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3 과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함

                                                        (2:11-21)


   이 과는 바울의 사역에 대한 그의 여섯 번째 이자 마지막 변증을 다루고 있습니다(2:11-21).

   바울은 그의 사도권에 대한 공격의 마지막 답변으로, 많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중의 인도자로 여겨지는 사도 베드로를 어떻게 책망하여야 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베드로가 결코 잘못이 없는 사도 중의 인도자라는 견해를 효과적으로 반박하는 것입니다.)

2:11 베드로가 처음 안디옥에 왔을 때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유를 맘껏 누리면서 이방인들과 더불어 식사를 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 아래에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2:12 얼마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로부터 온 한 무리가 안디옥을 방문하엿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그때까지 어떤 율법준수에 매여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들이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사실은 "후에 그가 부인했기 때문에, 그들이 야고보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행 15:24), 다만 그들이 그렇다고 주장한 것일 뿐이다"(스토트).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그들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에게 그가 한 행동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이방인들과 교제를 중단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으로 그는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며 민족이 다르다는 것이 교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를 부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핀들레이는 "베드로가 무할례자들과 식사하는 것을 거절함으로 비록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이라도 그에게는 '깨끗한 자와 부정한 자'가 있으며 모세의 의식들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보다 더 신성하다고 단언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2:13 베드로의 본을 따르는 사람들 가운데는 바울과 함께 수고하던 바나바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이러한 행동의 심각성을 인식한 바울은 단호하게 외식적인(위선적인) 베드로를 비난했습니다. 바울의 책망은 14-2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들처럼 생활해야만 하는가?


2:14 그리스도인으로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민족적인 차별 즉 이방인처럼 사는 것이나 이방인의 음식을 먹는 것 등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최근에 베드로는 이방인과 먹는 것을 거부함으로 그가 유대인의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 것이 거룩을 위해 필요조건이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게 되었습니다.

2:15 바울은 여기에서 모순을 보게 되었습니다.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베드로의 행위는 이방인의 지위는 천하고 유대인은 우수하다는 낡은 신념에 반대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이방인인 고넬료의 회심을 통해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아무도 깨끗하다거나 부정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 10장 ; 11:1-18).

2:16 구원받은 유대인들은 율법으로써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모든 사람은 율법의 거룩한 가르침을 범하기 때문에 율법은 모든 사람에게 저주를 가져옵니다. 구세주께서 믿음의 유일하고 참된 목적으로 이곳에 오셨습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베드로에게 "우리 유대인들도" 구원은 율법준수가 아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방인들을 율법아래 놓았다고 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율법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의죄악을 나타내 주지만 사람의 구원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2:17 바울과 베드로와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의를 구했습니다. (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행한 행동은 그가 완전히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의 완전한 구원을 율법 아래로 가져간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구세주로서 완전하고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사함을 얻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가면서도 그밖에 다른 곳으로도 간다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약속을 이루지 못한 죄를 짓게하는 자가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한다고 고백하면서 율법(오직 우리를 죄인으로 선고할 수 밖에 없는)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실상 주님을 죄를 짓게 하는 자로 만드는 그러한 행동에 대해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기를 바랄 수 있습니까?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고 분노한 대답을 했습니다.

2:18 이 구절에 대한 가능한 또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말하는 바는, 만일 의롭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 한 분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수단인 율법을 부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신을 유일한 길이라고 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 주님은 구원을 위한 사역자가 아닌 그러한 죄를 짓게 하는 자인 것이다."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위해 모든 율법제도를 버렸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데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어떤 구별도 부인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이방인과 먹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운 것입니다. 그러한 행동으로 그는 자신을 범법자로 증명한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율법을 버리는 것이 잘못이었든지, 아니면 지금 율법을 위해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죽었으나 산 자


