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4장

                                            온전한 믿음


   히브리서 10장 19~22절에는 이 장의 주제로 상고해볼 말씀들이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혹은 '믿음의 온전한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온전한 믿음"이라는 주목할 표현을 보셨습니까? 그 말씀을 읽을 때 당신의 영혼이 떨리지 않던가요? "온전한 믿음!" 이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그것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원하는 자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그것은 감정적인 경험의 확신도 아니며, 심사숙고한 철학체계의 확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온전한 확신입니다.

   "믿음이 무엇이지?"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믿음은 하나님을 믿고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겁니다"라고 크게 외치는 꼬마 아이의 답변은 옳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성령의 영감으로 내려진 그 놀라운 정의의 참된 의미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께서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것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그것에 실상(실체)을 부여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사실이라고 선언하신 것을 추호의 의문도 없이 확실히 의지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약속을 이처럼 확실히 의지할 때 성령께서 진리에 대해 증거하사 믿는 자로 온전한 확신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어떤 사실들을 단순히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사실들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로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일하는 역사가 따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복스런 주님에 관해 계시된 역사적인 진술들을 단순히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분의 구속사역을 믿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은 곧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구원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단단히 붙잡을만한 확실한 것, 의지할만한 가치 있는 메시지가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바로 그런 메시지가 나타나 있습니다. 복음은 그렇지 않으면 버림받을, 무력하고 절망적인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잘 정돈된 구원 계획입니다.

   가령 성경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네 번 나오는데, 그것은 단순히 우리가 낙관적인 태도로, 즉 만사가 결국 다 잘될 거라는 믿음 내지 기대로 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용기 있는 사람은 그 용기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붙잡는 손입니다. 그러므로 약한 믿음을 강한 믿음과 반대되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아무리 약해도 구원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자기 자신이나 그 어떤 것을 믿는 믿음은 아무리 강해도 미혹과 올무에 불과하며, 마침내 영혼을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버림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는 말은 하나님이 그분의 아들과, 우리의 구속을 위한 그 아들의 영광스런 사역에 관해 계시하신 것을 확고히 의지하자는 말입니다. 그 아들에 관한 계시가 이 히브리서 10장 앞 부분에 놀랍게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율법시대에 드려진 많은제사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리신 제사와 차이를 분명히 엿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차이점을 주목해보겠습니다.


   (1) 구약의 제사는 많았고 종종 반복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이며, 그 후로 아무 제사도 필요 없습니다.

   (2) 구약의 제사는 죄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가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무한한 가치가 있으며, 그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주었습니다.

   (3) 구약의 제사는 제물을 가져온 자들의 양심을 깨끗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든 믿는 자를 깨끗케 하고, 또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된 까닭에 온전한 양심을 줍니다.

   (4) 구약의 제사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휘장을 찢고, 하나님 존전에 들어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5) 구약의 제사는 제물을 가져온 자를 온전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는 거룩함을 입은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했습니다.

   (6) 구약의 제사 안에는 매년 죄를 다시 기억함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하나님으로 "그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고 말하실 수 있게 했습니다.

   (7) 황소와 염소의 피로는 죄를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바로 죄를 단번에 영원히 제거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렇든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을 의지합니다. 구약시대의 속죄제에 관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는 것이 그 사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죄를 범한 이스라엘 사람을 생각하라


   어떤 죄를 범한 이스라엘 사람이 제물을 가지고 나올 때 우리가 성전 뜰의 제단 곁에 서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사람이 제단으로 염소를 끌고 옵니다. 제사장이 그 염소를 주의 깊게 살피고 외관상 아무 흠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그것을 잡으라고 명합니다. 제물을 바치는 자가 직접 그 머리에 안수한 후에 칼로 목을 찌릅니다. 그 다음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신중히 둘러봅니다. 아무 흠이 없다고 선언되면 그것을 취하고 그 일부는 제단 불 위에 올려놓습니다. 피가 제단 사방과 네 뿔에 뿌려지고, 그 후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가 사해졌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장래 올 좋은 것의 그림자"에 불과했으며, 사실상 죄를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그 흠 없는 짐승은 위대한 속죄제물이 되신 죄 없으신 구주를 상징했습니다. 그분의 피가 범죄에 대한 완전하고도 충분한 보상이 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께 나오는 모든 자는 영원히 용서됩니다.

