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존 필립스


                                                CHAPTER 8

                                            

                                    어려움들에 적응하는 삶

                                         Coping With Problems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세기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인구수가 증가하자 애굽 지도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자기 나라에 위협적이고 귀찮은 존재가 될 것을 열려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정한 게토(ghetto)지역(주- 유대인들만의 제한 거주지역) 안에서만 거주하게 하고 마침내는 그 안에서 모두 멸절시켜버리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계획은 간단하지만 잔혹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여자가 남자 아기를 낳으면 나일 강물에 던져 죽게 하여 결국 한 세대 안에 "유대인 문제"를 애굽 땅에서 깨끗이 종식시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위한 한 구원자를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등장한 사람이 이스라엘 제2의 건국자, 모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위와 능력으로 무장한 모세가 당대 세계 최강, 애굽왕 바로와 맞서 당당하게 싸우는 장엄한 이야기들을 우리는 출애굽기 서두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는 다만 한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을 떠나도록 허락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히브리 노예들의 열망은 자신들의 곤궁한 상태를 벗어나 "삼일 길을 떠나 광야 속으로 들어 가는 것" (출 3:18; 8:27)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애굽의 입장에서 그 일은 허락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재앙이 반복되었고, 애굽왕 바로는 번번이 모세의 요구를 거절하였지만, 모세는 그 한 가지 요구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기 전 날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굽힐 줄 모르던 강팍한 바로왕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하여 자신의 장자를 비롯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장자를 잃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 앞에 굴복하고, 모세와 아론을 급히 불러 "너희 백성들을 이끌고 속히 이 땅을 떠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과 해방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침내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출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4백여 년간의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해방과 승리에 감격하며 출애굽의 대행진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흘 간의 여행 끝에 광야 한 가운데에  도착하였습니다. 그토록 열망하던 곳에 이르러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하는 그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이는 곧 실망(disappoint-ment)입니다. 약속의 장소가 실망의 장소로 변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자, 상상해 보십시오. 사흘간의 광야 여행길에서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큰 희망과 기대로 모두 그곳으로 달려갔을까요? 그들은 저마다 급히 물가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기쁨은 곧 큰 실망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들이 마라의 물을 마실 수 없었으니 물이 씀이었더라" (출 15:22-26). 그들 앞에 펼쳐진 끝없는 지평선과 시내 사막의 뜨거운 모래는 끔찍했습니다. 시련이란 장애가 무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위대한 희망을 품고 달려왔건만 그 모든 것은 마라의 실망스러운 최악의 환경으로 인해서 짓밟혀졌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실망 (The Christian and Disappointment)