2:19 율법을 범한 것에 대한 형벌은 죽음입니다.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나는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나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범한 나 대신 죽으심으로 나의 형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내가 죽었습니다. 주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를 갚으셨다는 의미에서 율법에 대해 죽으셨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 죽었기에 더 이상 율법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은 십계명을 어기면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두려워하여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해 죽어주신 분을 사랑함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행동의 틀과 같은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을 율법의 저주 아래 놓게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율법의 전체를 지켜야 하는 책임을 갖지 않고는 그 율법의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율법은 결코 거룩한 삶을 만들어낼 수 없기에 하나님은 결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에 대한 방법은 다음 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2:20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주님과 동일하게 여겨집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님께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뿐아니라 나도 주님안에서 갈보리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나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거나 받을만 하게 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더 이상 거듭나지 않은 옛 성품 안에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옛날의 악한 "나" 는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율법은 더이상 나의 삶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참된 신분이며 이것이 내가 행해야 할 참된 행동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삶이나 개인적인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죽은 사람으로 보시는 사람은 동일하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구주께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게 하려고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은 이제부터 주님께서 내 안에서 주님의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이 육체 가운데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뢰 또는 의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지속적으로 의지함으로, 주님께 굴복함으로,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주님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허락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는 믿음은 주 예수님께서 갖고 계신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자들이 주님 안에서 갖고 있는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생활 규범은 그리스도이며 율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는 심판을 두려워함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사 그를 위해 자기 몸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율법의 열가지 채찍 아래에서

아아! 어찌 참된 것을 행할 수 있으랴!

율법은 나를 더욱 죽어야 할 자로 만들어 갔고

그동안 율법은 너! 너!! 너!!!라고 외쳐댔네.


소망없는 싸움을 싸우며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고 외치며

참회를 통한 구원을 갈구하였고

그동안 나의 영혼은 나! 나!! 나!!!라고 외쳐댔네.


그러던 어느날 나의 분투가 그쳐졌을 때

모든 손발이 떨리며

 나를 위해 죽어주신 분의 나무 아래에서

나는 주여! 주여!! 주여!!!라고 흐느껴 울었네.


   당신은 당신의 육체에 주님의 삶이 나타나도록 기도함으로 당신의 삶을 주 예수님께 넘겨드린 적이 있습니까?

2:21 하나님의 은혜는 주님의 조건없는 구원의 선물로 나타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사람이 그 은혜를 사려고 하거나 대가를 지불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 은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은혜를 받을만 하다거나 은혜의 대가를 치르려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의 베드로에 대한 마지막 공격은 효과적이었습니다. 만약 베드로가 유대인의 규례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의미하게 죽으신 것이고, 주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주님의 생명을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율법준수를 통해서 조차도-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입니다.

   클로우는 "교회를 타락시키고, 어리석은 누룩과 같은 신조와 교만으로 우리의 육신의 마음을 부풀리는 가장 깊숙한 이단은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존 러스킨이 기록한 대로 '나는 기독교회를 핍박하는 이단과 모든 분파의 뿌리는 구원을 받기 보다는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전도가 전혀 효과가 없는 한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일하신 것에 주목하게 하는 것보다는 더욱 자주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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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12 과


                                               여성의 은사 활용


   성령님께서 주시는 은사 중 어떤 은사가 남성적이며, 어떤 은사가 여성적인 것일까요? 이에 대해 상고해 보노라면 어떤 은사도 남녀중 한 쪽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은사에 관해 상고하면서, 당신의 은사가 무엇일까를 염두에 두십시오.


                                                    은사의 정의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뚜렷한 역량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교훈하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신약에 기록된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은혜' 라는 의미의 '카리스' 라는 어원에서 나온 '카리스마'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은사들은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지 개인적인 기쁨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사의 유래


   영적 은사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주요한 세 대목을 살펴보면, 은사의 근원에 대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말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3절에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말씀하시며, 에베소서 4장 7절에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라고 말씀하시며, 고린도전서 12장 1, 11절에서는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종류


   로마서 12장 4~8절, 고린도전서 12장 7~11절, 27-31절, 에베소서 4장 7,8절, 11~13절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기록되어 있는 은사들을 열거해 보시기 바랍니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편의상 말씀의 은사, 봉사의 은사, 표적의 은사로 구분해 봅니다.