   만일 그 이스라엘 사람이 또 여호와께 범죄했다면 그는 다음날 새 제물을 가져와야 했습니다. 그의 양심은 결코 온전해 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한 번의 제사는 무한한 가치가 있는 까닭에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토록 죄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여기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구속사역과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완전함의 모든 효험(가치) 안에서 하나님께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그분 자신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를 보십니다.

   참으로 놀랍도록 보배로운 사실이 아닌지요! 그것은 인간이 꿈도 꾸지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 홀로 그 일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일에 대한 그분의 증거를 믿는 자는 온전한 확신을 소유합니다.

   그가 스스로 구원받은 줄 아는 것은 그 마음이 기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그 사실을 아는 것은 말씀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는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알기에 기뻐합니다.

   어떤 감정적인 경험에 근거한 믿음은 그 감정이 사라져버리면 그 사람을 완전한 혼돈에 처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확신은 흔들리지 않는데, 이는 그 말씀이 불변하기 때문입니다.


   노신사는 평안이 없었다


   여러 해 전 나는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스에서 얼마 떨어진 한 시골마을 학교에서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매일 밤 집회에 참석하면서도 전혀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던 한 친절한 노신사와 마차를 타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큰 나무들이 굽이굽이 늘어 선 아름다운 오솔길을 지나가다가 나는 불쑥 "하나님과 화목하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는 즉시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바로 그 문제 때문에 당신을 이곳에 데려온 겁니다. 나는 내가 구원받았음을 알 때까지, 아니면 그것을 확신하는 것 자체가 헛수고임을 알 때까지 한 걸음도 더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알 것이라 기대하시지요?" 내가 물었습니다.

   "글쎄요, 그게 궁금한 점입니다. 나는 뭔가 분명한 증거를 원해요. 흔들리지 않을 확실한 증거 말예요."

   "정확히 뭘 바라시죠? 어떤 마음의 뜨거운 반응 같은 것을 기대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사람들 얘기는 종교를 갖게 되었을 때 뭔가 굉장한 변화를 느꼈다고 해요. 나는 오랜 세월 동안 그것을 찾았지만 늘 나를 비껴갔어요."

   '종교를 갖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만일 선생님이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마음에 큰 기쁨이 생겼다면 선생님은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시겠습니까?"

   "예,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그렇다면, 만일 선생님이 저를 통해 그런 경험을 한 후 시간이 흘러 죽음을 맞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 때 만일 사단이, 선생님이 구원받지 못했으며 곧 멸망으로 끌려갈 거라고 속삭인다면 선생님은 사단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오래 전에 아주 행복한 감정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만일 사단이 그 행복한 감정을 준 이가 바로 자기였다고 말한다면, 선생님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실 수 있겠어요?"

   "아니요," 노신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습니다. "증명할 수 없을 거예요. 기쁜 감정으론 충분치 못하겠네요."

   "그렇다면 뭐가 충분할까요?"

   "만일 환상 중에 어떤 분명한 소리를 듣거나 천사의 메시지를 받는다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만일 선생님이 어떤 빛나는 천사의 환상을 보고 그 천사가 선생님의 죄가 사해졌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정말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될까요?"

   "내 생각엔 그럴 것 같아요. 만일 천사가 아무 문제없다고 말해준다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만일 선생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 사단이 또 와서 선생님이 멸망으로 끌려갈 거라고 말하며 혼란스럽게 한다면 선생님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그러면 천사가 내가 구원받았다고 말해줬다고 하면 되지요."

