈 4:30). 믿음과 율법은 반대의 원리입니다(갈 3:12).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지 않습니다(갈 3:21).


안식일에 대한 부록


   1.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십계명 중 하나이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에 대하여 "없어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한 것입니다(고후 3:7-11). 어떤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이 구절이 의식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입니다. 7절에서 그 율법이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도덕적인 율법, 바꾸어 말하면 십계명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다음에 11절에서 우리는 이 죽게하는 직분이 비록 영광이 있는 것이지만 "없어진" 것임을 읽게 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다른 아홉가지 계명들은 신약성경에서 반복되었지만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은혜아래 있는 자들을 위한 교훈으로써 된 것입니다.


   2. 어떠한 이방인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유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출 31:13). 비록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 안식일을 지키도록 어느 누구에게도 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시내산에서 명하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3. 어떤 주장과 같이, 어떤 교황의 신조에 의해 안식일이 주일로 바뀌었다는 것을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날을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특별한 이유에 의해 따로 정했습니다.

   a. 주 예수님이 그 날 부활하심으로 구속 사역이 완전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

   b.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음 두 주일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요 20:19, 26).

   c. 성령님이 주의 첫날에 오셨기 때문입니다(오순절날은 부활후 일곱번째 일요일입니다)

   d. 초기 제자들은 주님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떡을 떼기 위해 그날 모였기 때문입니다(행 20:7).

   e. 바울은 주의 첫날에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고전 16:1, 2).


   4.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은 고생스러운 한 주일의 마지막 날을 안식의 날로 정했습니다.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의 날과 함께 한 주일을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사역을 마치셨기 때문입니다.


   5. 안식일은 의무적인 날입니다. 주님의 날은 특권의 날입니다. 세속적인 일로부터 놓인 우리는 특별하게 그날을 주님께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 안식일은 처음 창조를 기억하게 합니다. 반면에 주님의 날은 새 창조와 연관되었습니다.


   7. 안식일은 올 것의 그림자로서, 그 취지는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입니다(골 2;16).


   8. 그리스도인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으로 비난받을 수 없습니다(골 2:16).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권위역 성경에 있는 골 2:16의 '안식일들" 이 주일의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안식일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다른 역본들은(한글 개역성경도-역자주) 그 구절에서 단수로서 "안식일" 이라고 했습니다.


   9. 율법은 어떤 한 날을 엄히 지킴으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루었기 때문입니다(롬 13:8-10; 갈 5:14).


   10.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십계명이 모든 세대에 대한 도덕적 원리들로 간직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관련된 계명이 도덕적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이라는 것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어떤 날을 지키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옳다거나 그른 것이 아닙니다.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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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제 6 과

                              율법의 목적(3:19-29)


율법은 사람의 죄를 찾아냄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만일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는 것이라면 율법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죄의 참된 특징인 범법함을 통해 죄를 드러내려고 의도된 것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오기까지는 범법함을 깨닫지 못햇습니다. 범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주신 율법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지 증명하려고 한다" (앤드류 죽스).

   율법은 죄인된 한 민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망없는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복에 대한 조건없는 약속이며 율법은 단지 저주의 결과일 뿐입니다. 율법은 조건 없이 거저 주시는 복을 받을 만한 가치가 사람에게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만일 사람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 것입니다.

