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제 10 과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활


                                           사업이나 직업에 있어서


   앞서 우리는 여성들이 가정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몇몇 가지 일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아울러 사업이나 직업의 일반적인 직무를 통해서도 주님을 효과적으로 증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나 태도, 관심 할것 없이 우리들의 생활 전체가 바로 간증입니다. 기회를 찾으려 한다면 간증할 수 있는 기회도 생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을 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위해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근무 시간을 전도하는 데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수를 받는 고용인답게 성실하고 정직하게 직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2, 23)고 말씀했습니다.


                                                  교회에서


   지역 교회에 있어서 여성들의 봉사는 커다란 가치가 있습니다. 여성들은 주일학교나 여름 성경학교 등 주로 어린이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며, 여성 복음 집회, 성경 연구회, 선교사들을 위한 기도회, 봉사하기 위한 모임, 음악을 통해서 도우며, 영적이나 물질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거나, 병중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냅니다. 또한 하나님께로서 감동을 받은 여성들은 교회를 방문하는  분들을 열렬하게 환영합니다. 그 외에도 교회를 인도하며 가르치는, 책임이 무거운 남자들은 여성들의 격려와 기도와 참여에서 큰 도움을 받게 됩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교회 회중에게 들려지지 않는다 해서 여성들의 태도나 영적인 상태가 대수롭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몸이기에 각 지체의 상태는 몸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교회생활에 있어서 교제에 대한 여성들의 공로는 소중하고도 고마운 일이지만, 교제만이 여성의 본분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던 교회 질서를 지키는 한도 내에서, 여자들이 영적으로 은사를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은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공궤하는 일은 교회로서의 임무와 번영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봉사입니다. 교회는 마치 전방에 있는 군인 한 사람을 위하여 열 명의 군인이 후방에서 일하는 군대와도 같습니다. 누가 감히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성들이 교회의 일꾼이요, 여러 사람의 보호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동역자라고 불리우는 것보다 더 큰 영예가 무엇이겠습니까?(롬 16:1~3)


                                                    선교지에서


   이 과에서는 여성들의 선교지에서의 지위에 특별히 초점을 맞추어 상고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오랫동안 여성들이 큰 몫을 감당해 온 분야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주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네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이르라" (요 20:17,18)고 말한 때부터 여성들은 그들의 주님을 증거해 왔습니다. 19세기 초 여성 선교사들이 최초로 외국 땅으로 갔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 중 몇몇 사람 예를 들면, 마리아 슬레써(Mary Slessor), 에이미 카미카엘(Amy Carmichel), 말라모에(MallaMoe) 등은 잘 알려져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수 천의 여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사 하라고 하셨던 일을 완수했으며, 주님께 묵묵히 헌신함으로써 보람있는 업적을 이룩했습니다.


   1.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우리의 심령에서 생기게 되는 최초의 의문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선교사가 되기를 원하신다면 '내가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에 관해서는 수많은 논문이 있으므로 여기에서 이를 따로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 겪게 되는 어려움은, 곧 주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측정해 주는 표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의식하면서 걷고 있는 성도는 겸손히 주님의 뜻을 매일 매일 갈구하며, 범사에 주님께 복종하며 헌신합니다. 이러한 성도는 주님께서 한 발자국씩 인도하심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뜻을 처음부터 끝까지 청사진처럼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한 번에 한 걸음씩만 인도하시며 첫 발자국을 옮긴 다음에 두번째 발자국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보여 주십니다. '네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어 가는 동안에 내가 네 앞에 길을 활짝 열어 주리라'