 말씀의 은사 : 사도, 예언, 전도, 목회, 교육, 권위, 지식, 지혜

 봉사의 은사 : 협력, 구제 ,다스림, 긍휼, 믿음, 분별,

 표적의 은사 : 이적, 신유, 방언, 통역,


1. 말씀의 은사

(1) 사도

   이는 '보냄을 받은 자' 라는 뜻으로 오늘날의 선교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선교사로서 말씀을 전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물론 좁은 의미에서 사도의 은사는 주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부터 함께한 자들로서, 주님께서 친히 부르신 자들이며, 주님의 부활의 증인인 12사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기초를 세웠으며(엡2:20), 특별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특별한 표적으로 입증했습니다. 이 특수한 은사는 초대 교회 당시에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2) 예언

   예언의 경우에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각기 쓰여지고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의 예언이란 미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전도가 곧 예언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예언의 은사는 특수한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이를 선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은사는 신약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필요했으나, 하나님의 계시가 다 기록되어 성경이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계시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3) 전도

   이 은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분명하게 전하는 특수한 능력으로서 결과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은사는 개인적일 수도 있고, 대중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 은사를 특별히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전도인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딤후 4:5).

(4) 목회

   이 은사는 목자가 자기의 양을 돌보는 것처럼 성도들을 인도하며 먹이고 악으로부터 보호하며 돌보는 특수한 능력을 가리킵니다.

 (5) 교육

   이 은사는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게끔 가르치는 초자연적인 능력입니다. 이 은사는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이들로 하여금 성경의 교훈을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6) 권위

   권위(權威)는 신앙의 동지들에게 어떤 행동을 강권하거나, 실패와 시련을 당하는 자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남녀가 곧 영적 상담자입니다.

 (7) 지식

   이 은사는 믿는 자가 하나님의 교훈을 연구하고 요약함으로써 거룩한 진리에 대해 심오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해줍니다.

 (8) 지혜

   이 은사는 성경의 진리를 필요에 따라 생활상의 문제에 적용함으로써 말씀의 지식을 매일의 체험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2. 봉사의 은사

(1) 협력

   이 은사는 배후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충성스럽게 봉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은사는 다른 성도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와 줌으로써 다른 성도들을 영적으로 격려하고 강건하게 해 줍니다. 이 은사에는 신약 성경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기도와 접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 구제

   이것은 자신이나 자신의 재물을 주님의 일과 믿는 자들에게 희생적이면서도 슬기롭게, 자원함으로 바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3) 다스림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과 믿는 자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며, 이를 실행하도록 성도들의 동기를 유발시키는 일을 합니다.

 (4) 긍휼

   이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의 각 지체가 당하게 되는 고난에 실제적이고 동정적인 사랑을 보여주며, 말로만 동정하지 않고 행동으로 희생을 보여주는 성령이 주시는 능력입니다.

 (5) 믿음

   물론 이것은 구원받는 믿음 이상의 것입니다. 이 은사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깨닫는 능력이 있으며,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하실 것이라고 믿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은사를 가진 사람은 큰 꿈을 꾸며,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해냅니다.

 (6) 분별

   모든 성도들에게 영을 분별할 책임이 있지만(요일 4:1), 어떤 성도들은 남다른 분별력을 갖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과 거짓 영을 분별하는 능력, 하나님께로서 온 영과 그런 것처럼 가장하는 영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 특별히 필요했습니다.


3. 표적의 은사

 (1) 이적

   이 은사는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경이로운 일을 행하는 것이며, 설교자 자신과 그가 하는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은사는 사도시대에 필요했습니다.

 (2) 신유

   이것은 모든 질병을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치유하는 은사입니다. 이것은 일시적으로 초대교회 당시에 말씀을 확증하기 위해 필요했던 은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3) 방언, 통역

   이 은사는 자신이 배운 적이 없는 언어이지만,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것도 사도시대의 특징적인 은사로서 설교자와 그의 말씀을(the messenger and his message)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 표적의 은사가 다른 은사와 다른 것은 어느 곳에서도 이를 행하라고 명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적이나 신유나 방언은 성도들에게 권하는 은사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막 16:15), 목회(갈 6:2, 10), 교육(골 3:16), 구제(고전 16:2) 등은, 비록 특정한 은사가 없을지라도 행하라고 권면하십니다.


