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강해 제7과  의를 사모함으로 죄를 미워함

                      Love of Righteousness Brings Hatred of Sin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엄 17 : 15)

 

   히브리어로 옳음(right), 의인(righteous), 의(righteousness), 정직(rightness), 공정함(just), 정의(justice) 등의 단어들은 무려 100번이나 잠언 중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악한자(wicked), 악함(wickedness), 사악한자(evil)등의 단어 또한 100번 이상 사용되고 있습니다. 잠언 연구에서 의로움(righteousness)과 악함(wickedness) 이 두 가지의 상대적인 개념을 바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의 의

 

   성경은 분명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0, 1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신 구약 전체를 걸쳐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성경은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은 예외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 부르심을 받고 있는 이 분은 의로운 분이십니다(요한 1서 2:1). 요한은 말하기를 "그(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한 1서 3:5)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다."(벧전 2:22)고 하였으며,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21)고 하였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선포하기를 죄인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게 될 때 단지 죄 용서함뿐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사역에 기초하여 의롭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The righteousness of Christ)가 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전적인 믿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사역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합법적인 신분적 인정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도들 역시 죄인이었으나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으며 또한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실 사역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의해 의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고 하였고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윗 역시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편 32:1-2).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의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잠언을 기록할 때 이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방법과 다윗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동일하게 모두 그들의 믿음에 의하여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삶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의인과 악인의 비교

 

   의인과 악인이 어떻게 다른 가를 연구하기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잠언 10:3).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잠언 10:16).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잠언 10:21).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잠언 10:25).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원은 끊어지느니라"(잠언 10:28).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잠언 10"30).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잠언 10:32).

 

   "의인은 환난에서 구원을 얻으나 악인은 자기의 길로 가느니라"(잠언 11:8).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언 11:18).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잠언 11:19).

 

   "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느니라"(잠언 11:21).

 

   "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잠언 11:2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잠언 12:3).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잠언 12:5)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잠언 12:7).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잠언 12:10).

 

   "악인은 불의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잠언 12:12).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느니라"(잠언 13:9).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잠언 15: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잠언 15:29).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느니라"(잠언 29:1).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잠언 29:2).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잠언29:6).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언 29:7).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함

 

   히브리서 1:9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시편 45:7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의 인용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반드시 그가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해야 하고 또한 그가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해야 합니다.

 

  갤럽 조사에 의거하면 미국인들의 90%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였고 그리고 80%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간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개인적인 관계임을 주장한다는 것은 친구가 된다거나 혹은 가까운 친척관계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친구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만일 80%의 미국인들이 하나님의 친구임을 주장한다면 여기에 의문이 있습니다. 이들 수많은 미국인들 중에 과연 몇 사람이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할까요? 이는 나 자신 스스로에게도 좋은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심판의 날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반드시 당신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죄를 범하는 생활을 하느냐? 혹은 의를 사랑하고 이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느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레스터(Lester)는 50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난날의 삶에 대해 말하기를 처음 34세가 될 때까지 가장 뛰어난 협잡꾼이 되는 것이 싦의 목표였으며 또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소매치기가 되는 것이 생애의 목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도둑질하기를 즐겨했고 마약을 팔고 도박을 하고 그의 갱 단원 친구들과 어울려서 당구를 치며 세월을 보내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는 부자가 되기를 원했으며 유명한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또한 여자들과 자동차들과 훌륭한 집을 원했습니다. 그는 할리우드 영화의 멋진 갱 스타(gangster) 배우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악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모든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일이나 범법행위 저지르는 일을 즐겨했습니다.

 

