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밀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어느 날 필자는 어느 열심 집사님에게 물었다. "하나님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도 지옥에 갈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는 깜짝 놀라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순교자도 지옥에 갈 수 있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생각할 때 이해하기 어려운 말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생각하여 보라. 남미의 어느 나라에서 불쌍한 아이들과 함께 평생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고생하며 살다가 간 그 유명한 수녀, 신부, 목사님들이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환자촌에서 나환자들의 고름을 닦아주며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평생을 그들을 위해 살다가 떠나간 그 위대한 신앙인으로 존경받는 성자들이 그들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멸망의 지옥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들은 살아있는 예수라고 추앙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성자로 존경받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도 지옥에 갈 가능성이 있다니!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들 중에는 고아들을 위하여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며 피나는 수고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다. 장애자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눈물겨운 헌신의 삶으로 소녀 시절부터 80이 넘게 살아온 수녀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와 같은 성자들이 평생을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도 멸망의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면 기가 막힐 일 아닌가.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세밀하게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충격 받을 일도 아니다. 여기서는 이와 같은 논제를 전제로 구원의 본질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기독교가 행위의 종교가 아닌 믿음의 종교라는 사실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퍼져있는 기독교는 행위주의자들에게 장악되어 있고 또 그들이 활개 치는 세상이니 통탄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필자가 알고 있는 장로교 전도사는 자원하여 나환자촌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고 같이 기거하며 그들을 섬겼으나 항상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구원의 확신 없이 방황하다가 필자의 전도집회에 참석하여 거듭나므로 천국의 소망을 깨닫고 지금은 시골교회에서 사역에 전념하고 있다. 어찌 이런일이 가능할까? 그 해답은 다음 말씀에 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에베소서 2:8,9)
우리는 이 말씀에서 구원은 선물이며 행위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말씀이 이러하니 어떤 사람들의 행위만 기준하여 구원을 인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언젲가 필자가 대단한 성직자라 할지라도 지옥에 갈 수 있다고 했더니 그는 놀라며 "그렇다면 교회사 2000년 동안 그 훌륭한 성자 같은 성직자들이 모두 지옥에 갔단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필자가 분명히 말하지만 그들 모두가 지옥에 갔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들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지옥에 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 혹시 대단한 간증이 있다거나 성직자나 기타 주님의 이름으로 사회사업에 헌신하는 것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헌신으로 인정받으려 한다면 점검해보시기 바란다. 기분이 나쁘거나 자존심이 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의 문제를 감정으로 처리할 일이 아님을 명심하기 바란다. 일이 잘못되어 지옥에 간다면 거기서는 영원히 탈출할 수 없는 극히 비참한 일인 것이다.
먼저 성경의 예를 살펴보자.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고넬료의 구원받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방인으로서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에 뛰어난 신앙인이었다. 그는 늘 기도하되 진실로 기도하여 하나님 앞에 그 기도가 상달되었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또 그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진실로 그는 만인의 아비와 같은 훌륭한 신앙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구도자였다. 하나님은 그에게 베드로를 보내사 복음을 듣게 하여 구원받게 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은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베드로를 통해서 죄 용서함 받는 복음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사도행전 10:43).
고넬료의 신앙에 있어서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그에게는 성령이 없었다.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난 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였다. 왜 그랬을까? 이 이유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다. 필자가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령 없이도 얼마든지 설교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희생적인 삶으로 세상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 없이도 얼마든지 순교도 하고 목회도 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는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로마서 8:9)
우리가 구원받은 확실한 증거는 성령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넬료는 성령이 없었다. 그는 구원받지 못하고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의 표본이 되어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랑하는 독자여! 자존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말씀앞에서 자신을 점검하여보라. 그대의 생명은 중요한 것이다. 스스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누가 그대의 영혼을 살리겠는가.
다시 고넬료의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고넬료가 성령을 받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한 것은 44절인데 43절에는 앞에 기록한대로 "예수 이름으로 죄 용서함을 받는 복음"이 전해졌다. 고넬료가 죄 용서함을 깨닫는 순간 성령은 그의 마음속에 임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구원의 순간이다. 찬송가 405장에는 이 순간을, 이 놀라운 순간을 귀하고도 귀하다고 외치고 있다. 이 놀라운 거듭남의 순간이 없는 사람이 평생을 하나님의 사랑 실천하기 위해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아도 하나님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구원은 생명의 탄생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자의 잊을 수없는 경험이다. 생각하여 보라. 죄로부터 해방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구원받은 자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구원을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러하다. 인간의 마음속에 더러운 죄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영이 임재할 수도 없고 하나님이 함께 할 수도 없었는데 예수님의 속죄로 말미암아 모든 조. 곧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일순간에 해결된 사실을 깨닫는 순간 깨끗해진 그의 마음속에 성령이 들어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모습이다.