   "하지만 만일 사단이, '내가 그 천사였어. 내가 너를 속이려고 광명의 천사로 변장했던 거야. 이제 넌 영원히 멸망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 때는 뭐라고 말씀하시겠어요?"

   노신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답변했습니다. "맞아, 당신 말이 옳아, 천사의 말도 안되겠어."

   "하지만," 내가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한 감정보다 더 좋은 것을, 천사의 음성보다 더 믿을만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그 아들을 내어주어 선생님의 죄를 위해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선생님이 그 아들을 믿으면 선생님의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그분 자신의 불변하는 말씀을 통해 증거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어보세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사도행전 10장 43절에 기록된, 사도 베드로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 여기 요한 일서 5장 13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선생님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닌가요?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나요?"

   "예, 믿어요. 정말 믿어요! 나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알아요.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줄 알아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뭐라 말씀하시는지 보세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충분히 믿을만하지 않나요? 이것은 하늘로부터 바로 선생님께 전해진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생님에게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천사나 감정보다 더 믿을만 하지 않단 말입니까? 그분을 말씀하신 그대로 믿고 선생님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으신가요? 이제 선생님이 죽어 가는데 사단이 와서 선생님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우길 경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사단아, 이젠 나를 두렵게 할 수 없어.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 그분이 내가 영생을 가졌으며 모든 죄를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고 계셔'라고 말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회개한 죄인으로 그분께 나아와 그 복스런 아들에 관한 그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지 않으시겠습니까?"

   노신사는 눈을 지그시 감았습니다. 마음에 큰 감동을 받은 듯 했습니다. 그 입술이 움직이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눈을 뜨더니 말 등을 찰싹 때리며 외쳤습니다.

   "이제 됐어. 이제 모든 문제가 분명해졌어. 이게 오랫동안 찾아오던 해답이야!"

   그 날밤 집회에서 그는 앞으로 나가 청중 앞에서, 자신이 반평생을 헛되이 찾아온 일과,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하신 일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원을 발견한 일을 간증했습니다. 그 후 오랬동안 그 노신사는 나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제를 나누다가 주님 품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확실한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의심과 두려움이 다 사라졌으며, 그 후로 기쁨이 넘치는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온전한 확신의 믿음이었습니다.

  

   구원과 감정적인 요소


   나의 말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구원받을 때의 감정적인 요소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죄 사함 받은 증거로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자신의 잃어버린 상태를 깨달을 때 감정적인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그가 회개에 이르렀을 때. 즉 자신의 죄와 자기 자신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의 완전한 변화에 이르렀을 때, 참회의 눈물이 그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본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의지하고 "저희 죄와 불법을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는 성령님의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웨슬리처럼 그 마음이 하나님의 구원을 즐거워하며 이상하게 뜨거워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신은 어떤 감정적인 변화에 근거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감정적인 경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 주어진 주님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인 결과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전한 하나님 말씀에 기초합니다. 그 말씀을 믿을 때 온전한 확신이 옵니다. 그 때 성령께서 믿는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게 하려고 그의 마음에 들어오십니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을 때 자연 뒤따릅니다.


   "구속의 피에 모든 것을 의지했을 때

    그 때 성령께서 들어오셨고

   나는 하나님께로서 태어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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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미래를 생각하라

                                                                     -윌리엄 맥도날드 (William Macdonald)

 

   너무나도 짧은 인생

   우리가 가장 온전하고 맑은 정신으로 인생이 오직 단 한번뿐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놀랍도록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에게 주어진 그 단 한 번의 인생이 너무나도 짧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얼마나 더 가치 있는 일이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 단 한 번밖에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긴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 단 한 번뿐일지라도 그것이 1,000년 이상 또는 500년 이상, 200년 이상 지속된다면 실제 우리가 처한 상황에 걸맞는 긴박감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 누구라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에는 여기 이 땅에서 살아 숨 쉴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기만 한다면 (실제로는 우리 중 대부분이 그 절반도 더 살지 못할 것이지만) 단 한 번뿐인 이 짧고 소중한 인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달콤한 것인가 하는 사실로 깊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살기를 바랍니까? 성경은 인간의 평균 수명을 70~80년으로 말씀합니다(시 90:10). 여기서 잠시 여러분이 평균 수명을 살게 된다고 가정하고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평균 수명인 70~80년에서 현재 당신의 나이를 빼야 합니다. 그 나온 결과가 당신이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에 대한 기대 가능한 햇수입니다.

