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소식]

 

                                              천국은 공짜다!

 

                                 공짜 모르고

                          지옥간 사람이야기(12)

 

                                                                                                                         - 허 윤욱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롬 3:24).

 

지옥에서

나는 유명한 안티기독교인으로 지옥에 왔습니다. 입만 열면 기독교를 비난하고 성경을 공격하고 예수 믿는 사람을 평생 비판만 하다가 지옥에 왔습니다.

나는 지금 지옥에서 이 말을 합니다. 나의 고통은 언어로 다 형용할 수 없습니다. 온몸이 아프고 뜨겁고 고통스럽습니다. 내 몸은 까맣게 타 화상을 입은 상태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는 사람인 것을 여기 와서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입니다. 물론 나를 지옥에 올 수밖에 없도록 잘못된 것을 심어준 사람들을 비난하고 원망해 보지만 모두가 허사입니다. 사실은 남을 탓하기 전에 내 탓입니다. 모두가 내 탓입니다. 내가 무서운 것은 이 미치도록 아니 미쳐버린 상태로 고통을 당하는데 여기서 빠져나갈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괴로움은 끝난다는 약속이 전혀 없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끔찍한 고통입니다. 세상에 있는 여러분들이여! 혹시 내 말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수만 있다면... .인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깨닫고 구원을 받아 이곳 지옥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한 유언

나는 15살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늘 기침을 많이 하셨고, 집에 누워 계시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건강이 괜찮으면 나가서 일하러 다니곤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건축 일을 하시는데 열심히 하셔도 집안 살림이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15살 되던 해에는 다른 때보다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냈습니다. 그냥 길을 걸어도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아버지의 기침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는 천식을 앓고 있었습니다. 한 번 기침을 하면 연달아 한참씩 하곤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큰 아들인 나를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절대 예수 믿지 마라." 나는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왜 그러냐고 묻지는 못 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일하고 돌아오시다가 버스 속에서 천식으로 쓰러지셨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어찌 하여야 할까? 어떻게 하여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 아버지의 유언은 나의 마음을 어지럽혔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나를 지옥까지 데려온 결과가 되었습니다.

 

청년시절

이상한 유언이 나의 삶을 이상한 방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동생들에게 교회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나도 모르게 기독교인을 만나면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색안경을 끼고 저들을 살피는 습관도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에는 이상한 기독교인들만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님을 성실하게 섬기는 기독교인보다 이기적인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습니다.

또한, 27살에 입사한 첫 직장에서의 상사도 기독교인이었는데 직원들에게 별로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하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하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뇌물 상납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교회에서는 안수집사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엔 안수집사가 무엇인지 잘 몰랐지만 모든 것을 알게 된 이곳에 와보니 장로 다음으로 대단한 직분이었습니다.

나는 여자 친구도 사귄 적이 있었는데 그녀도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얼마동안 사귀면서 보니 겉으로는 착해 보였으나 실제로는 여러 가지로 실망했습니다. 나는 얼마 후 이별을 하면서 그에게 예수를 믿으려면 예수 욕은 먹이지 말라고 충고하며 돌아섰습니다.

그 즈음에는 인터넷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나는 인터넷에 들어가니 많은 안티 기독교인이 있는 것을 알았고, 곧 그들의 안티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스포츠에도 기독교인이 나오면 그냥 욕을 해댔습니다. 하나님을 비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가 싫었습니다. 알고 보면 싫어할 만한 큰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싫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바퀴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만나면 송충이를 본 듯 마냥 피했습니다.

술좌석에서 종교 이야기가 나오면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술좌석에서 내가 제일 많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주 편리하기도 하지. 일주일간 온갖 나쁜 짓 다하고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잘못했다고 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 준다지. 참 편리해' 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장년시절

나는 장년시절에 더 높은 차원의 안티 기독교인이 되어갔습니다. 직장의 높은 사람이나 아랫사람 중에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나보다 착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예수 믿으면서도 술 먹고 못된 짓 다했습니다. 심지어 2차 노래방에 가고, 또 더 나쁜 짓도 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교회에서는 집사님이라고 하니 '나는 너희들보다 낫다. 너희들이 천국가면 나는 더 먼저 천국에 간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나는 비록 술은 먹었지만 아내나 자식들 앞에 부끄러운 짓 안하고 가정과 직장에 충실했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은 안 믿어도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그 자들보다 나를 먼저 천국에 부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동료들 앞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많았습니다.