                                                은사의 발견


   내가 가지고 있는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은사를 알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는 일단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기도하면서 시도해 본 후에는 다음의 문항에 따라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는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은사대로 일하고 있다면 그 일을 하고 있는 당신은 만족할 것입니다.

   둘째, 다른 이들이 내가 이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가?

   대개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활동에 대해 잘 분별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속기가 대단히 쉽습니다.

   셋째,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해서 쓸모가 있는가?


                                                 은사의 계발


   은사를 계발하는 데에는 인내와 근면을 요하며, 더욱이 은사를 계발하기도 어렵거니와 은사를 활용할 기회를 찾아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사가 신실하게 활용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벧전 4:10) 거나, "네 속에 있는 은사...조심없이 말며" (딤전 4:14) 라거나,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딤후 1:6) 하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머리로부터 받게 된 모든 은사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올바르게 세우고 그 기능을 수행하게 하는 데 필요합니다. 비록 작은 악기인 피콜로도 장엄한 오케스트라에서 자신의 몫을 연주해 내며, 이것이 제 구실을 못했을 때에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을 듣는 모든 이들이 이를 쉽게 알아 차리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책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상호간의 영적축복과 풍요를 위해서 그들의 은사가 적극 활용되어야 합니다.

   아울러 사도 바울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 말씀하심으로 은사를 계발하거나 활용하기에 앞서 사랑의 필요를 역설했습니다(고전 12:31~13:13). 사랑이 없는 은사의 활용은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하나님과 성도들을 사랑함으로 은사를 활용하는 성도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은사가 행해지는 것보다 성도의 생활 속에서 소리없이 맺히는 성령의 열매를(갈 5:22,23)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적 은사를 발견하고 계발함에 있어서 '더 좋은 길' 이며 더 중요한 길인 사랑의 길을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본 강좌의 서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없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많은 교훈을 받았거니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며, 그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롬 8:29). 우리 속에 주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을 그리스도로 채우고, 우리 속에 늘 주님의 말씀이 거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수고와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다만 매일 매일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킴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님께서는 이렇듯 헌신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셔서 우리로 우리 주님의 형상을 닮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여성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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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F. 스마아트  &   J. 영


                           제 2 과


                         여성의 범죄와 그 결과(창세기 3장)


   창세기 3장을 공부하기에 앞서 2장 16,17절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것은 해도 좋지만, 저것은 해서는 안된다' 하신  하나님의 분부가 아주 분명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경고하셨습니다. 도덕적 존재로서 창조된 최초의 인간은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선택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할 수도 있었고, 불순종하며 제멋대로 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러했듯이 우리도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최초의 남녀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거처로 주셨던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에서, 얼마 동안이나 평화스럽고도 의좋게 살았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 평화는 깨어졌고, 대신 비극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하와는 동산 중앙에 있던 금단의 과실 나무 가까이에 있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과실을 따먹으면 어떻게 될까를 이리저리 궁리하면서 서성 거렸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랬다면 유혹하는 자에게 있어서 이는 안성 맞춤의 기회였으며, 이러한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단이 이를 놓칠 까닭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에서 가능한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며, 죄의 유혹을 받을 만한 일에는 섣불리 접근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    혹


   뱀은 교활한 질문과 거짓말로, 여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모두 의심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손대지 못하도록 금하신 것이 있지 않느냐? 왜 그러셨는지 아느냐? 네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불행이 닥쳐오겠니! 하나님께서는 다만 네가 하나님처럼 위대해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실 뿐이야! 이 과실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래! 보라구, 보기에도 얼마나 아름다우냐! 이것만 먹으면 넌 지혜롭게 될거야!'