 

   그 남은 년 수에서 당신이 잠자면서 보내는 시간, 직장에서 보내는 시간, 필수불가결하게 보내는 시간, 그리고 병상에서 보내는 시간 등을 빼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이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는 시간을 계산해 보십시오. 과연 당신에게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대답은 "그렇게 많지 않은 시간"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인생을 잠에 비유했습니다(시 90:5).

   다윗은 인생을 그림자 같다고 말했습니다(대상 29:15).

   욥은 인생을 베틀의 북에 비유했습니다(욥 7:6).

   야고보는 인생을 안개라고 생각했습니다(약 4:14).

   베드로는 우리의 인생이 마르는 풀과 같다는 사실을 관찰했습니다(벧전 1:24).

 

   이처럼 짧은 우리의 인생은 냉혹할 정도로 속히 왔다가 속히 끝나버립니다. 우리 인생이 소유하고 누리던 그 찬란한 기회들도 짧은 인생과 함께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영안실, 영구차, 공동묘지 같은 것은 여기 이 땅에서 영원히 살기라도 할 것 같이 무사태평한 우리의 태도를 조롱이라도 하는 듯 보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담는 요람, 우리가 눕는 침대, 시체를 담는 관이 같은 나무로부터 재료를 얻고 손질하여 만들어진 사실 역시 인생이란 태어나기가 바쁘게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죽음이 아니라 주의 다시 오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공연히 우리 인생의 불확실성에 대한 논쟁을 불붙이고 격화시킬 뿐입니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별 탈이 없다면 앞으로 수십년은 더 살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을 알리는 "하나님의 호령과 천사장의 나팔 소리"(살전 4:16)를 직접 듣기 전에는, 주의날을 준비하기 위해 성별된 시간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정세에서 정치적인 발전의 추이나 도덕적인 타락은 주의 오심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성경의 예언과 매우 잘 들어맞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의 짧은 인생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단순히 다음의 사실을 의미합니다.---하나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매 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거룩한 시간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매시간을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소중한 시간으로 여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생각하면서 매일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 2세에게는 그가 전쟁터를 전전할 때 는 데리고 다니던 여종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은 매일 아침, "왕이여, 왕께서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소서." 라는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필립 왕은 이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을 매일 상기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매일 전쟁터를 전전해야 하는 인생이었기 때문에, 매일 아침 이 여종의 말을 들으며 오늘 죽는다는 각오로 늘 용기 있고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자는 다짐을 자기 자신에게 하였을 것입니다. 필립 2세는 페르시아를 공격하려다가 급작스런 암살을 당했지만 그의 아들 알렉산더 대왕이 대 헬라 제국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말을 혹자가 "흙으로 만든 모든 것은 이렇게 짧은 한 날을 위해 태어나서 결국은 다 죽고 소멸하고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매일 아침 성령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 역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영원을 생각하여 찰나처럼 매우 짧은 우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주여, 저를 도우사 제게 남겨진

   이 짧은 시간의 귀중함을 알게 하소서.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를 알게 하소서.

 

   제 모든 슬픔을 담당해주신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하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이를 인하여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 당신께 복종하게 하소서.

 

   주 예수님, 제가 사는 모든 날 동안 제 삶을

   통하여 영광 받으소서.

 

   주님 당신의 눈으로 모든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원하실 때, 당신의 뜻대로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

 

   그리 하오면, 제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내일은? 그 다음 날은? 그리고 그다음 장래에는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까?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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