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단]

                                             요한복음의

                               일곱 기적(7)

 

                                                                                                                        -피터 위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 8:59).

 

주님은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친히 "내니 두려워 말라." 라고 하실 때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니" (I am)라는 표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며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의미임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실 때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의미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분노하였고 돌을 던져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주님은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요한은 "예수께서 숨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어떻게 갑자기 숨었을까요? 요한이 기록한 이 단어는 아주 특별한 단어입니다. "숨어서 찾을 수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기둥 뒤에 숨으셨다면 사람들은 뒤로 돌아가서 찾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을 피해서 도 다른 기둥 뒤에 숨어도 결국은 찾아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숨었을까요? 주님께서 보이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전혀 해를 입지 않고 성전에서 나가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숨으심으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주님이 숨어 성전에서 나가실 때, 많은 무리들을 통과하여 가셨습니다. 주는 하나님이시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도 잡거나 체포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여러 번 유대인들은 주님을 잡고자 하였으나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계획과 목적대로 행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확한 때에 십자가로 가서 죽으실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주님은 자신을 체포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도 또한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 모두를 주님의 집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매우 복된 때입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1-7).

 

여기 날 때부터 소경 된 자가 등장합니다. 제자들은 이 사람의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냐고 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아픈 사람들을 보면 아마 그가 무엇을 잘못했거나 그 부모가 무엇을 잘못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다. 그 부모나 이 사람이 죄를 범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람에게도 목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이 이 사람에게 나타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만드셨고 이 세상에 빛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었고 요한복음에도 기록되었습니다. 주님은 물질적인 빛을 공급하시며 또한 영적인 빛도 주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물질적인 빛을 이 사람에게 주시고자 합니다.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이유는 바로 주님께서 그와 같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주님은 땅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진흙을 이겨 그 소경으로 난 자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주님은 다른 기적을 행하실 때 이와 같은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많은 소경들이 고침을 받기 위해 주님께 나왔습니다. 그 때 주님은 소경들에게 단지 말씀만 하셨고 그들은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도 다른 경우에 눈을 만져주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7-29).

 

그런데 이 경우에는 침을 뱉어 진흙을 만지시고 그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 남자는 고쳐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있는 분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고쳐 주셨습니다.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신 것입니다.

 

우선 그는 소경으로 났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소경으로 나서 소경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확한 때에 소경은 그자리에 있었고 주님은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이 그 소경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소경이 가서 씻고 보니 눈이 밝아졌습니다. 주님은 왜 이러한 일을 하셨을까요? 이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특별하게 이에 대해 진술하고 있습니다.

소경이 되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소경처럼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라면서 소경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을 선천적 소경이라고 하며 뒤를 후천적 소경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볼 수 없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의사라면, "그의 눈은 있었지만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시신경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고 말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가능한 설명일 것입니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에게 눈동자 자체가 없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기적을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드시고 이 진흙을 그의 눈에 넣어 눈동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저는 이것이 맞는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직전에 주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두 눈동자를 창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여야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 남자에게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적은 아주 중요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주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눈동자가 없는 소경에게 새로운 눈동자를 창조하여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던 이웃 사람들은 그의 눈이 떠진 것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는데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는 이웃들에게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요 9:11).

 

그는 간단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쳐 준 사람의 이름이 예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있던 자리에서 떠나 다른 데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행하신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38년 동안 중풍에 걸린 병자를 고치신 날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다고 분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예수라는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 말을 듣고 유대인들은 다시 화가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일 수 없다.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유대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소경을 심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였습니다. 그러자 소경의 부모를 심문하였습니다. 출회를 두려워한 그 부모는 아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요 9:17).

그러자 그 소경 되었던 자가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하는가? 당신들도 그를 믿고자 하는가?" "창세 이후로 소경 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 바리새인들은 화가 나서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라고 그를 쫓아내었습니다. 그를 출교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잡을 수도, 돌을 들어 칠 수도, 어떠한 일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적하여 완전히 무능력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은 그들 사이를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5-38).