   이처럼 뱀은 욕심과 교만에 호소하며 하와에게 접근해 왔습니다.


                        죄


   하와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하와가 뱀의 그 모든 제의에 대해 잠깐만 깊이 생각해 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거늘 어찌 감히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권리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젖혀놓고 사단의 말을 믿는 그 순간에 범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녕 죽으리라" 고 말씀하셨지만, 뱀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다른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하나님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와는 마침내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자비를 외면했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저버린 채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남편까지도 이 일에 끌어들였습니다.

   한편 주 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셨던 때의 사단의 접근 방법이 하와가 당했던 경우와 너무나 유사했음을 유의해 보십시오(마 4:1~10). 사단은 세 차례나 주님을 시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주님께 주시지 않았던 권세와 명예와 재물을 주님 스스로 취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 번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을 인용하고 의롸하심으로 단호히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단과 어떠한 논쟁도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오늘날 우리를 유혹하는 데에도 이와 똑같은 수법을 사용합니다. 세상에 반짝이는 것들을 우리 앞에 흔들어서 우리로 그런 것에 욕심을 내도록 합니다. 사도 요한은 이에 대하여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육신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먹음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안목의 정욕과(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보암직스러워 보였습니다.)  이생의 자랑이니(하와에게는 그 과실이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요일 2:15,16)고 경고했습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오직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하와는 하나님께 범죄했을 뿐 아니라, 아담을 무시하고 행동함으로써 아담에게도 범죄하였습니다. 이렇듯 하와는 아담이 행사하게 되어 있는 지도권을 남용함으로써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고 우리에게 부여해 주신 본분에서 이탈하게 되면, 우리는 무질서와 근심외에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범죄의 결과


   하와의 범죄는 즉각적으로, 이전에 가졌던 순수한 상태가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대치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죄로 인한 최초의 증세는 부부 관계에서 나타났습니다(창 3:7). 곧 이 죄는 창세기 2장 23~25절에 나타난 부부 일체의 원리를 파괴한 것입니다.

   뱀이 그들에게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꾀었던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선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실천할 힘은 없었으며, 그들이 악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이를 물리칠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궁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이었습니다.

   이 죽음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즉시로 이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영적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둘째, 세월이 지난 후에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으나(창 3:5), 도리어 죽음과 더불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는 이와 대조적인 사실을 보게 됩니다. 주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공부하시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강하신 손 아래 스스로 겸손하십시오. 때가 되면 그가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벧전 5:6).

   이렇듯 죄가 들어오게 되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행복한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이들 최초의 남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을 피해 숨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은혜로 도우시며, 축복해 주시려고 우리 인간들을 찾고 계십니다.


                    범죄로 인한 형벌


   하나님께서는 이 범죄 사건에 관련하여 세 가지 대상들 즉, 뱀과 남자와 여자를 각각 다루시되, 뱀과 땅은 저주하셨지만(창 3:14,'17)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옛 뱀(계 12:9)이라고 불리우는 타락한 사단의 상징으로서, 뱀을 보다 하등한 돔물로 격하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의 최후 운명에 대해서는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 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창 3:15).