   C. S. 루이스의 '스쿠르테잎의 편지' (Screwtape Letters)라는 책은 우리에게 깊은 내적 각성을 일으킵니다. 이 책은 스쿠르테잎이라는 노련한 늙은 악마가 웜우드(Worm-wood)라는 풋내기 젊은 악마에게 유혹의 기술을 지도하는 편지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 편지는 웜우드의 담당 환자가 방금 그리스도인으로 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스쿠르테잎은 웜우드가 담당 환자를 빼앗기게 된 그 실수에 대해서 그에게 상응하는 벌을 면치 못하리라고 경고한 후, 그와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 취해야 할 최선의 방법에 대하여 지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웜우드로 하여금 교회를 주목하게 합니다. 그는 특별히 웜우드의 담당 환자가 새로 출석하기 시작한 교회의 교인들을 주시하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 출석하게 된 그 그리스도인이 완전하지 못한 기존의 교인들에 대하여 깊이 실망하게 만드는 일을 특히 열심히 하라고 일러줍니다. 그는 웜우드에게 하나님은 "믿음의 초기에는 누구에게나 이러한 실망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고 귀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러한 실망의 상황을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하시는 궁극적 목적은 그들의 영성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을 더욱 성장시키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실망에 잠길 때, 정말 심각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그 실망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잠재적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일러 줍니다. 어째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기쁨과 평안을 빼앗기고, 힘 없이 살아가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의 감성적 경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원리에 의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기를 원하십니다(벧후 3:18). 우리는 믿음 안에서 영적으로 더 성숙되어지기 위해 반드시 시험들을 거쳐야 합니다. 실망스러운 상황 너머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물은 그 속에 모세가 나무 가지 하나를 던졌을 때 단물로 변하였습니다. 이 나무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행 5:30), 갈 3;13). 마라는 우리가 실망스러운 상황을 만날 때 우리를 주님의 갈보리 십자가로 이끄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는 우리 주님께 실망을 넘어 절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그를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께서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수치와 극심한 육체의 고통을 모두 참으셨고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히 5:8-9, 12:2). 이는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본인지요. 그러므로 실망스러운 상황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다만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목적이 아니라면 결코 우리에게 실망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이러한 실망을 극복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께 자기를 드려 그분을 아는 기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재난 (The Christian and Disaster)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세상살이의 다양한 재앙들로부터 제외될 수 없습니다. 구약시대의 믿는 자들과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 할 때, 재앙의 시험을 면하리라고 약속받았습니다(신 28:1-14). 만일 그들이 불순종하면 재앙이 임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7:11-26, 28:15-68). 구약시대의 하나님의 복은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아니 하신다" (잠 18:22). 라고 하신대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복은 아주 다릅니다. 저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복들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결코 행복이나 복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으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고, 온유한 자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긍휼히 여기는 자와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마 5:1-12) 이러한 축복들은 천국 시민으로서의 성품을 소유할 때 따르는 상급일 뿐, 이 땅에서의 물질적 풍요나 건강이나 장수나 재앙을 면하는 일 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동차 사고나, 집의 화재나, 자녀들의 상해를 경험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진이나, 벼락이나, 태풍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손실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주 예수님도 굶주림과(마 4:2), 목마름과(요 4:7), 집 없는 자의 삶(요 7:53-8:1)을 체험하셨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땅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기 때문에 역시 땅에 속한 임시적이고도 지상적인 복들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서에 기록된 대로 하늘에 속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신령한 복이 약속 되었습니다(또한 히 12:18-24 참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혀용하시는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합당하게 잘 감당한다면 그 모든 것들은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한 복들이 됩니다. 물론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영적인 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복들이 전혀 없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다만 신구약의 복의 관점의 차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안에 측량할 수 없는 높은 뜻을 두고 계시기 때문에 이를 위하여 이 땅에서의 우리 삶 속에 형통함과 함께 역경들을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빌 4:11-12).


   그리스도인과 배척받음 (The Christian and Disapproval)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 일을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좋아하지 않으며, 가능한 한 모든 면에 그들의 반대편에 섭니다. 어떤 핍박은 심지어 폭력적이고, 어떤 핍박은 보다 은밀하기도 합니다. 가족관계와 사회생활과 경제적 압박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포기하도록 강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자기 동족 집단으로부터 추방 당하고, 혹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기존 종교 세력으로부터 배척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지금도 어떤 나라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거나 공적인 침례를 받을 때, 죽임을 당하거나, 사회공동체로부터 격리 또는 추방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와 같은 일들을 예상하셨습니다. 그분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마 10:34-36). 또한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죽음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순교였습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을 죽인 이유는 아벨이 가인보다 의로웠기 때문입니다(창 4:1-16; 요1서 3:12).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는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박해는 종교적인 배후 세력으로 말미암았습니다(행 4:1-21). 두 번째 박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행 5:17-42). 스데반의 순교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무리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행 7장). 그리고 이 박해의 주동자는 당시 가장 엄격한 종교의 영향을 받은 다소 사람 사울이었습니다(행 8:1-3; 9:1-2). 그러나 훗날 사울이 주님의 제자가 된 후, 그는 이전에 자신과 같은 편이었던 예루살렘의 정통 유대교 지도자들에 의해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행 13:44-51; 14:2-5,19,13; 18:6; 21:27-32). 사도 바울이 받은 모든 고난의 목록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한 믿음의 역사였습니다(고후 11:22-33).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핍박은 때로는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들의 선동에 의한 박해가 두 번 있었는데, 이 두 사건은 복음이 그들 이방인들에게 경제적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행 16:16-24; 19:23-29). 그런가 하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는 설교 때문에 예루살렘 감옥에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믿음을 위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요 21:18-19; 벧후 1:15).

   그러므로 핍박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고난에 있어서 누구보다 풍부한 경험자였던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고 하였습니다. 핍박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오히려 비정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핍박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옳지 못한 행동으로 인해 핍박을 받지 않도록 하라고 교훈합니다. 그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고 하였습니다.

   둘째,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고 베드로는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의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그에 따른 상급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 5:11-12).


