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아사는 인생들이여!


                            속아사는 인생들이여!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전도서 7:10).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깨우치기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참된 지혜를 계시하사 그 어리석음 가운데서 건지시기를 원하신다.

   필자는 인생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전도서를 살피고 있다. 이 전도서는 어리석게 속아사는 무지한 인생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인생은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자신의 종착역을 알지 못하고 속아사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속아사는 인생들에 대해서 성경 안에서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첫째로 인생은 자신의 생각에 속아산다.


   사람들은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또는 금년보다 내년이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때에는 여러 면에서 더 나은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간다.

   학생들은 상급학교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청년들은 결혼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아름다운 아내를 얻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예쁜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혼 부부들은 날마다 더해지는 저금통장을 기쁘게 여기며, 재롱동이 아기를 신기해 하며,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 그들은 아이들이 자라감에 따라 아이들에게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녀들이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형편이 나아질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실체가 확실히 나아지고 있는가? 진정 그들의 소망처럼 그들의 행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인가?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전도서 6:9).

   인생들의 보장되어 있지 않은 소망은 말씀에 기록된대로 한낱 헛된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개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소년처럼 헛된 공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생의 모습을 잘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눈 앞에 나타난 현실이, 나타나지 아니한 심령의 공상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인생에게 좋은 교훈을 준다. 실제로 공상에 잡혀있을 때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나 현실에 충실하면 유익을 얻을 뿐만 아니라, 형편을 어느 정도 좋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 노력으로 좋은 열매를 얻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공상만을 가지고 헛되이 배부른 사람보다는 노력하여 현실을 잘 가꾸어 나가는 것이 났다.

   그러나 사실이 이와 같지만 이것도 헛되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참된 평안, 확실한 행복, 인생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은 진리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공상적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다가 문득 문득 뒤를 돌아볼 때마다 " 지난 날들이 좋았었다" 고 푸념하기 일쑤이다. 서두에 기록한 말씀처럼 " 옛날이 오늘보다 나음" 을 한탄하는 것이다.

   필자는 며칠 전 내과의사로부터 슬픈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내용인즉 서울 법대 3년생이라는 어느 청년이 얼마 전부터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여러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다. 정밀진찰을 해본 결과 소화기를 비롯한 내장에 암세포가 퍼져 있어서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꺼질 시한부 생명이었다. 그는 학업보다 치료부터 하라는 의사의 말에 4학년 등록을 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렇게 자기 길을 고집하는 청년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 가령 그가 건강하여 최고의 실력으로 법관이 되었다고 하자. 그것이 그 인생에 진정한 행복일 수 있을까? 모든 고뇌와 고통은 그에게서 다 사라진 것일까?

   아!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룰 수 없는 헛된 소망에 잡혀 있는 인생의 허탄함이여... . 바람을 잡는 헛됨이여, 헛됨이여... .


   둘째로 인생은 세상에 속아산다.


   세상은 인생들에게 속삭인다. 세상 어디엔가는 행복이 있다고... . 달콤하고 그럴듯한 속삼임으로 인생들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순간 순간 인생들을 즐겁게 하는 일들을 통해서 사람들을 그 속에 빠지게 한다.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이 세상에 살았던 솔로몬 왕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낙은 거의 다 누렸던 왕이었다. 전도서 2장에 기록된 것처럼 그는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더이상 요구할 필요가 없도록 누렸다. 그러나 그는 동일한 장에서 "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고 하였다.

   왜 웃음을 논하여 미친 것이라 하였을까? 그것은 해 아래 인생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도 진정한 행복의 웃음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없는 세상, 죄 용서함이 없는 세상,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의 웃음이 무슨 진정한 웃음이겠는가?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실수로 범죄하여 형무소에 갇혔다고 하자. 그는 형무소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일들로 인하여 때때로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있어서 진정 기쁘고 평안한 웃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순간 순간 일들로 인하여 크게 웃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웃음은 아닌 것이다.

   인생도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에 매여 지옥으로 가고 있는 인생에겐 잠시 잠시 즐거움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진정한 행복의 웃음은 아닌 것이다.

   사단은 세상의 그럴듯한 유혹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 빠져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게 한다. 요한 사도가 권면하고 있는 말씀을 들어보라.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7).


