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제12과

                         기도와 회복(야고보서 5:16-20)


자백(5:16 상)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이 말씀을 가볍게 읽으면 마치 우리의 은밀한 죄를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고 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다른사람에게 죄를 지었다면 우리가 잘못한 그 사람에게 즉시 그 죄를 자백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원한을 품거나 분노를 쌓기보다는 자백과 기도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제 가운데 우리 자신을 관리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치료는 영적인 회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야고보가 어떻게 자백과 기도를 치료와 연결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사람은 영, 혼, 육의 세 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살전 5:23). 사람의 한 부분에 영향을 주면 모두가 영향을 받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사장은 의사이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장은 문둥병을 진단하기도 하고, 그 병이 치유된 것을 선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제사장의 직무와 의사의 직무를 겸하게 하심으로 주님은 영과 육체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 것을 나타내셨습니다.

   정신신체 의약 분야는 이러한 연결을 깨닫고 육체의 고통을 일으키는 인격적인 문제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의약은 죄를 고치지 못합니다. 죄와 더러움과 죄의 능력과 형벌에서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해 자백함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더 자주 탐식, 걱정, 분노, 용서치 않은 마음, 술 취함, 시기, 이기심, 교만과 같은 죄에 의해 병이 생깁니다. 죄는 우리의 삶 속에 병을 초래하며 때로 죽음을 초래하기도 합니다(고전 11:30).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 죄가 들어온 것을 깨닫는 즉시 자백하고 버려야 합니다. 모든 죄를 하나님께 자백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범한 죄는 그들에게도 자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적인 건강에 중대한 것이며 육체의 건강에 유익합니다.


엘리야의 기도(5:16하-18)


   "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어마어마한 능력을 일으킨다. 엘리야를 생각하라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실제로 삼 년 육 개월 동안 한 방울의 비도 땅에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난 후 다시 기도하자 하늘이 비를 내려 땅은 평상시처럼 식물을 내었다". (필립스 역) 이 사건은 열왕기 상 17:1-19:10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는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었는데, 그 아내 이세벨로 인하여 바알 숭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백성들을 우상숭배의 더러움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저는 그 전의 모든 이스라엘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더라" (왕상 16:33). 이스라엘에 삼 년 반 동안 기근이 들었던 것은 죄의 직접적인 결과입니다.

   그 때에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유명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제단과 물을 다 태워버리자 백성들은 확신을 갖게 되어 여호와께로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다시 기도하자 기근은 끝났습니다.  엘리야의 본은 우리가 죄를 범한 사람이나 하나님의 교제에서 멀리 떠나 헤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16 하반절). 어떤 사람은 이 구절을 "하나님과 바른 마음을 가진 사람의 기도는 놀랍게 역사한다" 라고 의역했습니다. 엘리야가 우리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유혹을 받지 않도록 야고보는 그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육체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17절). 엘리야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연약함과 결점을 가진 사람일뿐입니다.


타락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5:19,20)


   앞의 구절들에서 우리는 교회의 장로들이 범죄한 성도들을 회복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엘리야가 타락한 이스라엘 민족을(부분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회복시키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원대한 사역을 우리 자신들에게 제시하게 됩니다.

   19절은 진리와 실제적인 교훈에서 떠나 헤매는 한 그리스도인 형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형제는 열정과 믿음의 기도로 그 형제를 그리스도 안의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나님과 다시 교제하도록 사랑으로 그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사역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징계의 손아래 속히 찾아오는 죽음으로부터 그 잘못된 형제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는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들을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시며, 또한 성도들에게서도 잊어버린 바 되어 공적인 눈길에서도 가리어집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사역이 필요합니다. 잃어버린 자들에게 전도하는 우리의 열정에 비하면 아마도 양 무리에서 벗어나 유리하는 그리스도의 양들에게는 충분한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야고보는 신앙생활의 여러 가지 영역에 대한 우리의 양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 땅에 보물을 쌓고 있습니까? 당신은 정직하게 사업을 운영하십니까? 예를 들어 소득세를 내십니까? 당신은 사치스럽게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구주를 알기 위해 나오게 하려고 희생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했을 때 기꺼이 그에게 가서 사과하십니까? 당신은 병이 들게 되면 누구에게 먼저 나아갑니까, 의사입니까 주님입니까? 어떤 형제가 죄에 빠진 것을 보면 당신은 그를 비난합니까 아니면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십니까?


 끝마치면서


   이제 우리는 이 실제적인 짧은 서신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시련을 보았고 경건치 않은 유혹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삶의 문제들로 믿음이 시험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과 속물적인 것들을 피하고 선한 행위의 생활로 그 믿음을 증명하여 나타내도록 도전 받았습니다. 믿음의 실체는 사람의 말하는 것에서 보여집니다. 신자들은 그 혀를 그리스도의 주권에 내어드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침 믿음은 참 지혜를 동반합니다. 시기와 다투는 삶은 실제적인 경건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믿음은 반목과 싸움 그리고 세상적인 야망과 탐욕에서 나오는 시기를 피합니다. 또한 잔인하고 비판적인 생각도 피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빼놓고 삶을 계획하는 자기만족을 피합니다. 믿음은 그 돈을 벌고 쓰는 법에 의한 시련을 견딥니다. 의기소침하기보다는 주님의 다시오심을 바라봄으로 참고 견디어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정직하여 그것을 증명하도록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그 모든 삶의 환경들을 바꾸어 놓습니다. 병이들면, 먼저 영적인 원인을 찾아봅니다. 하나님께 그리고 잘못을 한 다른 사람에게 자백함으로 가능한 원인들을 제거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은 타락한 사람들에 대해 사랑과 동정을 나타냅니다.

   당신과 나의 믿음은 날마다 시험받습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어떻게 판결하실까요?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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