내가 기독교를 반대한 이유는 신문 지상에 목사가 음란한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수시로 올라왔고, 돈을 횡령했다는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기독교인들이 당파를 지어 서로 싸우며 교회가 갈라지는 전쟁을 수없이 들었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불교도 각목으로 서로 패고 싸우면서 전쟁을 하곤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는 별로 관심이 없고 목사들 잘못하는 이야기만 귀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세상이 있을 때 엄청나게 큰 교회 목사가 돈 문제 이권 문제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교인들이 목사를 두둔하고 그 반대파는 목사를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둘 다 싫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 저들은 헛것을 믿는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전능자라는데 저들을 당장에 심판해 버리지 왜 그냥 두겠는가? 절대로 신은 없다. 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바보다. 저들은 엄청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기꾼이다. 나는 지금 바른 말을 하는 정의의 사자다'는 생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는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인터넷에는 안티를 도와주는 많은 영상물마저 풍성했습니다. 성경을 폄하하는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을 폄하하는

동영상물도 많았습니다. 기독교의 잘못된 부분을 드러내는 영상물도 범람했습니다. 지금 알고 보니 사탄이 사람들의 생명을 노략질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작품들인데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집안에 사건이 터졌습니다. 내 동생의 아들이 기독교 이상한 종파에 빠져서 갑자기 학교도 그만 두고 교회생활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찾아가 보았지만 면회도 할 수가 없는 이상한 집단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만났는데 예수님이 오셨다느니, 세상이 곧 끝난다느니, 기독교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를 늘어놓았습니다.

동생네는 평안이 깨졌습니다. 가정의 평화가 깨지니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동생의 사업도 괜찮았는데 그 일로 사업에 소홀하다 보니 어렵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동생집에 일어났습니다. 동생은 조카를 불러다가 집에 가두기도 하고, 매를 때리기도 하였지만 해결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나는 더욱 기독교라 하면 이를 갈았습니다. 결국 조카가 말하기를 3년이 지난 어느 날 세상이 끝난다고 하기에 만약 그때에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거기서 나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는 양해하고 집에서 거기 다니든 말든 상관 않기로 약속 하였습니다.

약속한 3년 후 그날이 되어도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조카는 약속대로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 교회를 완전히 끊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카가 약 5년 이상을 확신에 차서 따라가다가 거짓으로 밝혀지니까 허탈한 마음을 종잡지 못하고 공황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이상하게 되었습니다. 또 대학을 다니다가 중단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사회적 무능력자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하는 사업을 도우며 살아가지만 인생 낙오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나는 이 일을 겪으면서 기독교라 하면 이를 갈고 바난하였습니다.

 

행동으로 안티기독인이 되다.

내가 살던 동네는 도시지만 변두리였고 비교적 동네 사람들끼리 우애 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하면서 보니 동네 사람 몇이 모여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물으니 동네에 교회가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벌써 땅을 사서 건축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안 될 일이요. 왜 이 동네에 교회가 들어옵니까? 막읍시다."

그날 저녁에 동네 사람들을 다 모았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건축 반대 위원회" 위원장으로 위촉되었습니다. 그날부터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동네 택시 기사 두 명을 앞세워, 기도 소리에 새벽잠을 잘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게 했습니다. 시청에 민원을 내고 반대운동을 맹렬히 전개했습니다. 교회 측도 자기들이 합법적으로 건축하는데 왜 방해하느냐고 항의를 하고 진행하려 했지만 우리의 반대가 너무거세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심정

나는 지옥에 와서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봅니다. 아버지는 역시 기독교인에게 피해를 보고 실족하여 예수 믿지 말라고 유언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와 같은 것은 사탄의 간교한 역사였음을 여기 와서 알았습니다. 지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사탄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사탄이 종교를 만들어서 사람들을 속여 이곳에 데려오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야 가슴을 치고 통곡하지만 사탄에게 속아 이곳에 온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것은 기가 막힐 일입니다. 내가 평생 안티기독교인으로 생활하고 이곳에 온 것은 완전한 사탄의 작품입니다. 사탄이 준비한 시나리오대로 살다가 지옥에 온 것입니다. 지금 가슴을 쳐도 이제는 끝난 싸움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난 상황에 이곳에 와서 보니 성경에 사탄의 정체가 모두 나와 있습니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계 12:9).

