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5장
원만한 이해
주로 기도와 헌신의 사람인 에바브라를 통해 구원받은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3).
여기서 내가 특별히 주목하고픈 표현은 2절에 나오는 "원만한 이해"입니다.
구원의 문제가 처음 해결된 뒤에 더 이상 의심이나 혼란이 없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거스르는 광야, 곧 세상을 지나가는 외인이자 나그네이며, 그 길을 가는동안 그는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길을 방해하려는 많은 적들로 둘러싸입니다.
그의 안에도 적이 있는데, 그것은 새로운 출생으로 부여받은 영적인 성품과 늘 싸움을 벌이는 옛 육신적인 성품입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벧전 5:8). 우리는 그를 대적하고 믿음 안에 굳게 서라는 요청을 받습니다(벧전 5:9).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을 결코 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신자의 영적 진보를 방해하고 은혜 안에서의 성장을 더디게 하려고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할 것입니다. 그는 의심의 맹렬한 화살과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는 유혹물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방해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빼앗고 그 간증을 무너뜨리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고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주의 법도로 인하여 내가 명철케 되었다"고 다윗은 말합니다(시119:104).
우리는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즉시로 성령님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정기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구속받은 자녀들에게 보내신 우리 아버지의 편지입니다. 우리는 그 책을,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아버지께서 우리를 인도하고자 하시는 길을 알려주는 지침서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성경공부는 나를 진리로 가르쳐주고, 내 삶에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알려주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법을 깨우쳐주고,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성경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성경공부를 등한히 한다면, 그는 영적인 생활에 활력을 잃을것이고, 의심과 두려움의 먹이가 될 것이며, 모든 교훈의 풍조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거듭난 아일랜드 사람
갓 태어난 아기가 젖을 필요로 하듯이 거듭난 영혼은 말씀을 섭취해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읽다가 구원받은 한 아일랜드 사람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을 어디선가 얻었는데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책을 주의 깊게 읽었습니다.
하루는 교구 사제가 그를 찾다가 그가 영혼에 큰 축복을 가져다준 그 귀한 책을 정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팻," 사제가 경색하며 물었습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지요?"
"예, 신부님," 그가 답했습니다.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이라고요! 팻, 그건 당신 같은 무지한 사람이 읽을 만한 책이 아닌데요. 그건 신학교에 다니면서 그 본래의 뜻을 배워서 사람들에게 그 뜻을 알려주는 성직자를 위한 책인데요. 당신같이 배우지 못한 사람은 온갖 잘못된 사상에 물들 수 있어요."
'하지만 신부님," 팻이 말했습니다. "방금 이곳을 읽고 있었는데 여기서 사도 베드로가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그리고 나는 확실히 그리스도 안에 어린 아기이고, 또 나는 말씀의 젖을 사모해요.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말씀을 읽고 있는 건데요."
"팻, 그건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전능하신 천부께서 사제들을 유모로 임명하셨어요. 그러니까 말씀의 젖을 원할 때는 내게 와야 해요. 내게 오면 당신이 소화할 수 있을 만큼 젖을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신부님, 신부님도 알다시피 나는 전에 외양간에 젖소를 키운적이 있었어요. 한번은 몸이 불편해서 사람을 고용해서 젖을 짜게 했지요. 그런데 그 사람이 젖에 물을 절반 섞어서 부당하게 팔아 이득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몸이 완쾌된 후 그를 해고하고 내가 직접 젖을 짰습니다. 그 후론 항상 양질의 젖을 공급할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 만일 내가 말씀의 젖을 얻기 위해 신부님을 의지한다면 아마 신부님은 물이 섞인 젖을 주실 겁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직접 젖을 섭취하고 있는 것이지요. 날마다 내 영혼은 양질의 말씀을 섭취하고 있답니다."
이렇게 직접 부지런히 성경을 상고하는 것을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공부 없이는 원만한 이해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상고하면 이런 저런 진리가 놀랍게 계시된 것을 발견할 것이고, 그로 인해 의심과 의문이 사라지고 그 대신 위로부터 오는 확신이 자리할 것입니다.
낙심한 그리스도인들
가르침 받지 못한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실패 때문에 낙심하게 되며, 사단은 그런 기회를 타서 그들의 마음에 그들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속이고 있는지 의심을 품게 만듭니다. 그러나 신자의 두 가지 성품에 대한 진리를 알고 나면 이 문제에 대해 도움을 받게 됩니다. 거듭난 후에도 옛 성품에 있던 육신의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옛죄의 원리는 신자가 육체 가운데 있는 한 그 안에 머물러 있습니다. 새로운 출생과 함께 새롭고도 신적인 성품이 부여되는데, 그렇게 해서 그 두 가지 성품이 서로 다툼을 벌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때로 그런 소욕(所欲)이 나타나긴 하지만 육체의 소욕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행하려면 옛 아담의 성품에 속한 그 악의 원리를 대적하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의 원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처리된 것으로 간주하십니다. 왜냐하면 주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가 행한 것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본질적인 모습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은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신자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주의 깊게 살펴봅시다. 내가, 책임 있는 내가, 그 옛 사람이 나의 죄악된 성품을 포함해서 육신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나의 전 존재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약 2천년 전에 예수께서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그분 안에서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분은 나의 대리자요 나의 대속물이었습니다. 그분은 내가 당해야 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시기에 그분의 죽음은 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제 나는 그것을 내 개인의 경험에서 실질적인 것이 되게 하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야 합니다(롬 6:11). 옛 성품은 나에게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 옛 성품이 나를 속박하려고 시도한다면 나는 하나님 편에서서 그것에 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죄를 정죄하셨습니다. 나도 그 죄를 정죄해야 합니다. 그것에 굴복하는 대신 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분의 부활 안에서 새롭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며, 그분이 친히 내 안에서 사십니다. 이후로는 그분이 나의 새로운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책임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나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그분께 굴복할 때 나는 죄에서 자유케 됩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은혜의 향기롭고도 압도하는 능력이 나를 인도하사 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그것이 내가 마땅히 드려야 할 영적인 예배입니다(롬 12:1).