   그리스도인과 질병 (The Christian and Disease)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각종 병자와 불구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소경에게 빛을 주시고,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 가 말하게 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반신불수, 열병, 혈루증 환자, 앉은뱅이, 중풍환자를 낫게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도 살려주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는 예수님께서는 귀신을 몰아내시고, 질병과 죽음에서 한 남자와 한 여인과 한 어린이를 각각 고쳐주신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혹은 집단적으로 사람들을 고쳐주셨는데, 사람들을 직접 만져주심으로 고치기도 하시고, 멀리 있는 자를 말씀으로 고쳐 주기도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시기에도 병 고침의 기적은 흔한 사역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앉은뱅이를 일으켰고, 바울 또한 그러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심지어 어떤 병자는 단지 베드로의 그림자에 의해서 고침을 받았고, 사도 바울의 손수건을 만짐으로써 고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신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신은 항상 병을 지니고 있었고 늘 의사의 도움을 필요로 했습니다. 고린도 후서 12장 5-9절의 바울의 "육체의 가시"란 간질병(epilepsy) 혹은 심한 눈병과 같은 육체적 질병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또한 "연약함들" (infirmities)이란 무기력, 쇠약하게 됨, 혹은 미약함, 병듦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물 대신에 포도주를 약으로 사용할 것을 충고하였습니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딤전 5:23) 공중위생이 전무하거나 극히 미미하던 시대에 참으로 놀라운 충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그의 동역자 가운데 드로비모가 병들어 밀레도에 남겨 둔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딤후 4:20).

   그리스도인이 병 들었을 때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어떤 병은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버림으로써, 병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4-15절의 말씀은 이와 같은 종류의 병과 그 치유방법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병은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요 9:1-3). 그러나 대부분의 질병은 죄의 결과로서 이생에서 감당해야 할 인간 운명의 한 부분이며,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면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병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도록 해주며, 또한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도록 해 줍니다. 질병은 종종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펴보도록 해주며, 또한 예전에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태도와 성격을 돌아보며 각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질병들이 우리에게 허락되었을 때에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에게 지혜로우신 선한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병을 고쳐주시기도 하지만 그러나 모든 때에 다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건강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고쳐 주신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암이나, 심장마비나, 폐결핵이나, 혹은 기타의 다른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수많은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질병 중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병으로 말미암아 그릇된 일을 중지하게 되며, 영원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창하는 몇몇 위대한 찬송가들은 윌리엄 쿠퍼(William G. Cooper)나 화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와 같은 병자나 신체 불구자에 의해 쓰여졌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죽음 (The Christian and Death)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 1:21). 더욱 그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 "더 좋다" ( far better) (빌 1:23)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담대히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고후 5:8)고도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해서 놀라운 기대와 확신이 있었습니다.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지요!

   이제 죽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떠날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죽음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믿는 자들의 "땅의 장막 집(육체)은 무너지리라." (흙으로 다시 돌아감)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죽음에 대하여 '간절히 사모하는 것" (고후 5:1-2) 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죽어야 할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리라" (고후 5:4)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들처럼 충분한 빛에 이르지 못했던 구약 시대의 다윗까지도 죽음의 실체에 대해서 "사망의 음침한(shadow)골짜기를 지날찌라도 주님은 나의 목자시라" (시 23;1,4)고 놀라운 찬양을 하고 있습니다. 음침한 골짜기의 개들이 우리를 물지 못하며 음침한 골짜기의 칼날이 우리를 상치 못할 것입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는 결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막거나 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침한 골짜기는 필연적이고 실제적인 과정이며, 동시에 빛으로 향하는 관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다윗의 시편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 22:1)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셨습니다(마 27:46). 그가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 담당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야만 했습니다.

   이제 불신자의 죽음과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불신자들의 죽음은 생명으로부터의 분리이며, 모든 인간관계로부터의 분리이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로서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해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 8:12). 진실로 그리스도인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과 동행하고, 죽음의 문을 통과하여서는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 (잠4;18)라고 하셨듯이 완전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나와서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잠4:19,;유 13절).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은 육체로부터 나와서 빛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의 원수입니다. 바울도 죽음은 인간의 마지막 원수라고 말하였고(고전 15;26), 스펄전도 "이제까지 죽음은 마지막 원수였다. 그러나 그의 종말까지 그냥 내버려 두라."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 이후, 그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즉시 인도될 것이라는 소망 뿐만 아니라, 장차 부활하리라는 소망도 가지고 있습니다(고전 15장 전체를 읽을 것).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살아 있는 믿는 자들은 죽음을 보지 않고, 그 몸이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살전 4:13-18).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스러운 소망에 대해서 다시 말씀드립니다.원수인 사망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정복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확실한 소망이 있고 또한 우리의 모든 어려움들을 아시는 인자께서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며, 항상 우리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그의 완전하신 뜻에 따라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 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4-16).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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