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절제를 통한 승리의 삶

                                   Self-Control Brings Victory

 

   본문말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언 4:23).

 

   마가복음 7:21~23에서, 예수님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을 지키라. 왜냐하면, 모든 종류의 악한 것들이 다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렘 17: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취하느냐에 따라 참되기도 하며,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더욱 진실하게 되기도합니다. 잠언 23:7에서는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들은 결국,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이 자신의 생각을 절제하고 통제해야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감정을 만들어 내고, 감정은 그 사람의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은 자기 절제 없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농구를 하는 것이든, 노래를 하는 것이든, 물건을 판매 하는 것이든, 운전을 하는 것이든, 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는 것이든 그 어느것 어느 분야이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든지 그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부단한 자기 절제와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가령 천재적인 골프선수라 칭송받는 사람의 경우에도 그가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자기 절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수한 체육선수나, 탁월한 음악가나, 훌륭한 기능공이 되기까지 그들 모두가 다 그와 같은 노력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정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끊임 없이 자신을 연마하고 실습을 거듭하며 철저한 자기절제를 실천함으로 승리자의 위치에 오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아래의 각 문항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킨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 특징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네 가지 유형의 인격적인 특징

 

   1. 맨 먼저 그들은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9:12).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의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잠 20:3).

 

   "길로 지나다가 자기와 상관 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잠 26:17).

 

   예수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친구간의 우정이나 자신의 가정까지 파탄시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고 관계를 무너뜨림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며 그것으로 만족감을 취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강한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해치거나 피해를 입히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일부 청소년들은 절제되지 않은 감정에 이끌림을 받아 떼로 몰려다니며 남의 건물을 파괴시키거나 건물에 불을 지르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 청소년들에게는 일종의 힘의 과시이며 스스로 힘 있는 자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감정에 지배를 받는 자들은 이처럼 강력한 악의 힘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사랑은 미움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물을 파손시키는 방화범들보다 건물을 세우는 건축자들이 훨씬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분쟁이 있는 곳에 찾아가 문제를 예방시켜 주는 일을 돕거나,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힘은 사회를 깨트리고 파괴하는 사람들의 힘보다 훨씬 강하며, 많은 존경을 받게 됩니다. 분명한 사실은 전쟁을 일으키는 자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젭(Jeb)은 이와 같이 화평케 하는 사람에 속합니다. 교도소에 들어와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하기 전 그는 무절제한 생활로 끝내 결혼생활까지 파탄시켜버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감되어 있던 중에 이혼을 당했기 때문에 가석방으로 풀려나온 후에도 혼자 지낼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교도소에 들어가 있을 때 자신을 떠나 이혼을 해버린 전 부인에게 찾아가 그들 부부 사이에 상처를 입고 이혼을 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라고 사과 했습니다. 또한, 그는 부모님에게도 찾아가 마음의 상처를 입혀드리게 된 것을 사과했습니다. 젭이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그의 남동생도 범죄를 저질러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여동생 역시 마약에 빠져 그녀의 아이마저 부모님께 맡기고 떠나버리게 되었는데 젭은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모두 자신에게 있음을 인식하고 부모님께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이처럼 젭은 거듭나기 전, 과거 자신의 죄악된 생활로 말미암아 그의 부모님들께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혀드리게 된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젭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난 날 자신의 잘못된 삶으로 세 남매들이 부모님께 입혀드리게 된 마음의 상처들을 남은 생애 동안에 치유시켜 드리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후 젭은 화평케하는 자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갔고, 마침내 그의 부모님께 자랑을 기쳐드리는 아들로까지 변화되었습니다.

 

   2. 그들은 즐거움을 잃지 않는 긍정적인 심령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4:30).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잠 16:24).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어떤 사람은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 매사에 긍정적이고, 근심이나 걱정보다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반면에 우울하고 소극적이고 비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항상 즐거워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그들의 기쁨과 풍요로움은 우물물처럼 다른 이들을 말끔히 씻겨주는 역할을 해줍니다.

   특히 구치소나 교도소나 재활원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기쁨을 찾기가 더 더욱 쉽지 않습니다. 그런 곳에는 부정적인 생각, 불평 혹은 자기비관에 빠진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곳에 들어와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미 우울증을 앓았거나 아니면 절망을 이기지 못해 마약과 같은 약물에 빠진 경우가 많습니다.

