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제8과


                            여성에 관한 구체적 교훈


                                           아내에 대한 교훈


   이번에는 순복에 관해 다루고 있는 다른 세 대목을 상고해 보려 합니다. 이 구절들은 특히 아내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엡 5:22~24)

   골로새서 3장 18절에서도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Submit yourselves)" 고 특별히 명시하고 있는데, 이는 자진해서 순복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 다음 구절에서는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 5:25~33)는 말씀대로 남편들에게 아주 무거운 책임이 지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에게 사랑이 있는 지도자가 되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그의 책임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아내를 지으신 것이지, 어려움이 되도록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아내들이 그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말씀은 교회가 선포해야 할 중대한 교훈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행해야 할 신령한 진리의 실례가 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4절에서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의 교훈은 아내된 자들에게 주시는 것이지만, 기혼자이든 미혼자이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모든 여성이 갖춰야 할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여성은 모름지기 외모를 아름답게 하는 데 치중하기 보다는, 아름다운 품성 계발에 치중하여 정숙한 생활을 하게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용하고 부드러우며 신령하고도 고상한 품성과는 대조적으로 고집과 다투는 소리와 공격적인 태도를 몇몇 현대 여성에게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권면하십니다(롬 12:2).

   순복이란 누구에게나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주장을 내세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던(빌 2:6~8) 그리스도의 생애를 재현하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며, 또한 이를 주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 할진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던 순복을 본받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순복은 결코 열등하다거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훌륭한 인격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습니다(잠 16:32).

   순복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이 특권은 분명히 아내에게나 여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 5:18~21)고 말씀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5장 5절을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순복하는 심령은 모든 믿는 자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우선적으로 생활 전반에 걸쳐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요일 3:16).

   주님을 믿는 여성은 외모를 사치스럽게 꾸며서 자신에게 이목을 집중시키려 할 필요도 없고, 대중적인 활동을 통해서 사회적 지위를 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가치있게 보시는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자연히 내적인 정숙과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당시 믿음의 여인들이 갖고 있었던 소박하고 단정한 자태는 이방 여인들의 부도덕, 방종과는 대조적이었기에, 이교도였던 리바니우스(Libanius)는 "어쩌면 기독교 여성들은 이처럼 훌륭할까"라고 찬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침묵에 대한 교훈


   남자의 지도적 권위와 여자의 순복의 원리는 교회적인 집회에 있어서 여자가 잠잠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딤전 2:11,12)고 말했습니다.

   이에서 보다시피 교회에서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권위를 명백히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딤전 2:13,14)고 설명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여자의 침묵의 이유로 1세기의 어떤 지역적, 문화적 특수 상황을 제시하지 않았고, 창조와 타락의 순서에 기초하고 있음을 말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잠잠하라는 교훈이 근본적인 원칙이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됨을 보여줍니다. 아울러 디모데전서 2장 8절에서 바울은 공중 기도를 남자에게만 허용하고 있음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신자들에게도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임이라" (고전 14:34,35)고 편지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저 집회 중에 있는 여자들의 잡담이나 험담을 금했을 뿐이라고 강력히 주장하지만, 이 구절에서 "말하는 것'은 원어상 결코 잡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단어가 21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경우에도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여자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을 뿐더러, 남자의 지도적 권위에 순복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여자들이 대중앞에서 말하게 되면 순복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렇듯 여자들에게 보람있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셨지만, 교회에서 대중적으로 일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일관된 증거입니다. 심지어는 교회에서 대중적으로 질문하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35절). 로저(E. W. Rogers)는 "여성의 지위에 대한 모든 논쟁은 여성의 강단 사역이 중요하다고 과장하여 강조하려는 데에서 비롯된다. 모든 하나님의 일꾼들은 기도가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 기도야말로 자매들이 할 수 있을뿐 아니라 남자보다 더 잘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고 말했습니다.