   "씨(자손)"는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임시적인 수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약속은 주님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두 부류간의 계약에는 중개인이라고 하는 중보자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두 계약자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중개인으로 섬겼던 것입니다(신 5:5)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모세에게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신 32:2; 시 68:17; 행 7:53; 히 2:2).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모세와 천사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합당치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3:20 만일 계약자가 한쪽 뿐이라면 그는 조건없는 약속을 한 것이며, 다른 쪽에게 아무런 것도 요구할 수 없는 것이고, 아무 중보자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율법에 중보자가 요구되었다는 사실은 사람은 그 계약 가운데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을 지켜야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약점입니다. 율법은 지킬수 있는 힘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은 유일한 계약자이셨습니다. 이것이 그 약속이 주는 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고 사람에게 놓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중보자도 연루되지 않았습니다(비록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논증과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히 9:15)이시라고 말한 사실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곳에서 사용된 중보자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모세가 중보자로 섬긴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는 중개인 또는 백성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은 더욱 뛰어난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언약의 복을 바르게 나누어줄 수 있는 분은 죽으셨던 주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죽음만이 사람의 뜻이나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새 언약을 주님의 피로 인쳐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딤전 2:6).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그 언약의 복을 보증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언약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이며, 주님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부분이기도 합니다.

3:21 율법이 그 약속을 제쳐두거나 대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만일 율법이 죄인들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완전함을 이루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라면 확실히 구원은 율법준수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그렇게 적은 대가를 치루는 방법과 동일한 결과를 이룬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죄인을 위해 죽도록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많은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함으로 죄인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모든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망없음을 나타내고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써만 되는 것임을 그들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3:22 구약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나타내 주었으며, 그들을 율법 아래에 포함시켰습니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은 사람이 죄를 충분히 깨닫는 데 필요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22절에 있는 중요한 단어는 "믿음", "주려함", 그리고 "믿는" 입니다. 여기에는 "행하는" 이나 "율법을 지켜" 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율법에 갇힘


3:23 여기에서의 "믿음의 때" 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시대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 장사됨,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순절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대를 나타냅니다. 이 시대 전에는 유대인들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감시아래 있는 것처럼, 갇힌 것처럼 율법아래 갇혀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에 의해 그것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갇혔으며, 구원을 위한 믿음의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복음 안에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은혜로운 소식이 알려지기전까지는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3:24 율법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후견인 또는 가정교사로 묘사되었습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인간의 죄악됨, 속죄의 필요성에 관한 교훈들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어리고 미숙한 사람을 훈련시키고 일반적으로 감독하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를...인도하는" 이라는 단어는 원어에는 없었으나 번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빼낸다면 그 구절은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또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목적으로 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유대인 후견인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결혼, 재산, 음식 등에 관한 규율에 의해 독특한 민족으로서 보존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 이 오자, 수세기 동안 기적적으로 지켜졌던 이 민족에게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기초 위에 약속되었습니다.

3:25 율법은 몽학선생(가정교사)이지만 한번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받게된 믿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라디아인들과 같이 그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얼마나 더 율법아래 있지 않겠습니까! 24절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며, 25절은 율법이 의롭게 된 사람을 위한 생명의 법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


3:26 "우리" 라고 하는 대명사가 "너희" 로 바뀌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 말할 때 "우리" 라고 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 갇혀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은 전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구별된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들이 의롭게 되었을 때 율법아래 있는 것이 그쳐졌고, 그들의 유대인으로서의 특별한 특성이 그쳐졌습니다. 이 장의 여기에서 끝까지 나오는 "너희" 라는 대명사는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3:27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여기에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은" 것으로 일컬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침례를 받지 않으며, 자신을 율법아래 놓지도 않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침례는 신자들이 물 속에 잠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신자들은 군인들이 제복을 입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중심의 진실함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침례받지 않은 신자를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침례로 육체의 장사됨과 그 결과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옛 생활 방식을 그치고 새 생활을 시작한 것을 나타냅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침례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도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 생활규범과 같은 율법 아래 있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3:28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없애셨으며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차이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삶인 새 생활을 완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옷입었습니다.

   율법은 이러한 계급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7:6; 14:1, 2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유대인은 오전 기도에서 그를 이방인으로 만드시지 않고, 종이나 여자로 만드시지 않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차이들은 사라집니다. 유대인은 이방인보다 우선하지 않으며, 자유한 사람이 종보다 더 호의적이지 않고, 남자가 여자보다 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동등합니다.

