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6장
소망의 풍성함(소망에 대한 확신)
이 세상의 저명한 학자 중 한 사람이 "인간의 가슴속에는 소망이 영원히 샘솟는다"고 말한바 있습니다. 인생의 어떤 측면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실일지 모르나, 영원한 장래에 관한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중생하지 못한 상태로는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고 말해줍니다. 에베소서 2장 11,12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그 순간부터 신자는 "은혜로 말미암는 좋은 소망"을 소유합니다. 로마서 8장 24,2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소망한다고 말하지 않고, 소망에 의해, 아니 더 적절히 표현하면 소망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하십시오. 확신과 원만한 이해를 소유하고, 자신이 이미 의롭다함을 받고 영원히 구원받았음을 거짓말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알고 있는 사람은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그의 몸이 구속된다는 소망을 말씀을 통해 갖게 됩니다. 그 때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온전히 닮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이 여러 가지 시련과 삶의 문제를 만날 때 그의 마음을 북돋우며,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보며 참음으로 기다리도록 용기를 줍니다.
이와 관련해서 로마서 5장 앞 부분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이 아주 적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1~5).
이미 우리는 우리의 확신은 감정적인 경험에 기초하지 않고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는 데 기초한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경험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중생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든 시련 가운데서 그를 인도하시는 분으로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누립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이루기 위해 합력해서 역사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에서 물러나거나 환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큰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인내를 위한 기도
종종 소개되는 일화인데, 어떤 젊은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전심으로 섬기는 그의 형에게 기도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좀더 인내할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기도해 줘"라고 형에게 간청했습니다. 그들은 함께 무릎끓었습니다. 형이 먼저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주님, 제 동생에게 환란과 시련을 더 허락해주소서!"
동생이 외쳤습니다.
'형, 환란이 아니라 인내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했잖아."
형이 대답했습니다.
"잘 알아, 하지만 말씀에서 '환란은 인내를 이룬다'고 배웠잖아."
이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더디 배우는 교훈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나타난 단계를 주목하십시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망이 부끄럽게 되지 않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면, 히브리서 6장 10~12절에서 말하는 "소망의 풍성함"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보이지 않는 분을 바라보며 참고 인내하는 법을 배울 때, 영원한 것들이, 자연적인 사람에게는 모든 것인 이 세상에 속한 것들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될 때, 계시된 말씀에만 근거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에도 근거하는 고요하고도 확고한 믿음이 자리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귐은 현세와 내세에 대해 분명한 믿음을 가져다 줍니다.
한 번은 어떤 이가 "당신은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지요?"라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방금 그분과 30분간 대화를 나눴는데요. 틀림없이 그분과 만났어요."
이러한 증거는 오랜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되풀이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사귐을 가져왔음을 증거해왔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사랑과 헌신을 표했으며, 또한 확실한 기도응답을 체험했기에 그분의 인자한 돌보심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청년이 확신에 이르다
고(故) 로버트 T.그랜트 형제님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한번은 그가 열차여행 중에 자리에 앉아 성경을 읽다가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방에서 전도용 소책자를 꺼내 한 권씩 돌려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와 물었습니다.
"왜 이 책을 저에게 주셨지요?"
"그건 젊은이의 영혼에 안식을 주는, 젊은이를 위한 하늘의 메시지일세'라고 그랜트 형제가 답했습니다.
청년이 비아냥거리며 말했습니다.
"오래 전에는 그 메시지를 믿었어요. 하지만 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에는 더 던져버렸어요. 아무것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러면 방금 전에 내가 읽은 내용을 젊은이에게 읽어줘도 되겠나?" 그랜트가 물었습니다.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그 말씀의 축복을 경험해왔네. 거기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계속해 보세요. 다음 구절을 읽어보세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선생님. 좀 더 읽어주시겠어요."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여기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그러자 청년이 외쳤습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거기엔 모든 것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께서 그 말씀을 읊조리며 죽어가면서 어머니가 믿는 구주를 믿으라고 유언하셨으나 나는 그 구주를 멀리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제 선생님이 그 모든 일을 원위치 시키셨습니다. 더 얘기해 주세요."
이에 하나님의 종이 구원의 길에 관한 진리를 풀어 설명해주자 그렇게 경솔하고 믿지 못하던 젊은이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 열차 안에서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시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과 사망의 주되신 그리스도와의 복스런 사귐 안에는 모든 것이 있으며, 그것이 소망의 풍성함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확신이 기도와 말씀을 섭취하는 일에 대한 영적인 무관심과 부주의함으로 인해 흐려지고 어느 정도 사라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권고한 것과 같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라"는 권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불행한 배도자
베드로는, 자기 길을 고집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사귐을 멀리한 나머지 옛 죄가 씻음 받은 일을 잊어버린 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슬픈 상태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그런 상태를 흔히 "배역"(the backsliding)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마음이 패려한 자(the backslider in heart)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게 됩니다"(잠 14:14). "배도는 언제나 무릎에서 시작된다"고 어떤 분은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꼭 맞는 말입니다. 기도를 등한히 하면 곧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고 세상과 육신에 휩쓸리기가 쉽습니다. 그 결과 영안이 흐려지고 하늘의 비전을 잃게 됩니다.