   한편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고전 14:37)고 말했던 점을 유의하십시오. 이것은 앞서 다루었던 모든 문제와 여자들에 대한 가르침까지 포함한 모든 내용이 주의 명령이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단순한 사도 바울의 사상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전서 11장 5절에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라는 말씀을 상고하지 않은 채, 여자들의 침묵의 문제를 일단락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건대, 여자들이 대중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는 허락을 했고, 14장에서는 같은 내용을 금하고 있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와 교훈적 의미에 대해서는 구구하면서도 그럴듯한 견해가 무수하게 나와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11장이 지도적 권위와 순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을 뿐, 교회의 질서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즉 11장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회중 앞에서 말해도 '되느냐' '안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교회 질서를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4장, 디모데전서 2장에서는 잠잠할 것을 명하셨던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여자의 기도나 예언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만약 고린도 교회에서 여자들이 회중 앞에서 기도나 예언을 했다면,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로서 다른 교회에도 있었던 일반적인 관습은 아니었으며(고전 11:16), 많은 혼돈 가운데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 대한 특별 조처였다고 결론짓게 됩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 14장과 디모데전서 2장에서 분명하게 가르치는 침묵의 원리는 고린도전서 1장 11절의 지도적권위와 순복에 대한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있는 여자들의 무분별한 활동으로 인해 침묵의 원리가 변경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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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     성

                               F. 스마아트 &  J.  영


머리말


이 책을 공부하시는 분들에게


   남녀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본분을 깨달아 살아 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에 성경에서 여성에게 교훈 하시는 바를 살펴보기 위하여 이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 여성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은?

2. 여성으로서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격은?

3. 여성으로서의 바람직한 처신과 인간관계는?

4. 여성으로서의 가정, 교회, 사회 및 선교지에서의 역할은?

5. 여성으로서의 은사를 발견하여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활용하는 방안은?


   한 여성의 신앙과 인격이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장래에 끼치게 될 영향을 생각할 때, 이 강좌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고 뭇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1992. 3

                                    한국 엠마오 성경학교 교장



                           제 1 과


                           창세기 1,2장

                  목적적으로 창조된 여성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지혜로우신 창조주께서 구상하시고 설계하신 대로 일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드신 만물이 계획하셨던 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보시고 안식하셨습니다(창 2:2). 창조된 모든 것들이 각각 창조의 목적대로 기능을 발휘할 때 질서와 평화와 만족이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아가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또 어떤 일을 하는 데 알맞게 해 주셨는지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맞추어서 하나님이 설게하신 자신의 위치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에 대해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면, 나에 대해서도 목적을 가지고 계심에 틀림없습니다. 나의 첫째이자 가장 분명한 임무는 그 목적을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여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은 최초로 창세기 1장 27,28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두가지 성이 분명히 명시되어 있으며, 아울러 남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 나타나 있습니다. 남녀에 무관하게 항상 그들을 축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신분입니다. 생활과 활동에 있어서도 동등하며, 천성이나 권위에 있어서도 동등한,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대리인인 것입니다.

   한편 창세기 2장을 계속해서 읽어 가노라면 인간의 창조에 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여성이 의미상 남성과는 별개의 인격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성을 창조하신 시기와 방법과 목적에 있어서 남성과 어떻게 다른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여자의 창조


   성경은 아담이 먼저 창조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창 2:7) 되었습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이 ...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창 2;15~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최초의 사람이었던 아담은 아름답고 풍요로운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에덴 동산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래 처음으로 "좋지 못하다" 고 말쓸하셨던 것입니다. 아담은 과연 사회적 존재이며 사교적 피조물이었기에 누군가와의 사귐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된 모든 동물 중에서는 그로 더불어 사귈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없었습니다(창 2: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창 2:18)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옆구리에서 뼈와 살을 취하셔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이처럼 하와는 흙(원어상 Adamah)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남자(원어상 Adam)에게서 지음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최초의 여인도 최초의 남자와 동일한 체질이었습니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었던 것입니다(창 2:23).

   이렇듯 여성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수고와 기술의 결정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성을 창조하시되, 남성을 위하여(for Man), 남성에게서(from Man) 창조하심으로써 그 남성의 배우자이자, 동역자이자, 남성을 완성시키는 내조자로 주셨습니다.


          창조의 순서에서 배우게 되는 교훈


   남자를 먼저 창조하시고, 다음에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어떤 중대한 교훈이 담겨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신약 성경은 이 사실에 중대한 의미가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 (딤전 2:12, 13)임을 명기했습니다.