 

주님은 그에게 아주 분명하게 말하셨습니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영어 성경에는 "네가 하나님을 믿느냐?"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는 대답합니다.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말해주셨습니다.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그리고 주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기적이며 요한은 조심스럽게 이 기적을 선택하여 기록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 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할 때, 단지 일곱 개의 기적만을 기록하였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셨습니다. 물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주님은 모든 자연을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포도주는 포도로부터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아주 특별한, 하늘의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주님은 모든 식물, 채소, 과일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기적은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시는 기적입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은 이미 죽기 직전의 상태였으며 세균들이 그 몸에 들어가 아주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요한은 병중에서 아주 심각한 병을 선택해서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병들은 세균과 여러 가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에 의해서 생기는데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으십니다.

주님은 아주 약한 상태에 있는 38년 된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몸에 대한 통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문둥병자를 고친 것, 혈루병을 고치신 것 등 여러 가지 기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척수가 다친 병, 심장, 폐, 모든 병들을 고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뼈, 관절, 신경들이 약해져 있는 중병에 걸린 자였습니다. 주님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세포들, 신경들, 여러 조직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통제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여러 가지 식물들과 물고기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은 이 기적을 행하시고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죽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물위를 걷는 기적을 통해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원소들을 다스리는 능력이 있음을 보이셨습니다. 폭풍우와 천둥, 바람을 다스리는 능력을 보이셨습니다. 물과 파도를 다스리는 권세를 보이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이 기록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지고 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주님이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날 때부터 소경 된 자의 눈을 창조주의 능력으로 고쳐주심을 보았습니다. 이 외의 어떤 다른 기적들이 주님이 하나님이심을 더 강력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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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훈의 샘]


                                                   화 음

                                Harmony


                                                                                                                 - 정 선


화음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함께 노래를 부를 때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합창에 감동하는 이유는

그 많은 사람들이 화음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화음이 잘 이루어지는 합창은 듣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지만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은 합창은 듣기에 불편합니다.

그래서  화음에는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화음'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모든 것이 똑같아야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화음을 이룰 때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100명이 똑같은 목소리로 합창을 하는 것과, 다양한 파트로

화음을 이루어 노래를 부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울까요?


'화음'의 아름다움은 음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분야, 특히 사람들이 모인 '모임'에도 해당됩니다.

이 세상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많든 적든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어울려서 하게 되어 있지요.

그런데 '협화음'보다는 '불협화음'이 더 많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파트를 제대로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혼자 목소리를 크게 내거나 작게 내거나 하면 화음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화음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전체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조화를 이루면서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튀어도 안 되고 가라앉아도 안 됩니다.

즉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되 다른 사람도 의식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똑같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제각기 달랐듯이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이 서로 달랐듯이 기질, 배경, 성격 등이 모두 다릅니다.

그들이 만약 자기 기질대로만 행동하고 말한다면

얼마나 심한 불협화음이 나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보여지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지기 위해서는

화음을 맞추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고, 주님께 초점을 맞출 때 그것은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풍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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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편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구원, 거듭남

                                                                                                                 - 차 광선

그 파란 하늘 아래 노랗게 익은 벼가 추수됩니다. 겨울이 오기 전 모든 알곡들은 거두어질 것이며, 추수가 끝난 후 들판에 남겨지고 버려지는 것들은 끝끝내 열매 맺지 못한 쭉정이 뿐일 것입니다. 거두어지는 것이 있고 버려지는 것이 있게 되는 것이지요.

오 선생님, 늦은 가을의 냉기가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복음의 축복을 나누고 싶어 시작한 편지쓰기가 벌써 열 번째입니다. 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이제 마지막 서신을 준비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럽습니다. 이후 한 번의 서신을 더 쓸 기회가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 제게 안도감을 가져다줍니다. 한 번 더 말씀드릴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기회 때문입니다.

