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5 과


                       율법과 약속(3:10-18)


   4과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네 주요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하여, 복음의 위대한 진리(3:1-18),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에 대한 고찰(3:1-5),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3:6-14)를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증거에 대해서 10-14절에서 계속해 살펴보겠습니다.

3:10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은 결코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할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율법을 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27:26절에는 "기록된바...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말씀되었습니다. 이는 하루나 한달 혹은 일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하며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3:11 거짓 선생들은 다시한번 구약성경으로 반박되었습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사람을 의롭게 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원어로 그 인용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

3:12 율법은 사람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레위기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분명하게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는 대조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믿음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는 구절은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3 속량(deliver)은 다시 사다 또는 구하다,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말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인 율법의 저주는 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형의 형벌을 갚으심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하셨습니다. (바울이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때 비록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만 우선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말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킨들란 존스는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반정도만 샀다고 생각했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그들의 할례와 다른 유대 절기와 의식들에 복종하여 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선생들과 기독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것에 속히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고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참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들의 대속자이신 주님께 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놓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것으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무서운 사형의 저주를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구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특히 죄인으로 나무에 달린것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의 표시라고 가르칩니다(신 21:23). 성령님은 그 구절을 구주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예언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느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온 세상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죽음의 형벌이 치뤄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 주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님을 말한 것이 아니며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조건 없는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이 막고 있는 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되셔야 했습니다(요 16:7).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나타냈습니다. (1)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2) 구약성경의 증거, 사도바울은 이제 일상 생활로부터 한 예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인간 약속에 대한 의무(3:15-18)


   이 단락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에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22:18에서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단수)라고 말씀하시고 "씨들" (복수)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인(눅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순한 약속입니다.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 약속에 어떠한 조건을 더하거나 어떻게든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는 더욱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율법 준수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3:15 사람의 일에서도 어떤 언약이나 뜻에 서명을 하고 인을 치면 누구도 그 문서를 바꾸거나 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람의 언약도 어기지 못할진대 하나님의 언약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3:16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그 약속이 원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이스라엘 백성) 믿음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원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씨" 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단어가 때때로 군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단어는 한 사람인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십니다)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어떠한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닙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그 씨(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백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율법은 이 구원의 약속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약속을 한지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이 온 것은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속은 뜻과 같은 것이며, 죽음으로 확증된 것입니다(희생의 언약으로 창 15:7-11과 히 9:15-22을 보십시오). 이것은 결코 폐하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8 이 430년은 언약이 제정된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이 마지막으로 확증된 때 즉 야곱에게서부터 계산된 것입니다(창 46:1-4).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유업은 믿음에서 나지 않으면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모두에서 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조건없는 약속을 주심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유업은 구원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조건없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배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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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7과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7장 1절~25절)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가?


   사도 바울은 이미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백하게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구원을 받은 후에 생활의 규범이라 할 수 있는 율법을 꼭 지켜야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6장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에대한 이유는 이제 분명해질 것입니다. 덧 붙여서 사도 바울은, 사람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거룩해질 수 없음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1. 율법은 죽은 사람에 대해서 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혼인법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혼인법은 부부가 함께 살 동안만 유효합니다. 그러나 부부 중 한사람이 죽으면 그 법은 무효가 되고, 살아있는 사람은 다시 결혼할 수 있습니다(1~3절).


   2.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4절). 주 예수님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 담당하셨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이제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으므로 그 역시 율법에 대해 죽은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요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에 대해 관계할 수 없습니다.

  

   3.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신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4절). 이제는 율법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자의 생활 규범이 됩니다. 혼인은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노력으로 거룩해지려고 하는 것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4.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열매를 맺게 합니다(4절).

   1)율법이 어떤 것을 금할 때, 사람의 마음은 그일을 더 하고 싶어합니다. 율법은 어긴데 대한 형벌은 죽음이고, 또 우리는 율법을 지킬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율법 아래서 맺은 열매는 죽음뿐입니다(5절).

   2) 이제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두려움이나 의무로써가 아니라, 자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6절).


   5. 이 말이 율법자체가 죄악이라는 뜻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율법의 거룩함 바로 그것이 사람의 죄악의 큼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다면 악한 행동은 물론, 악한 생각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7절). 그러나 우리의 악하고 부패된 성품을 이용하여 마음속에 각양 악한 생각을 일으켜서 우리로 금지된 행동을 하고 싶어 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없으면, 죄를 죄로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나타날 때, 죄를 죄로 여기며, 죄가 기회를 타서 활동할 것입니다(8~11절). 그러므로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율법은 죄의 본능인 사악함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부패하여 금지하는 것을 하고 싶어합니다(12~14절).


   6. 자기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한 생활을 이루고자 함은 낙심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사도바울은 이 점에서 자신의 체험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15~24절).