   셋째로 인생은 사단에게 속아산다.


   사단은 여러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인생으로 하여금 내세를 믿지 못하도록 속이고 있다. 인생들로 하여금 절대로 지옥은 없으며 천국도 없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역사한다. 사단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역사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 중 두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첫째로 기독교의 모습을 통해서 그렇게 하고 있다. 사단은 오늘날 기독교계에 깊숙히 개입하여 기독교를 교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변질, 타락시키고 있다. 사단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타락시켜 선한 간증을 나타내지 못하게 하여 기독교계를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속이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행실이 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둘째로 사람들의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한다. 사단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신의 생각들을 심어줌으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주라도 능히 다 수용할 수 없는 크신 하나님을 제한된 사고와 육체를 가지고 측량하다가 이해가 되지 않으니 하나님은 없다고 결론내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이 속고 있는 이 세가지 이유에는 사단이 절대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사단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천국과 자신의 영혼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 헛된 소망에 사로잡혀 헛된 것에 모든 인생을 허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단은 세상의 수많은 쾌락적인 것과 욕망을 추구하게 함으로 인생을 속여 이생에만 관심을 쏟게 한다. 이와 같이 헛된 일에 잡혀 인생의 나날들을 보내는 동안 육체는 점점 낡아져가므로 죽음을 재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모든 기회들을 사단에게 속아서 다 허비해 버리고 영원한 멸망의 지옥을 향하여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오! 우리 모두 생각하여 보자. 멸망의 지옥에 떨어진 속아 살아온 인생들의 절규를... . 그들이 이 세상에 살 때는 괴로운 세상, 답답한 고통의 세상이라고 하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떤이는 실제로 괴로운 세상을 한탄하여 자살하는 이도 있지 아니한가! 그러나 그들이 멸망의 지옥에서 부르짖는 절규 중에는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생각했던 옛날이 오늘보다 나았다" 라는 탄식이 있을 것이다. 온통 황금같은 모든 시간들을 사단에게 속아서 헛되이 보내버리고 뜨거운 눈물 속에 탄식과 통곡으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후회할 것이다.

   다음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라.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복음 13:50).

   필자는 최근 어떤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친구를 살인한 사람의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었다.

   " 친구에게 배반당한 것, 즉 친구에게 속았다는 생각을 떠 올릴 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세상에서 속는 것은 한시적이지만 사단에게 속아 지옥의 고통 속에 들어 가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자신에게 속고, 세상에 속고, 사단에게 속아 멸망의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후회하고 통곡하는 인생은 인간으로서 가장 불행한 모습인 것이다.


   사랑하는 독자여! 부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하나님은 영원한 진리요 사랑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따뜻한 품 안에서 금세와 내세의 복락을 누리라.

   "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 7).


                                                                                                   -전도자 허윤욱-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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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증문


      주님이 사랑하신 '세상' 가운데 속해 있는 '나'

                                                                                        -정난영(원당교회)-


   지금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닐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교회 다니는 것을 그저 하나의 종교를 갖는 정도로 생각했으나 덕분에 많은 종교들 가운데 유독 "기독교" 라는 것이 제게는 친밀하게 느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철부지였습니다. 심지어는 성당에도 잠시 나갔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고등학교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는 친구였는데 제게 함께 다닐것을 권유했습니다. 저는 교회라는 곳이 그리 낯설지 않았기 때문에 함께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다녀보았던 때하고는 제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았고 성장해 갈수록 그동안 지어온 죄에 관해서도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수련회가 있어서 그 친구와 함께 기도원에도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보았던 사람들의 모습(방언이라고 말하던 알 수 없는 소리들과 큰소리로 기도를 하며 우는 모습)에 전 그만 놀라고 말았습니다. 신령하기보다는 두려웠습니다. 불을 끄고 드럼을 치면서 분위기를 점점 더 고조시켰습니다. 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다시는 기도원에 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교회에 출석했지만 말 그대로 출석하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놀라운 일이 고등학교 3학년을 졸업할 즈음에 생겼습니다.

