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6 과
율법의 목적(3:19-29)
율법은 사람의 죄를 찾아냄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만일 바울이 주장하는 대로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는 것이라면 율법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율법은 죄의 참된 특징인 범법함을 통해 죄를 드러내려고 의도된 것입니다. 율법이 오기 전에도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오기까지는 범법함을 깨닫지 못햇습니다. 범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주신 율법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거룩한지 증명하려고 한다" (앤드류 죽스).
율법은 죄인된 한 민족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율법을 지킬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결코 그것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소망없는 죄인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하기에 그들은 하나님께 은혜로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복에 대한 조건없는 약속이며 율법은 단지 저주의 결과일 뿐입니다. 율법은 조건 없이 거저 주시는 복을 받을 만한 가치가 사람에게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었습니다. 만일 사람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된 것입니다.
"씨(자손)"는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임시적인 수단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의 약속은 주님을 통해 오는 것입니다.
두 부류간의 계약에는 중개인이라고 하는 중보자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두 계약자들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중개인으로 섬겼던 것입니다(신 5:5)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천사들이 모세에게 율법을 전해주었습니다(신 32:2; 시 68:17; 행 7:53; 히 2:2).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모세와 천사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에 합당치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3:20 만일 계약자가 한쪽 뿐이라면 그는 조건없는 약속을 한 것이며, 다른 쪽에게 아무런 것도 요구할 수 없는 것이고, 아무 중보자도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20 중보는 한편만 위한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율법에 중보자가 요구되었다는 사실은 사람은 그 계약 가운데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을 지켜야함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약점입니다. 율법은 지킬수 있는 힘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지키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을 때 하나님은 유일한 계약자이셨습니다. 이것이 그 약속이 주는 힘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고 사람에게 놓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무도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중보자도 연루되지 않았습니다(비록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논증과 그리스도께서 새언약의 중보자(히 9:15)이시라고 말한 사실 사이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두 곳에서 사용된 중보자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모세가 중보자로 섬긴 것은 단순히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는 중개인 또는 백성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라는 것은 더욱 뛰어난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언약의 복을 바르게 나누어줄 수 있는 분은 죽으셨던 주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죽음만이 사람의 뜻이나 약속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이 새 언약을 주님의 피로 인쳐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셨습니다(딤전 2:6).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한 그 언약의 복을 보증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대립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언약 백성들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보혜사로서 하시는 일이며, 주님의 중보자로서의 사역의 부분이기도 합니다.
3:21 율법이 그 약속을 제쳐두거나 대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느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만일 율법이 죄인들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완전함을 이루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라면 확실히 구원은 율법준수로 말미암아 이루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이루신 것이 그렇게 적은 대가를 치루는 방법과 동일한 결과를 이룬다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죄인을 위해 죽도록 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은 많은 시간,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내야 함으로 죄인을 구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율법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한 것입니다(롬 8:3). 모든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망없음을 나타내고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써만 되는 것임을 그들에게 강조하는 것입니다.
3:22 구약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나타내 주었으며, 그들을 율법 아래에 포함시켰습니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율법은 사람이 죄를 충분히 깨닫는 데 필요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22절에 있는 중요한 단어는 "믿음", "주려함", 그리고 "믿는" 입니다. 여기에는 "행하는" 이나 "율법을 지켜" 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율법에 갇힘
3:23 여기에서의 "믿음의 때" 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시대입니다.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것은 주 예수님의 죽음, 장사됨, 부활 그리고 승천과 오순절 복음의 전파로 말미암아 시작된 시대를 나타냅니다. 이 시대 전에는 유대인들이 감옥에 있는 것처럼, 감시아래 있는 것처럼, 갇힌 것처럼 율법아래 갇혀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요구에 의해 그것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갇혔으며, 구원을 위한 믿음의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복음 안에서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출되었다는 은혜로운 소식이 알려지기전까지는 제한되었던 것입니다.
3:24 율법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후견인 또는 가정교사로 묘사되었습니다.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것은 가르치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인간의 죄악됨, 속죄의 필요성에 관한 교훈들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이 단어는 어리고 미숙한 사람을 훈련시키고 일반적으로 감독하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를...인도하는" 이라는 단어는 원어에는 없었으나 번역자들에 의해 첨가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단어를 빼낸다면 그 구절은 율법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또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목적으로 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유대인 후견인임을 가르칩니다. 여기에는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을 결혼, 재산, 음식 등에 관한 규율에 의해 독특한 민족으로서 보존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 이 오자, 수세기 동안 기적적으로 지켜졌던 이 민족에게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의 기초 위에 약속되었습니다.
3:25 율법은 몽학선생(가정교사)이지만 한번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받게된 믿는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율법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갈라디아인들과 같이 그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않았던 이방인들은 얼마나 더 율법아래 있지 않겠습니까! 24절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며, 25절은 율법이 의롭게 된 사람을 위한 생명의 법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
3:26 "우리" 라고 하는 대명사가 "너희" 로 바뀌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바울은 유대인에 대해 말할 때 "우리" 라고 했으며,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율법 아래 갇혀있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율법은 전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구별된 것을 나타내 줍니다. 그들이 의롭게 되었을 때 율법아래 있는 것이 그쳐졌고, 그들의 유대인으로서의 특별한 특성이 그쳐졌습니다. 이 장의 여기에서 끝까지 나오는 "너희" 라는 대명사는 구원받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3:27 그리스도인의 침례는 여기에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로 "옷입은" 것으로 일컬어졌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받은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과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세의 침례를 받지 않으며, 자신을 율법아래 놓지도 않습니다.
이 구절에 있는 침례는 신자들이 물 속에 잠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신자들은 군인들이 제복을 입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입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중심의 진실함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침례받지 않은 신자를 결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침례로 육체의 장사됨과 그 결과 의롭게 여김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옛 생활 방식을 그치고 새 생활을 시작한 것을 나타냅니다. 갈라디아인들은 침례로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주님과 함께 장사되었음을 고백하였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대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들도 율법에 대해 죽었으며 생활규범과 같은 율법 아래 있기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3:28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을 없애셨으며 그들은 그러한 민족적 차이에 대해서도 죽은 것입니다.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삶인 새 생활을 완전하게 살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옷입었습니다.
율법은 이러한 계급의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신명기 7:6; 14:1, 2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이루어졌습니다. 어떤 유대인은 오전 기도에서 그를 이방인으로 만드시지 않고, 종이나 여자로 만드시지 않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데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차이들은 사라집니다. 유대인은 이방인보다 우선하지 않으며, 자유한 사람이 종보다 더 호의적이지 않고, 남자가 여자보다 더 유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동등합니다.
이 구절은 말한 것 이상의 어떠한 의미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알고 계십니다. 신약성경은 남자와 여자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고 있으며, 종과 주인의 차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은 남자가 머리되며 여자는 종속된다는 것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봉사의 역할이나 영역의 차이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데 있어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늘나라의 신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3:29 하나님 앞에서 믿는 유대인들은 믿는 이방인들에 대해 조금도 뛰어난 자가 아닙니다! (29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고벳트는 "율법이 만들어낸 모든 차별들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공동묘지 안에 묻혀버렸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허물어 버리신 차별들을 다시 세움으로 또다른 거룩을 구하려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요!
갈라디아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속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유업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죄인이 주님을 믿을 때, 그들은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복을 유업으로 이을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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