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횃불'에 해당되는 글 927건

  1. 2020.06.08 [되새김] 십자가
  2. 2020.06.07 [예배와 기념] 입맞춤의 의미
  3. 2020.06.06 [권두언] 꾀임(3)
  4. 2020.06.05 [기쁜소식] 하나님이 없다?

[되새김] 십자가

횃불 2020. 6. 8. 09:19

   [되새김]


                                                        십 자 가


                                                                                                                                                      - 마일즈 스텐포드


   이러한 진리들을 공부해 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인 굶주림과 궁핍이 빛과 이해를  얻는 데 필수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말씀의 보화를 빨리 열어주시거나 쉽게 열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깊음이 깊음에게 부르고" (시 42:7) 이 점에서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말씀을 깊이 파는 일, 기도, 묵상, 열망, 경험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적 실재는 다른 방법으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앞의 방법들로는 가능 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모든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들, 그분이 최상의 것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최상의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의 두 가지 측면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영적인 성장과 생명력 있는 봉사에 대한 열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갈보리는 모든 것의 비밀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서 무엇을 하셨느냐이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능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취해야 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개인적인 승리를 위한 비밀로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의지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삶에서 승리에 대한  경험을 알지 못할 것이다. 먼저 주님의 승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승리를 알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을 먼저 확보하셨고, 바로 이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확보하신 것을 이제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 거룩한 삶의 시작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사역 이상의 것을 보고 계셨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바로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볼 줄 아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보리의 이러한 두 번째 측면, 즉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있어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하시려고 우리 각자를 훈련시키십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보리의 첫 번째 측면,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가 이를 통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는 완결된 사역을 믿고 자기 것으로 삼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나아간 다음의 사실을 믿고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롬 6: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우리가 갈보리의 사실에 기초하여 지식 있는 믿음을 갖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 완결된 사역을 우리의 매일의 삶에 자유롭게 적용시키십니다.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을 위해 돌아가신 사실에 기초하여 서 있었고, 이러한 믿음의 행동으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칭의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간 사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신 사실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해방의 진리에 서라는 말씀의 권면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위에 서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죄의 권세 즉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점진적인 성화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서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존재 자체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성화 즉 영화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속물로서 홀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표로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십자가로 데려가셨고,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죽게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헤방될 수 있다. 치료될 수 없는 희망 없는 인류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방의 길은 우리를 아드님의 십자가로 데려가시고,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아드님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이다(고후 5:17). 우리가 성령과 협력할 때 성령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사실을 우리의 경험에 참된 실재가 되게 하실 것이고, 우리 마음의 병은 진정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게 되었고,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으며, 죄의 움켜잡는 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죄의 지배권은 무력화되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비하신 흠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완결된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붙들 때, 즉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매일 매순간 그것을 사실로 '여길' 때에야 우리의 삶에서 살아있는 실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길 때 성령께서 그 사실을 실재로 만드신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여길 때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실재로 만드신다. 죄는 그리스도인이 불신을 통해 허락하는 것 이상의 권세를 그리스도인에게 행사하지 못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살아있다면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Ruth Paxson).

   종교개혁은 영적인 출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부각시켰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시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것은 영적인 성장에 대한 적절한 강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구원받는데 그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성장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신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함에서 나타나는 죄의 권세를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도록 남겨두셨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구원을 받은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이 가신 것만큼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바울이 지적한 갈라디아 성도들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완결된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일, 그리고 역시 그분의 완결된 사역을 통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일이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갈 3:24).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고후 5: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았으니 그분 안에서 행하라" (골 2:6),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옛 생명을 처리하도록 방치되지 않았습니다. 옛 생명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원리와 거룩에 관한 교리가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갈보리는 칭의의 기초일 뿐 아니라 성화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선물 모두가 동일한 갈보리 사역에서 나온 것이고, 칭의와 성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그가 받은 구원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백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들을 처리하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손실이 일어난 후에 뒷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결과에 따른 책임을 수습하려는 것이지 근원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근원을 다루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죄의 물결을 잘라내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자백하더라도 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게 되는데, 성령께서 근원을 처리하신다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죄 짓고 자백하고 또다시 죄 짓기를 반복하는 일에 지치게 되면, 그들은 죄의 근원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바로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으로부터 기인한, 자신에 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이 처음 우리 마음에 비쳐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들(sins)을 지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죄 용서를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죄 용서를 발견하고 난 뒤에 우리는 다른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죄인의 본성이 있다는, 죄(sin)에 대한 발견이다. 우리 안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죄로 끌어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 힘이 작용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된다. 우리는 용서를 갈구하여 받을 수 있지만, 그리하고 나서 다시 죄를 짓게 되면서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즉 우리는 죄를 짓고 용서를 받고, 도 다시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원한다. 그것은 바로 해방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용서를 필요로 하고,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갈보리에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완결된 사역에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칭의의 문제에 대해 갈보리의 완결된 사역에 추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워야 하듯이, 해방의 사역에도 무언가를 추가해서는 안 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유로 들어갈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떠나서는 심지어 새 사람의 힘으로도 옛 사람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필수적이다. 옛 사람을 극복하는 일에 있어 십자가가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또 다른 형태의 도덕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노력으로 자아를 극복하려고 할 것이고, 그에 따라 그의 투쟁은 희망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C. Usher).


