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새김]
십 자 가
- 마일즈 스텐포드
이러한 진리들을 공부해 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영적인 굶주림과 궁핍이 빛과 이해를 얻는 데 필수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성령께서 말씀의 보화를 빨리 열어주시거나 쉽게 열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깊음이 깊음에게 부르고" (시 42:7) 이 점에서 우리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일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말씀을 깊이 파는 일, 기도, 묵상, 열망, 경험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적 실재는 다른 방법으로는 경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앞의 방법들로는 가능 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을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을 위한 모든 과정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일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들, 그분이 최상의 것에 대한 굶주림과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장 핵심적인 최상의 것들을 예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갈보리의 두 가지 측면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영적인 성장과 생명력 있는 봉사에 대한 열쇠를 얻게 될 것입니다.
"갈보리는 모든 것의 비밀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곳에서 무엇을 하셨느냐이다. 그분께서 행하신 일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능력이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건한 삶을 살려고 할 때 취해야 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개인적인 승리를 위한 비밀로서 십자가에서 주님이 이루신 승리를 의지하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우리의 삶에서 승리에 대한 경험을 알지 못할 것이다. 먼저 주님의 승리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승리를 알 수 없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것을 먼저 확보하셨고, 바로 이와 같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확보하신 것을 이제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 거룩한 삶의 시작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사역 이상의 것을 보고 계셨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바로 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분과 동일시되고 있음을 볼 줄 아는 믿음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보리의 이러한 두 번째 측면, 즉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에 있어 우리가 그분과 개인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사실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을 갖도록 하시려고 우리 각자를 훈련시키십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갈보리의 첫 번째 측면,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을 위해 돌아가셨고, 우리가 이를 통해 의롭다함을 얻게 되었다는 완결된 사역을 믿고 자기 것으로 삼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훈련시키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나아간 다음의 사실을 믿고 자기 것으로 삼으라는 요구를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롬 6: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 6:11).
우리가 갈보리의 사실에 기초하여 지식 있는 믿음을 갖게 되면 성령께서는 그 완결된 사역을 우리의 매일의 삶에 자유롭게 적용시키십니다.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들을 위해 돌아가신 사실에 기초하여 서 있었고, 이러한 믿음의 행동으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칭의입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간 사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신 사실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해방의 진리에 서라는 말씀의 권면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위에 서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에 죄의 권세 즉 죄의 노예상태로부터의 자유를 가져다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점진적인 성화입니다. 그리고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서게 될 때 우리는 죄의 존재 자체로부터 영원히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성화 즉 영화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속물로서 홀로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의 죄들로 인한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표로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십자가로 데려가셨고, 하나님의 시야에서 볼 때 우리 모두는 십자가에서 그분과 함께 죽게 되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받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헤방될 수 있다. 치료될 수 없는 희망 없는 인류인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해방의 길은 우리를 아드님의 십자가로 데려가시고,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아드님과의 연합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함으로써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이다(고후 5:17). 우리가 성령과 협력할 때 성령께서는 이러한 위대한 사실을 우리의 경험에 참된 실재가 되게 하실 것이고, 우리 마음의 병은 진정되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그리스도인은 죄에 대해 죽게 되었고,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으며, 죄의 움켜잡는 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죄의 지배권은 무력화되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준비하신 흠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완결된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붙들 때, 즉 유혹이 찾아오더라도 매일 매순간 그것을 사실로 '여길' 때에야 우리의 삶에서 살아있는 실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여길 때 성령께서 그 사실을 실재로 만드신다.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여길 때 성령께서는 계속해서 실재로 만드신다. 죄는 그리스도인이 불신을 통해 허락하는 것 이상의 권세를 그리스도인에게 행사하지 못한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살아있다면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여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Ruth Paxson).
종교개혁은 영적인 출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부각시켰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시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는 것은 영적인 성장에 대한 적절한 강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단지 구원받는데 그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는 성장이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단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하신 것이라면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함에서 나타나는 죄의 권세를 우리 힘으로 헤쳐 나가도록 남겨두셨다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구원을 받은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주님이 가신 것만큼 멀리 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받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바울이 지적한 갈라디아 성도들의 오류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완결된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일, 그리고 역시 그분의 완결된 사역을 통하여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받는 일이 그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으니"(갈 3:24).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고후 5: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님으로 받았으니 그분 안에서 행하라" (골 2:6),
우리는 우리 스스로 옛 생명을 처리하도록 방치되지 않았습니다. 옛 생명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원리와 거룩에 관한 교리가 바로 이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갈보리는 칭의의 기초일 뿐 아니라 성화의 시초이기도 합니다. 칭의와 성화의 선물 모두가 동일한 갈보리 사역에서 나온 것이고, 칭의와 성화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구원의 두 가지 측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그가 받은 구원에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자백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들을 처리하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손실이 일어난 후에 뒷수습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결과에 따른 책임을 수습하려는 것이지 근원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하여금 근원을 다루도록 하심으로써 우리가 죄를 짓기 전에 죄의 물결을 잘라내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자백하더라도 죄가 휩쓸고 간 잔해를 처리해야 하는 일이 남게 되는데, 성령께서 근원을 처리하신다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오랜 세월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죄 짓고 자백하고 또다시 죄 짓기를 반복하는 일에 지치게 되면, 그들은 죄의 근원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해결책은 바로 십자가의 완결된 사역으로부터 기인한, 자신에 대한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이 처음 우리 마음에 비쳐오면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들(sins)을 지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로 인해 죄 용서를 갈구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죄 용서를 발견하고 난 뒤에 우리는 다른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죄인의 본성이 있다는, 죄(sin)에 대한 발견이다. 우리 안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우리 안에는 우리를 죄로 끌어가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 힘이 작용할 때 우리는 죄를 짓게된다. 우리는 용서를 갈구하여 받을 수 있지만, 그리하고 나서 다시 죄를 짓게 되면서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즉 우리는 죄를 짓고 용서를 받고, 도 다시 죄를 짓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것을 원한다. 그것은 바로 해방이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해서는 그것에 대한 용서를 필요로 하고,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는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필요로 한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갈보리에서 죄에 대해 죽었다는 완결된 사역에 의지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해방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칭의의 문제에 대해 갈보리의 완결된 사역에 추가하지 말아야 함을 배워야 하듯이, 해방의 사역에도 무언가를 추가해서는 안 됨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유로 들어갈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떠나서는 심지어 새 사람의 힘으로도 옛 사람을 극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죽으셨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필수적이다. 옛 사람을 극복하는 일에 있어 십자가가 기초가 되지 않는다면 그는 또 다른 형태의 도덕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즉 그는 자기 노력으로 자아를 극복하려고 할 것이고, 그에 따라 그의 투쟁은 희망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C. Usher).
마르커스 레인포드(Marcus Rainford)는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이 같은 헤결책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잠시 동안 죄의 유혹이 없어서 마음이 좋다는 이유로 마음의 신호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임재로 인해 잠시 동안 마음이 새로워지고 행복을 느낀다고 해서 본질적인 해결을 얻은 것은 아니다. 선행을 하면서 마음에 자부심을 느꼈다고 해서 완전한 해결을 얻은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로 인해 우리가 죄를 주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려면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 돌아가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 있다는 사실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나는 내면의 원수인 육신, 옛 사람, 자아, 나, 옛 아담이 강탈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나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두신 자리, 즉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에 놓여있다고 믿음으로 여겨야 한다. 나는 이제 나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나의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Ian Tho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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