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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15 C.H.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 3장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

                C.H. 매킨토시의

                                    완전한 구원


                                                3장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수 15:13)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주제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피의 보호아래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 두 번째는 홍해 바닷가에 서있던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요단강을 건넌 후, 현 시대 그리스도인의 참된 위치를 나타내는 길갈에서 유월절을 기념한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린양의 피에 의해 심판으로부터 벗어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악한 세상에서 해방을 받고, 현재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에 의해 주어진 다양한 관계와 책임 가운데 합당하게 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수도사나 신비주의자, 또는 구름 가운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땅에도 하늘에도 합당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꿈속을 걷거나, 안개속을 더듬거나,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날마다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미덕을 이 세상의 상황과 환경 속에 반영하는 행복한 특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성취된 구속의 견고한 터 위에서 무한한 은혜를 통하여 성령의 권능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입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에 대해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매우 명확하고 또 명백하게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또한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속에 성령님이 거하시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용납되었으며(받아들여졌으며), 부활하시고 영화롭게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장사됨으로써 세상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이며, 죄와 율법에 대하여 죽고 자신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삶의 기쁨과 영적인 활력을 발견하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오심을 날마다 고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반복해서 말씀드리지만, 이것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흔히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다른지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이제 독자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으로 자신을 평가해보시고, 과연 자신이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해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증거가 존재하는 한,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속한 풍성하며 귀한 모든 신령한 복을 충만하게 누리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며 안식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주의로 인한 어두운 불신앙과 잘못된 신학과 거짓된 종교심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서 자신들의 합당한 위치와 마땅히 누려야 할 분깃을 강탈해갑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세상과의 분리를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슬프게도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특권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여호수아 3-5장을 통해 모형적인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계시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더불어 싯딤에서 떠나 요단에 이르러서는 건너지 아니하고 거기서 유숙하니라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상거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 하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수 3:1-4)


   이제 독자들은 순전하고 명쾌하게 요단강의 참된 영적인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홍해바다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하듯이 요단강은 또 다른 면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서 광야 쪽에 서있게 되었을 때, 그들은 구속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대적들이 바다에 빠져 죽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승리에 찬 감격을 가지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출 15:13-18)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장엄한 것이며 신성한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약속의 땅 사이에 있는 요단강에 대해서는 아직 영광스러운 승리의 노래가 불리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나 믿음의 판단에서나 그 땅은 참으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약속의 땅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실제로 광야를 통과해야만 했고, 요단강을 실제로 건너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영혼의 역사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이 실제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얼마나 끊임없이 보는지요! 처음 회심했을 때, 우리에겐 기쁨과 승리와 찬송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알았고 우리 마음은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송으로 가득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서 5장 1-11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이상 높은 것은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천국에서 조차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높거나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로마서 8장이 로마서 5장보다 더 높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 하는 것" 보다 더 높을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아갔다면, 우리 영혼이 나아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에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분깃이며 안식이고, 처소이며 목적이고 또 우리의 모든 것으로 아는 것,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영적인 모든 자원을 소유하는 것, 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들에겐 천국 그 자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5장과 8장은 차이가 있는데, 바로 6장과 7장이 그 사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이 로마서 6장과 7장을 실제적으로 통과하며 그 안에 담긴 심오하며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 안에 내주하는 죄와 율법의 심각한 문제에 적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될 때, 그 때에 우리는 더 높은 수준이라기보다는 분명히 더 나은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실제적으로 통과할 때" 라는 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거룩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고 또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쉽습니다. 로마서 6장과 7장에 기록된 내용들을 우리의 이성으로, 단지 이론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그러한 것들이 실제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성령의 능력을 통해 우리 영혼에 실제적으로 적용해본 적이 있습니까? 놀라운 복과 특권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신 주님을 위해,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그분의 영광을 위해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지극히 거룩한 믿음의 깊고도 보배로운 이러한 비밀들을 많은 사람들이 단지 지식으로만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영적인 능력으로만 소유할 수 있고, 그럴 때 실제적인 결실을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 주제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참으로 요단강의 영적인 중요성을 바로 깨달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요단강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요단강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 한다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단강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나타낸다는 것은 믿고 있지만, 그것을 통해 해방을 받아 자유를 얻는 것으로는 아직 적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홍해는 이스라엘을 애굽과 바로의 권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요단강은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이 두 가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시길!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우리 죄와 죄책과 정죄로부터 해방시켰고, 또 사단의 권세와 악한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동일한 무한히 보배로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이제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 즉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분과의 살아 있는 연합 속으로 우리를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이 에베소서 2장에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4-6절)


   여기 "앉히시니" 에서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을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장차 앉히실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이루신 일입니다. 신자는 죽을 때에야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신자는 이미 영원히 사시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고, 또한 영광을 받으신 머리이신 주님과 연합되어 영으로, 믿음으로 이미 천국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며 실제일까요?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히신 것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던 것만큼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만큼이나 사실이며 실제적입니다. 모든 참된 신자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진리 만큼 사실이며 실제입니다.


   독자들이여, 우리는 지금 이 모든 영광스러운 진리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 속에서 날마다 실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주목하십시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아! 만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위치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독교를 신화나 속임수나 우화로서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신약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배운 후에 신령한 빛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환경을 살피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 고백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은 무한하신 은혜로 우리를 그러한 영광스러운 위치, 곧 그분의 아들과의 연합과 사귐 속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합시다! 그 위치는 우리 자신의 상태에 따라 좌지우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이것은 우리 인생 전체와 행동과 성품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합니다.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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