   약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약물이 가져다주는 효능에 의지해 인위적으로 자신을 현실세계에서 벗어나게 하여 환각상태에 빠짐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해방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약물은 그들의 뇌 속에 있는 호르몬과 뇌세포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함으로 단지 순간적인 만족감을 그들에게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환각적 만족감은 순간적일뿐이며 결코 진정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기쁨을 가져다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사람에게는 기쁨을 전염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의 심령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능가합니다. 그것은 단지 치료의 효능뿐만 아니라 장래에 겪게 될 심령의 정서적 장애를 예방하는 면역주사를 맞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이미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는 로마에 있는 감옥으로부터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서 그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하였고 계속하여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웟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나"(빌 4:11-13)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인 생각을 하도록 하기위하여 다음과 같은 처방을 해주었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빌 4:8).

 

   빈센트(Vincent)는 경제적 기능장애를 겪고 있는 역기능가정(신체적 결함은 없어도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가 범죄로 인해 재판정에 처음 선 것은 불과 그의 나이 9살이었습니다. 이제 30대가 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도소를 전전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 빈센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된 빈센트(Vincent)는 아주 새로운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의 평안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미소를 띠며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갱단으로부터 탈퇴를 결행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교도소내에서 그는 두 번이나 거의 죽임을 당할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떠한 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즐거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음의 평강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빈센트(Vincent)의 그러한 미소는 교도관들로부터 늘 호의적인 반응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평강과 즐거워하는 마음을 억누르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번은, 빈센트(Vincent)는 교도소의 목사에게 조차도 그의 설교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정중하게 전하면서 조금만 미소를 지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부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제는 다른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빈센트(Vincent)를 찾아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빈센트의 충고와 조언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빈센트는 그와 같은 상담을 통하여 행복한 심령은 다른 사람들을 치료 할 수 있는 치료의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3. 그들은 지위가 낮고 가난한 자들에게도 차별하지 않고 늘 친절한 사람들입니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잠 31:26).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서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 14:20-21).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 29:7).

 

   청소년 중에는 다른 친구들을 자신이 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여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학생들 중에서도 자신만을 인기 있고 멋지다고 생각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다른 친구들을 외톨이 취급하고 그들을 괴롭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학교에서 일부 동료 학생을 왕따(bully)로 몰아 그들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문제는 오늘날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까지 대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여기에서 집단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왕따 문제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어느 교수의 연구조사 보고에 의하면 자신이 다른 친구를 따돌린 경험이 있는 학생이 50%,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30% 정도나 된다고 하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다른 친구들을 왕따시키는 방법에는 별명부르기, 신체외모에 대해서 놀리기, 멍청하다거나 바보라고 놀리기, 무시하며 비웃기, 함께 놀아주지 않기, 말을 따라 하기, 빈정거리기, 말로 상처를 입히기 ,몸을 건드리기, 때리기, 물건을 빼앗거나 손상시키기, 째려보기,외면하기 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는 이와 같은 괴롭힘을 당한  피해자의 경우, 그 영혼이 파괴되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 데까지 발전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와 같은 피해자들은 사람을 무서워하거나, 기피하거나, 대인 관계에서 자신감을 잃거나,고립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하는 경우에는 자살로까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집단으로 괴롭히는 왕따문제가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와 같은 청소년들 속에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청소년들 마음이 각박해 있고 그들의 심성이 잔인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악한 죄악의 쓴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거듭남으로써  새로운 성품을 소유한 자로 변하지 않는 한 이런 악한 쓴 뿌리를 처리할 수 없습니다. 일찍부터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잘 양육된 청소년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이런 악한 쓴 뿌리를 넉넉히 이기며 성실하고 친절하고 이해심이 있고 예절 바르고 공손한 사람으로 자라갑니다. 나이가 어리거나 성인이거나 할 것 없이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며 친절하며 남을 위하며 섬기며 봉사하고 돕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 당시 당대의 종교 및 사회적 지도자들은 문둥병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사람들이나 창기나 세리 같이 죄인 취급을 당하는 사람들을 항상 가까이하시는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하고 배척하였습니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법과 의로움과 거룩을 내세우면서도, 실제 생활에서는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과 죄인들로부터 자신들을 철저하게 구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반대로 오히려 그러한 낮고 천하고 가난한 자들과 친구가 되어주시고 가까이하며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당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고 금기시하던 사회적 관습과 통념을 깨트리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누가복음 6:20-22).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전서 1:26-29).