   2. 어떻게 준비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본적인 임무는 주님의 말씀과 체험을 통해서 주님을 깨달아 아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친히 계시해 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알고자 할진대 매일 규칙적으로 성경을 묵상하고 공부하는 것 외에 더 좋은 방법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선교사나 남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나 비서나 교사나 직공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가...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증인은 오직 보고, 듣고, 겪은 것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지식과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초신자는 죄를 용서 받은 기쁨을 전할 수 있으나, 선교사는 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께 인도된 그들의 믿음이 든든히 서도록, 강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도록, 시험을 이기도록,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흔히 따르는 핍박과 반대에서 견디도록 가르치고 양육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어떤 그리스도인이 선교사의 일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일하시고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로지 당신의 섭리를 따라 부르시므로 우리의 선교지는 국내일 수도 있고, 해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성별, 연령, 교육, 사회적 지위가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걱정할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아시며, 그 주님께서 최선이라고 여기시는 곳으로 우리의 처소를 선정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3. 아직도 선교사가 필요한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현대 세계에도 예나 다름없이 선교사가 필요하겠는가?' 라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 해답으로는 주 예수께서 주의 백성들을 위해 오시는 그 날까지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 ; 마 28:18~20)으로 분부하신 것이기에 무조건 '예'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상황도 많이 달라졌고, 여러 나라들이 선교사의 입국을 거절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실른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대답은 역시 '예' 일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선교의 문이 열린 채 선교사를 기다리는 나라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을 여시는 분도 전능하신 주님이시며, 닫으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계 3:7). 우리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아니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4. 오늘날의 선교활동

   현재 여성 선교사들은 세계 도처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직접 전도하고 있으며, 다른 이들은 그밖의 형태로 "복음의 여종" 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1) 의료활동 : 아마 의료 선교보다도 쉽게 복음의 문을 열었던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도 친히 병을 고치셨습니다. 의료 선교하는 간호원이나 의사들이 보여준 사랑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었으며, 이로써 사람들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과거에 광범하게 의료 선교가 행해지던 나라들도 오늘날에 와서는 자국 정부가 국민들의 건강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벽촌 지역에는 의료 선교 요원들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남녀간 엄격히 격리되어 있는 회교권의 여성들에게는 더더욱 여의사나 간호원이 크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의료사업은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활발하며, 앞으로 더 필요료 하고 있습니다.

   2) 교육활동 : 선교 초창기에는 글을 가르침으로써 그리스도인 스스로가 성경을 읽도록 하는 것이 주요 교육 사업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지역에 있어서 교육이란 선교기관의 교육이 유일한 교육이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많은 국가들이 학교 제도를 직접 관장하고 있어서 교육을 통한 선교가 제한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행히도 많은 국 . 공립학교들이 선교사들이 성경을 가르치도록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의 자녀를 가르치는 학교에도 교직원이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그러하듯이 해외 선교활동에도 자격을 갖춘 교사가 필요합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선교지의 대학에서 직접 가정학이나 가정관리학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모든 선교사들은 주일학교나 성경공부반 등 여러 형태의 교육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해외에서 선교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독교적 교육과정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30 문서활동 : 문서 활동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서, 문자화된 언어에서 시작하여 문자로 표기된 적이 없는 언어를 표기하는 일까지 있습니다. 그 다음은 번역하는 일로서 성경이나 다른 문서를 새로운 언어로 번역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읽고 쓰는 일을 배운 후에는 글을 쓰고 편집하여 인쇄와 출판을 거쳐서 책방이나, 이동 서점이나, 우편이나, 개인적으로 배부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일에 여성들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엠마오 통신강좌는 많은 선교사들의 문서 활동 중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교재들을 취급하는 데에는 사무적인 기능이 말할 수 없는 도움을 줍니다. 문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아주 훌륭한 수단으로서 사람이 직접 가기 어려운 지역이나, 선교사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나라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문서선교가, 선교사가 직접 사람을 만나서 전하게 되는 선교활동을 전면적으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래도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일꾼이 대면하여 대화하는 중에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4) 캠프 : 국내에서 캠프 활동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 활동의 보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선교사들 역시 캠프의 열매가 풍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각 지역에 캠프를 확장해 가고 있습니다.