이 말씀에 땅으로 내어 쫓긴 사탄이 땅에 와서 사람들을 꾀어 지옥으로 데려간다고 한 것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명백하게 기록하여 주었는데 나는 안티기독교 노릇만 하며 살다가 사탄에게 속아 이곳에 왔습니다. 다시 부탁드리니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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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김] 제자도

횃불 2020. 6. 19. 09:11

[되새김]

 

                                                    제 자 도

 

                                                                                                                         - 마일즈 스텐포드

 

그리스도의 제자는 먼저 주님과의 교제를 가오는,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을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자도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을 경험하는 일과 십자가에 참여하는 삶을 사는 것은 둘 다 참된 제자도의 조건으로 전파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해답이 되신다. 하지만 그분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십자가가 필요하다."

 

영적인 진보에 있어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억지로 압박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시는 인도자로서 우리를 한걸음씩 인도하여 가십니다. 우리가 자기노력을 의지하여 싸우다보면 패배하게 되고, 그 때 우리는 이러한 절망적인 실패에 대한 해답을 갈구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십자가에서 해방에 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동일시), 이로 인해 그러한 자유로 들어가고 싶은 굶주림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의 사귐을 위한 자유입니다. 해결책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십자가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께 성별되게 만들 수 없고 어떤 것도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십자가만이 거룩에 대한 장애물을 죽음의 자리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다" (G. Watt).

 

"잃어버린 자들을 향한 모든 성공적인 사역의 배후에는 내면에 영적인 충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영적 충동의 배후에는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재생산하시는 성령이 계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특징적인 표시는 바로 십자가이다. 우리가 섬김에 적합한 사람이 되려면 십자가에 대한 살아있는 경험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한다."(J. E. Conant).

 

주님께서는 제자도에 대해 언급하실 때보다 더 단호하고 확실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9:23).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눅 14:27).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아(self)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따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자기에 대한 죽음을 불러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의 새로움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는 옛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고, 새 것을 향해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하자면, 그는 "죄에 대하여는 죽어버린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 (롬 6:11)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위해 주 예수님께서는 각자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최종 결론입니다. 이제부터는 "어떻게" 할지 그 방법에 대해 살펴봅시다.

 

우선,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선 십자가가 우리가 흔히 십자가라고 부르는 떠맡기 싫은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십자가는 생명을 포기하고 자기에 대해 죽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님께서 이러한 삶을 사셨듯이, 이러한 삶은 또한 우리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어려운 순간보다 오히려 번영의 순간에 더 필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십자가의 충만한 축복이 우리에게 열릴 수 없다."(Andrew Murray).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십자가와 주님께서 말씀하신 십자가를 혼동하지 않으면 좋겠다. 때로 자기 연민에 빠진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를 한탄하면서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십자가의 관점을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취할 때,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고,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며, 그분의 장사됨이 우리의 장사됨이 되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며, 그분의 부활생명이 우리의 생명의 새로움이 될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어떤 무거운 짐이나 어려움, 질병, 있기 싫은 상황이나 관계를 금욕적으로 견디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일들을 견디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이런 것들을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십자가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져야 하는 십자가는 갈보리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십자가입니다(갈 2:20 참조). 바로 그 십자가에서 영원한 해방선언이 어린 양의 보혈로 서명되었고 성령으로 인쳐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이 해방의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하기 슬프지만, 자신들이 받는 죄의 억압을 수용하지 않고 그것을 미워하는 자리에 온 사람들만이 자유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십자가에 대한 적대감은 죄인이든 성도들이든 단순히 도덕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메시지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경험하는데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만이 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유에 대한 굶주림이 강력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노만 다우티(Norman Douty) 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영적인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길은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길이 불신자들을 불쾌하게 하듯이 이 길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싫어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즉 죽음의 자리로 이해하게 되면, 그는 십자가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다른 길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만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사역을 완수하신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십자가의 피할 수 없는 길에 마침내 복종하기까지 우리에게 굶주림을 허락하셔서 지속적인 압박을 느끼게 하십니다.

자아가 우리에게 참기 어려운 존재가 될 때, 그리고 우리가 누가복음 14장 26절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 생명을 미워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질 준비가 될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깊은 부담과 주님을 닮고자 하는 갈망이 십자가의 효력-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비참한 속박의 참담한 시절을 오래 겪다보면 주 예수님 안에 있는 자유가 참으로 귀하게 느껴지고,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님과 바울의 태도를 동일하게 갖게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히 12:2). 사도 바울의 태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너희 안에 이 마음(태도)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5).