 

   델버트(Delbert)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명문대학을 졸업했고 훌륭한 경력을 쌓는데 초석이 될 만한 사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강력하게  부인하였지만, 그는 어떤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에 대한 분노를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불쌍하게 보았고 전적으로 자기 연민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의 삶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생활에 전념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안에서 수감생활을 하는 가운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부정적인 환경들에 굴복하기 보다는 맞서는 편을 택하였습니다. 델버트는 자신이 참기 어려운 현실에 대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거부하고 아무리 참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범사에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생활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방 안에서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감옥 안의 동료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때로는 일부이지만 성경공부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감방 동료 중에는 어떤 번역 성경이 제일 좋으냐는 등의 사소한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그와 변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들에게 조차 변론을 피하며 계속해서 사랑과 은혜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은 아이스크림을 사서 거기에 자신이 직접 쓴 성경구절들을 함께 묶어 감방 안에 있는 동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고 변화된 델버트는 전에는 세상에서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동료 죄수들을 꾸준히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랑하며 주님의 친절을 온전히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4. 그들은 선으로 악을 이긴 사람들입니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잠 31:10-1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하라"( 잠 25:21).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bloat: 고소하게 느끼는 감정을 의미)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잠 24:17-18).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잠 24:26).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잠 11:8).

 

   칼(Carl)은 40세로, 전직 마약 밀매꾼이었고 연립주택단지에서 자랐습니다. 지난날 그의 동료였던 사람 중 다수가 현재 교도소 안에서 무기수로 복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은 교도소 내에서 그들과 함께 불의한 생활에 동참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그는 매사에 아주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교도소 내에서 재소자들의 상담과 전도를 담당하는 교도소 목사의 보조원이 되어 동료 죄수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석방으로 출소한 후에는 길거리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언제 어느 곳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면 달려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가석방 후 2년이 지나고, 드디어 그는 완전한 자유인의 신분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칼(Carl)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자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사자처럼 담대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속한 지역의 교육 발전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편지를 통하여 교도소 안에 있는 옛 동료들을 격려하는 일까지 하면서  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독려하였습니다. 칼은 굳은 확신 위에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승리자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잠 10:9) 하는 잠언의 교훈을 실천에 옮기며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법을 삶 가운데 확실하게 배웠으며 이로 인하여 그가 속한 사회안에서 강력하고도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진정으로 칼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서 마침내 그의 삶에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결론

 

   세상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경에 쉬이 지배를 받습니다. 그리고는 자신들을 환경의 피해자로 보게 됩니다. 그들은 정서적으로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절망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그들의 종말은 자신들을 멸망시키려는 자들의 먹이가 되어 그들의 의도대로 파멸을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요 10:10). 반면에, 잠언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이기는 자 곧 승리자가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하는 말씀을 따라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들을 강하게 함으로 앞으로 닥칠 시련들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대비를 미리 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믿는 자들은 겸손하지만,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사자처럼 담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친절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 까지도 자신들과 우호적인 관계로 바꿔 놓습니다. 실로 믿는 자들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들입니다(롬 12:21).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과 또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한 사도 바울의 권면을 기억하며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날 까지 적극적인 믿음 안에 거하며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승리자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

 

잠언강해 제8과

분노한 자를 멀리함으로 얻는 안전

 

Avoiding an Angry Man Brings Safety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잠언 22: 24-25).

 

캔사스 레븐워스(Leavenworth)에 있는 미연방교도소 심리상담가인 글렌 월터즈(Glenn Walters)씨의 말에 의하면 교도소 수감자들이 정서적으로 겪게 되는 두 가지 경험은 "공포와 분노"(Fear and anger)라고 합니다. 교도소에 있는 죄수들의 주위의 환경적 모든 분위기는 사실상 이 두 가지 감정 이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제1과에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공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본과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의 말씀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의로운 분노

 

분노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anger)나 진노(wrath)는 의심의 여지 없이 항상 의로운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잠 24:17-1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청결케 하려 하실 때 분노하셨습니다(요 2:13-17). 그러나 성경은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진노하셨을 때에 예루샇렘 성이 불타고 온 성이 폐허가 되며, 백성들은 사로잡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된 광경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남 왕국 유다가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고 그들의 왕과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성이 파괴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참고-북 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함) 그러나 이와 같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당시보다 천년 이전에 신명기 28장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경고해 놓으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 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 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놀램과 속담과 비방거리가 될 것이라"(신 28:15, 36-37).