  그는 34세가 되었을 때, 지나치게 마약을 즐겼고 동시에 많은 돈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모든 악한 생활의 한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깊은 마약 중독증세로 이미 자신의 몸이 심각하게 망가지기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고 더 이상 돈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러는 동안 그는 감옥을 마치 제집처럼 들락거리게 되었고 이제는 감옥이 마치 그의 이웃 집(second home)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34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아 여생을 형무소 내에서 보내야 할  처지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람으로부터 성경 한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한 심각한 운명의 갈림 길에 서 있을 때 그는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차츰 차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Lester에게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Lester는 마침내 그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죄 용서함을 구했습니다. 즉시 그에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찾아오게 됨을 느꼈습니다. 놀랍게도 이제 그는 곧 예전에 그가 좋아하던 것을 미워하게 되었으며 대신에 그가 미워하던 것을 이제 좋아하게 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즉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는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는 악한 길에서 돌이켜 의의 길로 돌아 갈 힘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이 우리는 새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야 인간은 의를 좋아하고 그 의를 따르는 삶을 비로써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Lester는 더 이상 마약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그것이 싫어지게 되었으며 늘 이기적이며 물질만을 탐하던 지난날의 자신의 탐욕을 이제는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형무소 내의 모든 저속한 말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동료 죄수들에게 폭력과 범행활동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조차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자들을 쫓는 일도 싫어하게 되었고, 성적인 상스러운 언어들을 사용하는 일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대신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어린이들과 잃어버린 영혼들과 무주택자들과 연약한 자들과 그리고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이 생겨났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도소 내에서 의롭게 살기를 원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범적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날로 그 영혼 속에 깊어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자신만이 간직할 수 없어, 같은 감방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와 또한 외부에서 만나는 동료 죄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가져다 준 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증거 하였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전에 악을 사랑하던 옛사람으로부터 의를 사랑하는 새 사람으로 Lester를 완전히 변화시켜주셨습니다.

 

   과연 나는 진정 의를 사랑하는 자인가?

 

   1. 매일 나는 선한 길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의의 길을 지키고 있는가?" (잠언 2:20) 내가 결단을 내릴 때마다 내 자신에게 묻기를 이것이 옳은 일인가? 또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진정 원하시는 일인가를 내 자신에 질문하고 있는가?

 

   2. 다음과 같은 말을 과연 내 자신에게 말 할 수 있는가? "내 입의 모든 말은 의로우며 거짓되고 사악함이 그 안에 없도다"(잠언 8:8). 운동장에서 핸드볼이나 농구 시합을 경기 할 때 나는 시합이 격렬하게 진행되는 도중에 다만 내 입에서는 욕을 하지 않고 의로운 말만을 하고 있는가? 당황스러울 때, 혹은 소포가 제 때에 도착하지 않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면회를 오지 않을 때, 그러한 때에도 나는 과연 내 입에서 어떠한 형태의 삐뚤어진 말이나 사악한 말을 내 뱉지 않을 수 있는가?

 

   3. 내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가?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잠언 12:17) 나는 내 사건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는 나의 가족에게 나는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하는가? 혹은 감옥에 보내질 만큼 나는 그러한 범죄를 저지를 만한 시간이 없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인가? 내가 좋아 하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거짓 증언을 한 적은 없었는가? 내 자신이나 다른 친구가 저지른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지는 않았는가?

 

   4. 내 자신에게 우리는 이렇게 과연 말할 수 있는가?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잠언 11:18)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을 때 나는 자비를 나타냄으로 의를 과연 심었는가? 특별히 믿음의 가족들을 위하여 모든 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에 그리하였는가?

 

   5. 나는 과연 내 자신에게 이처럼 말할 수 있는 나 자신인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잠언 17:15) 범죄 영화를 보면서 나쁜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영웅이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가?  나는 범행을 저지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즐거워하며 그와 같은 친구에게 오히려 동조하고 있지는 않는가?  잘못한 일을 범한 적이 있는 인기없는 교도소 내의 어느 동료 죄수가 억울하게 벌을 받고 있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를 되려 좋게 생각하고 키득거리지는 않았는가?

 

   6. 내 자신에게 우리는 과연 이처럼 말 할 수 있는가? "악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공의를 따라가는 자는 그가 사랑하시느니라"(잠언 15:9) 항상 다른 사람들과 진담보다는 농담을 말하기를 좋아하며 어떤 일들을 할 때에도 교활한 방법으로 잘 처리하는 그러한 사람을 좋아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은 아니면 별로 인기도 없고 조용히 옳은 일만을 행하기를 늘 힘쓰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있는가?

 

   7. 나는 내 자신에게 이처럼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악한 부자가 되느니 차라리 가난한 의인이 되기를 원하는가?(잠언 16:8) 나는 자선을 베풀기를 즐겨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탐욕만을 쫓는 자인가? (잠언 21:26).