홍수가 난 때에 오히려 마실 물이 많지 않듯이,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쓸만한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고 누군가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모든 정보는 저마다의 가치를 품고 인터넷 시장에서 유통되지만, 정보 중의 정보, 진리 중의 진리, 소식 중의 참으로 귀하고 기쁘고 복된 소식은 바로 복음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의 존재 이유와 삶의 실상과 죄와 심판의 엄중함과 구원의 길과 참된 자유와 환희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진리이고 정보이며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일컬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죄인)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교회 예배당에 달려 있는 십자가는 단순히 교회를 표시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속죄의 현장이고 분명한 증거임을 말해 주는 메시지입니다

바다에 조난당하여 침몰한 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구조선이나 구조 헬기가 와서 생명줄을 던져 주지 않는 한 바다 위에 생존의 가망성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은 바다 한가운데서 표류하는 존재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복음은 그 구조선과 생명줄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오 선생님도 세상이라는 절망의 바다에서 구조되어야 할 표류자 중 하나입니다. 세상이라는 바다는 마치 사람이 원하는 모든 즐거움과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허무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이며 사망의 바다입니다. 어둠의 바다를 비치는 등대 같이 복음과 생명의 빛을 비추는 성경 말씀에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각 제길로 갔거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6).

우리의 죄를, 오 선생님의 죄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예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심이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이것을 기록하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해 오 선생님의 심령에 하나님의 음성이 메아리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우리가 아직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6-8).

오 선생님께서 죄인으로 출생하여, 보이지 않으나 그리고 느끼지 못하나, 죄의 세력 아래서 죄악 된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오셨습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여전히 죄악 된 삶을 살고 있을 때, 성경에 예언한 대로 오 선생님을 위하여 예수께서 대신 죽으셨는데, 그것은 창조자 하나님께서 오 선생님을 사랑하신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라 하는 한 지도자와 대화를 하셨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과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으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 대화의 내용은 요한복음 3장(2-8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니고데모는 옛 예언자들의 기록과 모세의 기록을 통해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예언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예수라는 인물에 대한 보고가 들려오고, 더구나 그에 의해서 나타난다는 일련의 이적 혹은 기적에 대한 소문이 들려올 때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했던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과 징조를 기억헤냈을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사야 53:2-3, 35:5-6).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소문, 말못하던 사람과 듣지 못하던 사람이 말을 하고 들을 수 있도록 고치셨다는 소문, 귀신들렸던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어 온전케 하셨다는 소문... 그 소문들을 확인하고자,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여 기록한 그 분이 아닌가 하여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기록된 대로 당시 로마의 사형 틀인 십자가에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피 흘려 죽음을 당했을 때, 이사람 니고데모는 몇몇 여인들과 함께 그의 장례를 치루는 것으로 보아(요한복음 19:39),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대로 오셨고 대속의 죽음을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예언대로 부자의 묘실에 묻히셨고 기록된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려온 대로 이 모든 것이 바로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오 선생님도,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그 말씀 앞에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오 선생님도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출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우리가 출생일을 기억하고 있는 그 몸의 출생 외에, 우리의 영혼이 말씀과 성령으로 출생하게 되는 영적 경험입니다. 그 신비한 역사를 주도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그러면 누가 어떻게 거듭나게 되는 것인가요?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생명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 그 복음이 보여주신 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나님과 관계없이 각기 제 마음대로 살아온 삶이 불순종의 죄로 살아온 삶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있는 죄의 실상을 깨닫고 그 죄와 그 죄로 인한 열매로 인해 슬퍼하고 괴로워할때, 그리고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때, 하나님은 그렇게 상한 영혼을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가십니다. 참혹한 죽음의 십자가 위에 달린 당신의 아들을 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난의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죽음이 죄인을 위한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하여 그의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깨닫게 될 때 은하수 같이 넘쳐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 이루었다!" 외치신 그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비로소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강도처럼, 절도처럼 허락 없이 먼저 들어와서 농락해버린 영혼 앞에 예수님은 진실하신 구주요 주님이시요 왕이시며 친구입니다. '내 마음의 보좌'에 앉으셔서 '나'를 다스리시기에 유일하고 지극히 합당한 분입니다. 그 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고 말씀드리는 것, 그것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런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신비스럽게 이루시는 용서와 구원과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길입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에베소서 2:8-9).

