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0 과
거룩함의 능력(5:16-25)
성령을 좇아 행함(5:16-18)
거룩함은 율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후 바울은 이제 성령님이 신자의 경건한 생활에 대한 능력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나아갑니다. 율법 아래에서 사람은 그 자신의 제한된 능력보다 더 높이 일어설 수 없으나, 은혜 아래에서 그는 하나님의 성령님의 무제한적인 능력을 그가 원하는대로 갖게 됩니다.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신자는 육체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주님의 길을 소유하기 위해 주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사역이 신자와 주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을 좇아 행하면 육체 또는 자신의 삶을 죽은 것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죄에 전적으로 속할 수 없습니다.
스코필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그가 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으로, 말하자면 옛나무와 새 나무의 두 나무가 있는데 새 나무는 거듭남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 문제는 어떻게 옛 나무를 마른채로 두고 새 나무가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문제는 성령을 좇아 행함으로 해결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구절과 그 이하 구절들은 그리스도인과 함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육체를 보여주며, 그러므로 죄의 성품을 근절하려는 생각은 반박됩니다.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과 육체는 항상 충돌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순간 신자들에게서 육신적인 성품을 제거하실 수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들의 약함을 늘 상기시키기 원하시며, 늘 그들의 제사장과 중보자 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하며, 그들이 벌레같은 그들을 구원하신 분을 쉬임없이 찬양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옛 성품을 제거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과 우리의 육체는 늘 대적하며, 우리가 하늘 본향에 들어갈 때까지 그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권위역 성경에는 이 구절이 " 이 둘이 서로 반대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할 수가 없느니라" 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것도 행할 수 없는, 그렇게 때문에 늘 좌절함으로 고뇌하는 자처럼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역성경은 이것을 바르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성령께서 육체를 거스려 대적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악된 일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5:18 (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 구절은 두가지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자는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그리스도인도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그들은 자신의 노력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악한 움직임에 저항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자는 육체 위에 올려진 자로서 주님께 전적으로 속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속하게 되면 율법으로 말미암는 생각이나 육체로 말미암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님은 의롭게 되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바라보도록 사람을 인도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유일한 근거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가리키십니다.
육체의 일(5:19-21)
5:19-21 ( 19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우리는 앞에서 율법은 육체의 활동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내는 일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육체의 일을 구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명백합니다. 간음은 결혼관계에서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이 단어는 개역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음행은 성적인 불륜입니다. 더러운 것은 음란과 같은 도덕적인 악함입니다. 우상숭배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뿐아니라 마귀숭배에 동반되는 부도덕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술수는 문자적으로는 마취제를 사용하는 마술입니다. 술수에는 마취제가 사용되기 때문에 그 단어는 악한 영과 교제한다거나 주문을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아마 "불운" 이라는 미신적인 관습도 포함할 것입니다. 원수를 맺는 것은 증오에 대한 강한 감정을 나타냅니다. 분쟁은 불화, 불일치, 다툼입니다. 시기는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분냄은 심하게 화를 내거나 격노하는 것입니다. 당 짓는 것은 추종자들을 얻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당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분리함은 의견충돌로 인해 나뉘는 것입니다. 이단은 고집스러운 견해를 가진 사람에 의해 형성된 당파입니다. 투기는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부에 대해 불쾌해 하는 것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을 불법으로 죽이는 것입니다(이 구절은 가장 정평있는 신약성경 사본에는 없는 구절입니다). 술취함은 과도하게 독주를 마심으로 취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방탕함은 술취한 무리들이 뒤에 일어나는 여흥을 위해 시끄럽게 떠드는 것입니다.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그가 전에 말한 것과 같이 이런 일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계했습니다. 이 단락은 술주정뱅이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 나열해 놓은 육체적인 일로 특징지어지는 자는 구원받지 않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교회들에게 이러한 태도로 기록해야 했는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 이유는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참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성령님은 종종 놀라운 영적인 진리들과 함께 가장 엄숙한 경고를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5:22, 23)
5:22, 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사도바울이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구분한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일은 사람의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열매는 포도나무 안에 거하는 가지에서 자라는 것입니다(요 15:10, 14). 공장과 포도원이 다른 만큼 그들도 다릅니다. (또다른 대조를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열매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인 것에 주의하십시오. 성령님은 한가지 열매를 맺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이제 나열해 놓은 모든 덕목들은 하나님의 아드님의 삶을 묘사합니다. C. I. 스코필드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사람의 마음 밭과는 이질적인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의 것도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해 놓았고, 갈보리 십자가에서 사랑의 완성이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희락은 하나님과 주님과의 관계로 만족해하고 흡족해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요한복음 4:34에서 나타내셨습니다. 화평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평화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구속자의 삶 속의 평화에 대해서는 누가복음 8:22-25 을 보십시오. 오래 참음은 고통, 고민, 핍박을 참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누가복음 23:34 에서 보여집니다. 자비는 온화함이며, 아마도 가장 훌륭한 설명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주님의 태도일 것입니다(막 10:14). 양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양선의 행동을 보려면 누가복음 10:30-35 을 읽으십시오. 충성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과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신뢰하는 것, 또는 충절과 미더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충절과 미더움을 뜻할 것입니다. 온유는 낮은 자리를 취하는 것으로 마치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하신 것과 같습니다(요 13:1-17). 절제는 자기 조절을 의미합니다(눅 23:8-12). 우리의 삶은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욕망과 야심, 식욕 그리고 기질은 억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적당하게 행해야 합니다.
사무엘 체드윅은 "영국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었다 : 성령의 열매는 상냥하고 사랑스러운 품성이며, 빛나는 영혼과 쾌활한 기질이며, 평온한 심령과 부드러운 태도이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환경과 시험하는 사람들을 인내로 참아내며,동정적인 생각과 요령있게 도와주는 것이며, 관대한 판단과 관대한 자선이며, 모든 환경 아래에서의 충성과 미더움이며, 다른 사람들의 기쁨속에서 자신을 잊어버린 겸손이며, 완성의 마지막 표시인 모든 일에 대해 자제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과 관계된 얼마나 감동적인 것인가!" 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라는 신비한 설명으로 이 목록을 마무리 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이러한 덕목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우리 자신에게 선한 것입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바람직한 속성을 한가지라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이 열매를 맺습니까? 사람의 노력으로 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교제하며 생활할 때 맺어집니다. 그들이 사랑의 헌신으로, 매일의 삶 가운데 주님께 순종함으로 구주를 응시할 때 성령님은 놀라운 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리스도와 닮은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그들은 주님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닮게 됩니다(고후 3:18). 가지가 그 모든 생명과 자양분을 포도나무에서 흡수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참 포도나무에서 주님의 능력을 흡수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위한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구절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분적인 면에서 진실입니다. 그는 육체로 십자가에 못박혔고, 성령으로 살며, 성령으로 행하려고 합니다. 죄라는 타락한 성품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았고 못박혔습니다. 침례는 육체의 장사를 묘사하며 육체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어떻게든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행동의 면에서도 진실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죽은것으로 여겨야 하며, 육체에게 어떠한 여지도 주지 말아야 하며, 육체를 개선하려는 헛된 노력을 그쳐야 합니다.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여기서 "만일" 이라는 말은 "때문에" 라는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그 동일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생활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율법은 결코 생명을 줄 수 없으며, 결코 그리스도인의 생명의 법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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