평생을 선교 일선에서 수많은 선교의 실적을 쌓으며 순교로 생을 마감하여 많은 분들의 애도와 칭찬 속에 장례를 치르고 세계가 경의를 표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없는 삶일 수가 있다. 거듭나지 못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그 속에 계시지 않는다면 말이다.
예화집에 나오는 한 토막 이야기는 생각해 볼 점이 많다. 어느 날 한 성직자가 밤에 길을 가다가 언덕 아래에서 나는 신음소리를 들었다. 가보니 어떤 할머니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올라오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신부의 도움으로 건짐받은 할머니가 사의를 표하고 나서 성직자에게 말하였다.
"신부님, 만약 조금 전에 죽었으면 예수님을 만났을 텐데 신부님도 그 소망이 있나요?"
신부님은 그 날 이후 그 할머니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수줍은, 그러나 밝고 순수한 얼굴을 잊지 못하며 또 자신에게는 그런 소망이 없음을 괴로워하다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이야기인가. 그러나 현실이다.
누가 뭐래도 천국에 갈 것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하나님의 종들이 무더기로 지옥에 떨어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 아니한가. 마태복음 7장 15절부터 23절까지 말씀에는 이와 같은 일이 실제로 나타날 것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사람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자신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하고 비판하며 잘 분별하여 자신의 영혼을 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유명한 교파에 속해 있으며 그 교단에서 정식으로 성직자로서의 절차를 밟았는데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이와 같은 안일한 생각은 자신의 영혼을 망하게 할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정말 이러한 문제가 올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있는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한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로마서 10장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울의 골육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유대인들의 실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말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지만 실제는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의", 이것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지옥에 끌고 가는 사단의 올무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배척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모름지기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의를 바로 깨달아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는 말할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수많은 종들이 얼마나 사랑이 많으며 정직, 성실, 겸손하여 존경받는 분들인데 어찌 그런 분들이 자기의 의에 잡혀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맞다. 그들의 인격은 진실로 존경스러움에 필자는 이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의라 함은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 더 말씀드리자면 인격적인 훌륭함에 있어서 필자는 그들을 논할 자격이 없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교리를 경험하는 경험적인 문제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내용이 요한복음 3장에 잘 나와 있다. 니고데모는 유대교의 존경받는 성직자였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공회의원이었으며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신앙인이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당시 유대교 사회에서 출교를 당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는 정직한 사람이었으므로 자기의 소신을 밝히러 찾아왔던 것이다. 그기 비록 백주에 찾아오지 못하였지만 이 행위는 실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무엇이라고 답하셨는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을 듣고 니고데모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여기에서 잠시 생각해 보자. 니고데모가 이 땅에서 이 말을 들었으므로 큰 다행이었다. 만약 사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이 말을 들었더라면 그는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여. 그대가 열심 있는 교인인가? 사랑 많은 성직자인가? 순종 잘하는 집사님인가? 경력 많은 권사님인가? 피나는 희생으로 일생을 살아온 수녀인가? 그런데 그대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너의 모든 수고는 '너의 의'일 뿐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므로 멸망의 지옥에 보낼 수밖에 없다"는 판결을 받는다면 어찌할 것인가? 니고데모에게 있어서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은 이런 뜻이다.
거듭남의 진리는 기독교의 핵심교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을 모르거나 오해하거나 자신의 생각에 의해서 착각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사단의 승리인 것이다. 사단은 기독교인들이 거듭남을 통과하지 않은 채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자기는 지금 열심히 섬기도 있으므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거듭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필자가 전도해 보면 화를 내면서 "거듭나지 않고 어떻게 이만큼 섬길 수 있는가?" 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수없이 보아왔다.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으며 자기 행위에 잡혀있으며 자기의 의를 좇으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자들이다. 그들의 인격은 훌륭하나 성령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노력과 수련에 의한 것이다.
거듭남은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죄인이 100퍼센트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한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므로 천국에 가는 확신 가운데 하나님의 형언할 수 없는 크신 은혜를 갚아나가는 과정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랑을 실천한다는 말은 적합한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을 실천할 인격이나 능력이 업ㅅ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 그대는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는 불쌍한 순교자가 되어 지옥에 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보기를 바란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갈라디아서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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