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등대] 연보 (1)

횃불 2020. 6. 10. 09:44

[진리등대]


                                   연보 (1)


                                                                                                                                                  - W. E. 바인


   야고보서를 시작하는 구절들은 주시는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포함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약 1:5).


   "주시는 하나님", 이것은 거의 그분의 칭호라고 할만하다. 성경에서 우리는 그분께서 참으로 풍성하게 주시는 것을 발견한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을 인해 넘치도록 주신다.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 (딤전 6:17).


   아버지를 닮음


   산상수훈에서 두드러진 교훈들 중 하나는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행함으로써 우리의 성품이 하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마 5:45).


   단지 자녀들이 아니라 "아들" 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에게서 났을 뿐 아니라 그분의 성품을 똑같이 갖는 것이다. 그분을 고귀하게 나타내면서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커서 그분은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그분은 아낌없이 주신다. 이와 동일한 관대한 영이 우리의 특징이어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연보 궤를 대하여 앉으사 관찰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눅 21:3-4).


   주님은 하나님의 헌금 방식에 일치되는 헌금을 확실히 발견하셨다. 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넣는 모습을 지켜보셨다. 이것은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아버지와 닮은 모습이 아닌가? 이들이신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전부이셨다. 우리의 경우도, 헌금은 우리를 테스트한다.


   동기


   세상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가지고 평가한다. 이와 달리, 주님은 주는 것을 가지고 평가하신다. 세상은 액수를 중시한다. 사람들은 총액이 얼마인지를 셈한다. 반면에 주님은 동기를 보신다. 세상 사람들이 가진 커다란 물음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고 있느냐? 이와 달리, 주님은 어떤 사람이 그 소유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눈여겨보신다. 그래서 이 과부의 헌금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하셨다. 부자들의 헌금에는 희생이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헌금을 하기 전에나 후에나 그들은 안락하게 살았다. 반면에 과부는 헌금을 한 후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부자들에게 연보는 종교적인 문제였다.

   이와 달리, 과부에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문제였다. 따라서 확실한 잣대는  얼마나 많이 드렸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남았느냐 이었다. 부자들은 여전히 많이 남았고 과부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 이것이야말로 연보에 진정한 가치를 부여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에게 금액을 지정해서 명하지 않은 듯하다. 정해진 양과 비율을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마음을 드리는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동기와 관련된 내용은 어디에 있는가? 충성이 기계적인 종교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사랑이 형식주의에게 밀려날 것이다. 개인 신자들과 지역교회는 고귀한 동기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수여자의 사랑에 대한 사랑의 반응으로 연보하기 위해서는 그 고귀한 동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십일조


   다음과 같은 질문이 나올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명령이 있지 왔나요?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이로 보건대, 그리스도인들도 십일조를 드려야 옳지 않을까요?" 우선적으로 언급할 사항은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보다 더 많이 드렸다는 것이다(레 27:30, 민 18:21-24, 신 14:22-27). 삼년이 지날 때마다 추가적인 십일조가 있었다. 그것은 레위인 뿐 아니라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까지 위한 것이었다.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어떤 이들은 앞의 세 구절들에서 언급한 십일조들이 따로따로 드려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근거로 탈무드를 제시한다. 여하튼 확실한 사실은 이 십일조들이 다른 제물들(속죄제물, 번제물, 처음 익은 열매의 첫 것)을 드리는 것에 추가적으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 3:8).


   따라서 총합을 셈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양은 소득의 6분의 1가량 이었을 것이다. 어떤 이는 심지어 4분의 1 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도덕적인 의무에서 드린 이들이 그러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우리는 갈보리에서 표현된 사랑의 능력 아래 있는 자들이다. 갈보리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뜨겁게 사랑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역사하고 계신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십일조를 명령받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입이 많은 이들은 수입이 적은 이들보다 낮은 비율을 따라 헌금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타인들보다 많이 헌금했다고 해도 거기에는 희생이 거의 들어가 있지 않다. 이는 그들이 풍부한 소득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런 한편, 소득이 많지 않은 이들이 처한 위험은 제약으로 인해 마음에 원하는 만큼 드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렸던 십일조 이상을 드리고자 한다.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대로 더 풍성한 반응을 보이고자 한다. 비율은 어떻게 정해놓았든지, 그 비율은 점점 더 커져갈 수 있다.


  

   하나님의 것을 훔침


   구약성경을 끝맺는 책은 지극히 엄숙한 말씀을 담고 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주시고 나서 천 년 쯤 된 시기에 기록되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말 1:8).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회개해야 했다. 이러한 회개의 영으로 자신들의 죄가 어려움을 초래한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대신 그 백성은 하나님을 비방하고 선지자들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 죄를 더 지었다. 그들이 범한 여러 가지 죄들 가운데 율법을 위반함이 있었는데 그 중에는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죄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통탄스러웠고 그것이 말라기 3장에서 강한 질책으로 나타났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은혜롭게 명하시고 약속하셨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자 그 백성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이에 대해 여호와께서 대답하셨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얼마나 은혜로운 대하심인지!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쏟아 부으려고 준비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번영을 누리지 못한 것이었다. 천박하게 행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이익과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백성은 하나님의 정당한 것을 바쳐야 했다. 그들은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야 했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짐을 발견할 것이었다.


   하늘 문을 열고


   하늘 문을 열고!

   정말로 깊은 의미를 담은 비유이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windows of heaven)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늘의 창들은 심판 때에 열린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지상은 물로 덮였다.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windows og heaven)이 열려"(창 7:11).

   그러므로 심판의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이 축복의 약속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었다. 이 명령은 믿음에 호소하며 이것은 이 시대에서도 효력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인가?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에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서 그것을 율법 아래에서 행한 것보다 못하게 행해도 좋다는 구실로 삼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주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주님께서 베푸신 비유들 중 열여섯 가지가 돈의 사용과 관련되었다. 그 중 하나에서 그분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자.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눅 16:11-12). *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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