   또한 남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그가 평생토록 가장 보람을 가지고 해야 할 근로가 이제는 고통과 수고와 피로를 수반하게 되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몸이 흙에서 지음을 받았던 대로 흙으로 돌아가게 되리라는 형벌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내리신 형벌은 근본적으로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본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창 3:16). 즉, 여성으로서의 특유하고도 축복된 기능, 곧 어머니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고통과 슬픔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여성들은 언제나 자녀를 갖고자 하는 강한 갈망이 있습니다. 여성으로서의 그의 소원을 성취할 수는 있었지만, 그 때마다 죄로 인해 당하게 되는 고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슬픔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변화가 와서, 이제는 남편의 권위에 복종하며, 다스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죄를 지을 때에는 하와가 지도자였고 아담이 하와를 따랐으나, 이제는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만 했습니다. 창조의 질서에 있어서 아담에게 지도적 권위가 부여되어 있긴 하였지만, 그렇다고 하와가 아담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타락한 이래로 결혼에 대한 갈망, 그리고 결혼에 의한 종속이 여성 대부분의 숙명처럼 되어왔습니다. 여성사, 특히 비 기독교 국가에서의 여성사는 굴종과 멸시, 천대의 기록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와서 남성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킴으로, 이러한 굴종과 멸시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의 선언 가운데 16절에서의 고통, 수고라는 낱말과 17절에서의 수고라는 낱말은 한가지로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고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로 보건대 형벌이 내려졌다는 점에 있어서는 남녀간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피로와 고통을 견디면서 처절하리 만큼 수고하는 것이 남녀 모두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비취어오고 있는가를 유의해 보십시오. 비록 여자가 먼저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구속 사업의 일익을 담당하는 영예를 안겨 주셨습니다. 여인의 후손, 곧 사단의 희생 제물이 되었던 하와의 씨가 바로 그 사단을 멸망시키도록 되어 있었습니다(창 3:15). 우리는 이 약속의 성취를 히브리서 2장 14절의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셨다는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현대 여성의 지위


   죄악이 가득한 인간 본성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는 타락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권위가 확립되고 유지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는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남자가 가정의 머리가 되어, 그 가정의 안녕과 질서에 대한 권위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는 궁극적으로 결혼 생활과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해보겠다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이에 유의해서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믿는 아내에게 이러한 여성의 지위에 대해 더 상세하게 교훈해 주십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상세히 상고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하려는 것은 이것이 영구적인 원칙으로서 복종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의 축복을 위해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점입니다.

   여성 중에 몇 사람이나 참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전 가족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완전히 책임을 지겠노라고 결단을 내리고 그 길을 선택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시 103:14)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으로 하여금 조력하도록 계획하셨고, 조력하는데 알맞게 하셨을 뿐, 한 가정의 가장으로 계획하셨거나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에 관한 한, 창세기 첫머리에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결혼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예나 지금이나 정상적인 일입니다. 폐일언하고, 여자를 창조하신 순서에서 보나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여자의 본분은 남자를 '돕는 배필' 로서의 역할, 곧 후원적이고 보조적인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엘리사벳 엘리오트(Elisabeth Elliot)는  "나는 모든 남성이 아주 강인하고, 지성적이고, 유능하고, 덕망이 있고, 거룩해서 남성 우위가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남성 우위란 그들의 훌륭함과 무관한 천부적인 지위임을 알고 있다" 고 술회했습니다.

   아직도 복종의 개념이 좀체로 깨달아지지 않으십니까? 복종하라신 하나님의 명령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명령을 깨달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일상 생활에서 평안을 누리며 사는 비결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친히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마 26:3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번뇌가 그치기까지


                                                 주님의 평온을


                                                 새벽 이슬처럼 내려 주소서 !


                                                 우리의 심령에서


                                                 긴장과 초조를 제하여 주소서 !


                                                 그래서


                                                 우리의 단정한 생활로



                                                 아름다움을 나타내게 하소서 !


                                                                                          J. G. Whit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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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07 건너편 지역들(13-15장)


요절 : 사도행전 13장 39절, 15장 11절

요점 :

1. 구약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2.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3. 핍박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4. 선행은 아무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5. 선행은 구원받은 어떤 사람도 지켜줄 수 없습니다.

6. 선행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필수요소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1. 바울과 바나바가 파송됨(13:1-12)


안디옥 교회에는 바울과 바나바 이외에도 세명의 다른 성경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시킬 특별한 일을 위해 그 두 사람을 파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바울과 바나바는 이 부르심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교회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그들을 파송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전도자들과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들이 방문한 첫번째 장소는 구브로 섬이었고 마가 요한은 수종자로 그들과 함께 갔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파하며 온 섬 가운데로 지나갈 때, 그들은 서기오 바울(Sergius Paulus)이라 불리는 그 지방을 관리하는 사람에게 갔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지만 박수 엘루마가 진리를 듣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결국 바울이(Paul : 이때부터 계속 이 이름으로 불리워짐) 엘루마를 얼마동안 소경이 되도록 벌함으로 복음의 빛을 방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서기오 바울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진리의 빛을 방해하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얼마 후에는, 사람이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어 마치 소경과 같이 되므로 더 쉽게 사단의 거짓말을 믿게 될 것입니다.