 

 

그러한 경고를 이미 받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한결같이 목이 곧고 패역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하나님 섬기기를 저버리고 그들이 거하는 가나안 땅 이방 족속들의 풍습과 그들의 우상 신들을 따라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을 진노케 하였습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천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인내하시며 자신의 택한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의 진노를 참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실패하였습니다. 예레미야애가에 나타난 비극은 바로 천년 이상 오래 참으사 진노하시되 더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잘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악한 자에 의해 누군가가 해를 입게 될때 이를 보고 나타내는 의로운 분노는 전적으로 합당한 것입니다. 가령 어느 악한자가 길거리에서 한 노부인의 가방을 뒤에서 낚아채고 그녀를 구덩이로 밀쳐 넣어 피를 흘리게 하고도 조롱하며 그냥 그대로 가버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이 그와 같은 광경을 보았다면 당신은 아마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류 중 하나에 속한 사람일 것입니다. (1) 히히덕 거리면서 그 도둑이 피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2) 아주 무관심한 상태로 자신의 일에만 신경을 쓰며 그 노부인을 구덩이에 내버려 둔 채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3) 의로운 분노에 따라 그 노부인을 도와 구덩이에서 이끌어 내고 또한 도둑을 잡으려 할 것입니다. 이러한 3번째의 반응은 곧 의로운 분노의 반응입니다.

 

불의한 분노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둘보다 무거우니라.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 27:3-4).

 

분노는 사람들 주위에 독을 뿌림과 같습니다. 남을 저주하거나 분노하는 사람앞을 지나게 될 때 자신도 감정이 솟구침을 느끼거나 혹은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환경에 있는 모든 사람이 긴장감과 불안감을 느끼게 됩니다. 분노한 자가 절제심을 상실할 때 필경 그 가운데 어느 사람이 다치게 되거나 때로는 총이나 칼 등의 무기까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 25:23).

 

자신을 등 뒤에서 험담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많은 사람이 분노를 표출하게 됩니다. 특히 가정 폭력문제의 큰 요인이 이와 같은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아내나 혹은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격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 21:19).

 

여자들 역시 화를 내게 됩니다. 그들은 남자들과 다른 방법으로 종종 자신들의 분노를 드러냅니다. 어찌되었든, 분노하는 자는 주위의 룸메이트나 동료 감방죄수나 직장 동료나 혹은 그의 배우자에게 극심한 불쾌감을 가져다주게 됩니다.

 

"노하기를 맹렬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 네가 그를 건져 주면 다시 그런 일이 생기리라"(잠 19:19).

 

폭력적인 기질을 가진 자는 결국 그에 대한 징벌의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격렬히 분노할 때에 누군가가 경찰을 부르게 될 것이며, 그의 아내는 집을 뛰쳐나갈 것이며, 자녀들은 공포에 떨 것이며, 고용주는 그를 파직시킬 것입니다. 혹은 범죄 수사기관에서 그를 심하게 다루게 될 것입니다. 여기 인용 구절의 후반부에서 주는 교훈은 상습적으로 분노하는 사람에게는 구제가 별 도움이 되지 못한 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속 화를 낼 것이며 심지어 이전보다 더욱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분노한 사람을 진정시키거나, 그의 잘못을 처벌함으로 분노하는 사람을 교정시켜보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의 아내나 어머니나 여자 친구들이 종종 이와 같은 방법으로 노력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오히려 일을 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만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수많은 형무소의 흉악범들이 형무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분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후로 양 같이 온순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는 실례들을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지난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당할 때 돌로 스데반을 치던 무리들을 인도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아 옥에 가두고 기독교를 이단으로 몰아 말살하려고 교회를 핍박하던 냉혈 인간 사울 역시 훗날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이후에 자신의 죄를 회개함으로 구원함을 얻고 주의 사도도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오른 편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 역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그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고 그 십자가상의 강도를 받아들이시고 그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잠 6:34).

 

수 많은 폭력사태나 분노를 일으키는 요인은 성적인 문제와 관련이 깊습니다. 실례로, 남자는 자기 아내나 여자 친구가 신실하지 못할 때 의심을 품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그의 여자 친구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조차 참지 못하고 의심하고 경계하며 분노를 나타냅니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잠 14:16).

