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11 과
권면의 원리(5:26-6:10)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성령으로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성령에 충만한 삶에 대한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할 것의 실제적인 몇가지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5:26 (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취하지 말아야 할 세가지 태도는 자만, 격동, 투기입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은 종종 그들의 하찮은 업적으로 교만해지며, 그들의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조롱합니다. 이에 반하여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이나 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는데 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다른 사람들을 투기하기 쉽습니다. 그러한 모든 태도들은 은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깁니다. 율법준수자는 잘못된 영광을 구합니다. 참으로 큰 자는 무시받는 사람들을 섬기는 자이고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사람입니다.
개선되어야 할 세가지 습관(6:1-10)
1. 범죄한 자를 바로잡음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에 범죄한 신자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범죄자를 심판함으로 꾸짖어야 하지만 이것은 율법과는 뚜렷이 대조됩니다.
범죄한 일이 드러났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범죄에 놀랐다" 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다기 보다는 어떤 범죄 행위에 연루된 사람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신령한 사람들에 의해 다루어지게 됩니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은 무정하고, 냉정한 태도로, 이롭게 하기보다는 더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죄한 사람도 주님과 접하고 있지 않은 사람의 훈계는 받기를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이 구절은 생각해 볼 만한 질문을 하게 합니다. 만일 참으로 신령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신령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신령한 사람들은 그들의 부족함을 가장 크게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만일 그러한 일을 한다면 신령한 사람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렇다면 누가 바로잡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겸양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답은 이렇습니다. 참으로 신령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상태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한 사람을 바로잡기 원하는 돌아보는 목자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교만하거나 우월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유혹받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온유한 심령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짐" 이라는 단어는 실패, 유혹, 시험, 시련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근심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형제에 대해, 거리를 두고 비판하면서 가까이 하지 않기 보다는 곁으로 다가가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를 돕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율법과는 너무도 다릅니다. 모세의 율법은 순종에 대해 생명을 약속했지만 순종할 아무 능력도 주지 않았으며, 형벌에 대한 두려움 만이 순종하도록 권할 뿐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법은 이미 생명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교훈입니다. 신자들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 교훈을 지킬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그들의 동기입니다
6:3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우리는 모두 동일하게 흙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제의 죄를 보게 되면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우수하다는 이상심리는 자기기만의 한 형태입니다.
6:4 (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이 구절은 만족을 위한 이유를 찾으려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는 습관에 대해 경고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시험될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실패 보다는 자신의 일로 인해 자랑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해야 합니다.
6:5 (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처음 볼 때, 이 구절은 2절과 모순되게 보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원어로는 2절에서 번역된 "짐" 이라는 단어와 5절의 단어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이생에서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과 문제들을 함께 하라고 가르칩니다. 5절은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자기 자신의 책임의 짐을 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2.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 대한 부양
6:6 (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신자들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 는 것은 그들이 기도와 경건한 열심을 유지하도록 생활에 대한 물질적인 것을 그들과 나누라는 의미입니다.
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비록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말하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계시며 그에 따라 거두게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심은대로 거두며, 우리가 심은 것보다 여러 배로 거두게 됩니다. 농부가 밀을 심으면 밀을 거두는데 때로 삼십배, 육십배 또는 백배로 거둡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성령님은 여기에서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그들의 천한 행위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라고 평했습니다.
6:8 (자기의 육체를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비록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이 일반적인 진리이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베풀도록 권하는 것임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해 우리가 자기의 돈을 자기를 위해, 자기의 쾌락과 안락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육체를 심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심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은 사람들은 그들이 더 늙어지면 쾌락을 위해 살았던 그 육체가 쇠퇴하여 죽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 땅위에서 실망과 패배를 거두는 것입니다. 이제 그때가 되면 그들은 영원한 상급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은 사람은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영생을 두가지로 사용하였습니다 (1)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 신분으로(요 3:36) (2) 이 땅위에서의 신자의 삶이 끝났을 때 그가 받을 것으로(롬 6:22)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으로 심은 사람들은 지금 여기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누리지 못하는 영생을 어느정도 누립니다. 그리고 그에 동반된 신실함에 대한 상급을 그들이 하늘 본향에 이르게 될 때 거두게 될 것입니다.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어떠한 사람도 낙심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수신자들에게 즉시는 아닐 지라도 어떤 상급이 있을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씨를 뿌린 다음날 밭에서 추수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영역에서도 신실하게 뿌린 것에 따라서 적당한 시기에 확실히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3.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함
6: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믿음의 가정은 교파나 교단에 관계없이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신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특별하게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틀렛은 " 이 권고의 명확한 강조에 주의하라. 그것은 얼마나 조금 해를 끼쳤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우리 앞에 놓여있는 선한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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