배도자는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는 이 가련한 세상에 속한 것은 뚜렷이 보지만 멀리 내다보지는 못합니다. 상태가 좋았을 때는 멀리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자에게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권면이 필요합니다(계 3:18). 성경으로 돌아가고 무릎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뉘우치는 마음에, 처음 사랑을 떠난 그 출발점을 분명히 알려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영원한 것들의 가치를 잃게 한 죄와 허물을 시인해야 합니다. 지난 방황의 시절을 돌아보며 다윗처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소서"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금 자신과의 복된 사귐을 알게 하실 것이며, 다시금 당신의 평안이 강물처럼 흐르고 소망의 풍성함이 당신의 것이 될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당신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모든 성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크게 넓어지고, 당신을 위해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 당신의 열린 눈을 비전으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은 당신의 영혼을 회복시키신 주님께 사로잡힐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의 소망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아버지 집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우리를 그분께로 영접하고 그분이 계시는 곳에 우리도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정화시키는 소망입니다. 요한일서 3장 1~3절에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여기 3절에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단지 시대의 징조나 예언의 말씀에 사로잡히지 않고 우리의 소망이신 장차 오실 그분에게 사로잡힐 때, 우리는 놀랍도록 그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분이 인정하실 수 없는 것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며,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고 그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며 온전히 거룩해지기를 추구할 것입니다.
"이 소망으로 즐거워하니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네.
주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나음을 얻었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으로
아무 거할 곳 없지만
주께서 오실 날을 고대하고 고대하네."
이러한 소망이, 우리가 간절히 뵙고자 하는 그분에 대한 우리의 충성의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되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분이 아침에 오든, 낮에 오든, 밤에 오든 늘 그분을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분이 오실 때 그분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치 않을 것입니다.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마 24:46).
이것이 디도서 2장 11~14절의 경우처럼 "복스런 소망"으로 불리는 것은 하등 이상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위대한 은혜의 학교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을 뿐만 아니라 은혜의 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친 백성 삼으신 그분의 칭찬을 늘 들을 수 있도록 행동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은혜가 우리의 양육자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은혜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것을 거절하는 것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해야 정결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실제성을 나타내고, 그런 중에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남을 기다리는 그 복스런 소망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 오셨을 때(초림)는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사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그분의 친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오실 때는 우리의 몸을 구속하시고 우리로 범사에 그분과 온전히 닮게 하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망인지요! 그 소망의 능력 가운데 사는 동안 우리는 곧 그 낯을 뵈올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을 얼마나 확신하게 되는지요!
종종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장사지낼 때 우리는 영광스런 부활을 확신하며 그 소중한 몸을 무덤에 안치하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복스런 진리입니다. 주의 재림의 소망이 실현될 때, 믿음 안에서 죽은 모든 지난 시대 성도들은 그 때에 지상에 살아있는 성도들과 함께 놀라운 변화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이 얼마나 찬란한 소망이며, 언제 어느 때 실현될지 누가 알리요! 그러므로 흔들리지 말고, 의심이나 불신앙에 빠지지 말고, "소망의 풍성함"을 유지하는데 힘쓰도록 합시다. 그 소망이 완전히 실현될 때까지 그렇게 합시다.
우리는 종종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마음을 상케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나, 그러나 그 성취는 확실합니다. 그 동안에 주님을 섬기는데 분주하도록 합시다. 특히 영혼들을 얻고 영혼들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이끄는데 분주하도록 합시다. 마침내 이 땅에서의 짧은 섬김의 날이 끝날 때, 주님을 위해 충분히 드리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충분히 수고했다고 증거할 사람이 우리 중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내가 염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난날을 아쉬워하며, 만일 다시 세상에 태어나 다시 삶을 시작한다면,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의 영광만을 위해서 신실하게, 헌신적으로 살겠다고 후회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구원받지 않는 것보다는 불 가운데서라도 구원받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소망이 실현되어 거둔 것을 가지고 나아갈 때 주님을 빈손으로 맞지 않고 기쁨으로 그분 앞에 나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죄악과 저주를 친히 담당하신 분의 놀라운 이야기를 잠시 한 다음 그분과 함께 그 보좌에 앉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올 때까지 머물러 있으라"는 그분의 명령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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