지금까지 증거된 성경의 말씀을 보고 들으시면서 오 선생님은 지정의를 통하여 인격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저 십자가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 오 선생님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라고 인정하시든지, 아니면 여전히 오 선생님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로, 무시해도 좋을 그저 그렇고 그런 잡다한 정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기시든지.

입학과 졸업, 취업문제, 결혼과 출산 문제, 모든 인간관계 문제, 노후 대책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 중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삶이 달려 있는 죄와 구원의 문제는 영원한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 위에 서게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문제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결국 이 문제에서 비껴가게 만드는 영적으로 속이는 자가 여전히 무수한 인생들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 또한 성경의 경고입니다.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성경은 이 영적 기만자에 대하여 '큰 용,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요한 계시록 12:9) 라고 폭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해 속은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거절하게 되고 영원히 구원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심오한 철학이나 유사 종교를 통하여 그것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속입니다. 혹은 하나님도 영원한 나라도 지옥도 없다는 사상으로 속이기도 합니다. 또는 이렇듯 저렇듯 결국 모두 구원을 받아 좋은 곳에 가게 될 것이라고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4).

복음을 깨닫지 못하도록 어둠의 신, 마귀가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일상에 넘쳐나는 속임수와 기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보이스 피싱으로 금전적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외에도 정말 그럴듯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얼마나 속출하는지 자고나면 새로운 유형들이 우리 앞에 덫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것들에 의한 피해가 작은 일이 아니지만, 영혼의 문제는 말할 수 없이 더 큽니다.

만일 오 선생님이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창세전부터 계획하여 오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죄인으로 죽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오 선생님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사실로 인정하신다면, 예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신 것이 또한 오 선생님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 선생님의 주님으로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모든 인생은 그 마음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모실만한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실,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죄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오셔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모든 죄인의 마음에 그 누군가가 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살아감으로 마치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것처럼 살지만 사실은 사탄의 기만으로 속아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 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니..." (요한복음 10:8).

오 선생님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 전까지 그와 같은 삶을 살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왕으로 계셔야할 자리에 어떤 상식이, 철학이, 명예가, 부귀가, 혹은 어떤 우상이나 욕망이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상은 그 배후에 미혹하는 자 마귀가 있었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사실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복음만이 그 모든 것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시는 중에 오 선생님의 심령에 울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인식한 적이 있습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겸손한 마음으로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춰 조아릴 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해 추운 겨울 저녁. 섬의 무선국에서 한 청년이 근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젯밤처럼 복음전도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직장 상사에게 일찍 퇴근하게 해 달라고 요청을 하였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마을로 돌아가려면 몇 구비의 산기슭을 돌아가야 하는데 가는 도중에는 공동묘지를 지나야 하는길도 있었습니다. 밤이 찾아온 산길에 청년은 더 늦지 않게 복음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어제 집회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고 천국과 지옥의 실재도 믿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과 이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청년은 구원을 받고 싶었고, 그래서 이틀째 열리는 복음 집회에 꼭 참석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어제 들었던 말씀을 기억하며 이제는 뛰다시피 하는 걸음이 되었습니다. 공동묘지 부근을 지나는 길에 청년은 죽음의 두려움과 지옥의 두려움이 깊어 옴을 느꼈습니다.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한 말씀이 명확하게 떠오르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요한이 쓴 복음서 3장 16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청년은 그 말씀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청년의 마음에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멸망하지 않게 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구나! 주님, 제가 믿습니다!' 청년의 마음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감사와 평안과 기쁨이 은은히 그리고 가득 차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소년이었던 저는 추운 겨울밤 냉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예배당 뒷자리에 앉아있었습니다. 전도자의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불꽃이 흔들리는 등잔불을 보고 있을 때 뒷문이 조용히 열렸습니다. 뒤돌아보니 찬바람을 가득품고 들어오는 이웃집 형의 환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간증인데, 그 형은 그렇게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노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궁벽한 섬마을에 사는 영혼들도 사랑하셔서 복음이 증거 되게 하시고 거듭나는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1:23).