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사귐을 가로막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주는 십자가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성령께서 우리 개인을 위해 오랫동안 위탁 받아 보관해 오신 완결된 사역으로 여기고, 우리의 해방이 되는 십자가를 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의 위탁재산이 되는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우리가 십자가를 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속박이 그리스도 안에서 갈보리에서 깨뜨려졌음을 알게 되고, 자유에 대한 굶주림으로 인해 마음이 준비되면, 우리는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을 의지하게 되고 우리 것으로 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믿음으로 기쁘게 그리고 기꺼이 갈보리에서 이루어진 완결된 해방의 사실을 내것으로 취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진실로 죄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 있다고 여깁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우리의 경험에도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죽음의 완결된 사역을 깨닫게 하시고 이 사실을 모든 옛 본성에 적용시키십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죽음의 자리 곧 갈보리의 죽음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에서 돌아서서 십자가가 아닌 다른 것-우리 자신을 포함해서-을 의지하게 되면, 자아는 십자가에서 다시 풀려나 활동을 시작하면서 전과 같이 우리를 노예 삼으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을 의지하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아돌프 사피어(Adolph Saphir)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시작되고-'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도다'-주 예수님의 영광과 함께 끝나는 좁은 길은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을 자신 가까이로 이끄시고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길이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주님께서는 생명의 유일한 근원으로서 우리안에 사신다. 옛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섬김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옛 나에게 사망을 선고 하셨다. 우리의 삶에 주인은 둘이 될 수 없다.

만약 옛 '나'가 우리를 소유하고 있다면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 되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구속의 위대한 사실-'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을 기쁘게 붙잡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서 생명을 역사하게 하시고 우리를 자신의 종으로 삼으시며, 그분의 승리의 열차에 태워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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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꾀임(4)

횃불 2020. 6. 18. 09:13

[권두언]

 

                                                           꾀임(4)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나, 듣고 믿음에서냐?" (갈 3:1-5).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이제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인도하십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육신, 자기 노력을 통해 성도의 삶을 살고자 하면, 성령의 사역을 경험하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도 무익하게 됩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도덕적 행동이라기보다는 의식입니다(의식은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의 행위는 의미가 없습니까? 아닙니다. 행위는 구원의 증거입니다(약 2:14). 그리고 구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엡 2:10).

구약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그에 반해 신약은 "너는 살았다. 이를 하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행하면 이는 율법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얻은 것에서 비롯되면 이는 영적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악취이고 다른 하나는 향기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율법주의자들의 꾀임에 넘어간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바울 사도는 이같이 질문합니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갈 3:4). 구원의 경험이 너희에게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주를 통해 구원을 경험한 게, 성령의 은사로 충만을 경험한 게 무의미하냐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하나님과 경험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행 1:4). 이는 성령님입니다. 성령이 능력을 주셔야 제자들이 주님의 명령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셨다" 는 "풍성하게 공급한다" 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은혜로 후원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능력" 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본 기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안에서 구원의 목표를 이루십니다. 따라서 삼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리가 무엇을 더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이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성령의 인도, 하나님의 후원, 이 모든 게 믿음으로 여러분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게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우리가 받은 구원입니다. 나는 율법에는 관심 없습니다. 율법은 아무것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정죄할 뿐입니다."

 

누군가 영적인 지름길을 말하면, "성경의 비밀을, 영적인 비결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성령을 따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난 이미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나는 주님의 영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후원 외에 아무 것도 더하고 싶지 않습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의 은사의 도움을 받는 것 외에 내 자신을 위한 어떤 목표도 세우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을 믿음으로 받겠습니다."

처음 시작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첫 사랑을 회복하고 기억하고 지속적으로 해나가기 원합니다. 이 같은 이해가 올바른 성화의 길을 걷게 하기를 기도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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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간추린 교회사

 

 

제3장

국가교회 시대 (AD 312년-590)

AD 312년에 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한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모든 핍박을 중단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했다. 그는 만일 자기 국민들이 단일 종교를 갖는다면 제국을 하나로 결속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며, 결국은 방대한 제국을 다스리기가 더 쉬워지리라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했지만 사실은 그가 죽기 바로 직전에야 침례를 받았다.

