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믿음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점검해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23).


   1973년 빌리그래함 초청 복음전도대회(7.29~8.16)가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다. 그때 빌리그래함과 여러 명의 수행 목사님들이 같이 오셔서 전국에서 초교파적으로 집회를 가졌었다. 수행한 목사님들은 지방에 흩어져서 집회를 하였는데 전북 전주에서는 전주 신흥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집회를 하였다. 전주에 오신 목사님은 E. J. 다니엘 목사님이셨다. 그 목사님은 마태복음 7장 21~23절 말씀을 읽고 난 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충격적인 말로 설교를 시작하였다.

   "여기에 모이신 목사님들은 거듭나셨습니까? 거듭나지 못했으면 지옥에 갑니다. 장로님들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렇지 못하면 지옥에 갑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죄용서 받은 기쁨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진정 이와 같은 경험이 없다면 멸망의 지옥에 갈 것입니다. 여러분이 수십 년 교회에 출석하였을지라도 지옥에 갈 것입니다."

   다니엘 목사의 설교는 연일 모인 수많은 군중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전북 각 지역에서 온 교인들과 지도자들을 놀라게 한 이 한편의 설교를 필자는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고 고백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기독교인들을 생각하며 과연 그들이 다 천국에 갈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룸으로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고자 한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구원 문제를 검토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앞의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고 부른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되 물불 가리지 않는 봉사와 수고를 한 자들이다. 그들 자신은 누가 뭐래도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도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을 잘 믿으니 틀림없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능력을 행했다. 귀신을 쫓아냈다. 그들은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평신도는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 지도자들임이 분명하다. 자타가 인정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을 헌신했으며 하나님만을 위해서 외길을 달려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다. 23절에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중요한 이야기이다. 생각해 보라. 지도자들이 그러하다면 평신도들은 어찌하겠는가. 혹자는 말하리라. 그렇다면 이 시대에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 말은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말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주님이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더 살펴보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며, 하나님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대통령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통해 대통령에 관한 내용들을 잘 정리하여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 만난 적도 없고 사귄 적도 없고 인사를 나눈 적도 전혀 없다. 믿음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전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희생하며, 심지어 순교까지 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이 글을 읽는 열성 신자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알고 계신지 확신이 있는가? 그 확신이 일방적인 확신은 아닌가? 진정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시는 바 되었는가? 이 질문은 실로 끔찍한 종말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점검해보기를 바란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짝사랑하는 불쌍한 기독교인은 어쩌면 한국 기독교인의 대부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 이전에 7장 13절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하였기 때문이다. 이 넓은 문에 관해서 보통은 기독교 아닌 이교도로 막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독자여, 본문을 잘 살펴보면서 일평생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온 나도 지옥 갈 수 있다는 끔찍하고 두려운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점검하기 바란다. 나는 큰 교파에 속했다고 자위하지 말라. 나는 크고 유명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고 안심하지 말라. 대부분 크거나 유명한 곳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분명한 것은 넓은 문은 멸망의 길이며 그 날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게 외면당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재림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초림 때의 예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진정 예수님을 믿고 기다린 신자들이 몇 명이나 되었는가? 시므온과 동방박사와 안나 등 몇 명에 불과했다. 소돔과 고모라 시대에 4명이 구원받은 것을 잊었는가. 노아 시대에 몇 명이 구원받았는가? 성경은 증거한다. 겨우 여덟 명이라고(베드로전서 3:20).

   오늘날 이 화려하고 웅장한 기독교 속에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두렵고 떨릴 뿐이다.

   필자는 며칠 전 서울 모교회 집회에서 90이 다 된 노인을 만났다. 그는 20살에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열심을 다하여 다니셨다. 그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천국에 간다는 확신은 없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지옥이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확신에 관해서 말씀드렸을 때 관심 없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떠나가려 하였다. 떠나가는 그에게 필자는 "부친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아가시면 지옥에 갑니다." 하고 경고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헛 믿었다는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