   5) 기타활동 :

   (1) 비서직 - 병원, 출판사, 인쇄소 등 어떤 종류의 기관에서든지 필요한 직무

   (2) 선교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협조하는 일

   (3) 고아원의 경영이나, 청소년 합숙소, 혹은 기숙사 사감으로 봉사하는 일

   (4) 대학생 선교에 참여하는 일

   (5) 그림을 그리거나 인쇄를 돕는 일

   (6) 선교사들이나 여러 선교 직원을 대접하는 일 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어떤 은사에 어떤 훈련을 받았든지, 능력의 대소에 불구하고 주님께 바치면 주님께서는 사용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오직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엡 5: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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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두 개의 불가에서 일어난 베드로의 이야기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던 날 밤에 사람들이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피워놓은 "숯불"(요 18:18)가에서 함께 불을 쬐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진정으로 주님의 쓰임 받는 사람으로 변하였고, 동시에 그 때 그곳에서 진정한 영적인 만족과 행복에 이를만큼 완전히 회복이 되어 있었던 바로 그 날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또 하나의 다른 "숯불"가에 서 있었습니다.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는 불가에 서서 배운 전생애를 통해 마땅히 알아야 할 중요한 교훈은 우리 범인들에게도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이겠지만, 주님의 제자 중에서도 특히 공격적인 성품을 가졌다는 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에게는, 결코 쉽게 잊혀 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 때가 추운 고로"(요 18:18)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되는 데에는 그 이전에 몇 개의 단계가 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눅 22:24) 다툼에 개입되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베드로는 자만심과 교만이 너무 커서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는 말을 용감히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세 번째 단계에는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 26:38) 고 부탁하신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기도를 하고 있기는커녕,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이런 일련의 일들은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요 18:10) 하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베드로를 자기 뜻과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작 주님이 붙잡혀 갈때에 베드로는 멀리 떨어져서 충분한 거리를 두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러한 여러 단계들 가운데서도 가장 극적인 경험은 "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중 하나가 아니냐,"(요 18:17)하고 물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여종에게 "나는 아니라"(요 18:17)고 말하며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 때에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종과 하급관리들인 아랫사람들은 "숯불"을 피워놓고 서서 "숯불"을 쬐고 있었습니다(요 18:18) 베드로는 한 단계 한 단계씩 내리막길을 향하여 뒷걸음질쳐 오다가 급기야는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행들 속에 실제로 들어가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이 피워놓은 활활 타는 불가에 서서 그들과 함께 불을 쬐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들이 피워 놓은 불을 아무 생각 없이 즐기고 있을 정도로 베드로는 추락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어지는 환경과 정황 가운데서 보면, 그 자신이 과연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가하는 문제를 깨닫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 하였다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직 닭이 세 번째 울 때, 때마침 주께서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 볼 그때, 베드로는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죄를 범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정신이 들었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눅 22:62)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는 6명의 다른 제자들에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베드로와 함께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요 21:3). 아침에 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애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실 때에 이 질문에 대하여 제자들은 한 목소리로 "없나이다"라는 말 밖에 달리 다른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습은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 자기 뜻대로 하는 섬김, 자기 마음대로 하는 봉사가 결국에는 어떠한 결과를 가져 올 것인가에 대하여 얼마나 훌륭한 예가 되고 있습니까? 놀랍게도 제자들이 보여준 예와 같이 자신들의 커다란 부족과 결핍과 연약이 오히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적인 친절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회를 갖도록 만들어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셨습니다.(요 21:6)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요 21:6, 11)나 되었습니다.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요 21:9)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부들이 자신들이 잡은 고기를 직접 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요 21:10)고 명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말씀을 더하시고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조반을 다 먹고 난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라고 물으셨습니다.- 한편 '이 사람들 보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 '플레온 투톤'은 '이것들 보다'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을 다른 말로 옮겨보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제자들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행한 사랑이 이와 같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냐?"라는 의미가 될 수가 있고 아니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배나 잡힌 물고기들 등 이런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와 같은 뜻의 질문으로 옮겨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와 같은 질문을 세번씩이나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이어서 세 번씩이나 응답하시면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내 양을 치라"(요 21:16)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두 개의 불이 다른불이 아니라 숯불이라고 하는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날 아침에 두 번째 숯불 앞에서 주님 곁에 앉았을 때에 그 순간 그 첫 번째 부끄러운 숯불을 기억하였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 자신의 연약에 대하여 그리고 통탄할만한 그 자신의 실패에 대하여 얼마나 뼈저리게 비참함을 느꼈을 것입니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주 예수께서 행하신 세 번의 질문에 의하여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또 그가 받은 수치스러운 모욕감은 얼마나 깊었을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아침 베드로가 불가에 앉았을 때에 한 없이 자비하신 주님으로 부터 받은 온유하신 말씀들 속에는, 베드로의 연약과 실패와 수치와 모욕감 등 이 모든 것들을 치유하고 남을 만큼 충분한 보상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불은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놓은 불이었습니다. 이에 반하여 두 번째 불은 주님 자신이 피워 놓으신 불이었습니다. 첫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의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두 번째 불가에서는 주님이 친히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첫 번째 불에서는 대적들이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악의 것들을 내어놓았고, 두 번째 불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줄 수 있는 것 중에 최선의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사탄이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을 시험할 때 그 시험하는 동기는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최악의 것을 끄집어 내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와 똑 같은 것을 욥에게도 시도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한 사람의 성도를 시험할 때에는 그 동기가 사탄의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의 동기는 겨와 같이 쓸모없는 것은 채로 걸러 제거해버리고 믿는 성도 안에 있는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