그는 또한 일요일을 국정 공휴일로 정했다. 뿐만 아니라 핍박을 받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건물은 어디에서나 불태워지고 파괴되었었는데 콘스탄틴 황제는 그것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하락해 주었다. 값 비싸고 훌륭한 모양의 교회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으며 교회의 인도자들은 많은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주님의 일에 대하여 열정을 기울이기보다는 이 세상의 부(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 역시 영적인 일에 나태하고 무관심해졌다. 이렇게 하여 주님의 일은 점점 더럽힘을 받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인기 있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인들이 심한 핍박을 받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에 진정으로 마음이 감동되지 않는 한 아무도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명예로운 일로 여겨졌으므로 우상을 좇는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악한 행위들을 회개하지도 않은 채 교회에 영접되었다. 그들의 마음과 삶은 조금도 변화되지 않은 이전의 상태 그대로였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같은 악한 관습들을 기독교의 예식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황제는 자기가 온 세상을 기독교화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교회를 세속화시킨 일 뿐이었다.

얼마 후에는 그리스도인과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교회는 세속화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지키지 아니하셨더라면 아마 교회는 진리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에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에 오염되지 아니하고, 오직 그분의 진리만을 순종하고자 노력하는 소수의 성도들을 보존하고 계시는데(왕상 19:18), 이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로마의 감독이 다른 지역교회의 감독들을 지배하는 권한을 갖기 시작한것은 바로 이 시대부터였다. 콘스탄틴 황제는 동방에 위치한 비잔틴이라는 도시를 로마 대신 제국의 수도로 삼고 비잔틴이라는 이름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City of Constantine)로 바꾸었다. 오늘날 그 도시는 이스탄불(Istanbul)이라고 불린다.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를 떠난 후, 그곳에 그냥 남아있던 로마교회의 감독은 서방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가 되었는데, 이것은 곧 그에게 대단히 큰 권한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며, 그 권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 갔다.

우상 숭배자들의 사제장으로서 로마 황제가 지니고 있던 최고 승원장(Pontific Maximus)이라는 칭호는 콘슨탄틴이나 그 후대 황제들이 그대로 계승했다. 그러나 AD 366년에 그라티안(Giatian)이라는 그리스도인 황제는 이 칭호를 거부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와 같은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마교회의 감독은 AD 378년, 황제가 거부한 그 칭호를 자기를 위하여 스스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까지 그 이름(pontiff-로마교황을 지칭하는 말)으로 불리고 있다. 그들은 또한 아버지(father)를 의미하는 pope(pontiff와 같은 의미)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AD 400년부터 460년까지 생존했던 첫 번째 교황(pope) 레오는 베드로가 다른 모든 사도들의 머리(head)라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 다녀간 적이 있으며 베드로 사도가 바로 첫 번째 교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이 베드로의 지위를 계승했으므로 다른 모든 지역교회의 감독들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 레오는 수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을 자기 수하에 예속 시키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 지역에서도 레오의 이러한 요구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이라고 불리는 교회가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기 시작하였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많은 논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이단적인 교훈을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간에 많은 혼란을 야기했다.

예를 들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이 영원부터 존재하시는 분이심에 반해 성자이신 그리스도는 영원부터 계시던 분이 아니며, 성부와 동등한 분이 아니라는 가르침이었다. 한편 성부 하나님께서 아들을 창조하신 다음 그 아들을 통하여 만물을 지으셨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가르침은 결국 많은 혼동을 불러일으켜서 동로마의 대부분의 교회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서쪽 지역의 교회들은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분이시며 그분과 더불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참된 진리를 가르쳤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올바른 교훈이다.

이 시대에 들어와서야 성경은 비로소 그 국민들이 사용하고 있던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 전에는 단지 히브리어와 헬라어(그리스어)로 된 성경만 있었기 때문에 이 언어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성경을 번역하는 일은 참으로 오랜 시간과 힘든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위하여 일꾼들에게 능력을 주셨다.

이 시대에는 좀 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수도원이라고 불리는 격리된 장소에서 공동생활을 했다. 흔히 수도사로 알려진 이 사람들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사귀지도 않았다. 그들은 많은 시간을 오직 기도와 학문연구로 보냈다. 그 결과 그들 중에는 뛰어난 지식으로 인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거나 혹은 전도자로서 종사하기 위해 수도원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간 사람도 많이 있었다.

