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제 3 과
차별하지 말라(야고보서 2:1-13)
2장 1-13절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에 대해 비난하고 있습니다. 편애는 주님의 본이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앙 속에는 속물적인 것이나 차별대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차별을 금함(2:1)
우선적으로 그런 행동은 명백하게 금지되었습니다(1절).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러한 훈계가 신자들에게 주어진 점인데, 이는 "내 형제들아" 라고 한 인사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취하지말라" 는 말은 "품지 말라" 또는 "행하지 말라" 는 말로도 볼 수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가리킵니다. 이 믿음은 주님의 신실하심이나 미쁘심에 의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실체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다" 라는 구절은 차별대우하는 불신자들의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묶어보면,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행하면서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말라" 고 말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속물근성이나 카스트의 차별 등은 참된 기독신앙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에 굴종하는 것은 영광의 주님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태생이나 인종, 성 또는 재산 때문에 멸시하는 것은 믿음을 부인하는 행위입니다. 물론 이러한 명령이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관원들이나 장로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가르침과 모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정해야만 하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롬 13:7). 또한 이 구절에는 어떤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거나 또는 다른 인위적인 구별을 갖고 있음으로 인해 그 사람들에게 아첨하여 섬기는 문제도 들어있습니다.
차별에 대한 예(2:2-4)
야고보가 2-4절에서 제시한 생생한 예화에 의해 그러한 모습이 분명해집니다. 가이 킹은 이 단락의 제목을 "짧은 안목을 가진 안내인" 이라고 멋지게 붙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지역교회의 모습입니다(개역 성경은 "교회" 라고 하지 않고 "회당" 이라고 하였지만 "회당" 의 곤본적인 의미는 사람이나 사물을 함께 모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가 꼭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화려한 옷을 입고 금반지를 낀 우아한 신사로 보이는 사람이 막 도착하자 안내인이 허리를 굽히고 손을 비비며 그 귀한 손님을 앞자리의 훌륭하고 잘 드러나 보이는 곳으로 안내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내인이 문으로 다시 돌아오자 또 한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이번에는 소박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2절의 "더러운 옷" 으로 번역된 말은 그 사람이 누더기 옷을 입었다든지 세탁을 해야 할만큼 더러운 옷을 입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삶을 나타내는 단순하고 소박한 옷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 안내인이 이번에는 그 사람을 뒤쪽에 세워놓든지 자기 자리 앞의 바닥에 앉도록 함으로써 회중들을 당황케 하지 않을 방법을 교묘하게 찾았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믿을 수 없게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화를 좀 과장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우리 가운데서 인위적으로 차별하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아마도 현대의 교회에서 가장 분명한 예는 다른 민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일 것입니다. 흑인 신자들은 많은 경우에 배척을 당하거나 적어도 달갑지 않은 느낌을 주게 됩니다. 회심한 유대인들은 늘 진심으로 영접되지 않습니다. 동양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차별대우를 맛보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민족적인 관계에 대한 모든 영역에서 막대한 사회적인 문제를 초래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원리에 진실해져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는 진리를 실제적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차별의 악함을 드러냄(2:5-11)
차별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전혀 조화되지 못하는 것으로 야고보는 5-13절에서 그에 대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신자들이 부자에게는 호의를 보이고 가난한 자는 업신여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 네 가지 이유를 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보시는 사람을 괄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5, 6상).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께 선출된 자요, 하나님께 선택된 자며, 하나님의 후사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자들은 부자가 아닌 가난한 자들임을 우리는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친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1:5). 주님의 말씀을 즐겁게 듣는 이들은 부자나 귀인이 아닌 평민들이었습니다(막 12:37). 귀인들보다는 어리석고, 약하고, 천하며, 경멸받고, 무시당하는 자들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고전 1:26-29). 부유한 자들은 대개 믿음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재물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믿음에 있어서 부유한 자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을 조사해보면 아마도 대부분이 가난한 자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그들이 부유하고 영광스러운 지위를 차지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날 우리의 주 곧 구주의 나라에서 높임을 받을 자들을 모욕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고 위험한 일입니다.
부자에게 특별 대우하는 것이 어리석은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하는 특징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6절 하).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과 약간의 혼란이 있습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 나오는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6절에 나오는 그 부자가 신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왜 그들이 부자라는 것으로 편애하느냐? 너희가 그런일을 한다면 너희를 압제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자들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칼빈(Calvin)은 "어찌하여 너희를 죽이는 자들을 존중하느냐?" 라고 말하며 이러한 논쟁을 일축하였습니다.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어리석은 세 번째 이유는 그들은 습관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나쁜 말이나 욕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인 또는 그리스도를 좇는 자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명예로운 이름입니다. 주님을 대적하여 욕하는 것이 부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가난한 자들을 핍박할 때 구세주에 대한 가장 악한 말로 핍박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특별 대우합니까? 부자들은 대개 주 예수님을 존중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 이라는 말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침례에 관계하여 봅니다. 신자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바로 이 이름이 부자들이 습관적으로 망령되이 일컫는 이름입니다.