 

   온유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친절로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는 자신의 죄와 연약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보여주신 신실하심과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 깊숙한 데서부터 감사하였기 때문에, 그는 진실로 마음이 낮아져 있었습니다.

 

   그가 계속해서 뒷걸음치며 추락하고 있을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전에 베드로는 "(모든 사람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막 14:29)라고 말하였던 사람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단지 내가 주님을 좋아합니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필레오' 사랑을 사용함으로써, 주님이 말씀하신 '아가페' 사랑보다 더 약한 의미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더 강한 단어인 '아가페'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인간이란 한 없이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구나하는 사실에 대하여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돌이켜 다시금 주님과의 교제를 나누는 중에, 비로소 베드로는 그 전에는 자신이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믿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를 실제로 회복시키셨습니까? 첫째는 온유한 표정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눅 22:61), 두번째로는 온유한 말씀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 16:7), 세 번째로는 그의 온유하신 행동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와서 조반을 먹으라."(요 21:12) 우리 주님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위대하신 목자이십니까! 하나님 진정 감사합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믿는 자들 가운데서 연약에 빠져 심하게 추락하고 형편없이 타락한 사람들조차도 주님께서는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다시 한 번 사용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아! 이 때 우리는 시편 기자와 함께 "(주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라고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대적들이 피워 놓은 불가에서 베드로는 불을 쬐고 그 자신을 따뜻하게 하였지만, 그 자신의 몸만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불가에서는 베드로는 그 자신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이 세상의 숯불 가에서 그 자신의 육체를 따뜻하게 하였을지라도 그 온기는 계속되지 못하였고 오래 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숯불 가에서 베드로의 마음이 따뜻해졌을 때에는 그 온기는 계속되었고, 이 온기로 인하여 베드로는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을 받되 능력 있는 사도로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서,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삼천 명이 한 번에 구원을 받을 만큼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 복음말씀을 전하였습니다.(행2:14 ,41) 

 

   베드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이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을 때에, 비로소 회복이 되었고 마음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남아 있는 전 생애를 통해서 베드로 자신에게 영감을 주며 전 생애동안  그를 지도하였던 주님의 명령을 받앗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이번에는, 우리 각자에게 우리가 불을 쬐고 있는 숯불이 어디에 속한 숯불인지 물어 보도록 합시다. 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우리의 시간을 보내도록 합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음식을 먹도록 합시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만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님의 숯불 가에서 따뜻함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 모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기고 봉사하는 중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을 받아 순종하는 삶을 살며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벤 F. 파머(Ben F. Parmer)

                                                                          EMMA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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