   1) 그는 마땅히 해야 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일을 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미워하던 일을 행했습니다.

   2) 그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옛 성품은 그것에 순종하기에는 무력했습니다.

   3) 그가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할수록, 그에 따른 실패는 더욱 컸습니다.

   4) 마침내 그는 손을 들고 이렇게 패배를 자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7. 이 때 비로소 사도 바울은 성결의 비밀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 하리로라." 라고 외치는 것이 그의 승리의 선언이었습니다. 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역사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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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6과 하나님의 종

                                                    (6장 1절~23절)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가르침은 죄악의 생활을 조장하거나 허용하는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할 때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할 일의 전부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면, 세상에서 나가서 마음대로 생활해도 괜찮지 않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로마서 6장은, 왜 이것이 불가능한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믿는 자들이 제일 먼저 직면하는 크나 큰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우리의 옛 성품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악하고 부패한 성품을 고치거나 개선시킬 의향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성품에 대한  하나님의 유일하신 해결책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주께서는 죽으실 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예수께서 죽으실 때,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옛성품에 속한 모든것은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셨을 때, 우리도 장사되었습니다. 그것이 죄 지은 피조물로서의 우리를 영원히 하나님의 면전에서 제거해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그가 갈 곳 즉, 사망으로 추방되었습니다.


   2. 침례가 이 모두를 상징하고 있습니다(3~7). 우리는 물속에 들어갈 때,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서 꼭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자아, 곧 사람이 살 가치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그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영원히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으므로, 이제 우리는  죄와 상관할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죄하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와 같이 보시기 때문에, 죄가 우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다시 산 자로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8,10절). 그러나 우리가 다시 산 것은 우리의 옛 생활을 반복하려 함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다시 살아난 것은 이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4. 이것은 다 신성한 사실들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느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그와 함께 다시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 곧, 그의 생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인 것을 알고 있기를 원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음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5. 다음 관계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기는" 것입니다(11,12절). 이것은 당신의 신분상으로 이미 그렇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 사실이 당신의 실제생활에서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죄와, 자아와, 세상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로 죄가 당신을 다스리지 못하게 행동하십시오. 당신이 죄에 대해서 죽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6.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마땅합니다(13절). 하나님이 당신을 주관하시도록, 당신 몸의 지체들을 매일, 아니 항상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 때에 당신은 자기 중심적 생활을 하는 대신에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거하시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7. 죄가 믿는 자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14절).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대단히 중대한 사실입니다.


   1) 사람이 율법 아래 있으면, 죄가 그를 주관합니다. 율법은 할 일을 가르쳐 주지만, 그 일을 행할 능력은 주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인에게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는 곧 그것을 더욱 더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 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말하기를 "주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거룩하게 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형벌이 두려워서는 하지 않을 것이라도 사랑 때문에는 합니다.

   30 그리스도인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가 죄 가운데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미워하는 새 성품을 받았습니다. 또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며, 격려해 주시는 성령님이 그속에 내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구주께서 자기 죄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당하셨는가를 잊지 못합니다. 이제 그는 그가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하는 자의 종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항상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생활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16~21절).


   8.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크게 사모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속에 나타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종으로 드리는 것입니다(22,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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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개 요

                                                               윌리암 맥도날드


                                     머리말


      이 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진지한 마음으로 성경을 공부하려고 하다가도 워낙 분량이 많고 개략적이나마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낙심하게 됩니다. 이 강좌는 바로 이렇듯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려는 분들을 돕기 위해 마련된 강좌입니다.

   성경을 전연 모르는 분이나, 시간의 여유가 별로 없는 분, 또는 역사적 배경을 잘 모르는 분에게도 충실한 성경의 안내서가 되어 줄 것입니다.

   아울러 각 권의 개요를 공부하실 때마다 해당되는 성경을 직접 읽으셔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제1과 역사의 기원


                                       창세기


   성경은 세계사가 아니며, 더군다나 어느 민족의 역사도 아닙니다. 성경은 다만 우리 인생들에 대한 당신의 뜻이 어떻게 펼쳐지게 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하여 필요한 사건들만을 하나님이 골라 뽑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적인 중대 사건이 빠져있기도 하며, 역사적으로는 사소하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관계가 있는 사건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맨처음에 있는 창세기에는 창조, 타락, 홍수, 바벨탑,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먼저 인간의 기원과 인간이 살고 있는 우주의 기원에 관한 사실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로 말미암아 죄가 인간에게 들어 오게 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실 것을 약속 하셨습니다(창 3:15). 구약 성경을 계속 상고 해 가노라면 이와같은 세상의 구주께서 오실 것에 관한 계시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3장 15절의 말씀은 가장 중요한 사건의 실마리가 됩니다.

