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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6.02.04 구원의 확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제8장 마음을 굳세게 함

            구원확신

                                     갈망하는 이들에게         

                                                                   H. A. 아이언사이드


                                  제8장

                          마음을 굳세게 함


   요한일서에는 기독교의 경험적인 측면과 관련이 있는 매우 소중한 진리가 밝혀져 있습니다. 3장 18,19절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을 통해 권면과 더불어 격려를 받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이러한 마음의 견고함은 성령께서 믿는 자 안에서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 순간 나는 영생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성경말씀을 근거로 알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분을 믿는 자는 현재 영생을 소유했음을 거듭 거듭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나는, 내 속에서 끊임없이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것이 내가 받아들인 교리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는 확실한 많은 증거를 보게 됩니다. 나 자신이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분명한 증거들을 날마다 발견합니다(엡 2:10). 그렇게 하여 확신이 깊어집니다. 하나님 말씀에 모든 것을 의지하고 믿음 안에 계속 거하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인인 나에게 부여된 영생의 증거들을 보고 그 말씀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해주는 그런 확실한 증거들을 몇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본능적으로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그의 게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3~5).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의 뜻을 즐거워하며, 자기 뜻을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을 몹시 싫어합니다.


   영국인 변호사와 젊은이의 상담


   몬타구 굳맨이란 유명한 영국의 변호사이자 널리 알려진 설교자가 근간에 본 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주는 다음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내가 어릴 적부터 알고 있던 한 젊은이가 내 서재에 들어와 앉았습니다. 그는 극동지역으로 떠나려는 차에 인사하러 들른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권했습니다. 그 때 그가 한 대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무 적대감이나 불쾌감이 없이 담담히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싶어요. 왜 내가 내 자유를 예수 그리스도나 다른 누구에게 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전 인류의 마음을 대변한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인류에 관한 보편적인 진리는 '우리는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사 53:6).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당한 정죄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뜻에 자신을 복종시킬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길을 고집하며, 누군가 간섭하는 것을 분개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 이뤄질지어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뜻을 앞세웁니다. 그 뜻이 저속한 것이든 고상한 것이든, 감각적인 것이든, 냉혹한 것이든 인자한 것이든,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합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요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글을 인용한 것은,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를 나의구주로 믿고 그분을 나의 주로 시인합니다. 그분의 넘치는 사랑이 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내 뜻을 그분의 뜻에 굴복시킵니다. 매일의 삶에서 아무리 연약을 발견하더라도 나는 내 마음의 최고의 소원이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그분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보나르의 찬송시는 이 사실을 얼마나 아름답게 묘사하는지요!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양 무리도 사랑치 않고

   내 목자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다스림도 원치 않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네.

   내 가족도 사랑치 않고

   내 아버지의 음성도 사랑치 않았네.

   나는 멀리 떠돌아다니길 좋아했네."


   "목자가 그 양을 찾았네.

   아버지가 그 자녀를 찾았네.

   그가 산과 골짜기를 넘고

   거친 광야를 헤치며 나를 찾다가

   거반 죽게 된 나를 발견했네.

   주리고 곤하고 외로운 나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사랑의 줄로 매었네.

   방황하던 자를 구원했네."


   "예수 나의 목자

   그가 내 영혼을 사랑했네.

   그가 그 피로 나를 씻었네.

   그가 나를 온전케 했네.

   그가 잃어버린 자를 찾았네.

   그가 길 일고 헤매는 자를 발견했네.

   그가 나를 양 우리로 인도했네.

   그가 나를 지금도 보호하네."


   "나는 길 잃고 방황하는 양이었네.

    나는 다스림을 원치 않았으나

    이제는 내 목자의 음성을 사랑하고

   양 무리를 진실로 사랑하네.

   나는 고집불통의 아이였고

   떠돌아다니길 좋아했으나

   이제는 내 아버지의 음성을 사랑하고

   그분의 가족을 진실로 사랑하네!"


   변화된 태도가 확신을 준다


   아러한 변화된 태도가, 내가 이제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을 줍니다. 이전의 오만한 뜻을 굴복시키고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기를 사모하게 된 변화는 거듭난 것으로 밖에는 달리 적절히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요한이 사용한 "계명"이란 단어는 단지 시내 산에서 주어진 십계명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훨씬 초월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義)는 육체를 좇지 않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우리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이 있는데, 그 계명은 그분이 지상에 계셨을 때 제자들의 행실에 대해 가르치신 모든 것과, 그 후로 성령을 통해 신약성경에 계시하신 것을 포함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들을 행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그가 순종의 삶을 사는 동안 십자가에서 온전히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서 샘솟게 되며,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 존귀한 분으로 여기게 됩니다.


   두 번째 예로, 요한일서 3장 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 말씀은 많은 부주의한 독자들과 어느 정도 주의 깊은 일부 독자들을 당황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예민하고 양심적인 자녀들을 격려하고자 의도하셨으나 오히려 사단은 그 말씀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낙심시키고 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너는 무죄하지 않아. 너는 종종 생각과 말과 행동에 잘못을 범해. 그것은 죄를 짓는 거야. 그러니 너는 하나님의 자녀일 수가 없어."