2.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의 증거- 그리스도의 죽으심(13:13-29)


그들은 구브로에서 더 위험한 지역인 대륙으로 돌아왔으며 이곳에서 마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습니다. 우리는 마가가 왜 돌아갔는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역을 아주 용감히 시작하지만, 곧 떠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주님께서 신실한 일꾼을 사랑하시는 것에 비하면 이일은 매우 슬픈 일입니다.

   곧 두 사람은 비시디아 땅에 있는 안디옥이라 불리는 다른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회당으로 먼저가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고,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그와 같은 방식으로 전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먼저 스데반이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 구약 내용을 제시하고는 가능한 빨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23절). 바울은 주님께서 다윗 왕의 직계였다는 것과 주님의 선구자인 세례요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배척한 것, 그분이 바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 자체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임을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잘 말하려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를 잘 알아야 합니다. 그 두가지는 우리의 구원자에 대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 바울이 전한 말씀 :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13:30-41)


물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을 듣는 것만으로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은 즉시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영광스런 부활하심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으며 바울은 그 사실이 분명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성경의 시편을 인용했습니다. 그후에 바울은 그분을 통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으며 만일 이러한 하나님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에 대한 경고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구원에 대해 주님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께서 놀라운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4. 안디옥에서 바울이 전한 말씀에 대한 결과(13:42-52)


그 다음 안식일에 유대인과 하나님을 믿는 이방인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바울의 설교를 다시 듣기 원했기 때문에 거의 온 성이 그에게 들으려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들으려고 그런 큰 무리가 모인 적이 없었기 깨문에 그들에게는 너무도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과 논쟁을 시작했고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로 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이방인들을 기쁘게 했지만 유대인들을 더욱더 분노하게 했고 결국 매우 큰 소란이 일어나 사도들은 그 성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는 한 무리의 행복한 제자들을 뒤에 남겨두었습니다.

   은혜의 때가 주어질 때마다 사단이 소동을 일으키고 할 수 있다면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려 한다는 것을 학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그 후로 특히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오직 우리의 증거를 통해서만 주님을 알게 된다면 믿지 않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받을 약간의 모욕을 염려하시겠습니까?


5.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처음에는 경배를 받았지만 후에는 돌에 맞음(14:1-18)


사도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를 치유하면서 아주 오랜 기간동안 머물렀으며 그 결과는 매우 비슷했습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믿었지만 유대인들은 대적했고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를 죽이게 돌을 던지라고 선동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것을 알고 피신하여 이웃한 큰 성 루스드라로 도망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 앉은뱅이된 자를 치유했는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바울과 바나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온 두 이방신임에 틀림없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음으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짐승을 희생제물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물론 고넬료가 베드로 앞에서 절하려고 했을 때 그에게 일어서라고 말한 것과 같은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신적인 경배를 받는 것은 매우 죄악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해 그렇게 선하신데도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을 그렇게 자주 기꺼이 경배하려 하는 것일까요?


6. 루스드라를 떠나 안디옥으로 돌아옴(14:19-28)


그러나 루스드라의 군중들은 주위에 의해 곧 변화되어 유대인들이 바울에 반대하도록 선동시켰을 때, 분노하여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되자 버려두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주님을 위해  해야할 큰 사역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무서운 경험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님만을 섬겨 나가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더베로 갔었지만 그곳에서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가혹하게 취급했던 이 성들을 결코 피하지 않고 그들이 그곳에 있을 때 구원받았던 몇 사람들을 굳게 하면서 바울은 그 모든 성들을 다시 지나서 곧장 나아갔습니다. 그는 또한 각처에 세워진 작은 교회들을 보기 원했기 때문에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났고 서로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본 교회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놀라운 일에 관하여 말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공회의