   이 구절은 말한 것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으며, 종과 주인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은 남자가 머리되며 여자는 종속된다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봉사의 역할이나 영역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늘나라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29  하나님 앞에서 믿는 유대인들은 믿는 이방인들에 대해 조금도 뛰어난 자가 아닙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고벳트는 "율법이 만들어낸 모든 차별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공동묘지 안에 묻혀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버리신 차별들을 다시 세움으로 또다른 거룩을 구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속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이 주님을 믿을 때, 그들은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복을 유업으로 이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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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4과  하나님 의 (2)

                                                           (4장1절~25절)


   복음은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사도바울은 이미 두 번이나 이 사실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이제 그것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에 있어서, 그는 율법 이전에 살았던 아브라함과 율법 이후에 살았던 다윗, 이 두사람을 예로 들어 증명하고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까? (1~5절)


   1) 만약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떤 피조물도 창조주 앞에서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2절).

   2) 구약 성경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창 15:6).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3) 이와 같이 하나님은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십니다(4,5절).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기본 원칙이 은혜라면, 믿음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단입니다(4,5절 말씀을 암기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다윗의 경험 또한 아브라함의 경험과 일치합니다. (6~8절)

   1) 그렇습니다. 다윗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행복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 예를 들면, 다윗은 말하기를 "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라고 하였습니다.

   3) 또한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도 역시 사람의 노력은 암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8절).


   3. 그러나 구약 성경은 할례를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9~12절)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가 할례를 받기 전 이었습니다. 그가 후에 할례를 받은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미 받은 의에 대한 외적인 표 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참된 신자들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4.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조금이라도 관계하지 않습니까? (13~25절)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은혜로 되는 것이지, 율법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약속을 하셨음은, 율법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조건도 부가하지 않았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어떤 행위에도 의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겠다는 하나님 편의 약속뿐이었습니다(13절).


   2) 만약 약속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되었다면,

   첫째, 믿음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둘째, 약속은 실효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14절)


   30 율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정죄하는 것입니다(15절).


   4)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야 된다고 선언하셨습니다(16절).

   첫째, 이것이 영생의 약속이 틀림없음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선한 행위가 그 필수 선행조건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만족 하리 만큼 행하였거나 또 행한 그것이 바른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확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이것이 영생의 약속이 만민에게 틀림없음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만약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면, 그 조건을 이행할 수 없는 사람이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어떤 개인적인 공로를 쌓지 않고서도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5. 아브라함이 의롭게 여기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증명합니다.(17~22절)


   10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18절).


   2)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자신의 나이가 일백 세나 되었고, 그의 아내도 아이를 낳기에는 너무나 늙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까지 그들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3)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불가능한 일을 능히 행하실 수 있음을 알고, 담대히 그를 의지하였습니다.


   4)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2절)


   6.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훈으로 쓰여졌습니다. (23~25절)


   1) 아브라함만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유일한 예는 아닙니다.

   2) 만약, 우리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으로 믿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같은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3)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시려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이 그의 갈보리 사역을 만족해하신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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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경  개 요


                                          제10과 바울 서신(1)


                                                    로마서


   사도행전이 교회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음에 반하여, 서신서들은 교회에 관한 위대한 진리와 교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진리를 가르치고 있음은 그 좋은 실례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 그를 하늘 나라에 가기에 합당한 자로 보신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로마서를 통하여 바울은 두가지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1.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고 있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오직 주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은 세 가지 사실을 부연했습니다.

   1.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이지, 율법을 지킨다거나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2.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원을 얻는 방법에 있어서는 다를바가 없다.

   3. 신약 시대나 구약 시대나 구원을 얻는 방법은 동일하며,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없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가를 설명하고나서, 바울은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은 모름지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된 자로 여기고, 이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일편 단심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심령에 거하셔서 성도가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십니다.