그는 선한 행위나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노예선에서 일했던 존 뉴턴이라는 사람. 그는 앞서 말씀드린 청년과 똑같은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깨닫고 회심하여 거듭났습니다.

자유라고는 한 틈도 누릴 수도 없는 노예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던 그는 죄에 매여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상태가 바로 저 노예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헤매는 가련한 인생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멸망이 작정된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누군가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듭났습니다. 그 후 1779년에 죤 뉴튼은 그 구원의 감격과 기쁨을 다음과 같은 찬송시로 표현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앙하리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진리의 말씀을 보고 들을 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입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를 아직 죽음을 이야기 할 때가 아니라고 종교를 가질 때가 아니라고 그런 것은 인생을 다 살고난 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 아닙니다. 왜냐면 성경은 이렇게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그렇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누운 것이 영원한 죽음으로 이어질 줄 누가 알겠습니까? 희망차게 시작한 하루이지만 뜻밖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어 그날 아침의 외출이 마지막 외출이 될 줄을 누가 알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이 중대한 말씀 앞에 무관심하고 태연히 미루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4).

구원의 복음과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는 하루 이틀 미룰 문제가 아닙니다. 잘 익은 곡식은 때가 지나기 전에 추수되어 곡간에 저장되기 마련입니다. 축복받은 영혼은 복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열매가 되지 못한 쭉정이는 버려지고 마침내 불태워질 것입니다. 복음에 대하여 태만히 하고 거절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되면 영원한 어둠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영원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예레미야 8:20).

몇 년 전, 늦가을과 초겨울이 겹쳐가던 어느 날 밤, 혜화동 어떤 창고극장에 가스펠 싱어 S자매의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선택한 마지막 곡은 '왕이 여기 계시네!'

깊고 맑은 성량으로 S자매는 마치 왕의 현현을 실감하듯 열창했습니다. '왕이 여기 계시네! 엎드려 경배하라!'

백여 남짓 모여든 사람들은 적어도 그 '왕'이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아는 성도들이었습니다. 마지막 곡이 끝나고 문을 나섰을 때도 그 멜로디, 그 짧은 가사가 제 심령 속에 메아리 되어 울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밖에는 샛노란 은행잎들이 계절을 바꾸려 거세게 부는 바람에 의해 흩날리며 가로등 황색 불 빛 속에서 화려하고도 자유로운 군무를 추고 있었습니다. 제 시야엔 어둔 밤하늘 너머 파란 창공으로 이어지는, 그분을 향한 장엄한 경외심이 그 금빛 이파리들에 실려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모두 엎드려 경배 드려야 할 그 분! 그분은 거듭난 자만이 모시고 섬기며 동행할 수 있는 분, 왕 중의 왕이시며, 모든 주 중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 마음에 친밀한 이웃으로 계신 오 선생님께서도 믿음으로 거듭나셔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영광의 세계를 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라고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평안하세요.*

11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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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 양육]


                                                그리스도인 생활

                          이정표들 - 질문편(5)


                                                                                                                        - 데이비드. 뉴웰


   성령님은 어떤 분인가요?


   오늘날 하나님의 세 위격 중에서 가장 오해를 받고 잘못 말해지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은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령님은 또한 가장 많이 말해지는 분인 듯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의문스런 가르침들 및 실행들과 그럴듯하게 연결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것은 성령님의 특성인 거룩함을 거의 나타내지 않습니다.

   다음 장에 가서 우리는 현대 은사주의 운동의 성격에 대해 성경적인 결론을 내려 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성경적인 기초를 견고히 쌓아야만 합니다. 즉 성령님의 현재의 전반적인 사역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기초는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에서 친히 제공해 주셨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과 관련하여 네 가지의 주된 원리들을 발견합니다.


   1. 영광스럽게 함의 원리.

   구주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 6:14).