   그는 속상한 모습으로 떠나갔는데 내일 오시라고 해도 오지 않겠다고 하면서 나갔다. 필자는 그를 위하여 기도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이튿날 왔다. 그리고 말씀이 끝난 뒤에 물어보니 구원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얼굴이 환하게 변화되어 있었다. 아마 그는 전날 저녁 자신을 점검해 보았음에 틀림없다. 독자여,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지 말라. 그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망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흔히 자신에 대하여 관대하고 자신의 길을 무작정 옳다고 인정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것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에 대하여 더 이야기해 보자. 예수님이 갈릴리 출신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하고 있는 시간에 예루살렘에서는 율법에 익숙한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 행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정통이라고 생각했으며 율법의 준행자요, 수많은 선진들이 물려준 신앙의 계승자라고 자처하며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질타하셨다. 그들은 말은 매끄럽지만 실제는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않은 마귀 자식들인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사랑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하나님을 전혀 닮지 아니하여 이방인들에게 "예수 믿는 놈" 이라는 비방을 들으면서 마귀 자식의 모습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어떤 회사 사원은 자기 사장님이 장로인데 사장님의 전도로 교회에 다녔다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사장님은 교회에서는 천사인데 회사에서는 무서운 사자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말하기를 왜 에배당에서만 신자여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여러분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라.

   수천 명이 모여서 의식을 갖추어 유월절 예식을 엄숙히 진행하는 군중 속에 속할 것인가? 아니면 초라하지만 12명이 모였던 그곳, 예수님이 함께 하셨던 그곳에 속할 것인가? 오늘도 동일하다. 숫자에 유혹 받지 말라. 큰 에배당에 유혹 받지 말라. 큰 세력을 자랑하는 교파에 위안 받지 말라. 당신의 생명은 당신이 사랑해야 한다.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는 확신이 있는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증거가 있는가?

   필자는 오래 전에 유명한 교파의 전도사 사모님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필자가 주관하는 집회에 참석했는데 끝나고 난뒤에 필자에게 "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느냐'고 하였다. 필자가 "무슨 뜻이냐" 하니 나의 설교를 듣고 구원 문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웃으면서 "흔들어 보아서 가짜라면 진실로 거듭나면 되는 것이고 진짜 같으면 점검해 보았으니 좋은 것 아니냐"고 답변하니 그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필자는 또 말했다. "흔들리는 것을 보니 진짜이기는 어렵겠구먼." 하니 그는 고민하면서 집으로 갔다. 필자는 그 영혼을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오, 사랑하는 독자여, 사단의 정체는 거짓말쟁이이다. 사단은 사람을 속이는데 특별한 재주가 있다. 따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선악과를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속였지 아니한가?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그들은 자기 생각에 속고 있으며 자기 지식에 속고 있으며, 환경에 속고 있는 것이다. 사단은 속삭인다.

   "너는 잘 믿고 있는 거야. 너는 훌륭해. 너는 양심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왔어. 너는 수십 년간 믿었지 않느냐? 네가 구원받지 않았다면 누가 구원받았겠느냐? 너는 존경받는 지도자가 아니냐? 너는 칭찬받는 집사가 아니냐? 너는 교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지 아니하냐? 그런데 네가 구원받지 못했다니, 그런 일은 없다. 절대로 안심하라.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지 않느냐? 너는 지금 에수님을 믿고 있지 않느냐?  성경을 믿고 있지 않느냐?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 아니냐?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 그래, 우리 목사님 말씀에 단순하게 믿으라고 하였으니 무조건 믿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필자는 경고한다. 이 모든 것이 사단의 속삭임이라고... . 사단은 얼마나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이는가.

   며칠 전 필자는 전도지를 나누고 있는 집사님과 노상에서 대화한 적이 있다. 많은 말을 했지만 그 중에 한 가지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천국에 갈 수 있느냐"고 필자가 물었다. 그는 '우리 목사님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물을 때 갈 수 있다고 대답하라고 여러 번 교육 시켰다"고 했다.

   독자여, 정신을 차리라. 도대체 구원문제가 교육으로 해결될 수 있는가? 억지로 대답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인가?

   교제하는 중에 그는 죄가 있다고 하였고 거듭나지 못했고, 거듭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천국에 간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목사님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거듭남도, 거듭남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필자가 전해주는 복음은 끝까지 거부하고 자기 교회 목사님이 천국 간다고 했으니 천국 간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불쌍하고 미련한 영혼인지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옥에 가서 목사님 멱살을 잡고 영원히 원망하며 싸울 것이다. 통곡하며 후회할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여기까지만 말하고 그치고자 한다. 다음부터는 구체적으로 점검해 볼 수 있는 사례들을 열거하고자 한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린도후서 13:5).