   한편 바울은 복음이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스라엘 민족과 맺은 언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젖힘을 당하고 있는 현재 상태는 완성적인 상태도 아니며, 최종적인 상태는 더더구나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잔존자들이 주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성취하신다고 주장했습니다.

   12-16장은 특별히 의롭다 함을 얻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서나 국가에 대해서나, 세상에 대해서나, 성도 상호간에 있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모로 보나 로마서는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치는 서신이라고 분별됩니다.


                                                   고린도 전서


   고린도 전서는 고린도 교회에 어려운 문제들이 있으며 ,이에 대해 성도들이 궁금해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울이 이를 해결할 목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아래에 열거하는 내용을 보게 되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이에 대해서 바울이 어떻게 처리했던가를 알게 될것입니다.

   1. 분파를 일으키며 분쟁하고 있었습니다(1-4장). 고린도 성도들은 지도자된 인간들을 각기 높이고 있었으므로, 육신적이라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2. 범죄하고 있는 성도가 있었습니다(5장). 이에 교회가 이를 방치해서는 안될뿐더러 회개하고 죄를 버릴 때까지 그 성도를 출교시키라고 명했습니다.

   3. 성도 간에 송사하고 있었습니다(6:1-11). 이에 성도 간의 문제는 성도 간에 해결해야 하고 송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4. 순결을 지키지 않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6장). 이에 성도의 몸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전으로서, 음행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처사라고 했습니다.

   5. 결혼 문제에 관해 무분별했습니다(7장). 이에 바울은, 결혼이 의무는 아닐 뿐더러 때로는 독신으로 생활하는 것이 더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바울은 부도덕을 예방하기 위해서 남자든 여자든 결혼하는 것을 일반적인 원칙으로 분별했습니다.

   6.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습니다(8-10장). 이에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잘못일 것까지는 없지만, 다른 성도들에게 걸림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7. 공중 예배에서 여자들의 태도가 무질서했습니다(11:1-16). 이에 여자들은 머리에 너울을 씀으로써 권세 아래 있는 것을 천사들에게 증거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8. 주의 만찬을 행함에 있어서 질서가 문란했습니다(11:17-34). 이에 먼저 자신을 살핀 연후에 이 예식에 참여하라고 책망했습니다.

   9. 신령한 은사들에 대해 그릇 생각하고 있었습니다(12-14장). 이에 대하여 바울은 특별한 은사라고 해서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이 아니며,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10. 부활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15장).이에 대한 바울의 해명인 15장은 몸의 부활에 관한 진리를 가장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11. 가난한 자의 구제를 소홀히 하고 있었습니다(16장). 이에 대하여 바울은,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연보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본서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고린도 후서에는 두 가지 주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과 사도로서의 사역을 변호하였습니다. 당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은 주 예수님의 진정한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바울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의 중대성을 설명한 뒤에,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얼마나 가혹한 시련을 당했던가를 기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봉사를 거짓 교사들의 활동에 비교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 자신이 바울 사역의 증거들임을 상기시켰습니다.그들은 바로 바울로 인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2.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당하며 가난하게 살고 있는 성도들을 재정적으로 도와주도록 호소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부유하신 분이면서도 우리를 부요케 하시려고 가난해지셨던 주님을 본받아 너그럽게 다른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갈라디아서


   바울이 갈라디아를 방문하여 교회를 세운 후, 갈라디아 교회에는 거짓 교사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할례를 받아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잘못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강경하게 반박했습니다.

   1. 자신의 사도 직분은 오직 주 예수께서 주신 것이므로 자신이 증거한 말씀은 거룩하다.

   2. 구원은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것이지 율법을 지킴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하거나 정죄할 수는 있어도,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주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율법의 저주에서도 속량을 받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는 이제 율법 대신 그리스도께서 곧 생활의 규범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하는 동시에, 더이상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지 말라고 권면했다.

   또한 십자가는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적인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어 주고, 이제는 육신적인 힘이 아니라 성령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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