   언니가 언젠가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집에서도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전 그 모습을 보면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내심 놀랐습니다. 어려서도 그렇고 저는 교회를 여러 군데 다녔었지만 언니는 전혀 다니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교회를 다녔어도 저는 집에서 성경을 펴 보지도 않았었는데 언니는 시간이 나는대로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언니는 제게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전 교회는 다녀보지도 않았던 사람이 교회라면 훨씬 오래 다닌 저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데 대한 자존심 때문에 매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져갔습니다.


   92년 11월 28일.

   제게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던 하루를 전 잊을 수 없습니다.

   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92년 1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전도집회가 있었습니다. 언니에게 가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첫날은 가지 않았습니다.

   둘쨋날, 집회에 참석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의 주제는 "율법과 은혜"였습니다. 그때의 말씀은 평소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에 대한 의구심과 구원에 대한 알 수 없는 것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제가 다녔던 교회에서 간단한 세례문답을 통해 세례를 받았지만 그건 형식에 불과했고 암기력을 인정해 주는 정도의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제게 한번도 예수님께서 저를 위해 해주신 일에 대해서는 자세히 얘기 해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그저 교회에 잘 나오라고, 열심히 하라는 얘기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제 친구조차 자신이 방언을 한다는 것과 하나님 앞에 잘못 행했을 때 벌을 받은 것들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나의 영적인 문제에 관하여 염려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제게는 여러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였지만 예배시간에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을 보면서 저런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신앙생활은 단지 율법에 속해서 두려움 가운데 해왔던 일방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날, 말씀이 끝난 후 여러 형제, 자매님들이 오셔서 제게 똑같은 질문들을 하셨습니다.

   "구원받으셨어요?"

   저는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꿇고 기도했습니다. 진정으로 구원받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날 저녁, 11월 28일, 말씀 시간이 끝난 후 어떤 형제님과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교제를 했습니다.

   그 때 여러 말씀들을 펴 보이셨는데 그 중에서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바로 저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어릴 때부터 노래로 부르기까지 했지만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그 말씀이 너무나 놀랍게 제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세상" 을 사랑하신다는 그 말씀. "세상" 속에 저도 포함되어있음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또한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을 통해 죄인인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게 되었고 요한복음 5장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는 말씀을 통해 이제 죄의 심판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던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저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장 12절의 말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으로 이제 하나님과 부자 관계가 성립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날 이후로 이제 구원받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도 갈등은 있었습니다.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는 말씀을 기억하면서 늘 부담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몇 주를 그 교회에 나갔지만 복음의 말씀과 생명의 능력이 없는 그곳에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복음이 증거되는 교회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93년 5월 31일 침례를 받았습니다. 예전에 받았던 세례와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물에 온 몸을 담그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과, 물에서 나오므로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산 것을 몸소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순종했던 것처럼 저도 이제 예수님께 순종하겠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을 알아가는 기쁨도 누리고, 자유도 누렸지만 때로는 고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핍박이 오히려 저와 언니의 믿음을 굳게 했었고 둘은 동역자가 되어 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부모님께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번 사단의 방해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아직까지 가정에서 더 이상의 열매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주님이 거두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저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게 하시며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게 하시고 주님의 일에 열심을 갖게 하셨습니다.

   여러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친구들은 여전히 종교의 하나일 뿐이라 여겼습니다. 예전에 함께 교회를 다녔던 친구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도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저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 친구가 받은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더욱 제 말을 듣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 때, 답답한 나머지 혈기를 부리기까지 했습니다.

   현재 그 친구는 교회에 나가지도 않을 뿐더러 심지어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조차 부인하고 싶다' 라고 제게 얘기하였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자신을 못 박으라 외쳤던 그들을 바라보며 주님께서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주님께서 받으셨던 육체의고통보다도 더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이런 일을 통해서 제게 예수님의 마음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그리고 죽으시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되고 그런 저를 사랑하시어 대신 죽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는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4~6)

                                                                       우리는


미련한 우리는

영혼의 목자 되신 주님을

알아 보지 못했고,

어리석은 우리는

영혼의 주인되신 주님을

알지 못했다네.

잃어버린 자들을 찾으러

먼 곳, 이 땅까지

주님은 내려 왔건만,

우리는 쇠와 뭉치로 그를 쳤도다.

선한 목자는

우릴 위해 목숨을 버리고,

착한 목자는

우릴 위해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구하시고,

은혜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주님은 지금도 사랑하셔

기다리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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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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