   이를 유념하십시오. 성령님의 사역이 지닌 위대한 목표는 성령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사역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구주가 주목받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5장 29-32절에서도 우리는 그분이 동일한 일을 행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여기서 베드로는 주님의 높아지심에 대한 증인으로 성령님을 이야기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 역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이 진행되어 갈수록 성령님이 점점 더 작아져 가시는 모습을 확실히 봅니다. 이것은 성령님이 실패하셨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이것은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게 하는 일에서 그분이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행 4:12).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 (행 28:31).

   이뿐 아니라, '영광스럽게 함'의 원리는 우리가 듣는 모든 가르침의 시금석을 제공합니다. 즉 주 예수님을 높이지 않는 어떤 교리 체제가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성령님 자신에게 사로잡힌 현대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은사를 주시는 분보다 은사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말아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늘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도록 아버지와 함께 기쁨으로 역사하십니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6-17).


   2. 조화의 원리.

   주 예수님은 성령님을 세 차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분의 증거가 절대적으로 신뢰할만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5: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성령님이 진리이신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분이 영감을 주신 성경도 그 전체가 진리입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벧후 1:21).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 17:17).

   하나님의 영은 성경의 영감에 직접 관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오늘날 그분의 역사는 성경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뤄야만 합니다. 이는 성령님은 모순된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에게 주신 또 다른 귀중한 시금석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께서 절대로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과 상반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영적인 인도하심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소원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전히 옛 성품 및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렘 17:9)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감정 및 경험과 전혀 다른 완전한 기준을 또한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넣으시고, 오류가 없고,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이에 근거하여 우리는 예컨대, 성령님은 절대로 신자로 하여금 불신자와 데이트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4).

   또는 성령님은 절대로 자매들로 하여금 교회의 집회에서 공적으로 기도하도록 인도하시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고전 14:34).

   이러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정적으로 말하건대 그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지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아는 만큼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경건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이들은 성경에 사로잡힌 이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되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만 함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3. 교육의 원리.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요 16:13).

   여기서 주님은 단지 신약성경을 미리 인증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들을 가르치실 분으로서 성령님이 어떻게 활동하실지 기대하게 해줍니다. 바울이 가르친 대로, 오직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진리들을 알 수 있습니다(고전 2:11-14).

   영감은 성경 저술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감독을 말해줍니다. 한편, 조명은 성경을 설명하는 일에 있어서의 성령님의 사역을 말해줍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구주의 말씀에서 발견됩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제자들의 교사요 인도자요 상담자였던 분이 꼭 그들을 떠나야만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과 완전히 같으신 그분은 그들과 함께 영원히 거하실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이렇게 하여 그분은 그들의 영적인 교육을 완료하실 것이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이 위로자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분은 마음속에 영원히 거해오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거듭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

   또한 우리는 성령님으로 침례를 받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또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고전 6:19).

   또한 우리는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엡 1:13).

   반드시 유념하십시오. 모든 그리스도인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롬 8:9).

   이 성령님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하도록 이끌어 가십니다.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롬 8:13).

   또한 그분은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를 닮은 열매들을 맺히게 해주십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 5:22-24).

   성령님의 나타남은 온갖 기적들의 발생보다 더 강력하며 더 귀중합니다.


   4. 적용의 원리.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요 16:15).

   아브라함의 충성된 종은 이삭의 신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성령님의 사역들 중 한 가지를 즐겁게 그려줍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에게 남편 될 사람의 부유함과 영광에 관한 증표를 주었습니다. "은금 패물과 의복을 꺼내어 리브가에게 주고 그 오라비와 어미에게도 보물을 주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부요함이 우리에게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썼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엡 1:14).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우리는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우리의 마음은 그분의 놀라운 인격과 사역에 사로잡힙니다. 왜일까요? 또한 모든 신자들은 구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성경은 우리를 전율케 하는 하나님의 진리들이 무한히 담긴 보물창고입니다. 왜일까요? 이 모든 것은 성령님께서 그분의 사역을 행하고 계심을 말해줍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러한 여러 가지 사역을 행하시는 위대한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늘 주님으로 인해 만족케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성령님에 관한 이런 가르침을 마음속에 잘 간직한다면 우리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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