1.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논쟁(15:1-5)


우리는 11장에서 믿은(적어도 믿었다고 말하는) 유대인 지도자들 중의 일부는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교제했다는 것 때문에 그와 논쟁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인도 하셨는지 설명하자 그들은 더이상 할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들이 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안디옥까지 가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할례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복을 구한다는 구약 시대의 표시였습니다. 이 일은 그 당시에는 선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모든 의식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졌고 폐해졌습니다. 더욱이 구원의 필수적인 요소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에 어떤 것을 더하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한 유일한 필요사항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주님께서 이루신 사역뿐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비참한 죄인은 하나님의 사랑외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바랄 수 없지만 할례. 세례, 또는 교회 출석과 같은 자신의 어떠한 선한 행위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이며,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에 당신의 공로를 덧붙이겠습니까?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은 이 잘못된 가르침에 혼동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그것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시켰지만 그래도 그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교회 지도자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사도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매우 반갑게 영접했지만, 믿는 바리새인 중 일부는 모든 사람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 베드로가 어떻게 성령님이 이방인 신자들에게 주어졌는지를 말함(15:6-11)


그래서 그들은 함께 모이기로 결정하여 철저하게 그 문제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와 논쟁들은 함께 모여 끝까지 대화한다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믿음에 근거해서 사실상 이방인들을 받으셨는 가를 단순하게 상기시켰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와 다른 여러 사람들에게 성령님이 주어졌기 때문에 증명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리새인들이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없이 받으신 사람들에게 율법 준수라는 짐을 지우려고 애쓰는 것입니까? 유대인 자신들도 율법을 준수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한 것을 이방인들에게 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입니까?


3. 바울, 바나바 그리고 야고보가 말함(15:12-21)


그후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나음을 받은 것과 같은 예를들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 사이에서 놀라운 표적을 행하셨는지 말했습니다. 더욱 더 놀라운 것은 수백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야고보는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베드로의 진술을 지지하기 위해서 아모스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것으로 논쟁이 해결되었고 우리에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의 결론은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법을 지키도록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편지를 써서 음행과 우상과 어떤 음식들로 인한 죄를 피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모든 이방인들에게 온 율법을 지키는 것은 짐이 되기 때문에 매우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또한 금지된 네가지 일들 조차도 구원의 방법이라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런 행위가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구분이 있습니다. 선행은 구원의 열매이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이제 내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의 구원을 지켜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나를 먼저 사랑하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4. 이방인 신자들에게 쓴 서신(15:22-29)


야고보의 제안은 모든 교회에 잘 받아들여졌으며 그들은 그 서신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유다와 실라 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형제 중에 인도자"(22절)로 표현되었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받을 가치가 있었지만, 그보다 더 나은 표현을 25절에서 보게됩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그리스도인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그들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서신에서 사도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될 것을 전하라고 그 사람들을 보낸 것이 아님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네가지 필수적인 일들 이외에는 그들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았습니다.


5. 이방인들이 기쁨으로 그 서신을 받음(15:30-35)


그들이 안디옥에 도착하자 온 교회를 모아 서신을 읽어 주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실제로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결국 옳았으며 누구든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을 듣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더우기 유다와 실라도 그 사람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믿음을 굳게했습니다. 얼마 후에 형제들이 그들을 예루살렘에 돌려 보냈지만, 실라는 계속 머물며 주님의 사역을 돕고자 했습니다.

   당신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되어졌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을 더하려고  매우 먼곳까지도 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직면한 이러한 잘못된 가르침은 갈라디아서, 고린도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에 있습니다.


6. 바울과 실라가 제2차 전도여행을 시작함(15:36-41)


얼마 후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전에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 성들을 다시 방문하러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원했지만, 그 첫번째 전도여행에서 낙오한 조카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므로 결국 그들은 서로 다른 길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나 마가를 볼 수 없지만 바울은 그들 모두를 친구로 여겼습니다(고전 9 :6, 딤후 4:11).

   바울은 실라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와 함께 가기를 기뻐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며 전송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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