 

지혜로운 자는 악한 자와 어울려 악을 도모하지 않습니다(잠 22:24). 그는 분노하는 사람의 악에 자신이 동참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어리석은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잠언에는 무려 50번 이상 어리석은 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만심이 강하고, 거만하며, 세상 모든 일이 그를 중심으로 해결되고, 그가 이끄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그의 뜻이나 방식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에 는 분노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언제나 일방통행식입니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이와 같은 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거부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잠 29:9).

 

이 말씀에서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와 쟁론을 하여 합의를 이끌어 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여기에서 어리석은자의 히브리어의 원어의 뜻은 악한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혜로운 자의 입장은 다만 당황스러울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악한 자)의 반응은 지혜로운 자를 향하여 노를 격동하던지 혹은 비방과 조롱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은 이와 같은 자를 상대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 29:22).

 

분노하는 사람의 주변은 항상 위험합니다. 그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자주 곤경에 빠뜨립니다. 따라서 분노하는 자와 동류가 되는 것은 결국은 자신도 심각한 문제에 함께 빠져들 염려가 있습니다.

 

술과 분노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까닭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잠 23:29-30)

 

술이나 마약의 중독에 빠진 자들이 자신의 건전한 통제력이나 절제심을 잃고 분노를 잘 나타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주정뱅이는 다툼이나 분쟁 일으키기를 좋아하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잠 23:32).

 

형무소 수감자들의 약 80퍼센트 이상은 술이나 마약 중독과 관계가 있습니다. 일단 중독에 걸리게 되면 그런 사람은 안전운행을 할 수도 없고 기계를 다룰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술이나 코카인이나 메담페타민 같은 각성제에 의해 환각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통제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지미(Jimmy)의 취미는 오토바이 타기를 즐기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전신은 온통 문신(tatoos)으로 뒤덮인 상태였습니다. 청장년기의 시절에는 항상 오토바이타기를 즐기고 술과 메담페파민 같은 각성제를 항상 가까이 하였습니다. 그는 거의 모든 일에 대하여 항상 분노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끊임없이 싸움을 일으키곤 하였습니다. 그는 어릴 때 자신이 받은 학대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심한 역기능 가정 환경 속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그의 친척들은 그에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학교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주 수입원은 거의 길거리에서 마악을 거래하는 일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오토바이 타는 것과 마약 거래하는 것과 같은 부류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어느 날, 지미(Jimmy)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바(bar-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그 자리는 싸움판으로 변했고 끝내는 커다란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지미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체포되었고 법정에서 7년 형을 언도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미는 형무소로 넘겨지기 직전, 구치소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구하였고 마침내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으며 차츰 차츰 하나님의 말씀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공부 시간과 기도회가 있을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참석하였습니다. 지미는 시간이 있을 때 마다 다른 동료 수감자들에게 예수님을 증거 하는 데까지 힘을 썼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그는 예전의 동료 갱 멤버들로부터 계속해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들과 결코 싸우거나 다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과 결코 조그마한 언쟁조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그들에게 복음의 말씀과 사랑을 나타내는 일만 하였습니다. 오래지 않아 그의 동료들은 그를 인정하게 되었고 그를 형무소내의 전도자라고까지 불렀습니다. 지미는 다시는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성령님을 근심시켜드리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하여 늘 조심하였습니다. 세월이 가고 또 해가 갈수록 점점 그는 더욱 자기 절제와 마음의 안정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드디어 지미는 형무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아주 굳건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들 가운데 우뚝 서게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분노와 자기절제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분노를 이기는 해결책은 인내와 절제와 신중성을 고양시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특성들을 발전시켜 나가기를 힘씁니다. 그는 자신을 모욕하는 자에게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받은 모욕을 할 수 있는 한 가볍게 넘기려고 애씁니다. 비록 어떤 사람으로부터 무슨 불쾌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는 그러한 모욕이나 반대나 도전을 단순한 일로 넘겨버리기 위하여 인내와 절제를 동원하여 할 수 있는 한 합당하게 대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하는 자의 분노가 경건한 사람을 분노 가운데로 함께 빠져들어 가게 하지 못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긴박한 상황을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있는 놀라운 재능을 주십니다. 상대편이 화를 낼 때 좋은 말로 대응을 하면 그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쁜 말이나 혹은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그릇된 태도의 말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하며,소금으로 간을 쳐 맛을 내듯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어떻게 합당한 말을 할 줄을 알리라."(골 4:6)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잠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지혜로운 자와 충동을 억제 하지 못하는 자 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충동적인 사람(impulsive people)은 그의 머리나 혹은 지각을 사용하지 않으며 대개 즉흥적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본성적인 근성(raw emotion)을 있는 그대로 나타냅니다. 누군가가 그를 모욕하면 즉각적으로 분노로 대응하며 목청을 높여 싸우려 들거나 때로는 주먹이나 발길질 같은 육체적 행동까지 거침없이 들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매년 50만 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이와 같은 범죄 사건으로 말미암아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보내진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그의 기질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영화 같은 흥행물에서는 민첩한 주먹을 휘두르는 자도, 총을 잽싸게 다루는 자를 영웅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신속하게 제압하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욕설이나 위협 등을 격렬하게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멋지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아주 반대입니다. 즉흥적인 폭력이나 공격적 행동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들보다 자기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다스리는 자를 하나님은 칭찬하고 있습니다. 앞에 인용된 잠언 구절은 실제로 그의 갑정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 성을 정복하고 승리한 용사보다 더 훌륭한 영웅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기는 사람은 자기 절제(self-control)로 말미암아 그의 마음과 영혼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 노를 억제하느니라"(잠 29:11).