Posted by 행복자
,

죄와 종교로부터의 자유


                          기복신앙으로 소경된 기독교인들이여!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라디아서 6:8).


   "나는 집에 너무 우환이 많고 살림이 어려워 예수를 믿었으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어 그만 두었습니다."

   "나는 예수 믿고 건강 축복, 물질 축복, 가정 축복 받았습니다. 예수님 참 감사하지요."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필자 뿐 아니라 독자들도 주위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금일의 기독교를 병들게 하는 기복신앙, 즉 육신적 축복에 매달려 있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기복신앙". 보이지 아니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소망에 빠져서 여기에만 매달려 하나님의 근본 뜻을 저버린 길 잃은 양떼들이 여기서 헤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수많은 방황하는 양떼들이 겉으로는 열렬하게 하나님을 부르지만 실제는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이 지옥으로 향하여 가고 있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불쌍한 거짓 기독교인들인 것이다.

   이 기복신앙의 실제문제를 성경에서는 수없이 많이 다루고 있다. 그중 요한복음 6장에 보면 기복신앙에 잡혀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슬프게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울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에수님을 임금 삼으려는 자들의 중심 뜻은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인 놀라운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이었다. 이 기적을 본 사람들은 이 놀라운 능력 있는 분을 왕으로 모시면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시키는 문제 뿐 아니라 백성들의 민생문제를 능히 해결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육신적으로 아무 걱정 없이 배불리 먹고 평안히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왕 삼으려 한 것이다.

   이들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이들의 청을 당연히 거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그들이 끈질기게 예수님을 찾아 따라온 것을 보게 된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정곡을 찌르는 말씀을 주셨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한복음 6:26).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통하여 표적을 베푸신 경우가 신구약에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와 위엄을 드러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소망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 분명하다. 표적이 표적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거나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만 있을 때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예수님이 26절의 이 말씀을 하신 것은 표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믿고 그분을 통하여 영생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셨으나 그들이 떡을 먹는 그 자체에만 목적이 있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육신적인 떡보다 생명의 떡이 되신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고자 노력하셨으나 그들이 기복신앙에만 머물러 있어서 알아듣지 못함을 볼 수 있다. 결국 예수님은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고 선포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육신적인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무리들에게 이 말씀이 얼마나 충격이 되었으면 대부분 물러갈 수밖에 없었겠는가(요한복음 6:66).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고 질문하심에 대해서 베드로가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하고 놀라운 답변을 하므로 오늘까지 성도들의 갈 길을 예시하신 훌륭한 가르침이 되었다.

   여기까지의 상황은 영생을 가르치고자 원하시는 주님과, 보이는 육신적 축복에만 매달려 있는 우매한 유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잘 묘사해 준다.

   독자여, 이와 같은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드러났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오늘날 주님을 위해서 열심을 내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육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받을 복을 위하여 열심을 내고 있지 않는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고 몇 년씩 하기 때문에 주님을 믿는 믿음(정성)이 가상하여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니 부디 새벽기도 열심히 하여 하나님 앞에 복 받기를 소망하라는 가르침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참여하고 있는가?

   참고할 것은 필자가 새벽기도를 부정하거나 무조건 질타하는 뜻이 아님을 알기 바란다. 새벽에 일어나 성경보고 기도하고 혹은 예배당에서 새벽집회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정성을 들여 기도하면 하루가 기쁘고 그렇지 아니하면 심령이 평안을 잃는 샤머니즘적 신앙은 지적 받아 마땅하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옛날부터 새벽마다 물 한 그릇 떠놓고 각종 신에게 빌었다. 그런데 이것이 새벽기도로 변하여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있다. 필자가 선교사들을 통해서 혹은 여행 경험을 통해서 아는 바로는 새벽마다 예배당에 모여 건물이 떠나갈 듯 통곡을 하면서 울어대는 교회는 대한민국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기독교 문화는 확실히 잘못 발전되었다.

   헌금을 드리는 문제도 그렇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경우 복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가? 헌금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께서 영육간에 베푸신 은혜를 깨닫고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야 마땅하거늘 하나님께서 크게 보상해 주심을 생각하고 헌금을 드린다면 이것이 기복신앙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악한 죄인이었으나 양심의 악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주님께 찬양이 넘치므로 진정한 헌신이 있게 되는 것이다.

   기복신앙의 예를 더 들어보자.

   어떤 신앙잡지에서 "나는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어 여기 줄거리를 소개한다.