 

   결론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무릎을 꿇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아들인 죄인을 의미합니다. 이일의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완성하신 구속 사역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더 이상 죄가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여 의인으로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롭게 믿음을 시작한 자들에게 새 마음(new heart)과 새 정신(new mind)과 새 영(new spirit)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새 마음(new heart)과 새 정신(new mind)과 새 영(new spirit)을 받고 새롭게 믿음을 시작한 사람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더 자랑하는 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위선자가 되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새 마음과 새롭게 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또한 그 자신도 미워하는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의를 사모하는 그의 열정은 그의 말과 행동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악을 미워한다는 의미는 더 이상 이 세상과 이 세상에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요한 1서 2:15-17). 대신에 이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찬사를 보낼만한 것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의 행동에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그가 행하는 모든 일에 의를 실천하려 할 것입니다. (요한 1서 3:4-10). EM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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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정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온다

A Good Marriage Brings God's Favor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언 18:22).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언 12:4).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내려 주신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종 아굴(Agur)은 인생의 기이한것들 중의 하나는 한 남자와 한 여인이 함께한 자취(the way)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잠언 30:18-19). 구혼과 약혼과 결혼은 가정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참으로 아름다운 일들입니다.

글로리아 게이더(Gloria Gaither)는 그녀가 쓴 "나의 부모님들이 행한 옳은 일"(What my parents did right)이란 책에서 50명 이상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그들의 가정생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들을 축복하셨는가를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과에서 결혼생활에서의 신실함의 중요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제 제6과를 통해서는 좋은 그리스도인 가정을 위한 세가지 원리들에 대해서 공부하려고 합니다.

분쟁의 근원을 피하라(Avoid power struggles)

역기능적인 가정 안에서는 언쟁과 위협과 다툼 그리고 오해와 잔소리와 적대적 행동들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정상적인 가정 안에서는 남녀 모든 식구들 각자가 평온함 가운데 자신들의 합당한 임무에 늘 충실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는 가정 안에서의 가정생활은 언제나 기쁨과 행복과 평화가 흘러넘칩니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언 17:14).

* 모든 식구는 저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잠언 구절은 흐르는 물을 차단시켜 홍수를 막아주는 댐(dam)의 역할을 연상시켜줍니다. 이 댐은 마치 제방의 보호벽(protective wall)처럼 가족들 간의 상충되는 의견들을 억제해줌으로 가족을 지키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시작된 언쟁의 발단은 결국 가족의 평화의 댐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며 결국 그 가정은 홍수로 말미암아 허물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지키려면 "언쟁이 시작되기 전에 싸움을 멈추라."고 잠언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 2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잠언21:19).

"다투는 여자는 비 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심하게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과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잠언 27:15-16).

*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항상 변론과 언쟁, 분쟁의 불씨와 불화를 초래하는 자입니다. 남자건 혹은 여자건 이러한 부류의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것들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려 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의 타협이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솔로몬의 잠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이러한 사람들은 바람을 제어하거나 기름을 손으로 움켜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동물세계에나 있는 강자와 약자사이의 위계질서(pecking order)를 따라 삶을 살아갑니다. 신체적으로 강한 사람은 걸핏하면 남을 째려보거나, 약한 자를 괴롭힙니다. 그러면 신체적으로 약한 위치에 있는 약자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심리전을 벌입니다. 그들은 종종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리며, 푸념하며, 투덜거리며, 시비를 걸며, 그리고 그들은 사랑과 애정을 거부하며, 쌀쌀하고 냉정한 태도를 나타내며, 때로는 위협을 목적으로 가출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가정안에서 일어나게 될 때 온 가족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게 됩니다. 가정 안에서 이러한 쟁투와 불화가 일어나게 될 경우 힘이 아무리 센 사람이라 할지라도 힘으로 이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해결책은 온 식구가 분쟁의 근원들을 피하고 서로 각자를 존경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들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과 인내와 이해해주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가족들 간에 서로를 존경하라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고리 같으니라"(잠언 11:22).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잠언 12:4).

* 사 려 분 별 이 부 족 하 다 (lacks discretion)는 말은 상식이 부족하거나 합당한 분별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경험이 부족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때때로 결혼생활에서 상식이나 분별력이 부족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의 결혼생활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경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사무엘 상 25장).

남편이든 아내든 결혼 배우자들이 그 상대방에 대해서 옳은 분별을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잠언 13:22).

* 가장 기본적으로 귀중한 일은 자신의 가족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솔로몬은 그의 가족을 귀중히 여기는 선한 사람은 자신의 손자들을 위해서도 재물을 물려주고자 하는 자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비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징계를 받는 자는 슬기를 얻을 자니라"(잠언 15:5).

