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6과
이상적인 여성상
신약에서 몇몇 여성들의 특성을 살펴 봄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성들에 관해 계속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개개인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대략적으로 살펴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한 여성이 하나님이 보시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완전히 보여 줄 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여성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었던 여러 특징을 찾아, 종합적으로 이상적인 여성상을 그려 보고자 합니다.
순복과 복종의 여성
이 주제에 있어서는 우리 주님의 어머니였던 마리아를 상고하는 것보다 더 나은 길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젊은 여성이 남달리 우리 주님의 어머니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다만 마리아가 요셉의 정혼한 처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마리아는 고결한 생활을 했고, 하나님을 향해 헌신된 심령의 소유자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또한 마리아가 천사에게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라고 대답한 것을 보아서 어렴풋이나마 그의 인품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려는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마리아는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리아에 관한 기록은 성경에 여러 번 나오고 있지만, 그중 한가지만 더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요 2:1~11)고 말했습니다. 이는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충고였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 전폭적으로 순복할 때에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됩니다.
한편 마리아가 비록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풍성하게 받은 자였으나,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구원을 받아야만 했음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스스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 (눅 1:47)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의롭고 흠이 없는 여성
침례 요한의 어머니이며, 마리아의 친척이었던 엘리사벳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 노파이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은 이러합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니"(눅 1:6). 이것은 남녀를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에게 갖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미리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그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자기의 아들로 미리 정하셨습니다(엡 1:4,5).
헌신적 여성
안나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연로한 여성으로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눅 2:37)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예수님의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성전에 데리고 왔을 때, 성전에 있던 안나는 예수님을 뵙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안나는 주님을 뵈올 때 이스라엘의 구속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기쁨에 넘쳐 다른 이들에게 예수님을 자랑했습니다. 안나는 평생 동안 시간과 정력 등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고 강권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마 6:33)를 구해야 하며, 위엣 것" (골 3:2)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자신입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사랑과 감사의 여성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은 예수님께서 일곱 귀신을 쫓아 낸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악귀를 쫓아 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눅 8:2)라 하여 다른 여인들보다 맨 먼저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눅 8:3)고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주님께서 구원해 주신 대 대한 그의 사랑과 감사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은 돌아보지 않았고, 다만 주님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막달라 마리아가 슬픔을 못 이기며 주님의 십자가를 응시하는 모습과 (마 27:55,56), 무덤에 이르러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 20:1~18). 그러나 바로 그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뵈옴으로써 주님을 사랑하던 마리아의 심령은 만족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살아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에게 최초로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마가는 기록했습니다(막 16:9).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에 대해서 실로 훌륭하게 보상해 주신 것입니다.
다른 경우로, 주님께서 인생의 감사에 대해 보답을 잊지 않으시는 실례를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고쳐 주셨지만 오직 한 사람만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드렸는데, 그때 주님께서는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7)고 물으셨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심령이야말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자들의 성품이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여성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딤후 1:5)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여인은 하나님께 대한 참 믿음을 통해서 유명해진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평생에 역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교훈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 디모데가 구원을 받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의해서 성경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입니다(딤후 3:15). 오!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는 어머니나 할머니나 그 밖의 여러 사람들 가운데에서 이처럼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배의 여성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를 보면, 그는 매번 주 예수님의 발 아래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42절에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앉아 주님의 말씀을 청종하며 주님께 배우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2절에도 보면 마리아는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려 자기 오라비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서도 마리아는 주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고 있었습니다. 온 집안을 진동한 향유의 향기! 마리아가 드린 이 경배의 향기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렸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참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였으며, 주님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요 4:23). 어떤 사람은 예배를 가리켜 '그리스도로 가득 채워진 심령이 넘쳐 흐르는 것' 이라고 정의 했습니다.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시 95:6)
선행의 여성
베다니의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와 아주 다른 사람으로 보여서, 때로는 가사에 분주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등한히 했던 신령하지못한 여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르다도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요 11:5), 주님께 대한 진실하고도 충성스러운 믿음이 있었습니다 (요 11:21~27).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를 다 인정하셨고, 다 필요로 하셨습니다. 다만 마르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 (눅 10:40) 했던 점이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균형을 잃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발생하기가 쉬운 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해치면서까지 봉사하는 것을 귀히 보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을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는 것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님의 발 아래 앉는 일과 봉사하는 것 사이에 조화와 균형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 9장 36~41절에서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 이 심히 많았던 여제자 도르가에 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물론 성경이 도르가의 선행에 관한 전모를 기록해 주고 있지는 않으나, 그가 겉옷과 속옷을 만들었다든지, 그가 베풀었던 친절을 기억하며 그의 주검앞에서 과부들이 슬피 울고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그의 선행을 알 수 있습니다. 도르가는 '여제자' 라 불리웠으며, 내적 새 생명의 실제를 다른 이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통해서 증명했습니다. 그는 야고보 사도가 말했던, "행함이 있는 믿음" 의 본보기가 되었던 것입니다(약 2:14~16). 우리가 행함으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선한 일을 위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히 13:16)
접대의 여성
빌립보에는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 (행 16:14)가 살고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이방인이었으나 유대 여자들과, 또는 자기처럼 하나님을 공경하는 다른 이방 여인들로 더불어 정기적으로 기도하러 모였습니다. 당시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으므로 바울 일행은 이 여인들의 모임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고, 그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 열린 마음이 가정을 열게 함으로써 선교사들을 "강권하여" 유숙하게 하고는 접대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럽 최초의 교회가 루디아의 가정에서 모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열려진 한 여인의 마음은 곧 열려진 한 가정이 되었고, 마침내 한 대륙이 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없이 하라" 고 권면했습니다(벧전 4:9). 더 나아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다" 고 강권하십니다(히 13:2). 우리가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천사들을 접대하지 못했던 경우는 참으로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복음적인 봉사의 여성
로마서 16장에는 사도 바울이 여러 여인을 보호자 또는 동역자로 열거하고 있습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여러 사람과 바울의 보호자" 였습니다. 브리스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울의 동역자" 였으며, 그의 남편과 함께 고린도와 에베소, 그리고 로마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집에서 모이던 교회를 가르칠 능력이 있었으며, 사도 바울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바울은 "많이 수고한 마리아",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 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가리켜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 (빌 4:2,3)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어떤 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일군이라든가 보호자라든가 동역자라는 낱말로 보아 후원하는 사역을 했다고 분별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여인들이 바울처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다는 견해는 성서적 주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수고했다거나 많이 수고했다는 말씀은 주님을 헌신적이고도 열정적으로 섬겼음을 보여줄뿐입니다. 그들은 무엇을 하든지 주께 하듯 했으며, 이와 같은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히 13:16).
이외에 성경에서 다른 여성들에 관한 구절을 찾아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만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있으면 기록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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