   마르커스 레인포드(Marcus Rainford)는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이 같은 헤결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죄의 유혹이 없어서 마음이 좋다는 이유로 마음의 신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임재로 인해 잠시 동안 마음이 새로워지고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본질적인 해결을 얻은 것은 아니다. 선행을 하면서 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해서 완전한 해결을 얻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죄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려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나는 내면의 원수인 육신, 옛 사람, 자아, 나, 옛 아담이 강탈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두신 자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에 놓여있다고 믿음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Ian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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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기념]


                                                              입맞춤의 의미


                                                                                                                             - 다니엘 스미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 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7-49).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1).


   입맞춤은 성경에서 많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화해의 표시로 입을 맞추었다(창 45:15).

   다윗은 요나단과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 입 맞추었다. 이는 우정의 입맞춤이다(삼상 20:41).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눅 15:20).

   바울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 할 것을(고전 16:20) 권면했다.


   중동에서는 오늘날에도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앉고 따로 인사하므로, 이 입맞춤은 남자는 남자와, 여자는 여자하고만 입을 맞추었다. 이는 "사랑의 입맞춤" (벧전 5:14)이며 인도에서는 애찬 (사회적 구분, 차별, 편견을 모두 부수는)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유다의 입맞춤


 "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8-49).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는 의미다. 이 배반의 입맞춤은 형식적인 인사의 일상적 입맞춤보다 더 과시적이다. 열 두 사도의 일원으로 가까이서 주님과 교제하던 기간 동안 그는 한 번도 주님을 "주님" 이라 불러본 적이 없다.

   즉 그의  제자됨은  연기이며, 위선이다. 유다는 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던 특권을 누렸다. 그는 주와 함께 있으면서, 주의 죄 없으신 걸음에 동참하고, 주가 하나님의 극단적인 진노를 받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진노의 잔을 마시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주가 대속의 희생과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신비에 다가가실 때 그는 주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의 표정을 보았을 것이다. 유다는 구주의 마음이 드러난 말씀, 끊임없는 기도, 주의 간구, 손을 내미는 호소를,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강퍅하고 왜곡되었다.

   여러 특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주님을 배반했고, 이를 사랑의 가장 친밀한 표시로써 배반했다. 이는 주님 얼굴에 입 맞추었다고 성경이 기록한 유일한 경우다. 이는 모든 비참한 인류의 더러운 입술이며 그 이름이 수치의 상징이 되었다.


   여인의 사랑의 입맞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 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이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도, 베다니 마리아도 - 물론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에게 똑같이 기름을 붓기는 했지만- 아니다. 이 여자는 죄인이다. 주님의  용서가 이 순수한 헌신의 행동을 낳게 했다. 그녀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았다. 그리고 발에 입 맞추는 겸손함으로 주께 대한 사랑을 나타냈다.

   주님은 이같이 완벽한 헌신의 행동을 들어 시몬에게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신시켰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47절).

   이 말씀은 그녀의 죄로 눌린 영혼에 향기로운 몰약처럼 떨어져 그 축복과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주님의 발에 입맞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한 영혼이 이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음을 말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주님의 공적인 복음 선포를 들었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주를 찾아온 것이다.

   이는 감동적인 행동이다.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향하고 있다. 그녀가 들은 죄 용서의 말씀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이었는지 모른다. 주의 발에 입 맞춘 것은 그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주님에게 만족을 드렸다.


   교회가 드릴 입맞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아 1:1).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다. 즉 다른 어떤 노래(사람이 지었건, 영감을 받았건) 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노래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신부는 신랑의 사랑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기를, 그의 사랑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를 갈망한다. 여기서 입맞춤은, 이 노래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기에,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형식적, 의식적인 것보다 더욱 친밀하고 실제적인 것을 원한다. 이게 "입맞춤" 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신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의 가장 순수한 소원은, 이 사랑이 특별히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이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애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그같이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신자의 하늘이며, 신자의 영광의 시작이다. 신자는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것보다 이를 더 원한다. 복되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이 이같이 비참한 자에게 입 맞추기 위해, 우리를 사랑으로 안기 위해, 몸을 구부리시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가 주 앞에 모일 때, 이같은 소원을 갖고 모인다. 우리가 여기서 주를 기념하는 것은 주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모이는 최고의 동기는 주가 우리 삶을 사랑으로 만지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같은 사랑의 잔치에 "그가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


   신랑인 주 예수를 위한 소원


   주님의 마음

   주와 함께 영광중에 있음이여

   주가 계신 곳에.


   끝없는 사랑, 한없는 은혜가

   내 마음을 잡고

   주의 피로 산 교회가 온전해질 때,

   각 영혼이 안전히 주의 발에

   엎드릴 때,

   영광중에서 교회는 이 같은 말을

   반복하리라.