   이렇게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은 계속 타락해 가고 있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홍수를 보내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전멸시키셨습니다. 이 사건은 아담이 창조된지 최소한 1600년 이후에 일어났었을 것입니다.

   노아 홍수 사건 후에도 인간은 거듭 거듭  하나님께 반역하였으며,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 도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인류를 땅 끝까지 흩으심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는 노아 홍수가 있은 지 400년 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 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는 성경에서 후에 바벨론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오늘날의 이라크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내셨다는것은, 지상 선민(選民)인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며, 그의 후손을 통하여 구주를 보낼 것과 가나안 일경을  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구약 성경의 대부분은 선민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13장을 기점으로 하여 주목할만한 두 차례의 방랑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건은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출생과 모리아 산에서 죽음을 모면하게 되었던 사건, 그리고 리브가와의 결혼 등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동이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생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고 이삭에 이은 새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야곱의 생애에 대해서는 많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그 사실들 모두 귀중한 교훈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사건은 후에 그가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될 12아들을 낳았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들의 이름을 출생순으로 열거하면,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블론, 요셉,베냐민입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것은 아닙니다. 메시야는 오히려 그의 형인 유다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생애와 활동은 구약 성경의 어느 누구보다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요셉은 아버지에게서 특별한 사랑을 받음으로 인해,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가던 대상(隊商)들에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애굽의 바로 통치 하에서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후 가나안에 흉년이 들게 되자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에 식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다가 마침내 전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때로부터 270년 정도 지나 요셉이 애굽에서 죽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요셉이 죽은 후에 다른 바로가 집권을 하게 되었는데, 그는 히브리인에게 불친절했고, 이들을 노예로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돌아 가는 것을 허락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에 바로가 거절하자 하나님께서는 아홉 가지 재앙을 차례로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끝내 돌이키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돌려 보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유월절 양의 피로 살아남지 않는 한, 모든 애굽 가정의 장자가 죽게 되는 열 번째 재앙을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지 아니한 애굽 사람들은 집집마다 죽음을 맞게 되었지만, 문에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 가정은 생명을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기적적으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널 수 있게 하시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를 수장(水葬) 하셨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삭과 애굽과 이후 증손, 고손을 거치는 동안에 200만을 헤아리는 민족으로 성장하였으며, 약속의 땅을 향하여 여행하는 동안에 조직적으로 단결되었습니다. 가족과 가축들을 이끌고 광막한 사막을 행진하며, 도중 여러 지점에서 진을치고 유숙하는 수백만의 무리를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 무리를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으로 만나를 비오듯 내려 보내사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셨습니다. 이 만나는 작고 둥글며 흰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아침 지면에서 이 만나를 구하여 만나로 빵이나 과자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애굽을 떠난 지 3개월만에 이스라엘은 시내 광야에 도착하여 잠시 동안 유진(留陣)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근처에 진을 치고, 근 일 년 동안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시내 산은 호렙 산이라고도 불리웠으며,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민수기 10장 11절까지의 기록은 모두가 이 시내 산에 있을 때에 일어 난 사건들입니다.

   한편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제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들의 행동규범이 될 율법의 체계화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관해서나 그들의 죄악에 관해서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에 관해서, 이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자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하여 모세에게 십계명을 반포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은 지금까지 인간 정치 제도의 초석(礎石)이 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상 책임이나, 인간 관계상 상호 간의 책임에 관해서 많은 법률을 따로 제정해 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건축에 관해 아주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막이란 천막과 비슷한 구조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처소였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습니다. 더구나 성막을 만드는 데에 쓰인 모든 자재와 모든 기구는 장차 오실 주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을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 제도는 바로 이 성막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막의 교훈에 이어, 레위 지파를 택하시고 그 가운데서도 모세의 형인 아론의 가계(家系)를 택하여 제사장의 반차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의 직무를 말씀하시면서 이에 관련하여 제사장의 의복과 활동과 예식에 관해서도 간단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면서 시내 산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함으로써 그 율법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가 돌아와 이를 보고 노하여 율법을 기록했던 두 돌판을 깨뜨린 후, 이 백성들을 멸망시키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에서 은혜와 긍휼을 약속하는 율법을 다시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은 이제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왔고, 성막 건축 공사를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성막이 완성되자, 제사장들이 따로 세워지고 그들에게 제복이 입혀짐으로써 모든 일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러자 밝게 빛나는 구름이 성막을 덮어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 출애굽기에는 우리의 실생활에 교훈이 되는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1.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는 구원을 상징해 줍니다.

   2. 홍해를 건넌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작별하고 실제로 거룩하게 살아갈 것을 교훈해 줍니다.

   3. 성막이나 성막에서의 봉사는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가를 교훈해 줍니다.

   4.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 보좌 앞에서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대제사장이신 주 예수님의 사역을 상징해 줍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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