* 가정은 부모가 그의 자녀를 귀중히 여기고 또한 자녀는 부모의 충고와 훈계를 경청하는 상호 관계를 맺은 곳이어야 합니다. 상호존중 하는 마음이 있는 가정에서 자녀는 그들 부모의 충고와 훈계를 경청해서 듣습니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견책받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며 지혜 있는 자에게로 가지도 아니하느니라"(잠언 15:12).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미련한 자는 어미를 업신여기느니라"(잠언 15:20)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은 진정한 소중함을 감정적으로 서로에게 드러내는 곳입니다. 이러한 가정의 자녀는 부모와 증조부들의 가정적인 전통을 대대로 이어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손자는 노인의 면류관이요 아비는 자녀의 영화니라"(잠언 17:6).

* 존경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조부모들이 그들의 손자들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길 때 그 손자들 또한 자기 조부모들을 존경할 것입니다.

"미련한 자를 낳는 자는 근심을 당하나니 미련한 자의 아비는 낙이 없느니라"(잠언 17:21).

"미련한 아들은 그 아버지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잠언 17:25).

"아비를 구박하고 어미를 쫓아내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며 능욕을 부르는 자식이니라"(잠언 19:26).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 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언 28:24).

* 다른 사람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존경을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항과 불복종으로 그의 가정에 수치를 초래하는 자녀는 자신의 부모를 매우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한결같이 언제나 그들의 자녀들로 즐거움을 얻고자 합니다. 그의 부모들에게 언제나 존경을 드러내는 자녀는 타인들로부터 귀한 칭찬을 얻게 됩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언 23:22).

* 자녀는 그의 부모님께 겉으로 말로서만 청종하는 척하지 말고 진정으로 그들의 부모님께서 수고하고 희생하신 일들에 대해서 항상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감사와 존경심을 바쳐야 합니다.

부모들의 자녀훈련

자녀들의 훈련에 있어서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그 첫 째는, 남성들이 성경적 권위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자녀와 아내들을 함부로 다루고 학대하는 일입니다. 둘 째는, 모든 육체적 체벌로 이것은 아동들에게 해를 입히는 아동학대에 해당됩니다. 이 두 가지 사상은 모두 그릇된 것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상반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책임은 그들 자녀를 위하여 음식과 거처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부모는 자신들의 자녀를 가르치고 훈련함으로 능력 있고 성숙한 어른들로 자라게 해야 합니다. 포유동물들의 세계 역시 그들 어미와 수컷들은 그들의 새끼들을 훈련하고 때가 이르게 될 때 그들 스스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길러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네 자녀를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편안케 하며 네 영혼에 기쁨을 안겨 주리라"(잠언 29:17).

* 만일 여러분이 축구를 할 줄 안다면, 교실 안에서 책을 가지고 게임의 규칙을 배우는 것과 운동장으로 나가서 실제로 훈련하는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후자를 우리는 훈련(training)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의 자녀들에게 단지 옳고 그른 것을 말해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훈련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일 축구 코치가 선수들이 실수를 범할 때 소리를 지르기만 하고, 실전에서 잘할 수 있도록 그들을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훈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는 곧 코치직을 해임당하고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장성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사람의 군인이나 운동선수나 혹은 농부와 같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2:1-7). 이들 세 가지 전문적인 일들은 모두 장시간의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이 요구됩니다. 그들 전문직에는 단지 규칙들에 대한 지식적 배움 그 이상이 수반됩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만일 실수를 범했을 때 그 실수에 대하여는 마땅히 그에 상당한 처벌이 따른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잠언 12:1).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잠언 13:1(.

"훈계를 저버리는 자에게는 궁핍과 수욕이 이르거니와 징계를 받는 자는 존영을 받느니라"(잠언 13:18).

*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자녀가 부모의 합당한 훈련과 징계를 감사히 여겨야 함은 마치 훌륭한 지도자를 존중히 따라야 하는 것과 유사한 것입니다. 운동선수나 음악도가 그의 코치에게 사례비를 내면서 훈련을 받는 것은 자신들의 성공을 위해서입니다. 하물며 자녀는 자신 생애의 성공을 위하여 돌보는 부모님께 얼마나 마땅히 이와 같은 태도를 지닐 때 더 훌륭한 자녀로 양육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언 13:24).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 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언 19:18).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말라 채찍으로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잠언 23:13-1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언 29:15).