야고보의 네 번째 주장은 부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이 사랑의 법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8절). 사랑의 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그들을 대접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가난하다는 것만으로 멸시받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을 그러한 이유로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씀은 신약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보듯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나보다 못한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의 복되신 구주를 알게 되도록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따라 결정을 하는 매우 자기 중심적인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부자에게서 사회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보상을 기대하기에 그들의 비위를 맞춥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유익을 끼칠 가망이 거의 없기에 그들을 무시합니다. 이 최고의 법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 최고의 법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우리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서 교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눅 10: 29-37). 이 사랑의 법은 왕에게 속한 법이며, 모든 율법의 왕이기에 최고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 최고의 법에 저촉되므로(9절) 죄와 범법이 됩니다. 죄는 하나님의 뜻에 적합치 못한 모든 것이며, 하나님의 기준에 못 미치는 것입니다. 범법은 알고 있는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떤 행동이 죄라는 것은 그것이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지만, 범법은 그 죄된 행동을 금하는 특별한 법이 주어질 때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이 죄라는 것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며, 또한 범법하는 것도 되는데 그것은 그것을 금하는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하나를 어기면 모두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10절). 율법은 10개의 고리로 된 사슬과 같기에 한 고리만 끊어져도 그사슬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계명은 어기면서 지킬만한 것들만 지키는 것은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하나님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11절). 어떤 사람이 간음죄는 짓지 않을 지라도 살인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어긴 사람입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율법의 정신은 우리의 이웃 사랑하기를 우리 몸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간음이 분명히 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지만 살인도 역시 그러합니다. 또한 속물근성과 외모로 취하는 것 역시 이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죄 중 어느 하나에 걸리더라도 율법의 명한 것을 범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야고보의 주장으로 인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 문제는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는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명히 십계명을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분명히 그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계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십계명 중 후반 다섯 계명을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을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놓는 것은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로마서 6:14에서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고 말씀하며, 로마서 7:6에서는 "우리가....율법에서 벗어났으니" ; 로마서 7:4에서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하였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2:19; 3:13; 3:24,25; 디모데전서 1:8, 9; 히브리서 7:19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7-11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계명 아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야고보는 이 은혜의 시대에 율법의 요소들로 그리스도인들을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은 생활규범으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모범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십니다. 율법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형벌이 있습니다. 율법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어긴 형벌을 갚고자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과 그 형벌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원리 중 어떤 것들은 그 가치가 영구적입니다. 이러한 교훈들은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우상숭배, 간음, 살인, 도적질 등은 처음부터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는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십계명 중 한가지 계명을 제외한 아홉가지 계명이 여러 서신서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한가지 반복되지 않은 것은 안식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 계명은 도덕적인 계명이라기 보다는 의식적인 계명이기 때문에 안식일이나 한 주의 일곱번째 날을 지키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한 곳은 없습니다. 한 유대인이 일곱째 날에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날을 하나님께서 구별되게 하셨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서신서들에서 반복된 아홉 가지 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의로운 교훈으로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적질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또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자는 구원을 잃어버린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은혜로 너희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너희가 나를 사랑함으로 거룩하게 살기를 원한다. 내가 얼마나 너희를 바라고 있는지 알고자 하면 신약성경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는 너희가 십계명 중 반복되고 있는 아홉가지 계명을 보게되겠지만 실제적으로 율법이 요구하고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주 예수의 가르침을 보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실 야고보는 신자들을 율법과 그 저주 아래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요 따라서 너희는 저주를 받아 죽게 된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것은 "너희 신자들은 더 이상 율법의 속박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율법 아래 있으니 옳은 일을 행함으로 자유하라. 모세의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을 주지도 않고 그 계명을 어긴 너희를 저주한다. 은혜 아래 있는 너희는 네 이웃을 사랑할 힘을 받았으며, 또한 그것을 행하면 상을 받게 된다. 너희는 이것을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행하지 말고 너희를 사랑하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이러한 기준에 의해 너희가 상급을 받게 되든지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상급의 문제이다" 라는 것입니다.
편파적인 자가 되지 말라(2:12-13)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는 말은 말과 행동을 나타내는 것입니다(12절). 말과 생활은 일치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편파적인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유의 율법을 어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3절은 문맥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야고보는 지금 신자들에게 말하고 있기에 이것은 죄의 영원한 형벌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형벌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치루어졌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주님의 자녀인 우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행하지 못할 것이며, 타락된 상태가 초래할 고난을 맞게될 것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기보다는 인애를 나타내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심판이 "부자연스러운 일" 이십니다. 이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었다면 심판에 임할 때 자랑할 수 있으나, 혹 우리가 올바르게 비난했을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우리도 긍휼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는 긍휼은 언제나 심판보다 위대하다는 의미에서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견해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면 심판은 우리를 넘어뜨릴지라도 긍휼로 말미암아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편파성에 대한 중요한 주제로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이든 사람들보다는 젊은 사람들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평범하고 못생긴 사람보다는 멋진 사람들과 사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사람보다는 유명한 사람들의 편을 들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신체적으로 장애를 갖고있는 사람들은 피하면서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들과는 함께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자보다 부자에게 더 호의를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와는 다른 "이방인들" 에게 냉대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가장 하찮은 신자를 대하는 방법이 곧 우리가 주님을 대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마 2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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