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기념]


                                                              입맞춤의 의미


                                                                                                                             - 다니엘 스미스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 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7-49).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보다 나음이로구나" (아 1:1).


   입맞춤은 성경에서 많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화해의 표시로 입을 맞추었다(창 45:15).

   다윗은 요나단과 마지막으로 작별할 때 입 맞추었다. 이는 우정의 입맞춤이다(삼상 20:41).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자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눅 15:20).

   바울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 할 것을(고전 16:20) 권면했다.


   중동에서는 오늘날에도 남자와 여자들이 따로 앉고 따로 인사하므로, 이 입맞춤은 남자는 남자와, 여자는 여자하고만 입을 맞추었다. 이는 "사랑의 입맞춤" (벧전 5:14)이며 인도에서는 애찬 (사회적 구분, 차별, 편견을 모두 부수는)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


   유다의 입맞춤


 "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8-49).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열정적으로 입 맞추었다는 의미다. 이 배반의 입맞춤은 형식적인 인사의 일상적 입맞춤보다 더 과시적이다. 열 두 사도의 일원으로 가까이서 주님과 교제하던 기간 동안 그는 한 번도 주님을 "주님" 이라 불러본 적이 없다.

   즉 그의  제자됨은  연기이며, 위선이다. 유다는 소수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던 특권을 누렸다. 그는 주와 함께 있으면서, 주의 죄 없으신 걸음에 동참하고, 주가 하나님의 극단적인 진노를 받고, 인류의 구속을 위한 진노의 잔을 마시는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주가 대속의 희생과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신비에 다가가실 때 그는 주의 얼굴에 나타난 고통의 표정을 보았을 것이다. 유다는 구주의 마음이 드러난 말씀, 끊임없는 기도, 주의 간구, 손을 내미는 호소를, 한 번도 받아들인 적이 없다. 그만큼 그의 마음은 강퍅하고 왜곡되었다.

   여러 특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주님을 배반했고, 이를 사랑의 가장 친밀한 표시로써 배반했다. 이는 주님 얼굴에 입 맞추었다고 성경이 기록한 유일한 경우다. 이는 모든 비참한 인류의 더러운 입술이며 그 이름이 수치의 상징이 되었다.


   여인의 사랑의 입맞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 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5).


   이 여자는 막달라 마리아도, 베다니 마리아도 - 물론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에게 똑같이 기름을 붓기는 했지만- 아니다. 이 여자는 죄인이다. 주님의  용서가 이 순수한 헌신의 행동을 낳게 했다. 그녀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았다. 그리고 발에 입 맞추는 겸손함으로 주께 대한 사랑을 나타냈다.

   주님은 이같이 완벽한 헌신의 행동을 들어 시몬에게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확신시켰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47절).

   이 말씀은 그녀의 죄로 눌린 영혼에 향기로운 몰약처럼 떨어져 그 축복과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주님의 발에 입맞춤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인식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한 영혼이 이제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찼음을 말하고 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주님의 공적인 복음 선포를 들었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후 주를 찾아온 것이다.

   이는 감동적인 행동이다.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향하고 있다. 그녀가 들은 죄 용서의 말씀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이었는지 모른다. 주의 발에 입 맞춘 것은 그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주님에게 만족을 드렸다.


   교회가 드릴 입맞춤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니" (아 1:1).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다. 즉 다른 어떤 노래(사람이 지었건, 영감을 받았건) 보다 우월하고 뛰어난 노래다. 그렇다면, 아가서는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라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합당치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신부는 신랑의 사랑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기를, 그의 사랑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변화를 주기를 갈망한다. 여기서 입맞춤은, 이 노래가 하늘에 속한 것을 말하기에,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형식적, 의식적인 것보다 더욱 친밀하고 실제적인 것을 원한다. 이게 "입맞춤" 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신자가 진정 원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의 가장 순수한 소원은, 이 사랑이 특별히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이리라. 이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애정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에 그같이 영향을 주는 것은, 이 땅에 사는 신자의 하늘이며, 신자의 영광의 시작이다. 신자는 이 땅의 가장 아름다운 것보다 이를 더 원한다. 복되시고 영광스러운 주님이 이같이 비참한 자에게 입 맞추기 위해, 우리를 사랑으로 안기 위해, 몸을 구부리시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은혜이다.

   우리가 주 앞에 모일 때, 이같은 소원을 갖고 모인다. 우리가 여기서 주를 기념하는 것은 주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모이는 최고의 동기는 주가 우리 삶을 사랑으로 만지시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이같은 사랑의 잔치에 "그가 내게 입 맞추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


   신랑인 주 예수를 위한 소원


   주님의 마음

   주와 함께 영광중에 있음이여

   주가 계신 곳에.


   끝없는 사랑, 한없는 은혜가

   내 마음을 잡고

   주의 피로 산 교회가 온전해질 때,

   각 영혼이 안전히 주의 발에

   엎드릴 때,

   영광중에서 교회는 이 같은 말을

   반복하리라.


   그때 교회는 보이리라

   주의 풍성한 은혜의 사랑을

   그날에

   표시해 놓은 페이지, 놀라운 무대

   지상의 방식을 넘는.

   -웰레스리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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