   지도적인 권위(headship)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 (고전11:3,8,9)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지음을 받아 머리가 된 남자의 처신과, 나중에 지음을 받아 권위를 침해해서는 안되는 여자의 처신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여자가 인격적으로 부족하다든가 무가치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단지 사회적으로는 남녀가 평등하지만, 지도적 권위는 우선적으로 남자에게 있음을 가리킵니다.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


   하나님께서는 여자를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위하여 "돕는 배필"이 되는 것입니다. 원어상 '돕는다'는 낱말에는 연약하다거나 부족하다는 뜻이 전혀 없습니다. 실제 이 낱말은 구약 성경에 21회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16회는 상류 계급의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도우신다' 는 경우에도 사용되었습니다(창 49:25; 출 18:4). 그 여인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우므로써, 세상을 다스리는 아담의 존귀와 영광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창 1:28).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창 2:22) 오셨을 때, 아담은 " 이 여인이야말로 정말 나에게 가장 합당한 자입니다"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여자를 자녀 생산의 도구로 지으셨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이는 하와가 아담 자신의 생명과 품성을 함께 갖고 있었으므로, 아담 자신과 더불어 생각과 말과 인격적 교제를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신 지혜의 경륜을 따라 인생을 남녀로 서로 다르게 창조해 놓으셨습니다(마 19:4). 따라서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특성을 불어넣어 주신 이성 간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도와 주는 보완적인 관계이지, 경쟁적인 것이 아닙니다.

   한편 여자의 특권과 자랑스러운 신분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아울러 우리는 여자를 창조한 목적이 남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다시금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여자는 세상에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아담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으며, 여자는 아담의 "돕는 배필" 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여자는 아담의 버금으로 지음을 받았으며, 아담에게서 지음을 받았고, 아담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녀가 없이는 아담도 불완전했던 동시에 아담 역시 그녀에게 보람있는 삶을 이룩해 주는 존재였습니다. 그 여인이야말로 그의 보필자이었고, 그의 온전함을 위해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남녀를 창조한 순서는 하나님과의 관계만 아니라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권위의 순서를 나타내 줍니다. 즉 먼저 지음을 받은 자가 인도하면, 나중에 그에게서 지음을 받은 자는 그를 따르며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를 여자의 "돕는 배필" 로 창조하지 아니하셨고, 도리어 여자가 남자를 돕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남편을 어떻게 돕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이 질문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지혜와 명철을 다해서 당신의 남편을 도와 주십시오. 더욱이 당신의 남편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이 되고자 할 때 돕지는 못할 망정 장애가 되어서는 안되겠지요. 교회에서는 장로들을 존경하며, 장로들에게 협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우십시오.


                   결  혼


   하나님이 여자를 창조하신 것과 아담이 그 여인을 그의 확실한 반려자로 흔연히 맞이한 사실에 이어, 계속해서 우리는 결혼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을 보게 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결혼은 사회 복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가장 오래된 제도입니다. 결혼은 기독교의 제도이거나 교회의 성례가 아님을 명심하십시오. 이것은 인류의 최초에 세워진 제도로서, 신앙적 무관심이나 신앙심의 부족과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제정된 것입니다.

   창세기 2장 24절에 기록된 결혼 지침에서 "떠나라" 는 말과 "연합하라" 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이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결혼에는 배타적인 요소와 지속적인 요소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몸" 이 될 때에 그 남녀는 사회에서 새롭고 영원한 관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 새로운 관계의 수립을 위해서 먼저 이전의 관계를 청산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부일처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경륜입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와 연합하여 일상 생활 전체에서 상호 보완해 줌으로써 마치 한 사람과 같은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결혼이 갖는 배타적인 특징입니다.

   복음서에는 주 예수님께서 창세기 2장 24절의 원리를 다시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과 마가복음 10장 6-9절을 읽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뇨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다시말해 주님께서는 지속적인 관계를 결혼의 또다른 특성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혼이란 함부로 약속하거나 파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부 상호 간에 평생토록 지켜야 할 엄숙한 공약입니다.바울도 에베소서 5장 31절에서 창세기 2장 24절을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바울이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말씀하셨던 그 원리가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이러한 결혼은 일종의 제약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제약이 우리의 자유를 제한 하거나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에게 있어서 무엇이 사회를 안정시키고,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이룩하게 할 것인지를 가장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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