* 자신의 자녀들을 방임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두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무책임한 부모입니다. 부모가 그의 자녀를 징계하고 때로 채찍질하며, 훈계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을 진정으로 돌보는 것입니다. 아주 성숙한 지혜와 방법으로 자녀를 다루며 양육하였을 때 그 자녀는 부모에게 큰 보람과 자랑과 기쁨의 열매들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잠언에서의 "채찍"(rod)이란 부모들의 자녀를 위한 여러 가지 합당한 훈련과 징계를 위한 도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죄인을 취급하듯이 채찍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부모는 결코 그의 자녀를 죄인을 다루듯 형사적 처벌을 줌으로 바르게 만들 수 없습니다. 성공적인 부모들은 채찍 사용과 책망(rebuke)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녀를 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징벌(puni-shment)은 항상 합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너무 약한 징벌이나 혹은 반대로 지나친 징벌은 모두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 마다 징계 종류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어떤 자녀는 이런 징계방법에 반을을 나타낼 수도 있고 어떤 자녀는 저런 징계방법에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비록 아이라도 자기의 동작으로 자기 품행이 청결한 여부와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잠언 20:11).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잠언 22:6).

* 자녀 양육에 있어서 부모들의 가장 큰 실수는 단지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경향입니다. 만일 그러할 경우 부모는 무절제한 분노와 질책으로 그의 자녀에게 자신들의 불쾌한 감정을 쏟아 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잠언의 구절들은 자녀의 양육과 훈련의 목적이 단지 잘못한 자녀를 처벌하기 위해 부모들의 분노를 쏟아내는 수단이 아니라, 온전한 훈련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훌륭한 품성을 길러주며 훗날 부모 자신들에게 돌아 올 기쁨을 기대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이(Jay)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는 불행한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결코 제이의 곁에 있어준 적이 없으며 그의 어머니는 마치 제이를 싫어하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제이는 위탁가정(foster home)에 맡겨져서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집단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때 그는 매우 분노로 가득 찬 아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십대 어린 나이에 길거리로 풀려나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성숙한 나이가 되기도 전에 그는 결혼을 하게 되었고 결국 두 아이들을 가진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범행에 연루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혼을 하고 바로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해 버렸습니다. 제이는 매우 분노하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궁지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뜻밖에도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삶으로서 이전보다 도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생부를 찾으려고 애썼으나 헛수고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력과 수고 끝에 어머니를 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그를 면회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이는 이와 같은 긍정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아 하나씩 열매가 맺기 시작하며 그의 형제들과 누이들 역시 그를 찾아 면회를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년 간 제이는 그의 아들들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드리는 제이의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그의 아들들과 다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들에게 편지 쓰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아들들의 방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는 참으로 따뜻하고 가슴 벅찬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아들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제이 자신이 그 나이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와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다행이 그의 작은 아들은 문제가 없이 그의 아버지와 긍정적인 관계를 아주 잘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작은 아들은 정기적으로 그의 아빠에게 그의 의견이나 행동에 대한 충고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곤 하였습니다. 비록 제이는 형무소 내에 있는 몸이었으나 그는 그의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살아 갈수 있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결론

시편 68:5에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재판장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인간이 가정을 이루고 가정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인류 최초의 가정 안에서는 형 가인이 아우 아벨을 살해하는 끔찍하고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가 머물러야 할 가정생활은 죄로 인해 뒤틀어지고 말았습니다. 로마시대의 아버지들은 어떠한 공권력의 제재도 없이 그의 아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종종 그들의 원치 않는 자녀들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성적개방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 많은 나라의 아이들은 잔인한 취급받고,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곳에서 여자 아이들은 성적 노리개 취급을 당하며 구타와 학대를 당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만도 매해 3백만명의 어린이들의 학대 건수가 보고되고 있습니다(Scientific America, March 2002). 그리고 자살을 고려해 본적이 있는 또 다른 3백만 명의 청소년들이 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있었습니다(Associated Press, July 2002). 1985년에서 1995년까지 미국에서 총상을 입고 죽은 어린이들이 미국 안에서 50,000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죄로 인한 이와 같은 사악한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가정생활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시며 또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또한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시기를 원하십니다(말라기 4:6). 이 아름다운 구절은 구약성경의 맨 마지막 구절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 가정의 주인으로 오시면 그는 사랑과 평안과 인자함과 선함을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가정의 온 식구들은 서로를 존경하며 서로를 돌보는 사랑의 보금자리와 같은 가정생활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가정 속에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EMMAUS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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