사실 나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있으나,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새로운 피조물에 속해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그것에 근거해서 행동하는데 실패하면 승리의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와 라오디게아의 신자들이 이러한 새 피조물 안에서의 그들의 위치와 책임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는 그들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그리스도께 사로잡혀서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권세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발견할 수 있기를 갈망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인간의 철학과 율법주의와 의식주의와 금욕주의 등, 인간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려고 의지하기 쉬운, 그러나 육체의 방종을 금하는데 아무 실질적인 가치가 없는 모든 것들의 대비책이 되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갈망하는 승리를 가져다 주는 것은 부활하사 영화롭게 되신 구주, 즉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머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부활했기 때문에 위엣것을 찾으라는 권면을 받고 있습니다.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3).
또 다른 아일랜드 사람이 "영광"이라고 외치다
앞서 하나님 말씀 안에서 기쁨을 발견한 어떤 아일랜드 사람 얘기를 한바 있는데, 여기 또 한 명의 아일랜드 사람을 소개합니다. 그는 내가 이제까지 밝혀온 진리를 깨닫고 원만한 이해에 이르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분명히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고 한동안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만일 내가 죄를 짓고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결국 멸망에 빠진다면 어떻게 하지?" 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한번 주님을 안 뒤에 그 높은 특권의 위치에서 떨어지고, 그렇게 하여 영원한 저주의 공포 아래 압도당한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두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밤낮 그 문제로 고민하고 좌절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 집회에서 위에서 인용된 골로새서 3장 1~4절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전문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 보배로운 말씀이 그의 귓전을 울리고 그의 눈으로 직접 그 말씀을 읽을 때에 뭔가 확신이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에 그는 자기가 여러 사람이 모인 집회 중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위 사람들이 다 깜짝 놀라게 "하나님께 영광!" 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엉뚱한 행동에 웃었을지 모르나 그러나 그는 원만한 이해를 가져다준 진리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 자신의 연합을 깨달았으며, 그의 머리께서 이미 하늘에 계시므로 자신은 영원히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영혼을 구원하는 소중한 진리인지요! 그것은 얼마나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지요!
그 실제적인 결과가 이어지는 구절들(골 3:5~17)에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땅에 있는 우리의 지체를 죽이고(즉, 실제적으로 죽음의 위치에 두고), 모든 불결하고 불경건한 성향을 새로운 창조에서 아무 위치도 차지하지 못할 것으로 여겨 잠시라도 용납지 말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합당치 않은 옷과 같은 습성과 행동들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합당한 것들을 입으라는 권면을 받습니다. 이 골로새서 3장 전체를 직접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32). 그분의 구속받은 자들은 그분의 진리를 알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 두려움과, 자기신뢰로 인해 생기는 교만으로부터 건짐 받기 위해 그분의 성령을 의지하여 그분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지요! 자유케 하는 말씀만이, 그것이 삶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는 정직하고 헌신된 영혼에게 원만한 이해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정직한 자에게 깨달음과 지각을 줍니다.
나아가라! 나아가라! 나아가라!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면서 여러 가지 문제와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그분의 뜻인 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 모두에 대한 답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케 됩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그분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므로 항상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의 영역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뢰하는 영혼은 그분이 계시해주신 것에 만족하고, 나머지는 장차 올 그 날에 알려지도록 조용히 그분께 맡깁니다. 그 날에는 그분을 계신 그대로 뵙고, 그분의 빛으로 빛을 보고, 주께서 우리를 아시듯이 우리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밝은 아침에 깨어날 때,
동이 튼 후 다시는 밤이 오지 않는
그 아침에 깨어날 때, 나는 영원히 빛나는 영광으로 만족하리.
사랑하던 이들을 만날 때,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이들을 품에 안을 때,
나는 주께서 내게
얼마나 신실하셨는지를 깨닫고 만족하리."
그 때까지는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불이 되고 우리의 길에 빛이 되어, 그것으로 우리가 죄와 슬픔이 다스리는 이 세상을 안전히 걸어갈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계시된 그분의 은혜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으로 둘러싸인 이 세상을 헤쳐나갈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는 우리의 마음에 안식을 주고, 우리의 영혼을 "원만한 이해" 가운데 평안을 누리게 하기에 충분한 약속들이 풍성히 담겨 있습니다. 나머지는 만사를 형통케 하시는, 또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께 맡겨드릴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하신 것과
계획하신 것을 깨닫는데 익숙하지 못하네.
나는 다만 하나님 우편에 나의 구주가 계신 것을 알뿐이네!
나는 하나님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죽으셨다고 기록되었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그분이 내 구주가 되실 필요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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