   그때 교회는 보이리라

   주의 풍성한 은혜의 사랑을

   그날에

   표시해 놓은 페이지, 놀라운 무대

   지상의 방식을 넘는.

   -웰레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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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꾀임(3)

횃불 2020. 6. 6. 09:28

[권두언]


                                                            임(3)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나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 (갈 3:1-5).


사도바울은 주님에 대한 경험을 서술한 후("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이제 성령님에 대한 경험으로 질문을 바꿉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인가 혹은 믿음의 들음을 통해서인가?" 답은 분명합니다. "듣고 믿음으로" 입니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됩니까? 구원받은 가장 큰 증거는 성령의 내주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성령의 은사와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 있다는 오해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에게만 성령을 주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행 10:47). 사람이 주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성령을 증거로 주십니다. 이는 영원한 구원의 절대적 보증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구원받으면 천국에 반드시 갑니다. 이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보증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요? 성령님입니다. 이는 인(도장 혹은 보증금)입니다. 즉 성령이 없으면 보증이 없는 셈이고, 구원이 흔들리게 됩니다. 영원한 안전을 믿지 않으면, 이게 구원을 취소하지 못하지만, 믿는 자를 요동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는 자의 안전을,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데려갈 때까지, 성령의 임재로 보장하십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행 15:8).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주님께  믿음으로 오는 사람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의 믿음이 진정한 것이면, 하나님은 그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의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이라는 확증으로 성령님을 주신 것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이제 바울은 묻습니다. "성령을 율법의 행위로 받았는가? 혹은 할례같은 종교 의식으로 받았는가? 믿음의 들음으로 받았는가?" 왜냐하면 갈라디아에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왔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성령을 경험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성령을 받을 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행위는 성령을 줄 수 없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성령을 받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육체로 보내주신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주님을 통해 거저 주시는 은혜의 혜택을 우리에게 적용하게 하십니다. 이는 세 가지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첫째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7).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 하는 영이라...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어나게 하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1-2, 5-6).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둘째는 거듭난 성도를 몸인 교회로 들게 하는 성령침례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고전 12:13). 이는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 사람과 새로운 합당한 관계를 맺게 해주는 사역입니다. 주님이 머리이시며, 다른 성도가 한 지체가 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이 내주하십니다.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이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그리고 후에는 영원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면서 우리 생각에 영향을 주시고, 우리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이는 교회시대와 천년왕국 시대의 특징입니다. 예를 들어, 주님 당시 제자들도 주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오신 후에는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 2:19-22).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 (요 12:14-16).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리시리라" (요 16:12-13). 그들 안에 계시면서, 주님이 하신 것처럼, 모든 이해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행 11:15).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때, 내주하신 성령님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말씀을 순종하여 이룰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의 인도가 우리 가운데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님을 통해 구원의 목표를 이루어가시고, 보장하신 주님을 더욱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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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


                                하나님이 없다?



   요즘 같이 현대적 시대, 즉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도록 격려 합니다. 그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더욱 담대히 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존재는 의심스럽거나 없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신화로 치부하거나,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같은 사람들은 영원한 하나님, 모든 것을 보고 계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자고 말합니다. 그들은 지금 이 세상을 위해서 살면 되고, 죽은 후 천국, 지옥, 죄에 대한 형벌 등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십니다. 무신론, 불가지론이 이 사실을 바꿀 수 없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며, 모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모든 만물에는 하나님의 지문이 묻어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이 땅 위에, 펼쳐두신 하늘에 나타나 있고, 하나님의 작품이 우리 주위에 널려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 하시나이까" (시 8:3-4).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33:6).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부요가 땅에 가득하니이다." (시 104:24).

   하나님은 아무 감정 없이 보좌에 앉아있는 분, 무감각하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상관하지 않는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니" (대하 16:9).

   우리가 인정하건 하지 않건, 우리 생애는 매순간 매 걸음이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피조물의 죄와 반역에 대해 깊은 고통을 나타내셨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를 아시고, 그들을 낙원에서 추방하셨습니다. 또한 노아 시대까지 사람들의 악이 점점 강해지는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처럼 무시하는 것을 아시고,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육지에 있어 코로 생물의 기식을 호흡하는 것은 다 죽었더라" (창 7:22).

   성경에는 민족, 성, 가족,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독자여, 이같은 경고를 받아들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죄를 다 보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아직 죄 용서를 받지 않았다면, 당신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차례로 베풀리라 하시는도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시 50:20-21).

   기적 중의 기적은 하나님이 구세주이며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위대한 증거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시고,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를 위해 아드님에게 벌을 대신 받게 하여 우리가 죄의 대가를 치루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께 우리 구속의 값을 다 지불하게 하셨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생각할 때 유일한 결론은 하나님이 나의 영원한 축복을 순전하고 진심으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않고 죽을 때의 그 결과를 알고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제안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자 하지 마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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