 

안정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야 한다고 하는 그릇된 이론을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분노나 격한 감정이 일어날 때 이를 외부로 드러내지 않고 자기 안에 이를 품고 참는다면 결국 나중에 쌓였던 그 분노가 마치 화산처럼 밖으로 터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는 정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분노를 절제하는 법을 먼저 배우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분노를 절제하는 자란 자신 안에 있는 분노를 부인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그와 같은 감정이 있는 것을 자신에게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도 인정해야 합니다. 시편 안에서 보면, 다윗은 그의 분노를 숨기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다른 사람에게 결코 해를 입히지 않고 매우 절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그의 원수 사울이 그가 숨어있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한 신하로부터 이 순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는 절호의 기회라며 그를 해치워 버리라는 권유를 듣습니다. 다윗인들 기회가 왔을 때 왜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었겠습니까? 그렇지만 다윗은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다만 사울의 옷자락 끝을 칼로 베는 것만으로도 괴로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사울 왕 앞에 자신이 결코 목전에 있는 원수를 해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줌으로 사울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또한 그는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피신하는 길에서 사울의 신복 시므이의 끈질긴 저주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인내하며 참는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절제의 인물이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삼하 16:5-13). 실로 다윗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실 때 그는 모욕과 조롱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고 베드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벧전 2:22-24). 모세도 그랬고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로 그랬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역시 그래야만 할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은밀한 선물은 노를 쉬게 하고 품 안의 뇌물은 분을 그치게 하느니라"(잠 21:14).

 

자기 절제를 잃은 분노한 사람에게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할까요? 때때로 선물이나 혹은 뇌물(bribe는 종종 present로 번역됨)은 화해(peace)를 이루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 중에서 좋은 실례 가운데 그하나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에게 한 행동입니다. 야곱은 그의 형 에서와 진정한 화해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는지는 몰라도 그의 선물로 말미암아 형 에서의 분노를 가라앉히기를 원하였습니다(창 32:33).

 

"분을 쉬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잠 15:18).

 

분을 참지 못하는 자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다툼이나 분란이 일어나며 결국 어떤 일이 벌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내하는 자는 어떻게 하든 싸움을 그치게 하는 방법을 체득한 사람입니다. 그는 때때로 자칫 싸움판이 진짜로 벌어질 상황에 이를 때면 그 가운데 직접 개입하여 상황을 적극적으로 중재시킴으로 화해를 가져올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경주합니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잠12:16).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짜증이나 불쾌감을 그의 얼굴에 즉각적으로 나타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방안에서 이야기할 때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하는 피해과다망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화를 낼만한 일을 당해도 동요하지 않고 그런 일을 너그러이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

 

지혜로운 사람은 분노를 잘 피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분노를 다스리는 법을 잘 배운 사람입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상황에 빠져들어 자신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분노로 인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인내심을 배워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patience)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롬 15:5). 욥은 경건한 인내의 사람(약 5:10-11)의 본보기였습니다.

 

인내(patience 시련이나 고통을 꿋꿋이 참아가는 능력)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환란을 통하여 우리 안에 쌓아가도록 하신 그리스도인들의 품성(character)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있는 여러 어려운 상황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인내의 역사를 온전히 이루어 내실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롬 5:3).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부딪치는 여러 어려운 상황들은 결국 남은 여생에서 인내가 온전히 이루어 질 때까지 계속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교훈을 터득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