   "다리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여 양약과 한약으로 수없이 치료하였으나 소용이 없고 다리는 계속 더 악화되기만 하였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악화되고 있었다. 고민으로 나날을 보내며 슬퍼하고 있는데 어느 날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갔다. 평생 처음으로 교회에 가보는 것이라서 처음에는 어색하였으나 며칠 있으면서 찬송을 배우고 말씀도 배우니 조금씩 적응하는 것 같았다. 이제 제법 울면서 기도하기도 하였다. 다리를 고쳐달라고 울부짖어 보기도 하였다. 며칠을 보낸 후 철야기도를 하는데 새벽 2시쯤 되었을 때 귀에 들리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나 갑자기 불덩어리가 머리로부터 온몸을 통과하는 것 같았는데 그후 다리가 씻은 듯이 깨끗이 나아버렸다. 얼마나 주님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신 주님께 눈물로 감사찬송 드립니다. 아멘'."


   이것이 간증의 전부이다. 여기에 말씀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이 믿어졌고 이렇게 구원받았다는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십자가가 빠진 구원, 보혈이 빠진 속죄, 이것은 양식 있는 기독교인이라면 단번에 분별이 가는 잘못된 간증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어려움이나 물질의 어려움, 직장의 어려움을 기도하는 자체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신앙의 순서가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것이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지적하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한복음 6:63)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에 죽으심도, 부활하심도, 다시 오심도 모두 영적인 문제, 즉 영혼의 문제를 위한 것이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므로" 사람으로 하여금 영원한 멸망의 심판을 면하게 하고 영생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심이 주님의 뜻이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생의 문제, 영혼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질문하면 대부분 많은 사람이 육신의 복을 위하여 나간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영혼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하여도 그것은 이차적인 문제요 거기에는 아주 적은 관심을 갖고 있을 뿐이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슬퍼하며 탄식하신 말씀이 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40).

   영생을 얻기 위하여 예수님 앞에 오는 사람은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영생의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게 된다. 요한삼서 2절에도 이 문제를 분명하게 다루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의 뜻은 무엇인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복을 구하며 하나님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순서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신앙의 최고 목적은 "영혼의 잘됨" 에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영혼을 잃어버린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누가복음 12:6~21).

   "범죄하는 영혼은 죽으리라"(에스겔 18:4) 하신 말씀처럼 죄를 범한 영혼은 영원한 멸망의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다. 천국과 지옥의 길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질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로마서 5:1)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인간으로서 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거룩한 자도 하나도 없다(시편 14:3).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말씀하셨다(마가복음 10:18). 그런데 더럽고 형편없는 죄인이 십자가의 보혈로 모든 죄를 용서받아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었다(로마서 3:24)는 것은 천지를 진동시킬 놀라운 사건이다. 이제는 (신분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것을 "신의 성품에 참여"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베드로후서 1:4). 바울은 이 구원을 가리켜 "큰 구원" 이라고 놀랍게 표현하고 있다(히브리서 2:3). 영혼구원의 문제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천하를 주고도 그 값을 계산할 수가 없다(마태복음 16:26).

   생각해 보라. 한번 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끔찍하고 무서운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영원히 눈물과 고통과 이별이 없는 영생의 복된 소망 가운데 거하게 되는 일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요한복음 3:16). 예수님의 오심으로 구원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모든 죄가 용서되어 의인이 되었으며, 부활하심으로 이 사실이 확증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구원의 약속을 확실히 받은 자로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육신과 함께 잠시 기다리고 있는 나그네 인생이다(베드로전서 1:7)

   잠시 기다리는 동안 육신에 필요한 것이 있기에 영생을 얻은 자녀에게 육신적 필요를 따라 하나님이 육신적인  복을 공급하신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먼저는 영적인 복이고 나중은 부수적으로 육신의 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한 삼서에서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하고 순서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오, 독자여! 부디 권고하노니 그대의 영혼의 문제는 확실히 해결을 보았는가를 생각해 보라! 필자가 만나본 독자들 중에는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하나 실제 말씀 앞에서 볼 때 주님과 전혀 관계없는 거듭나지 못한 쭉정이가 너무나 많았다. 이글을 읽는 그대는 부디 쭉정이가 아니길 바란다.