   그러면 고민하던 그 사람은 그 말을 당연하고도 논리적인 말로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마음은 그 말을 거부하고, 또 뭔가 그런 논리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끼지만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동사는 소위 "현재 진행형"임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따금씩 실수하거나 자주 잘못을 범해 크게 닉심하는 그런 경우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보다는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습관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6절로 돌아가 관련된 본문 전체를 읽어 보겠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두 가족의 상반된 행동방식


   여기에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않은 자의 두 가족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 보십시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짓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세련된 인품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 뜻대로 하기를 기뻐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무법(lawlessness))이라"(요일 3:4).

   모든 주의 깊은 학자들은 그것이 "죄는 불법(the transgression of the law)이라'는 번역보다 더 정확한 번역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죄가 세상에 있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롬 5:13). 그리고 아직 아무 기록된 기준도 주어지지 않은 까닭에 죄가 불법으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자의지나 무법 등으로 자신의 모습을 나타냈으며 타락한 인류가 있는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무법(無法)은 어떤 사람이 자기 뜻을, 절대 순종을 요구할 권한이 있는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기를 거절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점에서 마귀의 자녀는 그들이 속한 가족의 특성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는 다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고 위로부터 태어났으며, 그렇게 해서 새로운 성품을 소유합니다. 이 새로운 성품은 죄를 미워하는데, 그 후로 그 성품이 그의 욕망과 생각을 지배합니다. 죄는 가증한 것이 됩니다. 그는 지난 어리석고 죄악된 삶을 부끄러이 여기고 거룩을 추구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그의 삶의 방향이 변합니다. 그는 의를 행합니다. 물론 때로 실패를 하지만 그의 삶의 전체적인 방향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의 가치를 알면 알수록 은혜와 지식 안에 성장하며, 순종의 길로 걸어가도록 거룩한 능력이 주어짐을 깨닫습니다. 그의 새로운 성품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순복하는데서 기쁨을 발견하며, 따라서 죄가 그의 삶과 성품을 특징짓기를 중단합니다.

   이것은 새로운 출생의 세 번째 확실한 증거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요일 3;14).

   여기서 말하는 사랑과 단순히 인간적인 사랑은 차이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에 의하면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 각각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여기서 선택하신 단어는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이 부여하신 사랑을 가리키는데 사용됩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적인 감정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 안에 심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그것은 우리를 모든 곳의 모든 성도들과 연결시킵니다. 새로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이 새로운 가족에 속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자신과 같이 구원받은 모든 자들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 자매로 부릅니다. 그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그리스도인의 무리를 멀리했고 세상과 짝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료 신자들을 오랜 친구 마냥 반기고 찾아갑니다.


   한계선이 분명해진다


   이것은 그냥 지나가는 현상이 아닙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한계선은 오히려 더욱 명확해집니다. 세상은 갈수록 매력이 떨어지고, 구속받은 자의 가족이 갈수록 소중해집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을 소유했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실제적인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선행과 은혜로운 행실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전체에 걸쳐 이 진리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서신 앞 부분에서 이러한 새로운 출생의 내적인 증거들을 밝히 강조한 후에 놀랍게도 서신 뒷 부분에서, 모든 증거 중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라는 극히 중요한 진리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심이 민감하면 민감할수록 그 자신과 자신의 경험을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데, 복음의 중요한 근본 진리를 떠나 그러한 경험 위에 자신을 건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4장 13~1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읽고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성령을 주셨는지 알 수 있지요?"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 답은 성령께서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믿은 모든 이들 안에 거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예수님을 개인적인 구주로 믿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당신 안에 거하시고 당신도 하나님 안에 거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복음 안에서 나타났습니다. 만물은 그분의 사랑과 지혜를 나타냅니다. 십자가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선포합니다. 앞서 인용한 잘 알려진 찬송시 작가 중 한 사람인 호라티우스 보나르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다른 시에서 이 사실을 놀랍게 묘사했습니다.


   "꽃과 나무와

   싱그러운 바람과 지저귀는 새소리와

   사철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당신의 모습을 대합니다.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우리 대신 수치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내려 오사

   우리의 삶을 겪고

   우리의 죽음을 당하신 그분 안에서

   우리는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대합니다."


   구주께서는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마치고 하늘에 올려져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토록 복스럽게 완성된 구속사역을 증거하는데 능력을 더하기 위해 성령께서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로마 병정의 창이 죽은 그리스도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물과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물과 피는 죄인들을 위해 내어준 그분의 거룩한 생명을 말없이 증거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 성령께서 그 거룩한 기록을 더하십니다. 그러기에 요한일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구속사역의 완전함을 풍성하게 증거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사람들에게 그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영원한 구원을 얻으라고 촉구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증거를 믿습니다.  설령 우리가 이해할 수 없거나 믿기 어려운 애기를 할지라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신 것은 당연히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분의 기록을 믿기를 거절하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입니다.

   기록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요일 5:10). 아울러 요한은 이 책 서두에서 인용한 다음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

Posted by 행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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