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제 5 과
율법과 약속(3:10-18)
4과에서 우리는 이 서신의 네 주요 부분을 살펴보기 시작하여, 복음의 위대한 진리(3:1-18), 갈라디아인들의 경험에 대한 고찰(3:1-5), 그리고 구약성경의 증거(3:6-14)를 살펴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의 증거에 대해서 10-14절에서 계속해 살펴보겠습니다.
3:10 바울은 성경에서 율법은 결코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저주할 뿐임을 보여주었습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 구절은 "율법을 범한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행위에 속한 자"를 말하는 것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고 애쓰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아래 있는 자"는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입니다. 신명기 27:26절에는 "기록된바...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자"라고 말씀되었습니다. 이는 하루나 한달 혹은 일년동안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 율법을 항상 행해야 하며 완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다만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오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3:11 거짓 선생들은 다시한번 구약성경으로 반박되었습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바울은 하박국 선지자의 성경을 인용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율법으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사람을 의롭게 하셨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약성경에 있는 원어로 그 인용구절을 문자적으로 읽어보면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살 것입니다.
3:12 율법은 사람에게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또한 그 계명들을 지키도록 노력하라고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엄격하고 완전하고 완벽하게 레위기에서 가르치고 있는대로 분명하게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믿음의 원리와는 대조됩니다. 율법은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믿음은 "믿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고 말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는 구절은 이상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나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준수를 통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3:13 속량(deliver)은 다시 사다 또는 구하다, 대가를 지불하다라는 말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계명을 어긴 것에 대한 형벌인 율법의 저주는 사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에 의해 요구된 사형의 형벌을 갚으심으로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구하셨습니다. (바울이 "우리" 라는 대명사를 사용했을 때 비록 유대인들이 모든 인류를 대표하지만 우선적으로 믿는 유대인들을 말한 것은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킨들란 존스는 "갈라디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반정도만 샀다고 생각했기에 그 나머지 부분을 그들의 할례와 다른 유대 절기와 의식들에 복종하여 사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 선생들과 기독교와 유대교를 혼합한 것에 속히 이끌려 들어갔던 것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완전히 속량하셨다' 고 말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참으심으로 그들을 속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사람들의 대속자이신 주님께 임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니셨지만 사람들의 죄가 주님께 놓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동안 십계명을 완전히 지키심으로 율법의 저주에서 사람들을 속량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성경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신 것으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무서운 사형의 저주를 참으심으로 사람들을 율법에서 건지셨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구원도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특히 죄인으로 나무에 달린것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의 표시라고 가르칩니다(신 21:23). 성령님은 그 구절을 구주께서 피조물들을 위해 저주를 받으시고 죽으실 예언으로 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어느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신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달리셨습니다.
3: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또한 그를 통해 온 세상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참된 은혜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죽음의 형벌이 치뤄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다가올 수 있기 위해 주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아브라함의 후손) 안에서 모든 족속이 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님을 말한 것이 아니며 바울이 여기에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조건 없는 구원의 언약 안에 포함 되어 있는 성령님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시작입니다. 성령님은 율법이 막고 있는 한 오실 수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오시기 전에 죽으시고 영화롭게 되셔야 했습니다(요 16:7).
사도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나타냈습니다. (1) 갈라디아인들의 경험과 (2) 구약성경의 증거, 사도바울은 이제 일상 생활로부터 한 예를 들었습니다.
단순한 인간 약속에 대한 의무(3:15-18)
이 단락에 대한 바울의 논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3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속한 지상의 모든 가족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약속에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창세기 22:18에서 하나님은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씨" (단수)라고 말씀하시고 "씨들" (복수)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직계후손인(눅 3:34)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족속에게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선한 행위나 율법을 지키도록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단순한 약속입니다.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이 약속에 어떠한 조건을 더하거나 어떻게든지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도 옳지 않은 일인데 하나님의 일에는 더욱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주시는 복의 약속은 율법 준수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집니다.
3:15 사람의 일에서도 어떤 언약이나 뜻에 서명을 하고 인을 치면 누구도 그 문서를 바꾸거나 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만일 사람의 언약도 어기지 못할진대 하나님의 언약은 얼마나 더 어렵겠습니까!
3:16 유대주의자들은 비록 그 약속이 원래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이스라엘 백성) 믿음에 의해 주어진 것이지만 그 동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후에 율법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분명합니다.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래서 갈라디아인들도 원래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이제는 십계명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 "씨" 라는 단어는 단수입니다. 그 단어가 때때로 군중을 가리킬 때도 있지만 여기에서 그 단어는 한 사람인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보지 못할 지라도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조명해 주십니다)
3: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조건이 없는 것으로 어떠한 행위에 의존된 것이 아닙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아브라함과 그 씨(그리스도)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오실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며 그러므로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사백년이 지난 후에 주어진 율법은 이 구원의 약속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그 약속을 폐하거나 어떠한 조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유대주의자들은 그 약속을 한지 사백 삼십년 후에 율법이 온 것은 그 약속이 무효가 되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라고 제안했을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약속은 뜻과 같은 것이며, 죽음으로 확증된 것입니다(희생의 언약으로 창 15:7-11과 히 9:15-22을 보십시오). 이것은 결코 폐하여질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18 이 430년은 언약이 제정된 때로부터 계산된 것이 아니라 이 언약이 마지막으로 확증된 때 즉 야곱에게서부터 계산된 것입니다(창 46:1-4).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유업은 믿음에서 나지 않으면 행위에서 난 것입니다. 그것은 두가지 모두에서 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에게 조건없는 약속을 주심으로 그것을 분명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난 유업은 구원을 동반합니다. 그것은 조건없는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배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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