   그대는 하나님을 믿되 기복신앙으로 하나님을 믿은 것은 아닌가? 분명히 거듭난 경험도 없이 기도응답 몇 번 받았거나, 병 고침을 경험했거나, 기적을 체험하였다고 "그것으로 천국에 가겠거니" 하고 착각하지 말라. 그대의 영혼이 십자가 속죄로 인해 하나님과 분명히 "연결된 사실" 이 없다면 그대의 신앙은 기초 없는 집이요, 물 없는 구름이며, 열매없는 가을나무이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로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그대의 영혼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새 생명으로 변화된 성령의 열매가 있기를 바란다. 그대의 육체적 욕구를 위하여 교회에 나간다면 그대는 기복신앙에 잡혀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성령과 진리의 인도하심으로 거듭난 성도라면 그대에게는 영생의 소망이 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6:53).

Posted by 행복자
,

로마서


                                        8과 구원의 확신

                                               (8장 1절~39절)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죄의 정욕을 억제하는 것이 우리 자신의 힘으로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8장은 모든 신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 전체를 그에게 의탁하고 그에 의해 주관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되어 그의 형상으로 변화 받아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 이제 성령님의 내재하심으로 받게 되는 축복된 결과들을 살펴 봅시다 ...


   1. 새로운 자유가 있습니다(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율법을 준수하는 것은 속박을 의미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은 완전한 자유를 뜻합니다.

   (- 초기의 여러 성경 사본에는 4절 상 반절 말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이란 말씀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2. 새로운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대신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돌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면, 그것은 곧 땅으로 떨어집니다. 이것은 인력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를 공중으로 띄우면, 그것은 하늘을 날아다닐 것입니다. 생명의 법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항상 죄로 유인하고자 하는 인력의 법과 같은 법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임재하시고 계시는 성령님은 능히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실 수 있습니다.


   3. 새로운 힘이 있습니다(3,4절). 사람의 성품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성품에 나타나는 육신의 죄를 이기시고, 그 죄의 세력을 끊어 놓았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으로 율법의 의를 능히 이룰 수 있습니다.


   4. 새로운 의욕이 있습니다(5절). 성령님은 성도의 마음을 돌이켜 육신을 즐겁게 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마음을 두게 됩니다.


   5. 새로운 열매가 있습니다(6절). 생명과 평안이 믿는자의 분깃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생명이고, 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6.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있습니다(7절). 사랑 안에서 순복함이 적의와 반역을 대신합니다.


   7. 새로운 삶의 영역이 있습니다(8,9절). 육신의 생활에서 벗어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합니다. 육신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안일을 도모함으로 마치 자신의 몸과 재산만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보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은 성령님이 아무런 장애 없이 자유로이 역사하실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하나님께 의탁합니다.


   8. 새로운 보증이 있습니다(11절). 성령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임재하고 있음은, 성도의 몸이 그리스도처럼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리라는 확증입니다.


   9. 새로운 충성이 있습니다(12절). 우리는 육신에 대해서 빚진 것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대해 충성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님께 충성할 따름입니다.


   10. 새로운 살길이 있습니다(13절). 죄의 본성에 따라 산다면  우리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몸의 악한 일을 죽여야 합니다.  이 말은 주님께 욕이 되는 모든 생각이나 행위를 부정해야 함을 뜻합니다.


   11. 새로운 인도함이 있습니다(14절)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특권이 있습니다. 목표 없이 방황하지 않고 전진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2. 하나님과 새로운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15절). 그것은 종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13. 새로운 관계가 있습니다(16,17절).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의 모든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14. 새로운 특권이 있습니다(17,18,20~23절).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에는 별로 특권처럼 보이지 않으나, 주 예수께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 동참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오히려 이것이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15. 새로운 소망이 있습니다(23,24절). 그것은 몸의 구속을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일은 그가 우리의 몸을 죄의 권세와 존재로부터 해방시키실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16. 새로운 전망이 있습니다(17~19절).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생물계를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가 영광 중에 하나님의 자녀로 나타날 때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세상에서 고난과 탄식으로 보내지만, 희망의 그날은 올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7. 새로운 도움이 있습니다(26,27절). 내주하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간구할 때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뜻을 기도하도록 도와주십니다.


   18. 새로운 담대함이 있습니다(28~30절). 아무도 대적하여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승리하는 하나님 편에 속해 있기에 항상 넉넉히 이깁니다.


   8장 33~39절의 말씀은 동서고금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암송해 온 유명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 말씀을 묵상하신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