또한 이때부터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숭배함으로써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사람들은 사도들이나 순교자들의 훌륭한 행적을 지나치게 존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사람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그들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고 그들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도(聖徒)라 불렸지만(고전 1:2) 얼마 후에는 이 세상을 떠난 그리스도인 중에서 오직 몇 사람만이 성도라 칭함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오직 그들만이 자신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중보 기도를 드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로 우상 숭배자들의 사상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우상 숭배자들은, 세상에는 큰 신과 작은 신이 존재하고 있는데, 작은 신이 큰 신 앞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주님의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것과는 전혀 달랐다. 사도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다고 가르쳤다(딤전 2:5).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어지는 몇몇 사람들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게도 경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하나님의 어머니(Mother of God)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주 예수님은 참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불리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마리아도 성인(聖人)이므로 역시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초대교회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것은 우상 숭배자들의 또 다른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

우상숭배자들은 그들 자신이 처녀라고 부르는 한 여신을 섬기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신(神)들도 결혼하여 사람들과 똑같이 자녀를 낳았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이 여신은 처녀였다. 이러한 관습을 가지고 있던 우상 숭배자들이 구원받지도 않은 채 그대로 교회에 영접되자, 그들은 우상숭배의 한 변형으로서 마리아를 경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에도 마리아는 여전히 처녀인 채로 있었으며 결코 어떠한 종류의 죄도 지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실제로 여신을 조각한 상(像)에서 그 여신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거기에다 마리아의 이름을 새겨 넣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가 주 예수님처럼 죽은 후 삼일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말했으며 그녀를 "하늘의 여신" (Queen of Heaven)으로 숭배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예레미야 44장 15-30절에서 읽어볼 수 있는 대로 패역한 이교도(異敎徒)들의 옛 풍습이었다. 이와 같이 어리석고 악한 행위들은 계속 이어져서 성경이 오직 주 예수님께만 드리고 있는 많은 명예를 드디어 마리아에게도 똑같이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그 후 성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각한 상이나 그림들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악한 행위에 대하여 강한 반대와 이의가 제기되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우상 숭배자들의 영향력이 더 컸으므로 결국 반대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심지어 성인들의 유골이나 유품, 그리고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나무 조각이라고 전해지는 것들까지도 숭배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우상 숭배자들의 또 다른 관습에 지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명령은 물론 아니었다.

사람들은 또한 주님께서 명령하신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행하는데 있어서도 큰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주의 만찬을 비공개적으로 기념했다. 침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예식이 행해지는 자리에 참석하여 그 광경을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주의 만찬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분을 기념하기 위한 단순한 목적으로 행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떡과 잔을 통하여 주님을 기념할 때, 그들은 실제로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죄가 사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정말 얼마나 큰 오류가운데 빠졌는가?

이것은 마침내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행하고 있는 미사(Mass, 성체성사)로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써 자신의 몸을 몇 번이고 내어주신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시려고 자신의 몸을 결코 여러 번 죽음에 내어주시지 않는다. 그분은 이미 죄에 대한 대속물로 자신의 몸을 갈보리 십자가 위에 내어 주심으로써 단번에 모든 사람들의 죄를 영원히 사해 주셨다. 히브리서 10장 12-14절을 읽어보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주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으로 드린 그 제사는 죄에 대한 영원한 제사이며 결코 반복되지 않는 단번의 제사이다.

사람들은 또한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님의 사도들이 남긴 처음 기록들에서 우리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읽어볼 수 없다.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마다 구원을 받으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는 주님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에서 멀어져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운명할 때 어쩌면 그때까지도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거룩하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한 개인이 하늘나라로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은 그 자신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의지할 때뿐이라는 진리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도록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우상 숭배자들이 품고 있던 관념이었으며,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오시기 전부터 어떤 유대인들이 우상 숭배자들로부터 모방한 것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에는 먼저 연옥(purgatory)이라는 곳에 가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룩하게 될 때까지 불 가운데서 고통을 견디어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가 결코 아니며 복음 진리의 말씀에도 전적으로 모순되는 가르침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많은 악(惡)이 존재하였는데 교회까지 이것에 오염되어 교회 안에서도 점차 악이 번식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런 시대에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보존하고 계셨다. 그들은 다른 여러 나라에 복음을 가지고 갔다. AD 500년경에 게르만 민족의 조상들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로마를 정복했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역사하고 있었다. 정복자들은 복음을 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많은 거짓 가르침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진리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여 끊임없이 일하셨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 미혹된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보존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이나 사단의 능력보다 크시며 그분의 행하심은 참으로 기이하다.

많은 사람들은 계시록 2장 12-17절에 대해 당시의 교회에 관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 즉 세상과 짝한 곳이었다. 이 교회는 하나의 국가교회였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기는 하였지만 죄와 우상 숭배가 교회 가운데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많은 다른 거짓 교훈들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악한 세력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으며 주님을 위하여 신실한 삶을 살았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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